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로 보는 세계전쟁 일본제국편》 2부를 보며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 지난 6월에 리뷰한 1부는 1937년부터 1944년까지의 일본을 다뤘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나치 독일과 군사협정을 체결하는 상황,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을 계기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패색이 짙어지는 상황을 묘사했다. 자세한 건 [전국노동자정치협회]에 기고한 “《컬러로 보는 세계전쟁 일본제국편》 1부를 보며”를 참고하기 바란다.(저자 주)

 

다큐멘터리 2부는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3개월 뒤인, 1944년 9월 펠렐리우 전투 시점부터 시작한다. 당시 미·영 연합군은 일본 반경 3,200km 지점까지 진군한 상태였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지 7년이 넘은 시점이었으며, 이제는 중국전선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에서 승산 없는 전쟁을 치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이례로 일본과 미국은 서로에 대해 증오를 유발하는 프로파간다를 남발했다. 또한 태평양 전쟁에서의 양측의 전투는 점점 더 잔혹한 양상을 보였다. 일본 해군 중위 신 하세가와의 말이다.

“이 전쟁에서의 정의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간 쌓이고 쌓인 일들이 상대방에 대한 증오로 표출됐다. 자멸의 길로 빠져들기 전엔 누구도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미국은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일본에게 빼앗긴 자신들의 식민지 영토인 괌을 도로 되찾았다. 괌에 입성한 미군은 일본군이 괌을 점령하며, 그 지역 주민들에게 저지른 잔혹행위를 알게 됐다. 일본이 괌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최소 수백 명에서 1,000명 이상의 주민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참고로 당시 괌의 인구는 2만 명도 안됐다. 1944년 11월 일본의 대본영은 영·미 연합군의 진격을 막는다는 구실로 새로운 군사전술을 채택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카미카제(Kamikaze)였다. 다큐멘터리에서는 1944년 11월 25일 일본의 급강하 폭격기 한 대가 미군 항공모함인 USS 에식스 호에 자살돌격을 감행했다. 이것이 바로 카미카제 공격의 시초였다.

일본 대본영은 카미카제 공격이 전세를 바꿀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에 빠지기도 했다. 수천 명의 일본 젊은이들이 카미카제에 자원했고, 비록 다큐멘터리에선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들 중에는 강제로 징집된 조선인들도 적잖게 있었다. 일본의 신문들은 카미카제 공격을 연일 보도했으며, 자살공격을 극도로 미화했다. 마치 일본 제국의 구세주인 것처럼 말이다.

출격하는 카미카제에 꽃을 바치는데 동원된 여학생들

카미카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최소 400척 이상의 연합군의 배를 공격해 5,000명 이상의 연합군 선원을 사살하고 4천 명 이상의 카미카제 대원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본 본토를 향한 미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했다.

1945년 3월 19일 일본 근해에서 일본군의 폭격을 받고 기운 미국 항공모함

카미카제로 자원한 22살의 조종사 요시 미야기가 쓴 일기의 한 구절을 보자.

“카미카제는 로봇이나 다름없다. 조국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면, 이런 재앙을 겪진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내 죽음이 무의미한 죽음임을 알고 있다.”

다음은 카미카제 조종사인 21살의 하루오 아라키의 얘기다.

“사랑하는 내 아내에게. 이제 행복한 시간은 끝났소. 내일이면 난 적의 함대로 전투기를 몰아야 하오. 나는 양키 몇 명을 죽이고 저 세상으로 가겠지. 당신의 앞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오.”

일본은 카미카제 공격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들의 영토인 오키나와까지 밀리게 됐다. 1945년 4월 1일 미 해군은 오키나와 섬을 항공기 및 군함으로 폭격과 포격을 가했다. 수많은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여 4월부터 7월초까지 대략 3개월 간 전투를 치렀다. 오키나와는 한때 류큐왕국이라 불리던 곳으로 일본이랑은 다소 다른 정체성을 가진 지역이었다. 일본 현지인들은 오키나와인들을 식민지 조선인들처럼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오키나와인들은 일본인들에게 무시당하면서 미군에게도 잽스(Japs)로 비하 당했다.

1945년 5월 17일. 오키나와 나하에서 민가를 파괴하면서 진격하는 미군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 사상 미군과 일본군이 치른 전투 중 가장 잔혹한 전투였다. 전투 과정에서 적잖은 민간인이 죽었다. 오키나와에서 대략 15만에서 20만 명이 사망했는데 이중 수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이 민간인 사망자였다는 점에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미군의 무차별 함포사격과 폭격으로도 많은 민간인들이 죽었지만, 다른 한편 일본군의 인명경시적 군사전략으로 일본군에 의해서도 적잖은 민간인들이 자살을 강요받았으며, 그들의 총알에 희생되기도 했다. HBO에서 만든 10부작 드라마 《더 퍼시픽(The Pacific)》에서도 일본군이 민간인에게 폭탄을 설치하여 미군에게 돌격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전투가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미군은 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네이팜탄을 사용하여 일본군 진지를 폭격했고, 지하에 있는 기지들은 미군의 화염 방사기 공격에 불에 타버렸다. 오키나와 전역이 전쟁으로 인해 지옥도로 변한 것이다.

1945년 오키나와에서 동굴에 있는 일본군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쏘는 미군

그러던 1945년 5월 8일 일본의 동맹국이던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된 일본군 야하라 대좌의 얘기를 들어보자.

“우린 이제 운명이 결정됐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의 유일한 동맹국인 독일이 패배한 이상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 우리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군인들이 그런 이유로 자신들이 죽어간다는 걸 알게 되면 모두 희망을 잃을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은 미군에게 패배했고, 이 전투는 미군과 일본군이 치른 태평양 전쟁에서의 마지막 전투였다. 1944년 말에서 1945년부터 연합군은 일본 본토를 대상으로 한 공습에 나섰다. 이제 미국은 최신식 폭격기인 B-29 폭격기를 사용하게 됐다. 미군은 B-29 폭격기 350대를 이용하여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를 폭격했다. 1945년 3월 10일 커티스 르메이가 지휘한 도쿄 대공습으로 당일 10만 명의 일본 민간인이 사망했다. 아마도 드레스덴 폭격과 더불어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한 사례일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제공권에서도 연합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미군은 일본의 영공을 완전히 정복했다. 일본의 구식 전투기들은 미군 전투기들에게 상대가 되질 않았다.

1945년 1월 27일 후지산 상공을 비행하는 미국 제73 폭격단의 B-29  편대.

거기다 무방비 상태의 대양항로와 중요한 연료공급이 끊기자, 일본의 전쟁무기들도 효력을 잃었다. 따라서 도쿄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 전역의 미 공군의 공습 대상이 됐다. 요코하마, 도야마, 나고야, 오사카, 고베 등이 폭격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최소 50만 명에서 100만 명이 이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외에 미국의 잠수함들은 일본의 근해를 돌아다니며, 상선과 군함을 공격했다. 이에 따라 일본 본토에서도 식량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서, 수많은 일본 민간인들이 굶주렸다. 미치오 코마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부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다들 미국 잠수함이 이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에겐 남은 배가 없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모래를 먹어야 할 거라 했다. 이제 와서야 우리가 엄청난 적과 싸우고 있단 걸 알게 됐다.”

1945년 7월 독일에 있는 포츠담에서 미국의 해리 트루먼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 그리고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모여 회담을 가졌다. 이것이 바로 포츠담 회담이며, 세 지도자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만이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포츠담 회담 당시 처칠, 트루먼 그리고 스탈린

얼마 지나지 않아 8월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원자폭탄 투하로 20만 명의 일본인이 사망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 소련은 만주 전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진격을 게시했다. 사할린 이남과 쿠릴 열도, 한반도 이북과 만주, 중국, 몽골 등으로 소련군이 진격을 게시했고, 그 결과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일본 천황이 대국민 성명을 발표함에 따라 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에 있는 일본군인들 또한 무기를 놓고 항복할 것을 명령했다. 따라서 일본군인들 또한 무기를 내려놓고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1945년 4월 5일 이오지마에서 미군에 항복하는 일본군 병사

해외에서 주둔한 일본군과 주민들은 전쟁이 끝나자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규모가 600만 정도라고 한다. 다큐멘터리에선 언급되지 않지만,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게 됨에 따라, 3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한반도에서도 대략 90만 명의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일본의 항복은 또 다른 의미에선 혼란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해 8월 말, 한때 카미카제들의 비행장으로 사용되던 곳에 연합군 항공기 1대가 착륙했다. 이 연합군 항공기에는 일본을 지배할 새로운 지배자가 타고 있었다. 그가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였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자신들의 새로운 지배자를 맞이했고, 일본에는 수많은 미군이 주일미군의 형태로 주둔하게 됐다. 맥아더가 요코하마를 떠나 도쿄로 가는 길에 일본군 3만 명이 그를 호위했으며, 도쿄에 도착한 맥아더는 일본의 새로운 지배자가 됐다.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한 일본인의 얘기를 들어보자.

“최고 사령관은 햇빛 비치는 비행장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했는데, 마치 영화배우가 미리 세운 계획에 따라 입장하는 듯 했다. 서구인들이 드디어 왔다. 과연 얼마나 있을 생각인가.”

1945년 9월 2일 맥아더는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공식 항복 조인식을 가졌다. 패망한 일본은 새로운 지배자 미국의 점령통치를 받게 됐다. 초기 미국은 일본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소위 서구식 민주주의 교육을 도입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초기에는 대량의 인플레이션과 구제정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또한 주일미군이 주둔하게 됨에 따라, 주일미군에 의한 아녀자 강간은 빈번히 일어났고, 빈곤에 따른 일본 여성들의 매춘이 급증했으며, 암시장이 즐비했다. 또한 경제난으로 인해 굶어죽는 이들도 적잖게 발생했다. 1945년부터 1949년 내지는 1950년까지의 일본 경제는 말 그대로 처참했다. 일본의 경제가 부흥한건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였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뿌린 프로파간다로 인해, 대다수 일본인들은 주일미군을 맞이하기 전 미국인들을 뿔 달린 괴물로 인식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눈에 비친 미군들 중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도 적잖게 있었다. 미군들 중에는 일본 민간인들에게 초콜릿을 주는 이들도 있었으며, 함께 같이 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었고, 아이들과 놀아주는 미군들도 있었다. 즉, 일본인들은 미군의 양면을 같이 보게 된 것이다. 미국은 도쿄에서 군사재판을 열었다. 이들 중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들이나 전쟁범죄자들이 처벌받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진행된 뉘른베르크 재판 및 이후에 진행된 나치전범 재판에 비해 강도가 약했다.
도조 히데키 같은 이들이 처형되기도 했지만, 731부대의 수장 이시이 시로 같은 이들이 살아남아, 미국과 거래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쟁의 책임자인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전범재판은 일본인들에게 전쟁범죄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반성할 기회를 주지 못했다. 특히나 냉전이 격화되면서 일본이 친미 반공국가가 됨에 따라 그러한 모순이 더 나타났다. 맥아더는 일본의 천황을 살려줬다. 대신 일본 천황은 폐허가 된 일본 전역을 다니는 여행을 하게 만들었다. 1947년 12월에는 히로시마도 방문했다고 한다.

더글라스 맥아더와 일본 천황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끝났다. 8년간의 전쟁으로 일본은 250만 명이 죽었고, 해외에서 1,500만 명을 죽였다. 어쨌든 전쟁을 끝났고, 일본은 다시 재건을 해야 할 상황이 왔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지만, 일본은 결국 냉전이 시작되며 친미 반공국가가 되었고, 한국전쟁을 통해 미군의 보급기지 수리기지 역할을 하며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우리의 비극이 그들에겐 경제성장의 발판이 된 것이다.

다큐멘터리 《컬러로 보는 세계전쟁 일본제국편》 2부는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는 과정과 패망 이후 점령군 미군이 들어와 새로운 통치를 하게 되는 시점까지를 다루고 있다. 비록 영미권 다큐멘터리라 서구적인 시각에서 만들어진 측면이 강하기는 하나, 일본 제국주의가 광기화 되고 또 어떻게 패망의 길을 걷게 되는지 알기에는 나쁘지 않은 다큐멘터리라 생각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이 다큐멘터리에는 식민지 조선 민중이 겪은 고통에 대해선 얘기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점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나쁘지 않게 만든 다큐멘터리는 사실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많은 이들에게 추천하는 다큐멘터리다. 노/정/협

이 기사를 총 89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