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민족 예멘! 팔레스타인을 전면 옹호하며 시오니스트와 미영 제국주의자들과 싸우는 예멘인들의 영웅성은 어디에서 왔는가?
“홍해서 마구잡이로 선박 건들다가 미군 폭격 받은 후티반군”
연합뉴스는 16일 유튜브에 올린 영상에서 이렇게 자막을 쓰고 있다.
이 ‘후티반군’은 미군과 영국군의 공격을 받고도 이러한 미국 상선에 대한 공격 행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고 했다.
먼저 한국언론과 서방 언론 대부분이 사용하는 “후티반군”이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다. 어떻게 반군이 예멘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며 아덴만 홍해를 관장하며 이 바다를 통행하는 항선을 막고 미국 영국 연합군과 전면에서 싸울 수 있단 말인가?
BBC코리아는 이 실상에 대해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공식적인 예멘 정부는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 전 대통령이 2022년 4월 권한을 이양한 ‘대통령 리더십 위원회’이다.
그러나 해당 정부는 하디 대통령이 2015년 망명한 이후 줄곧 사우디 리야드에 자리하고 있다.
예멘 국민 대부분은 후티 반군이 지배하는 지역에 거주한다. 후티 반군은 수도 사나, 북부 지역뿐만 아니라 홍해 연안까지 장악하고 있다.
후티는 주민들로부터 세금도 걷고 자체적으로 화폐도 발행한다.”(BBC코리아, 예멘의 ‘후티’는 누구며, 이들이 홍해에서 상선을 공격하는 이유는?, 2024년 1월 12일)
이 보도처럼 예멘의 기존 정부, 친미정권은 후티 저항세력들의 공세로 인해 무너져서 사우디에 망명 정부를 세우고 있다.
이들은 이제 반군이 아니라 예멘을 실제 통치하는 권력이다.
그런데 저항군으로 출발해 아직 내전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예멘을 통치하는 후티는 도대체 누구인가?
후티는 현실감각 없는 한낱 돈키호테인가? 거대한 수레와 맞서 싸우는 당랑거철인가?
후티는 왜 미영연합군의 공격을 받으면서까지 홍해를 통제하며 이 해상을 통과하는 선박을 공격하고 있는가?
“후티의 홍해 선박 공격은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대 하마스 간 전쟁 발발 이후 시작됐다.
후티는 하마스 지지를 선언하며 이스라엘로 가는 모든 선박을 공격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이스라엘로 향한 모든 선박이 공격당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후티는 자신들이 이스라엘 화물선을 나포했다고 주장했으며, 이후로도 무인기와 탄도 미사일 등을 동원해 여러 상선을 공격했다.”(BBC 코리아 같은 기사)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의 팔레스타인인 학살에 맞서 중동지역과 전 세계에서 국제적인 공분이 일고 지지와 연대투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시오니스트는 이러한 국제적 분노와 연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학살과 파괴를 자행하고 있으며 미제국주의는 이를 군사적으로 직접 지원하고 있다. 서방제국주의는 반이스라엘 시위를 탄압하고 있다. 영국제국주의는 이스라엘 시오니스트를 규탄, 폭로하는 책자를 판매하는 공산주의 활동가들을 연행해 감으로써 자유주의 나라 영국이 얼마나 반동적인 억압 통제 국가인지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한국 윤석열 정권을 비롯한 미제 추종국 10개국도 예멘에 대한 미영공습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의 학살만행을 지지하는 국제적 반동의 일원으로 다시금 자리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멘 후티 집권세력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표명하는 것을 넘어 미제의 전유물인 해상봉쇄와 제재수단을 사용하여 홍해를 가로막고 이스라엘과 미제와 서방상선들을 통제하고 미영연합군의 폭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영연합군과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에 맞서 결연하게 싸우는 모습은 영웅적이며 감동스럽다.
서방 언론에서는 후티가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이러한 규정만으로 이 영웅적인 패기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도대체 후티는 진짜 누구이고 예멘인들의 역사는 어떠하길래 이러한 담대하고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가?
서방언론의 만연한 악선전과 파편적으로 사실 일부를 드러내는 기사로는 진실을 알 수 없다.
이러한 차에 예멘의 자주적 역사와 영웅성을 이해하고 지금 펼쳐지고 있는 중동지역 분쟁을 역사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사가 나와서 소개하려고 한다.
https://www.struggle-la-lucha.org/2024/01/15/yemen-an-indomitable-people-part-1/
https://www.struggle-la-lucha.org/2024/01/15/yemen-an-indomitable-people-part-2/
“예멘: 불굴의 민족(1, 2부민족”, 세르히오 로드리게스 겔펜슈타인Sergio Rodríguez Gelfenstein, 2024년 1월 15일)
이 기사는 원래 1월 3일 알 마야딘(Al Mayadeen)에 스페인어로 실린 글을 struggle-la-lucha가 영어로 번역해서 올렸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초벌 번역 수준임을 감안하기 바란다.)
2015년 서방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개입주의 동맹의 위협을 받는 주권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예멘인들은 독립을 지키기 위해 거의 40만 명의 자녀들의 생명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많은 이들은 서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여겨지는 나라가 어떻게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로 구성된 연합에 저항하고 이들을 패배시킬 수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이제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이후 예멘은 레바논 헤즈볼라 운동과 기타 아랍 및 이슬람 혁명 세력과 함께 팔레스타인과의 연대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예멘은 지역적 영향뿐만 아니라 지역적, 세계적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려 다시 한 번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다시 한 번, 세상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홍해 연안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내륙과 남부 해안은 자이디스의 지배를 받으며 독립을 유지했다. 1634년 오스만 제국은 마침내 자이디족에 의해 예멘에서 축출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인들이 홍해 모카(Moka) 항구에 동인도 회사 초소를 설치하면서 그 지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19세기에 영국은 남서쪽 끝 전체를 점령하고 1839년에 이 지역 최고의 항구인 아덴에 정착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1872년에 투르크는 예멘 내륙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사실상 지역 이맘의 이름으로 세습 군주제를 확립했다. 이 분할은 예멘을 두 국가로 효과적으로 분할했다.
1870년경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 예멘 북부에 대한 터키의 지배가 강화되면서 아덴은 영국의 글로벌 전략에서 새로운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아덴은 홍해와 새로운 운하의 열쇠였다.
20세기 초 터키와 영국은 각각 북예멘과 남예멘으로 알려지게 된 자신들의 영토 사이에 국경을 표시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이미 1904년부터 자이디스의 이맘*이었던 이맘 야히아 마흐무드 알 무타와킬(Yahya Mahmud al-Mutawwakil)은 북예멘을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제1대 이맘 알리(Ali)와 그 부인인 파티마(Fatimah)를 숭배하는 시아파는 무엇보다도 이맘(Imam)을 강조하는 종교이다. 이맘은 바로 알리와 파티마의 자손을 의미하고 시아(Shia)는 이들을 숭배하는 ‘무리’ 또는 ‘당파’를 의미한다.
투르크의 패배로 예멘은 1918년 11월 독립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1928년 예멘의 독립을 인정한 후 오만 국경까지 예멘 남부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1934년까지 영토를 통제하고 아덴을 보호령으로 전환한 후, 1937년에 식민지로 전환했다. 예멘인들은 다시 한번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벌여야 했다. 1940년,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이맘들의 국가 통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 민족주의 자유예멘 운동이 등장했다.
전투는 북쪽과 남쪽에서 서로 다른 경로를 취했다. 북쪽에서는 1962년 예멘아랍공화국이 창설되었고, 남쪽에서는 1963년 창설된 민족해방전선이 1967년 아덴을 점령하고 독립을 선언하며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했다.
남예멘은 예멘인민민주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1969년 영국의 모든 기지를 폐쇄하고 은행, 대외 무역, 해군 산업을 장악하고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 외교정책에서는 소련과 긴밀한 동맹을 유지했다. 또한 공개적인 반시오니스트 투쟁과 팔레스타인 국민에 대한 지원을 장려했다.
1978년 10월 국민의 상당한 지지를 얻은 대회에서 민족해방전선은 예멘사회당을 창설했다. 12월에는 독립 이후 처음으로 인민혁명위원회 위원 111명을 선출하는 국민선거가 실시됐다.
예멘 인민민주공화국은 건국 첫해부터 석유 매장지가 발견된 영토 일부를 통제하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끊임없는 적대에 시달렸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한편, 북부에서는 국내 모든 진보세력을 결집한 민족민주전선(NDF)이 1978년 대통령이 된 알리 압둘라 살레에 맞서 무장투쟁을 주도하고 있었다. 민족민주전선이 정권을 잡으려던 무렵, 사우디아라비아는 분쟁을 예멘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전쟁으로 전환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일부 아랍 국가들의 중재로 휴전이 이루어졌고 1972년 이후 중단됐던 통일 협상이 재개됐다.
마침내 1990년 5월 22일 두 공화국이 통합하여 예멘 공화국이 탄생하고, 예멘 아랍공화국의 옛 수도인 사나를 정치적 수도로 삼고,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옛 수도인 아덴을 세웠다.
아덴에서 열린 두 입법회의 합동 회의에서 알리 압둘라 살레 장군이 이끄는 대통령 위원회가 선출되었다. 예멘 통일은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사우디는 내분과 분리를 지원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1994년 5월, 분리주의자들은 남부에서 예멘 공화국을 선포했지만 정부에 충성하는 세력에 의해 패배했다.
2004년 6월과 8월 사이에 성직자 후세인 알 후티(Hussein al-Houthi)의 지도 하에 시아파 지향 이슬람의 특정 분파인 자이디의 신념을 표현하는 운동이 나타났다. 그해 9월 그가 순교한 후 이 운동은 후티(Houthi, Huthi) 혹은 안사랄라(Ansarallah 신의 지지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자이디즘의 역사는 천년이 넘으며 8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이디즘(Zaydism)은 정의를 위한 투쟁과 그 정의를 달성하는 데 있어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이슬람의 한 분파이다. 무슬림은 불의한 술탄과 칼리프를 포함한 불의한 지도자를 폐위시켜야 할 종교의 윤리적, 법적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1962년 권력을 잃은 후 주변화되었던 이 이데올로기는 안사랄라의 정치적, 종교적 사상 기초를 형성했다.
알리 압둘라 살레(Ali Abdullah Saleh)의 친서방 및 친사우디 정부에 대한 안사랄라의싸투쟁은 지난하고 피로 얼룩졌다.
2009년 살레는 점점 커지는 안사랄라 운동에 맞서 싸우기 위해 사우디와 동맹을 맺었다.
처음에 안사랄라 전사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최고 지도자의 몰락을 포함하여 큰 패배를 겪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강해졌다. 2011년부터 알 후티의 남동생 압둘 말리크(Abdul Malik)의 지도 하에 안사랄라 운동은 상당한 승리를 거두고 적에게 심각한 좌절을 가하기 시작했다. 반제국주의, 반시오니스트 수사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미국과 이 지역 “이스라엘”의 지배 파트너로 식별함으로써 강화되었다.
일단 집권한 안사랄라 운동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들은 알카에다 테러리스트 세력, 그들을 보호하는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다른 걸프 국가들의 연합군과 동시에 싸워야 했다. 이 모든 적들은 서방, 주로 미국, 영국, 독일의 무장과 지원을 받았다.(1부 발췌)
초국적 주류언론은 안사랄라가 이란 정부의 영향을 받아 행동한다는 서사를 심어왔다. 이란이나 안사랄라 모두 제국주의, 식민주의, 시온주의에 대항하는 저항 축의 일부임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이 축은 레바논, 시리아, 바레인, 팔레스타인 자체의 정치 세력을 뭉뚱그려 “종속” 관계로 등식을 단순화한다. 예멘 민족의 투쟁 역사를 고려하면 이는 피상적이고 진부하다.
수니파는 ‘전통의 사람들’이라는 뜻의 ‘알 알순나’에서 나왔고, 시아파는 ‘알리의 당파’라는 뜻의 ‘시아트 알리’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이것이 예멘인들이 단지 이란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테헤란으로부터 받은 재정적, 군사적, 통신 및 정치적 지원 외에도 안사랄라 운동은 팔레스타인 운동을 지지하고 2015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및 그 동맹국과의 전쟁에서 활동의 설계 및 실행에 있어 자율성과 자결권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12월 19일 “홍해 항해 자유 보장”을 목표로 하는 “번영 수호자”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해군 동맹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이것은 예멘에 전쟁을 선포하고 홍해를 군사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예멘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예멘군은 “예멘 자산이나 예멘 미사일 발사 기지에 대한 어떤 공격도 홍해 전체를 피로 물들일 것”이라며 “항공모함과 구축함을 침몰시킬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12월 28일 예멘은 미국과 그 파트너들에게 홍해의 군사화에 대해 경고하고 가자 봉쇄가 계속되면 적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동맹국이 결국 홍해의 안사랄라에 직접 도전하기로 결정하면 아덴만, 아라비아해, 인도양에서 대규모 해전을 치르게 된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차원의 멈출 수 없는 대결의 악순환을 야기할 것이다.
수에즈 운하를 통제한다는 것은 세계 무역의 90%를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스라엘 경제에 타격을 주어 이스라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의미에서 안사랄라는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미국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려고 했던 일, 즉 “가자 지역의 집단 학살을 세계적인 위기로 바꾸는 것”을 이뤄낼 수 있었다.
레바논 언론인 칼릴 하르브(Khalil Harb)는 세계 은행을 인용하여 크래들(The Cradle) 기사에서 이스라엘이 상품의 거의 99%를 강과 바다를 통해 수입하고 수출하며 국내총생산(GDP)의 절반 이상이 상품 무역에 의존한다고 밝혔다.
국제정치 전문 브라질 언론인 에두아르도 바스코(Eduardo Vasco)는 안사랄라 운동이 서아시아에서 일으키고 있는 직접적인 영향 외에도 그 행동이 “세계 경제, 즉 중동 침략 전쟁의 근원인 자본주의 정권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스코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예멘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는데, 이는 이 지역의 미국 동맹국들에 대한 보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며, 이미 시작된 석유 위기로 경제 위기를 무자비하게 악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랍에미르트연합은 안사랄라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원하는 반면 사우디는 신중한 입장이다.
이 모든 행동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쟁에 맞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예멘 인민의 역량과 결단력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들은 작은 나라임이고 세계적으로나 지역적으로 경제 발전에서 소외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 국가로서 존재한다는 천년의 정서를 표현하는 투쟁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제국주의 정책을 실행하는 미국에 맞서고 있다.(2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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