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이 글은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에 있는 글을 여러 참고문헌을 통해 보다 보완한 글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2)은 미국에게 있어 역사상 가장 많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전쟁이자, 가장 높은 미국인들의 단결력을 보였던 전쟁이다. 전쟁 시기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만들어진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대중 매체를 통해 상당히 많이 홍보되어 왔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미국인들에게 큰 영감을 줬고, 이는 현재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론 코빅(Ron Kovick)은 회고록에서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한 가장 멋있는 영화는 오디 머피1)가 나온 ‘지옥의 전선(To Hell and Back)’이었다.”고 밝히며, “오디 머피가 불을 뿜는 탱크에 뛰어올라 기관총을 잡고 독일군 진지로 돌진하는 것”을 명장면이라고 회고했다. 또한, 지금까지도 그런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도 회고했다.2)

(영화 ‘지옥의 전선’ 포스터, 이 영화는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공을 세운 오디 머피가 직접 주인공으로 출현한 영화다. 냉전 시기 미국의 대표적인 영웅주의 서사를 담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이기도 하다.)

론 코빅이 회고한 ‘지옥의 전선’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국과 미군을 영웅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들은 많이 있으며, 이러한 영화들 중에는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 나온 영화들 또한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1998년 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나 ‘진주만(Pearl Harbor, 2001)’, ‘미드웨이(Midway 2019)’, ‘퓨리(Fury 2014)’와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 2001)’나 ‘더 퍼시픽(The Pacific 2010)’ 또한 그러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작품들의 경우 비교적 전쟁의 잔인성과 비인간성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미국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점이 형성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대중매체 적으로 이미지 메이킹의 성공적인 사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1998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로 전형적인 미국만세식 구도를 보여준 영화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2001년에 제작된 드라마로 미군 공수부대인 제101공수사단 대원들의 참전 경험을 드라마화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는 숨겨진 사실들이 다소 존재한다. 이것은 자칫하면 미국이 만들어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분법적 구조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는 사실들도 제법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난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미국은 왜 이 20세기 최악의 인명피해를 가져온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일까?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어떠한 이득을 보았을까?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선 미국이 경제 대공황을 겪던 1930년대의 국제 정세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펼치던 1930년대의 국제 정세는 또 다른 전쟁을 향해 돌진했다. 소위 ‘파시즘(Fascism)’ 혹은 ‘전체주의(Totalitarianism)’를 표방하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서구세력들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사변(Japanese Invasion of Manchuria)을 일으켜, 1932년 괴뢰 황제 푸이를 앞세워 만주국을 세웠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33년에는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이끄는 나치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새로운 독일 정권이 탄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각국의 사망자 수치, 중국과 소련이 가장 압도적이다.)

1933년 독일의 수상이 되어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1934년 독일의 ‘총통(Führer)’이 됐다. 히틀러는 집권 초기 하늘 높이 솟아 있던 독일의 실업률을 낮추고 급격한 경제 성장을 해나갔다. 히틀러는 1935년부터 군비를 대폭적으로 증강하며 국방력을 강화했는데, 그로부터 1년 뒤인 1936년 3월 라인란트 지역(Rheinland)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1922년 이탈리아에서 파쇼국가를 세운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히틀러의 파시즘 선배였다. 무솔리니 또한 1935년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합병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를 순식간에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2년에는 상해사변을 일으켰으며,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국공내전을 틈타 중국 대륙을 잠식해나갔다. 그러던 1937년에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은 난징 대학살을 벌여 20~30만 명의 중국인을 대량학살 했다.3)

1936년 스페인에선 좌파세력이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좌파정권은 민중에게 사회개혁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파시스트 세력인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스트 프랑코 세력과 민주세력 간의 전쟁이었는데, 민주세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파시스트 세력은 나치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양상을 보임으로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4) 스페인 내전에는 어네스트 해밍웨이와 같은 인물들도 참전하였으며, 미국에선 3,000명 이상의 지원병이 차출됐다. 그중 450명인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Abraham Lincoln Brigade)을 조직해 파시즘에 맞서 싸웠고, 이들 중 120명이 전사하고 175명이 부상당했다.5)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이 내전의 승자는 프랑코를 비롯한 파시즘 세력이었다. 193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나치독일이나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과 같은 파시스트 국가들이 성장해나갔다. 1938년 히틀러는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1939년 초에는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점령했다. 1939년 3월 무솔리니 또한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합병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에게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걸로 대응했지만, 1939년 9월 1일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독일에게 선전포고하게 된다. 이로써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6)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팽창 영토)

‘전격전(Blitz Krieg)’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했던 히틀러의 독일군은 개전 2주 만에 폴란드를 점령했다. 더 나아가 독일군은 1940년 초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했으며, 1940년 5월에서 6월 사이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와 프랑스까지 전격전을 통하여 이 국가들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까지 점령한 히틀러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항공부대를 조직하여 영국을 상대로 공습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독일과 영국 사이에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졌다. 지구 반대편에 있던 일본 또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3국동맹(Tripartite Pact)’이라는 군사동맹을 맺음으로써 ‘추축국(Axis power)’을 형성했다.7)

1930년대 뉴딜정책을 추진했던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우드로 윌슨이 그랬듯이 표면적으론 중립정책을 내세웠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도 그랬고, 영국이 폭격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때까지도 미국은 그저 유럽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초반기에도 영국에게 적잖은 물자를 지원해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독일의 유보트(U-boat) 부대가 미국의 상선을 침몰시키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미국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었다.8)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시키게 만든 장본인은 히틀러가 아니라 일본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영토인 하와이를 기습 공격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격침된 애리조나 호)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감행한 진주만 기습공격에서 미군 2,400명이 전사하고 1,000명이 부상당했으며, 애리조나호와 오클라호마호를 비롯한 전함 8척이 침몰 및 손상당했고, 순양함 3척, 군함 4척을 잃었다. 항공기 188대가 파괴됐으며, 민간인 100명이 공습으로 사망했다.9) 하지만 일본군은 미해군의 최고전력이라 할 수 있는 항공모함 3대를 파괴하지는 못했다. 당시 미항공모함 3대는 하와이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주만 기습공격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전쟁 참가법’을 발표했고, 이것은 “진주만을 잊지 말자!(Remember Pearl Harbor)”라는 구호로 표현되기도 한다. ‘전쟁 참가법’은 상원에서는 만장일치로 하원에서는 388:1로 가결됐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에게 최종적으로 선전포고했다. 그러자 일본의 동맹국인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미국에 선전포고했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관련해서는 몇 가지 의문점이 제시되기도 한다. 우선 미국이 진주만 기습 공격을 당하기 이전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조셉 그루(Joseph Grew)’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에 대한 일본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알려줬다. 거기다 루스벨트는 1941년 11월 25일 “미국이 며칠 안에 일본과 총격전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언급했는데, 분명한 건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미국이 진주만이 아닌 일본의 필리핀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점들을 유추해보았을 때, 미국이 일본의 기습 공격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탱크 생산을 보여주는 사진, 사진을 통해 미군 탱크 생산이 얼마나 대규모로 진행됐는지 알 수 있다. 탱크 기종은 미군 주력전차인 M4 셔먼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폭격기 생산을 보여주는 사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대공포 생산을 보여주는 사진)

경제 대공황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기관총, 탱크, 비행기, 군함과 같은 군수 물자들을 대량생산하는 체제에 돌입하면서 뉴딜정책이 해내지 못했던 성과들을 만들어 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의 국민총생산이 증가했고, 개인소득도 증가했으며, 실업률이 극적으로 감소했다. 또한 전시체제로 돌입하며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많은 여성이 일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여성의 고용률도 높아졌다. 전시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하게 된 미국은 전쟁 초기에 있었던 물자 지원을 보다 확산시켰고, ‘랜드리스(Land Lease)’라 하여 추축국에 맞서 싸우고 있던 영국과 중국 그리고 소련까지 보급물자를 지원했다.

이러한 물자 지원은 파시즘에 맞서던 연합군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군비 생산량은 천문학적이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1941년 7월부터 1945년 7월까지 미국이 군수품 생산을 위해 쏟아 부은 돈이 1,860억 달러였다. 4년간 미국에서 생산한 탱크는 총 86,338대, 항공기는 297,000대, 함정은 64,500척 그리고 군함과 운송선은 합쳐서 수천 척이 넘었다.10) 한마디로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은 군수산업 발전시키고 경제공황을 해결해버리는 일거양득의 기회였다. 이주영에 따르면, 전쟁에 따른 경제의 팽창으로 대공황의 문제들은 대부분 해결되었고, 실업자는 사실상 모두 사라졌으며, 1944년 군수산업에 고용된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45%였다. 1939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기간에 임금도 70%가 인상되었으며 이는 군수산업의 영향이었다.11)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 사회를 단결하도록 만드는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특히나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일본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매우 분노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자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자원했다. 군대에 자원한 이들 중에는 16, 17살이나 되는 청소년들도 존재할 정도였다.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 1화에 나온 참전용사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10대였던 이들은 주로 나이를 속여서 입대했고, 군대에 자원했다가 부적격 판결 받은 이들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라는 사회를 단결시켰던 것이다. 심지어 미국 공산당도 제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에 맞서는 전쟁”으로 규정하며 이 전쟁을 지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온 도날드 덕, 도날드 덕이 미군모를 쓰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역사에 있어 현재까지 미국이 겪었던 전쟁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던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 당시 총 1,800만 명의 미국인이 미군에 입대했고, 1,000만 명이 해외로 출병했으며, 2,500만 명의 사람이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을 했다.12) 따라서 하워드 진(Howard Zinn)과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이 전쟁에 참전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또한 이런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미국인의 지지는 ‘도날드 덕(Donald Duck)’과 같이 당시 디즈니에서 만든 만화에도 잘 반영이 되었다. 그 외에도 ‘뽀빠이(Popeye)’나 ‘벅스버니(Bug Bunny)’, ‘대피 덕(Daffy Duck)’ 그리고 ‘톰과 제리(Tom and Jerry)’등과 같은 만화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미군 입대와 애국심을 호소하기도 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시기의 전황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한 일본은 홍콩과 말레이시아 싱가폴, 버마(현재 미얀마), 괌,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등을 단기간에 점령했고, 더 나아가 태평양의 중간인 미드웨이와 미국령 알래스카 주의 알류샨 열도까지 점령했다. 한편 1942년 유럽에서는 독일군이 동쪽을 향해 소련 영토로 진격해 들어가며 스탈린그라드에 도달했고, 북아프리카에서도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 부대가 영국군을 이집트로 압박하고 있었다.

이러했던 세계대전의 전황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군이 패하고, 미드웨이 해전이 미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연합국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1942년 미국은 영국군을 돕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병사들을 투입했고, 1943년 5월엔 아프리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해 7월엔 시칠리아 섬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본토에 입성했다. 1944년 6월 영미연합군은 지상최대의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Invasion of Normandy)을 감행하여 성공시킴으로써 소련의 요구했던 제2 전선을 형성했다. 이것은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강력하게 요구했던 부분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1944년 6월 영미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스탈린이 요구한 제2전선을 구축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시작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프랑스를 천천히 해방해 나갔다. 1944년 8월에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입성했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차례대로 해방했으며,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개시했던 아르덴 대공세에서도 승리함으로써, 전쟁의 승기를 확실하게 잡았다. 1945년 3월 말 미군은 라인강을 도하했으며, 1945년 4월에는 동쪽에서 진격해오던 소련군과 만나 악수를 했다. 앞서 언급한 이탈리아 전선 또한 1945년에 이르러서 영미 연합군이 이탈리아 북부까지 도달했고, 무솔리니는 4월 28일 이탈리아 측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총살됐다. 그로부터 2일 뒤인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고, 베를린 국회의사당에는 소련군의 붉은 깃발이 세워졌다. 5월 8일 독일은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은 이렇게 해서 종결됐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군 항공모함을 격침하는 미군 항공기)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은 일본군은 태평양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군은 11척의 전함과 8척의 항공모함(이 중 4척이 주력항모인 대형 항공모함이다.) 22척의 순양함, 65척의 구축함과 21척의 잠수함을 동원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은 일본군 주력항모 4척과 더불어 330대의 일본군 항공기도 파괴했다.13) 미드웨이 해전이 승리로 끝나면서 미군은 태평양 전역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군은 1942년 과달카날 전투(Battle of Guadalcanal)와 1943년 타라와 전투(Battle of Tarawa)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했고, 알래스카 령인 애투(Attu)와 키스카 섬(Kiska Island)에서도 일본군을 몰아냈다. 1944년 사이판 전투(Battle of Saipan)14)와 펠렐리우섬 전투(Battle of Peleliu) 그리고 필리핀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1945년 이오지마 전투(Battle of Iwo Jima)에서 승리했다. 또한 미국은 1941년 일본군에게 빼앗겼던 필리핀도 되찾았고, 수많은 해전에서 일본의 막강한 해군력을 무력화시켰다.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일본이 항복한 이유가 원자폭탄 투하가 아닌 소련의 대일참전이며 스탈린 때문이라는 영문 기사)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을 때, 태평양에서는 전투가 계속됐다. 특히나 1945년 4월에 시작되었던 오키나와 전투는 6월까지 계속되어 미군에게 적잖은 사상자를 안겨주었다. 그해 7월 미국에서 극비리에 진행된 맨해튼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미국은 원자폭탄을 소유하게 되었다. 당시 루스벨트가 사망함에 따라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결과적으로 그 원자폭탄을 일본에 사용하기로 했고, 1945년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3일 뒤인 8월 9일 또 다른 원자폭탄이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되었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은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이 진짜 항복한 이유는 근래 들어 원자탄 투하가 아닌 소련의 대일전 참전인 것으로 조명 받고 있다.15)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선언식은 1945년 9월 2일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8월 15일에 끝이 났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영국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6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대략 7,500만 명이 사망했다. 비슷한 비율로 군인과 민간인이 이 전쟁에서 사망했다. 4년간의 참전 기간 동안 대략 40만 명의 미군 병사가 사망했다. 28만 명은 유럽 전선에서 사망했고, 12만 명은 태평양 전선에서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독일이나 일본 제국과 같은 파시즘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 전쟁에서 미국이 소련과 더불어 승리의 주역이었고,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 체제를 종결시킨 역사적인 사실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벌인 잘못된 것들은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치부를 보는 관점도 필요하다.

(미국 본토에 있던 일본인 강제 수용소, 미국 정부는 일본인만 강제이주 시키는 정책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시행했다.)

(미국에서 만든 인종주의적인 일본관련 프로파간다)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을 당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일본계 미국인들은 사막과 같은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 당했다. 1942년 2월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함으로써 영장이나 기소절차, 심문과정 없이 대략 12만 7,000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사막 근처로 이주시켜 살게 만들었다. 그 중 7만 명은 미국에서 태어난 엄연한 미국 시민들이었다.16) 대부분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대략 3년 이상 그런 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그렇게 이주당한 동양인 중에선 제2차 대전 당시 유럽 전선과 한국전쟁에서 미군으로 활약했던 김영옥과 같은 한국계 미국인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이 조치가 특징적이었던 것은 당시 파시스트 국가였던 독일과 이탈리아 쪽 미국인들에게는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는 점에도 있다. 쉽게 말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의 이런 조치는 당연히 인종차별이라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군 해골을 쌓아놓고 웃는 미군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선전물들은 미국인들이 일본인을 극도로 증오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전시 선전물은 사악한 나치 지도자들과 선량한 독일인을 구분하기 위해 애썼지만, 반면에 일본에 대해서는 그런 구분을 전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인은 해충, 바퀴벌레, 방울뱀, 쥐새끼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원숭이에 비유됐다.17) 또한 태평양 전쟁 당시 태평양전선담당 특파원이었던 에드거 존스는 ‘애틀랜틱 먼슬리’ 1946년 2월호에 실린 기사에서 미군의 잔학 행위를 상세히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미군들은 포로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총으로 쏘아 죽였고, 병원들을 파괴했으며, 구명정에 기총소사를 가했고, 적국 민간인을 죽이거나 학대했으며, 적 부상병을 죽였고, 죽어가는 자들을 죽은 자들과 함께 구덩이에 던져버렸다.”18) 따라서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들은 단순히 일본과의 전투에서만 인종차별에 빠진 것이 아니었고, 여기에는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던 인종주의적 편견에 의한 영향도 분명히 있었다.

미국 사회의 가장 큰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흑인에 대한 차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엄연히 미국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략 100만 명에 달하는 흑인들이 군복무를 하게 되었음에도 미국 정부는 군대 내에서도 흑인과 백인을 분리해서 수용했다. 심지어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한 혈액은행조차도 백인과 흑인의 혈액을 따로 보관했다. 이런 시스템에 반대했던 흑인 외과의사 찰스 드루(Charles Drew)는 그저 그것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부당해고 당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19) 제2차 세계대전은 분명 미국인들을 단결시켰지만, 한편으론 미국의 노동자들에게 파업권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실업률이 낮아졌고 경제 대공황이라는 위기를 극복했지만, 한편으론 미국 기업의 이윤율을 높였던 데에 반해 노동자들의 임금은 아니었다. 전쟁 중이었던 1944년에만도 광산과 철강공장, 자동차 및 운송설비 산업에서 10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였다.20)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B-17과 같은 폭격기들을 적국을 폭격하는 데 사용했다. 1943년엔 독일 함부르크를 폭격했고, 그 외의 각종 독일 공장 시설 등을 폭격하였다. 그러나 1000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던 1945년 2월의 독일 드레스덴 폭격은 대략 2일 동안 최소 3만에서 10만 명의 독일 민간인들을 죽였다.21) 존 키건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미 연합군의 공습으로 루르 지방의 여러 소도시에서 8만 7,000명, 함부르크에서 적어도 5만 명, 수도 베를린에서 5만 명, 쾰른에서 2만 명, 상대적으로 작은 도시인 마그데부르크에서 1만 5,000명, 보석 같은 바로크풍 소도시 뷔르츠부르크에서 4,000명의 독일인이 사망했다. 공습을 통틀어 총 60만 명의 독일 민간인이 죽고, 80만 명이 부상자가 됐다.22)

(도쿄 대공습 당시 폭탄을 투하하는 미군 B-29 폭격기)

(소이탄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어버린 일본 도쿄)

이와 같은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동반한 폭격은 일본 본토에서도 전개됐다. 1945년 3월 10일의 도쿄 대공습(Bombing of Tokyo)은 당일 공습으로 8~10만 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적국의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차원에서 실행된 거지만, 한편으론 상대편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23) 비단 도쿄 대공습 뿐만이 아니었다. 미 공군은 3월 11일에는 나고야, 13일에는 오사카, 16일에는 고베, 19일에는 나고야를 포함한 대도시 공습을 전개했고, 6월 이후에는 중소도시들까지 불태웠다. 그 결과 일본의 전국전재도시연맹의 조사에 따르면, 공습에 의한 사망자는 최소 50만 9,649명, 이재민은 964만 771명에 달했다.2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 강간의 문제를 보면, 당연히 미군도 피해갈 수 없다. 독일 측 학자 미리암 게브하르트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대략 86만 명의 독일 여성들이 서방 연합군에 의해 강간당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놀랍게도 게브하르트는 소련군에 의한 강간 피해자들보다 서방 연합군에 의한 강간 숫자가 더 많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게브하르트는 미군에 의한 성폭행 피해 여성을 19만 명으로 제시했다.25) 그녀에 따르면, “미군 점령지의 일부 지역, 이를테면 뮌헨 근교 무스부르크라는 마을에서 독일 주민들은 미군을 위해 문 앞에 주거인의 나이와 성별을 적어두도록 명령을 받았고, 그 마을의 목사는 피해 여성을 병원에 실어다주거나 도피처를 제공해야만 했으며, 성폭행 혐의로 군사법정에 서게 된 미군들은 한결같이 독일 여성이 거부하지 않았다고 발뺌했다.”는 것이다.26)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은 또 다른 치부일 것이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2개의 원자폭탄으로 대략 16~20만 명의 민간인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물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이를 가지고 물 타기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그런 대량 살상 무기를 실전에 투입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인도적인 차원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많은 사람들이 나치의 전쟁범죄 현장으로 생각하는 역사적인 장소다. 그러나 이 죽음의 수용소를 해방한 주체는 영미 연합군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추축국과 싸웠던 이유 중 하나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끝내려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전쟁 기간 동안 600만 명이 유대인이 나치가 만든 독가스실에서 죽어갈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미국 정부는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42년 미 국무부는 이미 150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 독일의 점령 지역에서 학살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를 확보했음에도 말이다.27) 헨리 파인골드(Henry Feingold)의 연구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에 구금되고 유대인 600만 명과 유대인이 아닌 수백만 명의 소름끼치는 몰살로 끝날 절멸과정이 시작되고 있었음에도, 루스벨트는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을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28) 즉 미국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곳으로 향하는 철로나 연결되는 시설들을 폭격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유대인이 나치가 만든 가스실에서 죽어 나갔다.

오히려 나치의 압제와 홀로코스트와 같은 제노사이드로부터 구한 주체는 소련이었다. 비자이 프라샤드에 따르면, 나치 강제수용소의 대부분을 해방시킨 것도 소련군이었고, 베를린에 진격해 전쟁을 끝낸 것도 소련군이었다. 소련은 나치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고, 2,600만 명 이상의 소련 시민을 잃었다.29) 프라샤드의 말대로 소련군은 나치를 몰아내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명백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1941년 기준 소련에 침공한 독일군의 병력은 250개 사단 규모였던 데 비해, 영국군이 북아프리카에서 상대한 독일군은 4개 사단 규모였다.30) 동부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소련군은 600개 이상의 적군 사단(독일군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해)을 괴멸시켰다. 특히 독일의 경우 동부전선에서 30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00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독일 총 전쟁 사상자의 75%), 히틀러의 추축 동맹국들은 100만 명을 잃었다. 붉은 군대는 4만 8,000대의 적군 탱크, 16만 7,000문의 대포, 7만 7,00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3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쟁 승리에 큰 역할을 맡았던 미국과 소련은 신강대국의 위치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명실상부 초강대국이 된 것이다. 구제국주의로 대표되는 영국과 프랑스는 전후 복구 과정을 거쳐야 했고, 사회주의 국가 소련도 전후 재건에 나서야 했다.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2,600만 이상의 인명손실을 감당했던 소련은 전쟁 과정에서 아주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소련에 있던 공업화된 지역의 1,710개 도시와 7만 곳 이상의 농촌 마을이 파괴되었다. 3만 2천 곳의 공업설비와 6만 5,000킬로미터와 철도가 파괴되고, 9만 8,000개의 협동조합과 5천 개에 가까운 국영농장과 트랙터나 농업기계 창고가 나치 독일군에게 약탈당했었다. 수만 개의 병원, 학교, 예술학교 고등교육기관 도서관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소련은 총 2조 6천억 루블의 피해를 받았다.32) 앞서 소련의 극심한 피해를 설명했지만,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만 11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보여주는 포스터, 미국과 소련의 경쟁은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로 얘기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제국주의 세력 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주의와 민족해방 세력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을 제외하고 본토피해가 전혀 없었던 미국에는 전쟁 기간 설비해 놓은 인프라가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 소련보다 훨씬 더 유리한 조건에서 시작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미국은 1950년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적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전시 기간의 대량생산 체제는 미군을 현대화시켰고, 대규모의 군대로 성장시켰다. 거기다 미국은 대량 살상 무기인 핵폭탄까지 가지게 되어서 냉전 초기 소련보다 군사적으로 우위를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한편으로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가 국제무대로 뻗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많은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었고, 경제적 토대와 군사적 토대를 통해 미국은 냉전시기 소련과의 경쟁에 나섰고, 점차 제국주의 국가의 면모를 국제적으로 보여주었다.

 

각주

1) 오디 머피(1926년 6월 20일~1971년 5월 28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으로 참전하여 독일군 260명을 사살하고 6대의 탱크를 파괴한 베테랑 병사다. 명예 훈장을 포함하여 육군수훈 십자훈장, 은성 훈장, 동성훈장 등 미국 군인에게 수여되는 모든 훈장과 메달을 받았으며, 1949년 자서전 ‘지옥의 전선(To Hell and Back)’을 출판했다. 그의 자서전은 1955년에 영화화 됐으며, 심지어 머피는 그 영화에 집적 주인공으로 출연하기까지 했다. 노시창, “[인물 아메리카] 2차 대전의 영웅, 오디 머피”, VOA, 2019.08.16, <https://www.voakorea.com/a/5043625.html>.

2) 론 코빅 지음, 이희구 옮김, 『7월4일 生』, 한마음사, 1990, 50쪽

3) 존 톨런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일본 제국 패망사 – 태평양 전쟁 1936~1945』, 글항아리, 2019, 116쪽

4) 스페인 내전 당시 민주 세력에게 병력과 물자를 가장 많이 보낸 국가는 바로 소련이었다. 1936년 10월부터 거의 전쟁 종료 직전까지 계속된 소련의 군사적 지원은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전투기, 탱크, 중화기 등에서 기관총, 소총에 이르는 각종 무기는 물론이고, 공화정부가 수입한 석유의 대부분도 소련에서 공급됐다. 그와 동시에 2,000명 이상의 군사전문가, 기술자 등이 내전 기간 스페인에 파견됐다. 최해성, 「스페인 내전의 국제사적 고찰 – 간섭국들의 지원 결정 시점과 의도를 중심으로 -」, 『이베로아메리카硏究』 17,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2006, 132쪽

5) 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지음, 이광일 옮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 윌슨에서 케네디까지』, 들녘, 2015, 170~171쪽

6) 당시 소련은 전쟁이 터지기 몇 주 전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스탈린이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은 1938년 9월 29~30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참여하여 맺은 뮌헨협정 때문이었다. 소련은 뮌헨협정에서 자신들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히틀러의 강제병합을 인정한 서구에 대해 가장 강력히 비판했으나, 서구가 이를 외면했다. 따라서 스탈린 또한 파시즘에 맞서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그리스 청년공산주의자 원문, 『1917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 쏘련 사회주의 경제, 권력, 역사왜곡에 대하여』,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번역, 2017, 120~131쪽)

7) 이 조약은 1940년 9월 27일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Berlin)에서 체결됐다. 독일의 요하임 본 피벤트로프 외무장관, 이탈리아의 갈레아초 치아노 외무장관 그리고 구루스 사부로 독일 주재 일본 대사가 이 조약에 서명했다.

8) 존 키건에 따르면, 1941년 4월부터 12월까지, 호송선단 공격 전술에서 기량이 차츰 늘어난 덕분에, 그리고 미 해군이 습격행위를 하는 잠수함을 공격하겠다는 의향을 알린 미국의 ‘중립구역’ 설정에도, U-보트 함장들은 작전을 중대서양과 서대서양으로 확장했다고 한다. 존 키건 지음, 류한수 옮김, 『2차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16, 160쪽

9) 앨런 브링클리 지음, 황혜성 외 옮김,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 미국의 세기 –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바마 행정부까지』, 휴머니스트, 2011, 221~222쪽

10) 제2차 세계대전 당시를 통틀어 보자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은 총 32만 4,750대의 항공기를 생산했다. 이를 당시 연합국이나 추축국과 비교해보면 미국이 압도적으로 많다. 당시 소련은 15만 7,261대를 생산했고, 영국은 13만 1,549대를 생산했다. 독일은 11만 9,371대고 일본은 76,320대였다. 즉, 미국은 독일보다 2.7배 일본보다 4.2배나 더 많은 항공기를 생산했다.

11) 이주영 지음, 『미국사(완전개정판)』, 대한교과서, 1997, 310쪽

12)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미국 민중사 2』,  이후, 2008, 97쪽

13) A.J.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 학살과 파괴, 새로운 질서』,  페이퍼로드, 2020, 229~230쪽

14) 사이판 전투의 경우 섬 북쪽 끝에 잇는 자살절벽에서 패전한 일본군과 민간인 1만 명이 ‘천황폐하 만세’, ‘대일본 제국 만세’를 외치며 절벽 아래로 떨어져 집단자살을 했다. 여기에는 원주민과 조선인들 조차 몸이 묶인 채 강제로 죽음으로 내몰렸다.(김남기, “<컬러로 보는 세계전쟁 일본제국편> 1부를 보며”,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22.06.20, <http://mlkorea.org/v3/?p=11810>)

15) 일각에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본이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이었다는 얘기가 현재는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도요다 소에무 해군참모총장의 경우 “원자탄보다는 러시아의 대일전 참전이 항복을 더 앞당겼다.”고 봤고, 당시 내각종합계획국 책임자였던 이케다 스미하사 중장 또한 “소련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는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앞의 책, 2015, 303~304쪽

16) 손세호 지음, 『하룻밤에 읽는 미국사 – 500년 미국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읽는다!』, 알에이치코리아, 2011, 300쪽

17) 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앞의 책, 2015, 267쪽

18) 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앞의 책, 2015, 268쪽

19) 하워드 진, 앞의 책, 2008, 111쪽

20) 하워드 진·레베카 스테포프 지음, 김영진 옮김,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 신대륙 발견부터 부시 정권까지, 그 진실한 기록』,  추수밭, 2008, 208쪽

21) 하워드 진, 앞의 책, 2008, 121쪽

22) 존 키건, 앞의 책, 2016, 647~648쪽

23) 김남기, “《컬러로 보는 세계전쟁 일본제국편》 2부를 보며”,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22.11.28., <http://mlkorea.org/v3/?p=12795>

24) 김태우 지음, 『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창비, 2021, 139쪽

25) 이동기, “2차 대전 종전 뒤안, 강간과 학살의 기억”, 한겨레21, 2015.05.28, <https://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39607.html>

26) 이동기, 앞의 기사, 2015.05.28.

27) 아거 지음, 『하워드 진 –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불복종자』, 인물과사상사, 2020, 48~49쪽

28) 하워드 진, 앞의 책, 2008, 110쪽

29) 비자이 프라샤드 지음, 원영수 옮김, 『제3세계의 붉은 별 – 러시아 혁명은 제3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두번째테제, 2018, 133쪽

30) 노경덕, 『사료로 읽는 서양사 5 현대편 – 제국주의에서 세계화까지』, 책과함께, 2022, 237쪽

31) 제프리 로버츠 지음, 김남섭 옮김, 『스탈린의 전쟁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냉전까지, 스탈린은 소련을 어떻게 이끌었나』, 열린책들, 2022, 45~46쪽

32) 바만 아자드 지음, 채만수 옮김,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 사회주의 국가 쏘련을 해체시킨 요인들』,  노사과연, 2009, 116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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