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로 보는 세계전쟁 일본제국편> 1부를 보며

_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필자가 중학생 시절 역사라는 과목에 관심을 갖게 만든 다큐멘터리가 있다. 그 다큐멘터리가 바로 <컬러로 보는 세계전쟁(World War 2 in Color)>이었다. 2005년에 방영했던 다큐멘터리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장면을 컬러화했다. 이 중에는 그 시기에 사용된 컬러용 동영상들도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 중 하나인 일본제국편은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는 1937년부터 1944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어린 시절 봤던 다큐멘터리라 성인이 되어 다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물론 다큐멘터리는 영어권에서 만들었기에, 친서방적인 시각이 많이 담겨 있으나,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해서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지, 이들의 심리적 구조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는 제법 도움이 될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1937년 당시 일본에서부터 시작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했고, 1910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중국의 칭다오를 점령했고, 그 외의 태평양 섬들을 장악했다. 그 이후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 1932년에 상해사변을 일으켰으며, 1933년에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 일제는 중국 대륙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 있던 게 군국주의 일본이었다.

일본의 이러한 군국주의화에는 분명 일본 내부의 모순적인 경제적 구조도 한몫했다. 물론 일본은 아시아 최초로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로, 1937년 당시 일본의 기업 닛산은 최초로 고급자동차를 생산했고, 역사상 최초로 호주에 수출할 계획까지 세웠던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호황을 겪었던 일본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으로 불황을 맞았으며, 당시 자국 내 일본인들의 삶은 어려웠다. 특히나 농촌 지역의 농부들의 삶은 워낙 어려웠다. 이러한 일본의 상황은 빈곤과 정치적 극단주의에 빠지게 된 계기였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당시 22살의 농부 타다시 코누마의 증언을 들어보자.

“농부들은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먹고 살기위해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려야만 한다. 아무리 열심히 벼를 키워도 쌀값을 감당할 수가 없다. 일본은 점점 살기 힘든 나라가 돼 가고 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언급이 안됐지만, 당시 일제 식민지였던 조선 민중 또한 이러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쨌든 1937년 시점으로 일본은 정치적 극단주의가 자리를 잡으며, 군이나 전쟁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는 군국주의 사회로 변모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치치부 왕자는 유럽을 방문하며 나치 독일을 방문했고, 나치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뉘른베르크 연회에 초청받기까지 했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히틀러는 일본의 치치부 왕자를 크게 환대해줬다. 당시 일본은 나치 독일과 반코민테른 협정을 통해, 협력관계를 형성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나치 독일과 일본의 관계는 히틀러의 연설을 통해 알 수 있다.

“독일 국민은 위대한 일본 제국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합니다. 두 나라가 하나로 마음을 합쳐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관계가 된 것을 기뻐하는 바입니다.”

1937년 7월 일본은 노구교사건을 통해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만주와 상해, 난징 등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에서는 20만 명에서 30만 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벌였다.

난징에서 학살을 저지르는 일본군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을 시작하며 신속한 승리를 국민들에게 약속했지만, 이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전쟁이 장기화되었지만, 이에 대해 크게 불만을 가진 일본인들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사회 전체가 군사화 됐다. 심지어 초등학교에서도 모의 군사훈련을 했다.

중일전쟁은 몇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고 장기화됐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으로 중국인들을 침략자 일본에 맞서 항전했다. 1940년 히틀러가 전격전으로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을 정복하자,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고, 독일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맺었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중국 국민당을 지원했고, 일본에 비우호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에 거래하던 석유 공급을 중단했다. 그 이유는 일본이 중국에서의 철수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청년들에 대한 징집이 더 많아졌다. 미국이 일본의 석유공급을 중단하자, 일본의 대본영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은 미국을 공격함으로써, 사실상 패전의 길에 접어들었지만, 일본 국민들은 자신들이 미국과 전쟁하여 승리할 것이라 착각했다. 아래는 진주만 기습 공격 소식을 들은 12살의 학생 요시다카 코지마의 증언이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시는 발소리가 들렸어요. 전 반장이어서 아이들에게 경례를 하게 했죠. 선생님은 일본이 미국, 영국과 전쟁을 시작했다고 하셨어요. 저희 모두 흥분해서 기쁨의 박수를 쳤죠.”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일본은 미국령 필리핀과 영국령 버마(현재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파푸아 뉴기니 등을 점령했고, 호주까지 위협했다. 1941년 12월부터 1942년 5월까지 일본은 과거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점령했던 수많은 식민지들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점령한 영토

물론 일본의 대본영은 진주만 기습 공격이 완벽한 승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미국의 태평양 함대에게 큰 타격을 줘야한다 생각했고, 1942년 6월 태평양의 한 섬에서 승부를 보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었다. 미드웨이 해전 결과는 일본 제국의 참패였다. 일본은 주력 항공모함 4척과 최소 300대 이상의 항공기를 잃었다.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는 일본이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 도쿄의 라디오는 일본이 승전했다는 거짓정보를 방송했다.

“이번에도 우리 황군은 거만한 적인 미국과 영국을 물리쳤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두려워합니다. 우리 모두 이 위대한 승리를 기념합시다.”

1943년에는 과다카날(솔로몬 군도) 1944년에는 사이판이 미군에 의해 함락됐다. 특히 사이판 전투는 참혹했다. 당시 사이판에는 일본 민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미군이 상륙하자, 일본군에 의해 집단자살을 강요받았다.

사이판섬 북쪽 끝에 있는 자살절벽에서는 패전한 일본군과 민간인 1만 여 명이 ‘천황폐하 만세’, ‘대일본 제국 만세’를 외치며 절벽 아래로 떨어져 집단 자살을 했다. 여기에서는 원주민과 조선인들조차 몸이 묶인 채 강제로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러한 광기의 현장은 K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잘 묘사된 바가 있다. 사이판에 있던 일본 민간인들은 미군이 오자 동굴에 숨어 군인과 함께 자살하기도 했고, 원치 않는 죽음을 당했으며, 일부는 미군이 쏜 포격에 죽었다. 어떤 일본인 여자는 자신의 갓난아기를 목 졸라 죽이도록 일본군인에게 강요받았으며, 결국 자신의 아기를 스스로 목 졸라 죽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전쟁의 광기가 극대화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다수의 민간인이 사이판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후방 또한 상황이 처참했다. 미국 영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일본은 물자부족에 시달렸고, 이는 도쿄 우에노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 정부는 결국 이 동물들을 독약을 먹여 죽이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일본 아이의 증언이다.

“소식을 듣고 너무 놀랐어요. 엄마는 눈물을 터뜨렸죠. 정말 끔찍한 전쟁이에요. 나라를 위해 코끼리 하나코를 죽여야 한다니 끔찍해요.”

미국의 태평양 함대는 일본이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강했다. 미국은 사이판을 점령함으로써, 일본 본토를 자유자재로 폭격할 수 있게 됐다. 다른 태평양 전선에서도 일본은 밀리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의 함대에 맞서 새로운 전술을 생각해내는데, 그것이 바로 자살 공격의 대명사 가미카제(Kamikaze) 공격이었다. 1부 다큐는 2부에서 가미카제에 대해 다룰 것을 말하며 끝난다. 이 다큐를 보며, 일본이 정말 이기지도 못할 제국주의 전쟁을 벌여놓았으면서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짓을 많이 저질렀음을 느꼈다. 다큐멘터리에선 언급되지 않았지만, 일본이 일으킨 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수많은 조선인들도 이 전쟁의 희생자가 됐다. 그런 점에서 태평양 전쟁은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노/정/협

《민족과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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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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