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1

_ 고전 제국주의론의 쟁점 및 종속이론에 대한 평가

 

나원준 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

 

* 이 글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설 민주노동연구원의 연구보고서 《미중갈등과 한국경제》제2장에 수록돼 있다.(민주노동연구원은 이 연구보고서가 민주노총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다고 주를 달고 있다.) 저자의 허락을 얻어 소개하는 이 글은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다양한 쟁점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현대제국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다. 두 번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 주)

 

Ⅰ. 머리말

 

코로나19 감염 확산에 이은 경제위기는 종속과 제국주의라는 오래된 연구 주제의 귀환을 불러왔다. 그 연구 주제들은 그동안 학술 연구 영역에서는 사실상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유례없던 글로벌 공급망 위기 속에서 제3세계 국가들과 그 나라 노동자들이 겪은 어려움이 진보적인 연구자들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그렇게 종속과 제국주의의 문제는 다시 세계 경제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 예를 들어 발전경제학 분야의 저명 학술지인 『아프리카 정치경제학 리뷰』(Review of African Political Economy)는 2021년 봄호(제48권 통권 167호)를 “사미르 아민과 그 너머: 급진정치경제학, 오늘날의 종속과 단절(delinking)”이라는 제목으로 편집하면서 종속 이론과 제국주의론의 재등장을 예고했다. 이듬해인 2022년 1월과 3월에는 또 다른 학술지 『라틴아메리카의 조망』(Latin American Perspectives) 제48권 1호와 2호에 “발전의 재평가: 과거와 현재의 마르크스주의 종속 이론과 주변부 논쟁”이라는 특집이 편성되어 문제의식을 공감하는 여러 논문이 실렸다. 같은 맥락에서 세계적인 학술 전문 출판사인 팰그레이브 맥밀런에서는 『현시대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의 종속 자본주의』(Madriana and Palestini, 2021)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2021년에 출간했다. 또 다른 학술 전문 출판사인 에드워드 엘가에서도 2023년에 『불균등경제발전』(Reinert and Kvangraven, 2023)이라는 논문 모음집을 출판했다. 2022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경제적 제국주의(Economic Imperialism)’라는 제목이 붙은 전문서적을 출간했다(Cope and Ness, 2022). 국내 독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미국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의 『슈퍼제국주의』(Super Imperialism) 제3판과 『문명의 운명』이 발간된 것도 2021년과 2022년의 일이었다.  

정세적으로도 우크라이나 전쟁과 팔레스타인 전쟁이 발발하고 미중갈등을 배경으로 미국 패권주의 세력이 주도해 동북아시아에서 한미일 군사동맹이 전략적인 수준으로 격상되면서 현대 제국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시급성이 커지고 있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으로서는 전쟁에 반대하고 전쟁 위협을 고조시키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실천 과제가 제기되는 국면이다. 또한 이론적으로도 종속 문제와 그것의 원인인 제국주의 문제에 대해 기존의 전통적인 이해를 변화된 현실에 맞춰 발전시키고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는 것은 우리 시대에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 장은 바로 그와 같은 당면 목적을 고려하면서 기획되었다.

구체적으로 본 장에서는 먼저 제2절에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에 의해 완성된 고전 제국주의론을 살펴보면서 현대 제국주의에 알맞게 재구성이 필요한 내용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 제3절에서는 과거 종속 이론의 강점과 약점을 검토하면서 종속 개념과 제국주의 개념의 재정립을 시도한다. 이어지는 제4절에서는 금융 지배 자본주의(finance-dominated capitalism)를 배경으로 하는 마이클 허드슨의 금융제국주의론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평가한다. 제5절은 이 장 전체에 대한 소결 부분에 해당한다.

 

Ⅱ. 고전 제국주의론의 쟁점

1. 제국주의 5표지의 개관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대중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당시 벌어지던 열강들 간 전쟁의 배후에 작용하는 경제적 원인을 규명함으로써 최후의 단계에 도달한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전쟁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폭로하고 노동자계급의 변혁적 실천을 조직하려는 기획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구체적 정세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제국주의’란 말 자체는 실은 오래된 옛 용어였다. 그 용어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세계사의 특정 역사적 단계와 상관없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정복해 식민지로 관리하는 예속 정책 일반의 뜻으로 통용되었다. 정복을 일삼고 조공을 받던 과거 로마 제국이나 당 제국을 연상하면 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역사적 국면에 형성된 새로운 독점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그런 옛 이름이 붙여진 것도 그 체제의 핵심 특징이 식민 정책에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새로운 체제가 자본주의의 특수한 단계에 해당하는 경제적 질서의 산물임을 밝혔다. 당시 열강의 정복 정책과 식민 정책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발생한 변화에 따른 유기적 결과이고 그와 같은 변화를 배경으로 자본주의가 새로운 발전 단계로 이행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 점에서 레닌은 탁월했다. 제국주의는 한마디로 (신)식민지를 거느리는 독점자본주의인 셈이다.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는 주요 자본주의 열강의 경제정책에 큰 전환이 일어난 시기였다. 서방 열강들은 그 기간에 제국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각국에서 축적과정의 모순이 심화되고 그 결과 독점자본의 지배가 확립되면서 열강들 사이의 경쟁은 격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경제정책의 전환도 이루어졌다. 1880년대가 되면 이미 일찍부터 제국이었던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외에 새로운 얼굴들이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 사반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아프리카의 10퍼센트만이 유럽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 사반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90퍼센트 이상이 식민지가 됐다.

레닌에게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제국주의는 앗시리아나 로마, 당나라 같은 세계사의 여러 대목에서 출현했던 제국과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제국주의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책으로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하나의 특수한 단계로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제국주의를 규명하기 위해 그것의 경제적 기초, 즉 당시 형성되던 새로운 생산관계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는 다음 진술에 담긴 5개의 표지로 요약된다. “제국주의는 독점체와 금융자본의 지배가 형성되고, 자본수출이 현저한 의미를 띠게 되며, 국제적인 트러스트에 의한 세계분할이 시작되고, 거대한 자본주의 나라들에 의한 지구상의 모든 영토의 분할이 종결된 발전 계제에 있는 자본주의이다(레닌, 1988: 122).”

20세기 초 레닌의 시대와 21세기 초 오늘날 자본주의 사이에는 한 세기만큼의 시간 거리가 놓여 있다. 그 둘이 같은 성격일 수는 없다. 특히 오늘날 제국주의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 일극 체제로 변모했기에 영국과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여러 열강이 경합하며 식민지 전쟁을 벌이던 과거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레닌이 제시한 제국주의의 본질이 오늘도 여전히 관철되고 있는지를 둘러싸고는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해둘 점은 레닌이 제시한 제국주의의 5개 표지가 곧 불변의 기준은 아니며 표지들 각각의 상대적 중요성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20세기 벽두에 질적인 이행을 경험했다. 그 내용은 독점자본주의가 자유경쟁을 대체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자본주의의 질적 변화는 일련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이루어졌다. 1860년대까지는 독점화가 초기 단계에 머물렀으나 1873년 공황을 거치면서 카르텔 형성이 활발해졌고 1900년~1903년 공황 이후에는 독점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 독점화는 생산과정의 사회화로도 해석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은 그대로 온존해 있었다. 레닌에 따르면 “특정 산업부문들에서 생겨난 독점은 자본주의 생산 전체에 내재한 무정부 상태를 증가시키고 격화”시킨다. 반면 고전 제국주의론의 또 한 명의 주요 저자인 니콜라이 부하린은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 형태로 자본주의가 조직되고 나면 경쟁은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그 점에서 레닌은 부하린과 시각 차이가 있었다(Noonan, 2017: 75-76). 다만 레닌에게서도 부하린처럼 “모든 기업과 모든 국가를 예외 없이 흡수해 버릴 단일한 세계 트러스트”(레닌, 2018: 15)와 같은 단선적 인식이 발견되기도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에서는 “이 새로운 특수한 단계의 성격규정에서 결정적인 것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독점단계라는 사실”이며, “이 결정적인 특징으로부터” “다른 근본특성들도 결과하는 것”이라고 지적된다(자골로프, 1989: 186). 따라서 5개 표지 가운데 독점체의 형성으로 자본주의가 독점단계에 진입한다는 첫 번째 체제 표지가 가장 결정적이다. 첫 번째 표지가 충족되지 않으면 제국주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독점단계라는 첫 번째 표지는 어떤 나라가 제국주의이기 위한 필요조건에 해당한다.*

* 그러나 이 표지 1을 제국주의의 충분조건으로 해석해선 안 될 것이다. 사회구성체가 독점자본주의 성격을 가진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제국주의가 되지는 않는다.

20세기로 들어서면 경제의 거의 모든 주요 분야에서 독점은 지배적인 경제적 관계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생산영역에서의 독점지배가 제국주의의 일차적인 특징이었다.* 금융과 무역을 비롯한 기타 분야에서의 독점체 형성은 생산에서의 독점체 형성을 그 기초로 했다. 경제력이 집중된 소수의 독점 대자본은 제국주의의 두 번째 표지인 금융과두제 형성으로 나아가며 국가권력과 유착했다.

* 레닌은 당시 자본주의 발전의 중요한 면모로 집중(concentration)과 결합(combination)을 제시했다. 집중은 자본의 독점화 경향을 뜻한다. 결합은 분리되어 있는 생산과정이 하나의 기업체 단위로 통일되는 것이다. 결합을 거치면서 상이한 업종이 단일 조직 밑에 묶이게 되었다. 부문별로 업황이 가변성을 보이더라도 결합기업은 상대적으로 더 안정적인 이윤율을 올릴 수 있었다(레닌, 2017: 21-22). 그러나 집중과는 달리 결합은 과거 독점자본의 한 양상이었을 뿐이며 현대 제국주의에서는 그것이 지배적 경향으로 관측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교통 및 통신 기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가 변화한 데 있다. 독점자본은 결합을 추구하는 대신에 국경을 넘나들며 공정을 재배치함으로써 비용 극소화를 실현했다. 그 과정에서 원하청 관계의 지리적 확장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구축되었다. 20세기 초에 정립된 고전 제국주의론이 그와 같은 후대의 경제적 변화까지 예견하기는 어려웠을 터이다.

제국주의는 자본의 집중이 일국의 경계를 넘어 확장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확장의 근본 동력은 자본 집중, 즉 독점화에 있었다. 자본 집중은 먼저 국내에서 일어났다.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이었던, 더 정확히 말하면 순전히 지역적이었던 경제단위들을 더욱더 단일한 중심에 종속시키는”(레닌, 2017: 41) 국내적 과정이 선행했다. 그렇게 단일한 국민적 자본주의 경제가 만들어진 다음에 자본 집중의 범위는 세계경제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세계경제 차원에서 자본 집중이 일어나면서 독점자본으로서는 자국 국가와의 제휴가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독점자본은 자국 국가를 대리인으로 삼아 국가의 힘을 이용해 세계시장으로의 팽창을 추구했던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는 나라마다 자본의 축적과 독점의 진전에 따른 발전 정도가 상이해 불균등발전법칙이 관철된다. 이에 세계경제는 독점 단계에 접어든 일부 부유국과 다수의 빈곤한 나라로 분열된다. 제국주의의 세 번째 표지인 자본수출은 전자, 즉 일부 부유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정책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지속적으로 구매력 부족에 직면하므로 자신의 생산력을 기존 생산조건의 개선에 이용할 수 없어 ‘과잉’ 상태에 놓인 자본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 과잉자본은 잉여가치를 착취할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옮겨간다. 그것이 자본수출이다. 우선 종속국으로 수출된 과잉 자본은 제국주의 나라의 자본가계급을 불로소득 생활자로 만들었다. 반면 종속된 (신)식민지 경제는 정상적 발전 대신 기형적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세계는 대자본의 국제적 연결과 단절에 의해 경제적으로 분할되었다. 그것이 제국주의의 네 번째 표지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종국에는 열강에 의한 전 세계의 영토적 분할로 이어졌다. 제국주의 전쟁은 불균등발전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불균등발전을 강화시켰다. 그것이 제국주의의 다섯 번째 표지였다.

 

2. 표지체계의 비판과 표지 4 및 5의 검토

 

20세기 초에 들어서면 유럽에서 자본주의 자체가 변해 질적으로 다른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선 것이 확실해졌다. 체제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전술한 바와 같이 자본이 축적을 거듭하며 점점 더 소수에게 집중된 결과로 독점자본이 등장한 것이었다. 독점자본은 전통적인 경쟁시장 논리를 걷어차고 먼저 국내 수요처를 자기들끼리 분할했으며 그런 다음에는 국가 권력의 지원을 받으며 해외 시장을 확보하고자 했다. 독점자본 간 경쟁은 식민지를 둘러싼 국가 간 정치적, 군사적 대립으로 이어졌고 그 절정이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독점자본은 각국 내부적으로 주요 생산 부문을 장악했다. 그것은 지배적인 형태의 자본이 되었다. 국민경제 내 다른 부문을 견인하는 역할도 맡게 되었다. 독점자본들은 상호 연계망을 형성하고 국가를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는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독점자본 이전 단계의 자유경쟁 자본주의에서는 그런 일이 불가능했다. 독점자본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개별 독점자본이 체제 전체의 동역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었다. 독점자본과 연결된 국가는 정치적 군사적 팽창주의를 추구하며 자국 독점자본에 유리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추구했다. 더 이상 전통적인 야경국가가 아니라 독점이윤의 획득을 위해 해외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국가가 선택된 것이었다.

제국주의의 한 가지 불변의 속성은 세계분할의 멈출 수 없는 동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세계분할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첫 번째는 표지 4로 개념화된 경제적 분할이었고 두 번째는 표지 5로 개념화된 정치군사적 영토 분할이었다. 경제적 분할의 대표적인 예로는 1907년에 맺어진 미국과 독일 간의 전기시장 분할 협정을 들 수 있다. 당시 독일의 지멘스 등은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네덜란드, 덴마크, 스위스, 터키, 발칸 반도 시장을 맡고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은 북미 시장을 맡기로 합의했다. 협정이 체결된 다음 그 두 거대 트러스트 간에 경쟁은 사라졌고 각자는 자신의 시장을 잠재적 경쟁자로부터 지켜내는 데에 전념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서면서 국민적 자본 간 경쟁은 국가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국가들은 각자 국민적 자본의 대리인이 되어 서로 경제적 투쟁과 군사적 투쟁의 전선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자본은 국가를 이용했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자본을 이용했다.

단, 제국주의 열강들 간 영토 재분할은 식민지를 둘러싼 갈등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자본 집중은 영국이 인도나 이집트를 점령한 것처럼 ‘수직적’ 분업 관계에서도 나타났지만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한 것처럼 산업화된 지역을 병합하는 ‘수평적’ 집중도 함께 일어났다. 벨기에도 식민지 약탈을 일삼던 제국주의 나라였다. 독일에 점령된 벨기에는 제국주의 나라들 사이에도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성립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 레닌은 벨기에 외에 “국가 종속의 과도 형태”(레닌, 2017: 106)를 언급하며 포르투갈의 예를 든다. 포르투갈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외양을 갖추고 있고 자체 식민지도 거느리고 있지만 금융적으로나 외교적으로는 영국의 보호국으로서 종속된 나라였다. 영국은 포르투갈에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대상으로도 제국주의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벨기에나 포르투갈의 예를 통해 제국주의 나라들 사이에도 위계와 서열의 체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레닌의 제국주의 5표지에 대해 안소니 브루어는 각각의 표지가 분리되어 묘사되고 있으며 그것들 사이의 상호 연관성은 규명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5표지로 정식화된 제국주의의 일련의 경향이 “동시에 일어난 역사적 우연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지, 아니면 “필연적으로 동시에 일어나게 하는 본질적인 상호 연관성이 그 경향들 자체 내에 내재”하는지가 중요한데도 제국주의론의 서술은 그렇지 못하다는 지적이다(브루어, 1984: 131).

제국주의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려면 다섯 개 표지들 사이의 연관성이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는 브루어의 주장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표지 간 연관성 문제에 대해서는 레닌의 서술에서도 제국주의의 여러 모습은 결국 독점자본의 발전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암시 정도가 제시되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점체 형성을 내용으로 하는 첫 번째 표지가 다른 표지들보다 더 본질적이라는 추론은 가능하지만 그 점에 대한 레닌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논의는 찾아볼 수 없다.*

* 이처럼 레닌 논의가 일정 부분 피상적이라는 비판은 Howard and King (1989: 259)에서도 발견된다.

브루어는 더 나아가 첫 번째 표지를 제외하면 “레닌이 묘사한 그 경향들이 그가 예상한 대로 진전되지 않”(브루어, 1984: 131)았다고 평가한다. 독점의 진전은 레닌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심화된 반면 마지막 표지인 세계의 영토적 분할은 “탈식민지화로 실제로 역전되었다”(브루어, 1984: 132)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마지막 표지(표지 5)에 대한 브루어의 부정적 평가는 타당성이 없다. 탈식민지화 사례 중에는 구식민지가 신식민지로 전환되면서 식민지 지배 방식만 바뀐 경우가 더러 있다. 제국주의는 (신)식민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식민지 없는 제국주의’는 형용모순이다. “타국 영토의 정치적 지배를 추구하지 않는 제국주의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자골로프, 1989: 107).” 소위 탈식민지화는 제국주의적 지배의 소멸도 아니었고 식민지 체제의 해소도 아니었다.

브루어의 비판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현대 제국주의가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위계의 일극 체제로 재편된 사실을 간과하는 점에서도 틀렸다.* 한때 대등했던 제국주의 열강 간 영토 분할이 종전 후 막을 내리면서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압도적 강국인 미국에 의한 전일적 지배였다. 재분할의 결과가 바로 전일적 지배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영국이나 일본은 제국주의 나라이지만, 두 나라 모두 이젠 미국의 중심적인 하위 파트너라는 점에서 과거의 위상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미국 단극 체제에서는 제국 열강이 각자 자기 의지대로 영토 분할을 위해 경합하는 일은 최소화되며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국지적인 범위에 그치기 쉽다.

*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세계 제국주의는 미국을 정점으로 하고 다른 제국주의 나라들이 하위 파트너로 결합되는 종속적 동맹관계의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후 변모된 제국주의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이처럼 제국주의체계 내에 단일한 정점이 형성된 것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현상이기도 했다.

제국주의 전쟁의 물적 토대는 “한편으로 생산력 발전 및 자본축적과 다른 한편으로 금융자본의 식민지 및 영향권 분할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레닌, 2017: 122)에 있었다. 불균등발전은 식민지 및 영향권의 기존 분할 양상을 불합리한 것으로 만든다. 제국주의 전쟁은 따라서 재분할을 위한 전쟁이다.*

* 여기서 ‘영향권’ 개념이 식민지와 나란히 등장하는 점에도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영향권이란 것은 영토를 지배당하지 않았고 외형적으로는 주권이 부인되지 않았지만 사실상 식민지 기능을 하는 나라들이라는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등장한 신식민지와 공통점이 있다.

제국주의 간 경합이 필연적으로 전쟁을 낳는다는 레닌의 예견에 대해서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레닌이 전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함으로써 20세기 후반 미국의 헤게모니 하에서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간에 장기간 평화가 유지된 것을 내다보지 못했다는 비판이 대표적이다(Howard and King, 1989: 261). 제국주의 간 경합의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일어난 사건을 자본주의 세계화의 불변의 법칙으로 승격시켰다는 비판도 있었다(Panitch and Gindin, 2004: 5).

그러나 제국주의 간 경합의 결과로 절대 강국이 지배하는 일극 체제가 형성되고 나면 전쟁은 당분간 불필요해진다. 전쟁의 물적 토대가 잠정적으로 해소된 상태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다가도 만약 그 절대 강국의 지배가 흔들리는 조건이 된다면 재분할을 위한 전쟁은 다시금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 제국주의 각국의 경제력이 그들 사이에 (신)식민지 및 영향권이 분할된 양상과 괴리가 생기면 제국주의 전쟁은 언제든 현실이 될 수 있다. 만약 세력 균형이 부분적으로 바뀌더라도 그 괴리가 충분히 크지 않거나 조율 가능한 정도라면 평화 국면도 잠정적으로는 가능하다. 다만 그 경우에도 물밑으로는 쉼 없는 긴장이 이어질 것이다. 제국주의 체제에서 평화는 전쟁의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Howard and King(1989)이나 Panitch and Gindin (2004)의 레닌 비판이 충분히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레닌에 따르면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세계분할은 1900년경이면 거의 완료되었다. 그때쯤이면 식민주의 권력에 의해 점령되지 않은 지구상 영토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1840년과 1860년 사이 기간에 영국이 식민 정책에 반대(레닌, 2017: 98)한 사실은 흥미롭다. 당시 영국 제조업은 세계경제를 지배했다. 이처럼 특정 국가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기간에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자유무역 옹호와 식민 정책 반대가 대세가 된다. 유사한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일극 체제의 황금기 자본주의에서도 재연되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에서는 불균등발전이 철의 법칙으로 관철된다. 따라서 장기적 시각에서 보면 기존의 시장 분할은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올 뿐이고 재분할을 둘러싼 갈등이 언젠가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레닌의 관점은 확실히 탁월했다. 반면 카우츠키는 이른바 초제국주의론을 역설하며 세계시장의 평화적 분할로 제국주의 강국들 간에 평화가 달성될 수 있을 것처럼 주장했다.*

* 당시에 강력한 독점체들로 세계시장이 나누어진 모습은 최근 들어 보호주의와 블록화 경향이 재연되고 있는 세계경제 상황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그렇다면 이번 블록화는 과연 어떤 역사적 귀결로 이어지게 될까. 이번에도 레닌이 맞을까. 아니면 이번에는 카우츠키가 맞을까.

독점자본이 출구를 찾아 해외 시장으로 향할 때에는 국제정치 환경이 중요하다. 시장 점유를 늘리기 위한 각국 독점자본의 전략은 상호 충돌하기 쉽다. 그 경우 경쟁하는 각국의 독점자본 사이에 세력 균형을 고려한 타협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일종의 국제적 카르텔이 형성될 수 있다면 평화로운 시장 분할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은 그와 같은 국제적 카르텔의 가능성을 필연성으로 둔갑시킨 데 따른 잘못된 결론이었다.

그러나 각국 독점자본의 세력 균형에 근거한 국제적 카르텔은 그 중 어느 한 세력이라도 위반을 통한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하게 되면 순식간에 와해될 수 있다. 일종의 조정 실패(coordination failure)로 인해 그 카르텔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다음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는 반드시 성립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 세력 균형이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불균등하게 발전하며 세력 균형은 반드시 변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첫 번째 조건은 현실성이 없다. 두 번째 조건은 세력 균형이 부분적으로 바뀌더라도 각국 독점자본의 이해를 조율해낼 수 있는 유일한 절대 강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 두 번째 조건은 고전 제국주의론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다만 일극 체제에서도 세력 균형이 부분적인 변화의 수준을 넘어서 근본적 재편으로 이어진다면 카르텔은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의 두 번째 조건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과는 전혀 다르다. 일극 체제는 초제국주의 상태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현대 제국주의 체제에서는 지금까지 미국의 패권 하에 두 번째 조건이 성립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확립된 제국주의 체제에서는 두 조건 중 어느 하나도 성립할 수 없었다. 따라서 카우츠키가 기대했던 국제적 카르텔은 조직될 수 없었고 설사 조직되었더라도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 중국을 독점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자본주의 체제로 보지 않는다면 최근 미중 갈등을 본문의 두 번째 조건이 성립하지 않게 된 사례로 간주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표지 5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오늘날과 같은 미국 일극의 신식민지 체제에서는 그 타당성이 다소 제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닌의 문제제기는 현상적 관찰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팽창적 속성을 직시했다. 제국주의 간 평화가 아무리 장기간 지속되더라도 그것은 전쟁의 물적 토대가 구축되면 즉시 깨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레닌이 “식민 정책과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근 단계 이전에도 존재했고 심지어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했다”(레닌, 2017: 102)고 지적한 점도 관심을 끈다.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 독점이 형성되고 금융자본의 지배가 작동하면서 식민 정책이나 제국주의의 성격에도 변화가 수반되었다. 식민 정책과 제국주의의 형태와 성격은 근본적으로 경제 시스템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제국주의 자체는 비록 더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가질지라도,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는 독점화되고 금융화되었으며 다른 나라에 경제적 정치군사적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자본주의 국가로만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독점자본 간 국제적 연계와 분리로 세계경제가 블록화된다는 네 번째 표지(표지 4) 역시 현대 제국주의 체제에서는 해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미국 일극 체제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과 여러 자본가 단체들의 금융적 수단에 기초해 뒷받침된 측면이 있다. 이들 국제기구와 단체는 실제로는 철저하게 미국 제국주의를 위해 복무하는 지배 도구일 뿐이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 체제가 일극 체제인 경우라면 더 이상 세계경제는 독점자본가 단체 간 경합으로 분할되지 않을 수 있다. 미국에 정치적으로 대항하는 나라들을 제외하면 이미 세계경제가 미국 제국주의의 지배 체제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다.

 

3. 표지 2의 검토

 

이제 레닌의 제국주의 5표지 가운데 두 번째 표지(표지 2)에 해당하는 금융과두제(financial oligarchy)에 대해 검토하자. 제국주의의 중심에는 금융적 이해를 중시하는 소수 과두 세력이 있었다. 제국주의는 국내적으로 금융과두체제였다. 영국에서 제국주의 정책을 주도하며 금융과두제를 뒷받침한 세력은 생산적 활동과는 거리가 먼 금리생활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자본가계급 중에서도 소수에 불과했다. 제국주의는 그렇게 금융과두제를 이끄는 일부가 국가 전체를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게 변형시킨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국내에는 더 이상 없는 안전한 고수익 투자 기회를 해외에서 확보할 수 있도록 국가권력이 앞장서야 한다고 요구했다. 제국주의적 팽창은 해외에서 바치는 공물에 의존해 살아가는 이들 소수 금융 세력한테는 이득이었지만 대다수 시민은 징병과 징용의 대상이 되었고 제국의 영광을 위해 전쟁 비용을 부담하는 등 희생을 강요당했다.

당시 존 앳킨슨 홉슨으로 대표되는 일부 자유주의 개혁가들은 제국주의를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각국이 임금 인상으로 국내 수요 원천을 강화하고 금융자본에 특혜를 주는 제도를 시정해 산업자본의 이익을 지킬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금리생활자와 금융자본의 동맹에 대해 산업자본과 노동조합의 동맹으로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와 같은 홉슨의 제국주의 이해는 경제학의 역사에서 ‘과소소비론’*으로 분류되는 것이며 케인스 경제학이 등장하기 전에 미리 케인스 경제학적인 결론을 선취한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 대중의 구매력 한계로 인해 소비가 생산에 미치지 못하고 이로 인해 경제가 불황에 빠진다는 이론이다.

레닌이 직접 인용을 하지는 않았으나 『제국주의론』에는 홉슨의 선구적 연구결과로부터 받은 영향이 배어 있다. 후대의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그와 같은 영향을 공식적으로는 부인했지만, 레닌의 제국주의 해석에 과소소비론을 비롯한 홉슨의 영향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다만 홉슨과 레닌은 정치적 입장에 있어서는 타협이 불가능했다. 홉슨에게 제국주의가 정책 개념이었다면, 레닌에게 제국주의는 정책이 아니라 체제 개념이었다. 정책은 바꿀 수 있는 것이지만, 체제는 정책을 다르게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다. 레닌은 제국주의 반대는 혁명적인 체제 전환을 지향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레닌의 정치적 입장은 제2인터내셔널을 지도했던 칼 카우츠키와도 대립했다. 카우츠키는 금융자본이 자신들만의 이해관계를 위해 국가를 팽창주의적인 도구로 변모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카우츠키는 금융자본의 이해관계는 산업자본의 이해관계와 상반된다고도 주장했다. 산업자본한테는 자유무역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국제평화가 유리한 반면 금융자본은 제국주의 정책으로 국가 간 전쟁에 앞장서는 점에서 둘 사이에 차이가 크다는 것이었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가 당시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서 가능한 유일한 모습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제국주의가 아닌 자본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카우츠키의 입장은 산업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독점체를 형성함으로써 금융자본으로 발전해온 과정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결과였다.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변증법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대립하는 관계로만 이해한 것이었다. 그 둘은 실제로는 서로 단순히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고 전자가 후자로 발전하는 개념인데, 마치 그 둘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한 것처럼 착각한 것이었다. 이렇게 제국주의를 잘못 이해하면 카우츠키처럼 사회주의 운동이 산업자본과 연대연합을 구축해 국제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식의 엉뚱한 주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점에서는 홉슨도 카우츠키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금융자본은 전쟁에 친화적이고 산업자본은 평화에 친화적이라는 카우츠키의 이분법은 근거가 없다. 금융자본도 국제적으로 개방된 자유로운 금융시장을 선호할 수 있다. 산업자본도 전략적 경쟁을 위해 블록화된 세계경제를 선호할 수 있다. 홉슨과 카우츠키는 금융 세력, 특히 은행자본과 금리생활자 계층이 제국주의를 이끈 결정적인 힘인 것처럼 주장했다.* 분명한 사실은 제국주의 자체는 탈산업화에 대한 지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 크리스 하먼에 따르면 레닌 역시 금융자본의 기생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면서 홉슨이나 카우츠키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하먼, 2009: 30). 다만 금융자본의 기생성에 대한 지적이 틀렸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 점에서는 홉슨도, 카우츠키도, 레닌도 옳았다고 평가해야 공정하다.

은행은 회사 설립이나 투자, 인수, 합병 등 다양한 기업 활동에 금융을 제공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주식회사들이 창업되는 과정에서 은행이 증권의 발행과 판매를 주도했고 그로 인해 기업의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다. 그런데 하나의 은행은 대개 여러 기업과 동시에 거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은행으로서는 기업들이 서로 전면적이고 격렬한 경쟁에 돌입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은행은 경쟁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기업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일환으로 자본의 집중과 독점화를 적극 지원했다. 그와 같은 은행자본의 역할은 19세기 말 이래 산업자본의 독점화가 촉진된 또 하나의 배경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경제학자 루돌프 힐퍼딩은 은행자본과 산업자본 사이의 그와 같은 긴밀한 관계에 주목했다. 힐퍼딩은 이들 사이의 제휴에 있어 은행자본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산업자본은 은행자본에 종속된 것으로 기술했다.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이 결합된 금융자본은 은행자본의 통제를 받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이에 대해 미국의 네오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폴 스위지는 힐퍼딩이 “자본주의 발전의 한 과도적 단계를 지속적인 경향으로 잘못 인식”(스위지, 2009: 372)했다고 비판했다. 힐퍼딩이 주목한 시대는 주식회사의 설립과 합병에 따른 기업결합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던 한창때였고 따라서 은행의 전략적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업결합이 항구적으로 늘어날 수만은 없는 법이다. 힐퍼딩의 시대가 지난 뒤로는 실제로도 그 빈도가 줄었다. 은행의 위치도 재조정되었다. “은행자본은 전성기를 누린 뒤에 다시 산업자본에 대해 종속적인 위치로”(스위지, 2009: 374) 돌아갔다. 기존의 은행과 산업 간 관계가 복원된 것이었다.

당시 관측되던 은행자본의 지배는 독점자본주의 단계로의 이행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현상이었을 수 있다. 그와 같은 은행 지배의 과도기적 성격을 부인하면 종전 후 최근까지 자본주의 역사에서 경험된 사실들을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기업들의 자금조달 패턴이 변화하면서 은행자본보다 내부 자금 조달이 우선시되고 있고 은행이 아닌 자본시장과 비은행 금융기관을 통한 자금조달 비중이 커지고 있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 점만 보더라도 힐퍼딩 시대의 은행 지배는 어디까지나 역사적으로 특수한 한시적 현상이었던 셈이다.

그 점과 관련해 미국에서 1933년 은행법인 글래스-스티걸 법을 통해 은행업과 증권업이 분리된 사실도 거론될 수 있다. 동 법은 은행의 주식 취급을 금지해 은행-산업 간 제휴나 은행의 산업 지배를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차단하는 것이었다. 글래스-스티걸 법은 신자유주의와 함께 다시 금융화가 진전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무력화되었고 20세기 마지막 해인 1999년에 최종 폐기되었다. 그러나 1934년부터 1970년대까지 미국에서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금산분리가 강제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힐퍼딩이 보고한 것과 같은 은행 지배는 절대로 영속적인 현상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정성진 (2003: 114)의 지적대로 오늘날의 금융세계화가 생산과 금융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점도 문제다. 만약 생산과 금융의 융합이 금융자본이라는 용어로 표상되는 제국주의 체제의 불변의 본질이라면, 제국주의는 이미 사라진 과거의 것이 되고 만다. 정말 제국주의는 사라졌는가.

은행의 산업 지배를 독점 단계 자본주의의 일반적 원리로 과잉 해석한 힐퍼딩의 오류가 금융자본이라는 용어에 반영되어 있는 점도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동일한 용어를 레닌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레닌은 산업에서의 독점체 형성이야말로 금융자본이 형성되는 출발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힐퍼딩의 금융자본 정의가 “극히 중요한 사실, 즉 독점에 달했거나 달할 정도로 생산과 자본의 집적이 증대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레닌, 1988: 77)한다고 비판했다. 스위지도 인용했던 “생산의 집적, 이로부터 생겨나는 독점체, 은행과 산업의 합병 혹은 유착, 이러한 과정이 바로 금융자본의 발생사이며 금융자본이라는 개념의 내용”(레닌, 1988: 77)이라는 레닌의 진술에서는 은행의 산업 지배가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좀 더 공정하게 따진다면, 레닌이 그 점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이 예민하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레닌의 힐퍼딩 비판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레닌은 이를테면 “은행업무가 발전하고 소수의 수중으로 집적됨에 따라, 은행은 중개자라는 소극적인 역할로부터 탈피하여, 거의 모든 자본가와 소경영주의 화폐자본 및 한 나라 혹은 여러 나라의 생산수단과 원료자원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강력한 독점체가 된다”(레닌, 1988: 59)고 진술한다. 여기서 독점체는 산업자본과 유착된 금융자본을 뜻한다. 이 진술은 금융자본이 어디까지나 은행의 진화 결과이며 은행의 주도로 창출되는 것이라는 함의를 갖는다.

레닌은 더 나아가 “산업과 금융계 사이의 밀접한 연관은 은행자본을 필요로 하는 산업회사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한”(레닌, 1988: 70)한다거나 “은행과 산업 사이의 밀접한 연관에 대해서 말한다면, [중략] 산업자본가는 보다 완전하게 은행에 종속당하는 것”(레닌, 1988: 70)이라고도 언급한다. 다른 저자로부터 “산업을 대신하여 활동하는 금융기관”(레닌, 1988: 73)이라는 표현을 재인용하기도 하고 “대은행이 [상공업계에] ‘명령’을 내리고 있”(레닌, 1988: 73)다고도 진술한다. “대은행의 이사들 자신도 국민경제의 새로운 조건들이 창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레닌, 1988: 74)다고도 밝힌다. 은행의 달라진 역할과 관련된 유사한 진술은 그밖에도 더 많다. 이들 진술은 대체로 레닌이 은행자본에 대해서만큼은 힐퍼딩에 현저히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 자본 집중에 필요한 금융을 제공하는 등 은행자본이 독점화 과정에 밀접히 관련되었고 그 과정에서 은행 자신도 독점화를 겪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레닌도 힐퍼딩처럼 독일의 경험을 특권적으로 일반화하고자 했다. 레닌의 인용에 따르면 당시 거대 기업들은 “베를린에 있는 거대 은행 여섯 곳의” “지시를 받”았다(레닌, 2017: 22). 그 은행들은 “은행 업무의 연계성, 당좌계정, 여타 금융 업무 등을 통해 우선 다양한 자본가들의 재정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그 다음으로는 그들을 통제할 수 있고, 신용을 제한·확대·촉진·방해함으로써 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레닌, 2017: 43). 레닌에게 있어서도 금융자본은 어느 정도는 은행의 지배적 역할을 전제로 한 개념이었던 셈이다. 다만 제국주의 나라마다 독점화 진행 양상에 차이가 있었다는 그의 지적은 충분히 타당했다. 미국이나 독일 같은 신흥 제국에서는 보호관세가 국내 자본 집중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반면 영국에서는 기업 간 경쟁 격화로 주요 경쟁 업체의 수가 줄어들면서 시장 집중이 진행되었다는 관찰 결과가 그랬다. 그와 같은 국가별 차이를 감안하면 독점화 자체도 상당히 포괄적인 규정이라고 볼 법하다.

레닌이 제시한 제국주의 5표지 가운데 두 번째는 금융자본, 그리고 소수 금융자본에 의한 지배 체계를 뜻하는 ‘금융과두제’라는 두 용어로 집약된다. 그만큼 금융자본은 제국주의론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며 따라서 변화된 오늘날의 현대 제국주의에서 그 용어가 갖는 의미는 정확히 평가될 필요가 있다. 금융과두제에 대해서도 그것이 제국주의의 필요조건에 해당하는지 재검토해야 한다. 스위지는 “‘금융자본’이라는 용어에서 힐퍼딩이 부여한 은행자본의 지배라는 함의를 떼어내는 것이 가능할는지는 의문(스위지, 2009: 376)”이라고 지적한다. 그가 “그 용어를 아예 폐기하고 ‘독점자본’이라는 용어를 대신 사용(스위지, 2009: 376)”할 것을 제안했던 이유다.

그러나 20세기로 진입하던 당시 힐퍼딩이나 레닌이 주목했던, 은행이 수행한 역할은 어쩌면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금융 지배 자본주의에서는 금융 업종 전체가 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법하다. 은행은 한때 뉴딜 국가의 제도화된 규제망 안에 있었지만, 신자유주의는 다시 금융 업종 전반에 걸쳐 규제 완화를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금융의 지배적 지위가 뚜렷해졌다. 은행이 아니더라도 각종의 금융회사와 자본시장 투자기금들이 기관투자자로서 금융적 이해의 실현을 위해 산업을 지배하는 현상은 오늘날에 다시 관철되고 있다. 그 점에서는 독점자본주의의 금융 지배 특성에 달라진 바가 없다.

레닌에게 있어 금융과두제는 금융자본을 통제하는 소수의 상위 계층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지대를 누리게 된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오늘날 금융화가 진전되면서 산업의 경영 원리 자체가 금융적 가치 중심으로, 즉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한 단기 수익성 중심, 현금흐름 중심으로 변모된 것과도 관련시킬 수 있다. 금융적 지대를 누리는 자산계층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점에서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스위지는 금융자본의 의미가 힐퍼딩에 의해 오염된 측면을 우려하면서 금융자본과 금융과두제의 형성을 내용으로 하는 두 번째 표지는 그 합리적 핵심이 독점체 형성을 내용으로 하는 첫 번째 표지에 이미 모두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이 옳다면 두 번째 표지는 없어도 된다. 스위지는 두 번째 표지를 제거하는 대신에 “몇몇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산업제품의 세계시장을 놓고 대등한 수준의 경쟁관계를 형성(스위지, 2009: 427)”하는 것을 새로운 표지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스위지의 새 표지 역시 오류다. 그것은 그가 힐퍼딩을 비판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 자신이 역사적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오해한 결과다. 왜냐하면 새 표지의 내용은 열강들 사이의 대등한 수준의 경쟁관계를 강조함으로써 단일 패권에 의해 지배되는 제국주의 체제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원천 차단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현대 제국주의가 미국의 단일 패권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임은 부정할 수 없다. 스위지의 서술이 1942년이므로 미국의 단일 패권이 역사적으로 확립되기 전이라고는 해도, 적어도 그 시점에는 스위지 정도의 경제학자라면 미래 미국의 경제적 역할에 대해 충분히 내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4. 표지 3의 검토

 

이번에는 레닌의 제국주의 5표지 가운데 세 번째인 표지 3, 즉 자본수출 표지에 대해 검토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독점자본은 가격을 설정하고 공급을 제한함으로써 초과이윤을 누린다. 여기서는 공급 제한과 맞물린 만성적인 유휴설비의 존재로 인해 독점자본이 초과이윤을 자신의 설비를 확장하는 데에 쓰려는 유인이 크지 않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레닌은 “농업의 후진성과 대중의 빈곤”에 비하면 “자본주의가 과잉성숙”되어 “유리한 투자영역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도 했다(레닌, 1988: 94).*

* 레닌이 자본주의의 ‘과잉성숙’을 언급한 맥락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농업이 후진적이라고 해서 혹은 대중이 빈곤하다고 해서 이윤율이 저하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브루어, 1984: 133). 대중의 빈곤이 문제라면 결과적으로는 유효수요 부족으로 국내시장이 제한된 사정이 자본수출의 원인이 되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레닌의 제국주의 해석이 홉슨의 과소소비론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드러난다.

결론은 독점자본한테는 새로운 출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투자처는 둘 중 하나다. 하나는 국내에서 독점자본이 직접적으로 지배하지 않고 있는 비독점 부문이다. 전통산업처럼 노동생산성이 낮아 독점자본이 흡수하지 않고 남겨진 영역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그런 영역이 당장 새로운 투자처가 되기는 어렵다. 국내 비독점 부문 중에는 국영 부문도 있다. 제도적 제한 때문에 독점자본이 지배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그런 영역이 존재한다면 독점자본은 끊임없이 민영화를 요구한다.* 남아 있는 또 하나의 출구는 해외 시장이다. 독점자본 입장에서 국내 비독점 부문과 해외 시장은 대체 관계에 있다. 기대수익률에 대한 판단에 기초해 투자 비중을 조정한다. 다만 위험을 고려해 둘 모두에 분산 투자를 시도할 것이다.

* 이와 관련해서는 데이비드 하비에 대한 보론의 논의를 참고할 수도 있다.

독점자본이 국내 비독점 부문 말고 두 번째 투자처인 해외 시장으로 향할 때 그 해외 투자가 바로 자본수출이다. 자본수출의 기본 형태는 해외에 직접 설비를 두고 기업 활동을 수행하는 직접투자(FDI, foreign direct investment)라고 하겠다. 국가 간에는 관세를 비롯한 무역 장벽이 존재하며 그로 인해 국내 생산물의 해외 수출이 제한될 수 있다. 그런 경우 직접투자는 독점자본에게 유리한 선택이 된다. 당나라가 과거 주변국들이 바치는 조공을 누렸듯이 현대의 독점자본은 그렇게 직접투자한 해외 자회사로부터 이윤을 송금 받고 투자수익을 올린다.

다만 무역 장벽이 제거되고 자유무역이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되면 독점자본 입장에서는 금융시장 상황에 따라 자회사 운영에 따른 영업위험을 추가로 감수해야 하는 직접투자보다 주식, 채권 등 금융상품을 대상으로 하는 포트폴리오 투자(FPI, foreign portfolio investment)가 더 매력적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국주의의 본질적 속성을 직접투자나 차관 공여 형태의 자본수출로만 제한해서는 안 될 일이다.

기실 고전 제국주의론은 그 점에 있어 완전히 명확하지는 않아 보인다. 직접투자나 차관 공여가 자본수출의 지배적 형태처럼 당시에 이해되었던 것은 어쩌면 고전 제국주의론이 정립되던 시기의 역사적 특수성을 보편적 특성처럼 인지한 결과일 수도 있다. 실제로 금융화가 진전되면서 주요 자본주의 나라의 해외 투자에서는 포트폴리오 투자의 비중도 직접투자 못지않다.*

*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 해석에서는 자본수출을 차관 및 채권투자와 관련된 대부자본수출과 산업자본수출(기능자본수출)로 구분했다. 그런 다음 산업자본수출을 다시 자본참여와 증권투자로 나누었다(자골로프, 1989: 87-88). 직접투자는 자본참여로, 포트폴리오 투자(와 기타 투자)는 증권투자(와 대부자본수출)에 해당한다고 볼 법하다.

다만 미국의 경우에는 직접투자로 해외에 대한 자본수출이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포트폴리오 투자로 해외로부터 자금이 유입되는 특징이 관측된다. 예를 들면 2022년의 경우 직접투자로 382억 달러가 순 유출되었고 포트폴리오 투자로 4,377억 달러가 순 유입되었다.* 포트폴리오 투자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미국 연방정부가 발행한 국채, 즉 재무성증권을 안전자산 내지는 준비자산으로 매입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해외 부문의 미국에 대한 포트폴리오 투자는 엄격하게 따지자면 해외 나라들이 미국에 자본수출을 시행한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여기서는 직접투자로 자본수출이 이루어지면서도 자본수지가 흑자인 점을 특별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 U.S. International Transactions, Bureau of Economic Analysis, U.S. Department of Commerce. (https://www.bea.gov/sites/default/files/2023-09/trans223.pdf) 

독점자본은 자본수출을 시작하면서 해외 시장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러면서 해외의 잠재적인 경쟁자로부터 국내 시장에서의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야 하는 과제에도 동시에 직면하게 됐다. 독점자본의 선택은 자신이 속한 국가와 긴밀하게 유착하는 길이었다. 또한 독점자본으로서는 자신과 유착된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편이 유리하기도 했다. 이제 독점자본의 국가는 정치적 지배 영역의 지리적 팽창을 추진함으로써 제국으로 변해갔다. 원재료의 공급처이자 생산물의 수요처가 될 식민지를 점령하고 병합함으로써 독점자본에게 독점적 초과이윤의 원천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주는 것이 제국주의 국가의 역할이 되었다.

자본수출은 우선 후진국으로 향했다. 후진국은 원료가 싸고 토지가격이 낮으며 임금이 낮아 이윤율이 높을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영국이 자본수출을 본격화한 시기는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 상품과 자본을 수출했다. 인도는 영국을 국제수지 흑자로 만들어주었다. 영국은 인도에서 벌어들인 부를 세계 다른 지역에 투자했다. 단, “자본수출은 수많은 후진국들이 이미 세계 자본주의적 교역에 편입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레닌, 1988: 94)”했다. 자본수출이 이루어지는 후진국에서는 산업발전을 위한 기반시설이 창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후진국을 대상으로 하는 자본수출에는 제한성이 있었다. 독일의 벨기에 점령처럼 영토 분할이 식민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듯 자본수출 역시 식민지로만 향했던 것은 아니다. 영국 자본의 많은 부분은 인도 외에도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에 투자되었다. 나중에는 더 많은 자본수출이 식민지 후진국이 아닌 선진국을 향했다. 왜 이윤율이 높은 후진국 대신에 이윤율이 낮은 선진국으로 자본수출이 몰리게 되었을까? 그 문제는 이후 여러 경제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잠정적인 결론은 선진적인 기술은 수준 높은 인적자원과 결합할 때 제대로 구현된다는 것이었다. 기술과 인적자원 간에 일종의 보완성(complementarity)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후진국은 인적자원의 한계로 기술 도입에 어려움이 있었다. 낮은 소득수준 탓에 구매력이 부족해 수요처로서도 제약이 작지 않았다.

* 현재 문맥에서 보완성은 수준 높은 기술이 수준 높은 인적자원과 결합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자본수출은 레닌이 제국주의 5표지 가운데 세 번째로 제시했다. 이에 따라 그것은 제국주의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하나로 이해된다. 그런데 자본수출은 실제로는 식민지가 아닌 나라로도 향하고 제국주의 나라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수행되기도 한다. 그런 자본수출을 제국주의와 식민지 간 관계에 고유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먼에 따르면 자본수출에 대한 레닌의 강조는 심지어는 “레닌이 글을 쓰던 당시 상황에도 맞지 않았다.”(하먼, 2009: 31) 이를테면 당시 미국과 러시아는 자본을 수출하는 나라가 아니라 정반대로 유럽 선진국들로부터 자본을 도입하는 나라였다.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미국과 러시아도 영토의 세계적 분할에 참여했다. 그렇다면 미국과 러시아는 레닌의 제국주의 5표지 중에서 세 번째 표지 기준으로는 제국주의가 아니고 다섯 번째 표지 기준으로는 제국주의가 맞는 셈이다.*

* 토니 클리프 역시 “1860~1914년에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이 외국에 투자한 자본의 양은 거의 끊임없이 증가한 반면, 제국주의가 성숙기에 접어든 1914년부터는 외국에 투자한 자본의 양이 결코 1914년 수준 이상으로 증가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이하로 감소”(하먼, 2009: 32)했음을 강조했다. 소련을 미국과 같은 또 하나의 제국주의로 평가하는 하먼이나 클리프의 관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레닌의 5표지와 관련된 평가에는 참고할 점이 없지 않다.

레닌의 시대에 주요국은 자본수출에 있어 서로 상이한 경로를 밟았다. 영국은 주로 자신의 식민지를 대상으로 자본을 수출했던 것에 비해 프랑스는 유럽, 특히 러시아에 집중했다. 레닌 이후 시대에는 자본수출 양상의 시기적 변천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최근의 재산업화 흐름, 자본수출과 자본도입이 선진국 사이에 주로 나타나는 점, 뉴딜과 황금기 동안 그 중요성이 줄어들었다가 신자유주의 국면에 들어 다시 중요성이 커진 점 등은 주의 깊게 검토되어야 한다.

전후 1950년대까지 기간만 보더라도 미국의 자본수출은 군비 지출에 비하면 미미한 정도에 그쳤다. 1930년대 대공황시기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자본수출의 중요성은 엄청나게 감소했다(하먼, 2009: 59).” 국제무역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더욱이 식민지를 경험한 후진국에 대한 자본수출은 더욱더 줄어들었다. 자본수출은 점점 더 많은 부분이 선진국 간의 관계로 국한되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레닌이 글을 쓰던 당시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과 이후 냉전 기간에 걸쳐서도 레닌의 5표지 가운데 자본수출 표지가 현대 제국주의론의 한 부분으로 적합한지를 둘러싸고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나라 자본가들이 누리는 투자 이익의 일정 부분은 자본수출의 결과로 실현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본수출은 제국주의 나라가 식민지를 수탈하는 유력한 방법이다. 해외 투자 수익을 누리려면 자본수출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규모나 중요성이 시기마다 달라졌다고 해서 자본수출이 제국주의의 기본 속성이 아닌 것처럼 간주할 일은 아니다.

크리스 하먼은 금융과두제, 자본수출 두 표지와 관련해 “금융자본과 해외투자 명제는 맞지 않았다(하먼, 2009: 57)”고 단언했다. 좌파들 다수가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도 덧붙였다. 제국주의의 본질적 규정은 어디까지나 산업의 독점자본이 국가와 유착해 세계시장을 재분할하는 데에 있는데, 레닌의 금융과두제 표지나 자본수출 표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등장했던 제국주의의 역사적 특성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을 돌아보면 금융과두제 표지나 자본수출 표지는 역사적 현실의 끊임없는 변화를 정확히 예견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제국주의 체제의 항구적 진실을 포착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으며 따라서 그와 같은 하먼의 비판에는 과도한 감이 있다.

1960년대부터 시작해 20세기 말 본격적인 세계화 국면에 접어든 이후로는 국경을 넘나드는 자금 흐름이 다시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달러 자금이 유럽 자산의 매입에 나서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자본수출이 늘었다. 해외 직접투자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세계 국내총생산의 9%였다가 1950년에는 4%로 줄었고 2000년에는 16%까지 다시 커졌다. 다만 되살아난 자본수출의 압도적인 부분은 이번에도 저발전국가가 아닌 다른 선진국으로 향했다. 미국의 해외 직접투자는 약 절반이 유럽을 대상으로 했다.

 

5.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은 고전 제국주의론의 타당성을 시험대에 올린 사건이었다.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해석에 따르면 1930년대의 축적위기를 겪으면서 자본주의 열강들이 다시금 세계 시장의 재분할에 나선 것은 고전 제국주의론의 타당성을 확인시켜주는 역사적 필연이었다. 달라진 점은 무역 블록으로 세계가 분할되면서 상품 무역과 자본수출이 눈에 띄게 감소한 현상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놓고 제국주의가 보호무역에 더 친화적이라고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제국주의는 국내 독점자본이 외국 독점자본과 직접적으로 경쟁하는 것을 제한하는 일환으로 보호무역 조치를 시행하기도 했지만, 종전 후에는 자유무역과도 대체로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무역은 제국주의 나라가 단골 메뉴처럼 활용하는 노골적인 수탈 수단이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은 파시스트 국가가 경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중공업 중심으로 자본축적을 주도했다. 경제의 군사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개별 독점자본은 국가의 요구에 복종했다. 두 나라는 유럽과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을 병합해 원료 공급처를 확보하고 그들의 산업 기반을 자신들의 군국주의적 목적에 종속시키는 팽창주의의 길을 선택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 내에서 제국을 건설한 독일에 맞서 처음에는 세력 균형을 통한 공존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망상임이 곧 드러났다. 독일과 일본은 미국과 영국이 이미 제국으로서 세계 각지에 가지고 있던 부를 빼앗기 위해, 그리고 미국과 영국은 자신들의 부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는 심지어는 같은 연합군 진영 내에서도 대립을 피할 수 없었다. 전쟁이 한창인 중에도 영국과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두고 경합을 벌였다. 결과는 영국이 미국에 무기 대금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해외 투자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위협 하에 영국은 미국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독점자본의 이해관계는 곧 독점자본과 유착된 국가의 이해관계였다. 이에 각국 독점자본 사이의 경쟁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적대로 발전했다. 경쟁하는 자본가들의 집단이 국가를 이용해 세계를 영토적으로 분할하는 과정에서는 국가의 전쟁 수행 능력이 중요해진다. 그것이 바로 제국주의 국가가 경제의 군사화로 나아갔던 배경이다. 경제의 군사화는 방위산업과 철강, 조선 등 연관 산업의 경제적 중요성을 극적으로 키웠다. 해당 업종에서 독점자본의 지배도 함께 강화되었다. 규모가 커진 군수산업 독점자본은 국가와 유착하며 공격적인 팽창 정책을 추구했다.

특히 제국주의 체제가 경쟁하는 열강들로 구성되었던 시기에는 각 열강마다 적극적인 군사적 행보가 필수적이었다. 한 지역을 직접 지배하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 패권을 행사해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양상이 달라졌다. 더 이상 경쟁하는 열강들의 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군사적 수단을 사용해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것이 오직 미국 한 나라한테만 허용되었다.

미국은 종전 후 자신의 손에 들어온 지구 절반을 지키기 위해 군비 지출을 늘렸다. 전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두 세계(two world)로 확연히 분리되었다. 미국 제국주의는 두 세계 중에 한 쪽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유일한 패권적 지배자가 되었다. 미국은 그 세계에서 한편으로는 자유무역의 질서를 수립하고자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비 지출과 원조 제공으로 소련을 봉쇄하고자 했다.

체제 경쟁은 미국과 소련 양국에게 있어서는 단기적인 경제적 득실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만큼 군비 지출 규모는 막대했다.* 특히 미국은 40년 넘게 지속된 냉전 기간에 소련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지구 곳곳에서 전쟁을 주도했다. 내전 개입의 역사적 시발점은 한국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현대 제국주의에서도 경제의 군사화는 지속되었다. 군비 지출은 필수 조건이 되었다. 군수독점자본과 국가기구 및 군부가 유착된 ‘군산복합체’가 그 특징적 단면이었다.

* 미국 제국주의의 군비 지출과 소련 봉쇄는 큰 비용을 치른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동기가 지배했을 법하다. 그러나 경제적 이해관계는 고려하는 시간의 길이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단기적인 득실만 고려했다면 당시 미국 제국주의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군사적 패권을 유지 강화하는 것이 당장은 손해인 듯 보여도 장기적으로 경제적 이해관계의 실현에 유리하다고 인식했을 것이다. 군사적 패권을 경제적 득실과 대립하는 것처럼 볼 일은 아니다.

현대 제국주의에는 고전 제국주의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설명이 힘든 특징들이 있다. 전후 수십 년간 자본주의 열강은 직접적 식민지배로부터 후퇴했다. 과거의 식민 정책은 큰 변화를 겪었다. 서방세계에서 제국주의 열강 간 갈등은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의 뜻을 거슬렀던 1956년 수에즈 전쟁이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열강 간 충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구식민주의의 역사적 퇴장은 미국 주도의 일극 체제 성립 및 사회주의와 비동맹 중립 세력의 대두를 주요 배경으로 했다. 식민지에 대한 직접 지배에 수반되는 비용의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식민주의의 등장을 제국주의 체제의 해소로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직접 지배 방식은 아니지만 여전히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신식민지로 부를 만한 체제를 조성해 막대한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 “새로운 지배의 방법 및 형태의 총체, 경제영역으로 중점을 옮긴 억압과 착취는 이른바 신식민지주의의 기초를 형성한다. [중략] 신식민지주의는 제국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구식민지에서 착취의 규모와 강도의 증대를 가능하게 했다. 신식민지주의의 정치경제학적 본질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발전도상국의 경제적 종속성과 낙후성을 독점적으로 수탈하는 것에 있다. 신식민지주의는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 대한 제국주의 열강의 적응형태이다(자골로프, 1989: 107-108).”

그러나 고전 제국주의론이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독점자본이 자신의 활로를 식민지 분할에서 찾아 세계대전까지 불사했던 시대가 지난 다음 서유럽의 과거 제국주의 열강들은 식민지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들은 식민지 없이 자본주의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영광의 30년 동안 그 나라들은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의 성장과 가장 평등한 분배를 동시에 달성했다.

다만 식민지 상실 여부를 떠나 황금기 자본주의의 성공은 그것 자체의 내재적 요인도 따지면서 평가하는 편이 옳다. 여기서 내재적 요인이란 대체로 케인스주의 정부와 노동조합에 의해 독점자본을 견제할 수 있는 대항력이 형성되고 복지국가가 제도적으로 안착되면서 유효수요 부족이 완화된 사정을 일컫는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본국에서 생산된 잉여를 흡수해 과소소비에 따른 침체를 막을 식민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과거 홉슨의 정책 제안이 현실화됨으로써 제국주의 체제가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다는 진단이었다.

이에 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입장은 전후 황금기의 원인을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의 성공에서 찾는 것은 일면적 평가라는 비판에서부터 출발했다. 서방의 사민주의나 복지국가란 것도 결국 신식민지 수탈과 그것을 가능케 했던 미국의 군사적 팽창주의에 힘입은 것이라는 시각이었다.

전후 성립된 현대 제국주의 체제의 경제적 실체는 어디까지나 국가독점자본주의*였다. 그것은 미국을 위시한 각국 내부적으로 국영 부문 확장과 정부의 경제개입을 통해 축적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다시 미국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본령은 군사적 팽창주의를 주도하는 군산복합체에 있었다.

*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인 것은 아니다. 다만 레닌 시대의 제국주의가 당시 초기적인 독점자본주의를 물적 기반으로 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 후 현대 제국주의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물적 기반으로 하며 그 점에서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군산복합체는 군수독점자본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면서 국가기구를 종속시키는 특수한 독점자본 지배체제라고 할 수 있다. 군산복합체의 역할이 커지면서 오늘 자본주의 경제가 고도로 팽창된 군수경제로 전환하고 있다는 진단도 제기된다. 한편 국내경제와 관련해 군수산업은 국내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모순을 제어하면서 유효수요 제약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축적의 위기를 조절하기 위한 하나의 해법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게 주요국에서 독점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하면서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종속적인 제국주의 연합이 구성되었다. 식민 정책은 과거와는 달리 개별 국가에 의한 영토 분할 대신에 제국주의 연합 전체가 지배하는 집단적 신식민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황금기에 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해석은 그와 같이 변화된 현실의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제국주의의 직접 지배에서 벗어난 과거 식민지 나라들은 이후 경제발전의 양상이 서로 크게 달랐다. 극히 일부 나라에서는 제국주의 선진국들이 구성해놓은 글로벌 공급망 내에서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이동에 성공함으로써 본격적인 양적 성장의 길로 접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더 많은 나라들에서는 저발전이 대세였다.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나아진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제국주의 나라에 의해 (신)식민지를 상대로 수행된 자본수출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자본수출 덕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세계 구석구석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 자본수출은 전 세계적 범위에서 자본축적을 진전시켰다. 이와 관련해 레닌은 “자본수출은 그것을 수입하는 나라의 자본주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그 발전을 크게 가속화”시키는 반면 “자본수출국의 발전을 어느 정도 정체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진술했다(레닌, 1988: 96). 자본수출은 경제적으로 제국주의에 불리하고 (신)식민지에 유리하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고전 제국주의론의 주장은 실망스러운 것이다. (신)식민지 후진국들이 역사적으로 겪었던 기형적 경제발전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때문이다.*

* 이후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해석에서는 제국주의 지배가 식민지 경제의 저발전을 가져왔다는 인식이 명확해졌다. “제국주의에 대한 경제적 종속은, 과거 식민지 경험이 있는 나라들이 오늘날 겪는 경제적 낙후상태를 야기했다. 장기간 계속된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이 그들의 본질과 구조를 기초지었다(자골로프, 1989: 108).”

 

Ⅲ. 종속 이론의 평가

1. 종속 이론의 문제의식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정체와 후퇴를 경험하면서 경제종속에 대한 고전 제국주의론과는 분명 다른 설명이 필요해졌다. 바로 그 공백을 채운 것은 네오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폴 바란의 『성장의 정치경제학』(바란, 1984)과 그 영향 하에 라틴아메리카 연구자들이 발전시킨 종속 이론이었다. 레닌의 고전 제국주의론도 종속 이론의 틀 내에서 재해석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중심부 제국주의 나라가 아니라 주변부의 종속된 식민지 나라의 시선에서 문제가 다루어졌다.*

* 종속 개념이 분석적 목적에 유용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먼저 종속되지 않은 중심부 경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주변부 경제만의 특성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단 여기서는 그와 같은 개별적 특성들의 존재 자체가 문제는 아니며 그보다는 그런 개별 특성들이 모여 하나의 구별되는 총체적 상태로서 국민경제의 종속 상태가 논의될 수 있는지가 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와 같은 종속 상태의 특성들이 종속된 주변부의 경제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한다. 

(신)식민지 나라의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이 저발전으로 귀결되고 만다는 인식은 바란 이후 종속 문제에 대한 대표적인 시각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은 고전 제국주의론과는 엄연히 다른 접근법이었다. 저발전국가들은 자본주의 발전 과정이 선진국들의 과거 역사와는 크게 달라 저발전국가의 경제발전을 그것 자체로서 연구할 가치가 있음을 분명히 한 점만으로도 바란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기여는 작지 않았다.

종속 이론의 기본 입장은 주변부 나라에서는 자립적인 완전한 산업화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요약되었다. 따지고 보면 (신)식민지 후진국을 대상으로 한 자본수출이 해당 (신)식민지 후진국의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증거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투자는 철도와 같은 기반시설이나 자원 개발에 집중되어 제국주의 본국의 경제발전이라는 원래 목적에 보다 충실했다. 본국의 이해관계를 해칠 수 있거나 조금이라도 경쟁할만한 요소가 있다면 싹부터 잘려나갔을 것이었다. 오히려 자본수출은 식민지 경제를 왜곡되고 편중된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는 선진국으로 이윤 배당 형식의 잉여 유출도 함께 이루어졌다.

문제를 정치적으로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신)식민지의 후진적 경제구조를 개선시킬 의향이 없는 지주계급 등 국내 기득권 세력과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긴밀한 유착이었다. 바란은 외국 자본에 빌붙어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국내 자본을 ‘매판자본’이라고 불렀다. 외국 독점자본과 그 배후에 있는 제국주의 국가야말로 저발전국가의 발전을 질식시키는 요인이라는 생각이었다.

종속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경제적 자립의 조건이 아주 명확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개 ① 생산이 주로 국내 시장을 지향해야 하고, ② 투자 재원이 주로 해외에서 조달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③ 국내 산업 구조가 다양화되어 있어야 하고, ④ 기술도 자립적이어야 한다는 네 가지로 추려졌다. 그러나 이 경제적 자립의 조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었다. 매판자본이 아닌 자립적인 민족자본의 형성이 관건이라면, 왜 해외 도입 기술이나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통해서는 자립적 민족자본이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인지 해명이 안 된다는 지적이 대표적이었다. 다만 민족자본의 존재 여부보다는 그것의 국내 경제에서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를 따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논쟁 과정에서 더 명확히 인정되었어야 했다.*

*  애초부터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사회 형태로의 발전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민족자본의 형성이 경제적 자립을 위한 필수조건도 아니었을 터이다.

제국주의 지배 하에서 (신)식민지 경제가 균형 잡힌 발전을 경험한 사례는 정말 찾기 어려웠다. 산업화는 대개 본국 산업구조에 종속된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그나마도 속도가 더뎠다. 예외도 있었지만 토착 산업의 성장은 대체로 쉽지 않았다. 본국과 (신)식민지 저발전국가 사이에 무역은 보통 저발전국가가 저렴한 1차 산품에 특화하고 본국은 공산품에 특화하는 패턴으로 이루어졌는데, 본국으로부터 값싼 수입품이 수입되면서 자체적인 공업 기반은 파괴되었고 본국과의 사이에 새롭게 창출된 산업연관에 근거하는 일부 업종을 중심으로 불균형적인 발전이 파행적으로 이루어졌다. (신)식민지 경제는 자신들이 경험하는 경제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역량도 부족했지만 종속적인 경제구조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도 없었다.

종속에 대한 그와 같은 인식은, 과거에는 자본주의 발전이 중심부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조건을 창출했지만 이제는 자본주의 발전의 결여가 주변부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조건을 창출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전일적 지배 속에 제국주의 중심부의 갈등 요인이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효과적으로 통제되고 있어 더는 중심부 국가에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적 저항이 조직되기 어려워진 현실도 그와 같은 인식에 어느 정도 작용했을 법했다.

(신)식민지 사회에서 제국주의와 그것에 유착된 기득권 세력에 맞서는 정치적 대항력은 ‘민족국가’와 ‘민족해방’의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민족국가는 원래 자본가계급이 봉건적 질서에 도전하면서 영토 내적으로 경제를 통합하고 자유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내세운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였는데 그 성격에 질적인 변화가 초래된 결과였다. (신)식민지 경제의 정체와 저발전을 배경으로 지주계급과 소수 부역자들을 제외하면 (신)식민지 민중의 거의 모든 계급 계층이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즉 민족해방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집결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자리를 잡아갔다. 민족주의적 반대 세력은 그와 같은 대중적 기반을 토대로 형성될 수 있었다.* 제국주의 체제에서 민족은 억압받는 (신)식민지 민중에게 해방을 상징하는 자기 정체성이 되었다. 민족주의는 자결권에 대한 자기의식이었다. 그것은 다시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는 세계화 반대의 깃발도 되었다.

*  ‘종속 = 저발전’의 등식이 현실에서 깨진 오늘의 관점에서 그간에 민족주의적 반대를 조직해온 물질적 기초가 그만큼 약화되었다고 볼 여지는 없지 않다. 기존에 종속 = 저발전 등식이 반제국주의 세력과 경제성장을 지향하는 세력 간에 일정한 타협을 가능케 했던 반면, 그 등식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되면서 그 두 세력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토대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제국주의 운동을 새로운 토대 위에 재조직하는 과제를 제기하는 것일 뿐, 반제국주의 운동 자체의 물질적 기초가 해소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 반제국주의 운동은 반자본주의 지향을 보다 명확히 하면서 그 동력을 노동자계급 중심성과 내부 통일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재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2. 폴 바란과 성장의 정치경제학

 

바란은 경제학적으로는 스위지처럼 과소소비론의 시각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이 노동자계급의 구매력 제한에 따른 유효수요 부족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지출로 이어지지 못한 저축을 ‘경제잉여’로 정의한 다음 경제발전은 경제잉여의 규모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독점 이전의 단계에 비해 투자 부족이 특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유효수요 부족이 만성적인 현상이 되면서 정체 경향이 뚜렷해지기 때문이었다.

바란에 따르면 선진국에서 독점자본은 그 대안으로 생산적 투자를 벗어난 다양한 형태의 낭비를 통해 경제잉여를 ‘흡수’(해소)하기에 이르렀다. 그 예로는 광고를 비롯한 비생산적 경제활동을 꼽을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독점자본이 자신들의 해외 활동에 대해 국가적 자원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낭비였다. 단연 군비 지출이 그 목록의 맨 앞에 있었다. 바란은 임금 인상이나 복지 강화로 노동자계급의 구매력을 증대시키면 될 것이라는 케인스주의적 처방에 대해서는 레닌처럼 그런 처방 자체가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일축했다.

바란에게 있어 잉여의 재분배는 세계적 차원에서 불평등을 낳는 구조적 원인이었다. 세계경제는 잉여가 저발전국가로부터 선진국으로 유출됨에 따라 부자 나라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나라는 더 가난해지는 악순환을 겪는다. 한 지역의 발전이 다른 지역의 희생의 결과라는 인식이었다. 구체적으로 바란은 후진국에서는 투자에 이용할 수 있는 경제잉여의 규모 자체가 작고 더욱이 선진국으로 유출되어 남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제대로 된 경제발전을 떠받칠만한 수준이 못 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후진국 스스로도 투자 유인 결핍으로 인해 저성장의 덫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았다.

저발전 국가의 저임금도 투자를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꼽혔다. 정부가 기반시설에 투자하더라도 그 결실이 주로 수출 기업이나 외국 자본에 쏠림에 따라 막상 국내 경제발전에는 큰 도움이 못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여러 복합적인 어려움이 후진국의 저발전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바란의 궁극적인 의도는 자본주의가 일정 단계까지는 성장을 추진하는 동력이 될 수 있지만 당시 이미 그런 단계는 넘어섰으며 따라서 선진국의 독점자본이 선진국과 저발전국가 모두에게 정체와 후퇴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 대신에 그는 사회주의가 경제성장의 과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농업의 잉여가 먼저 중공업 발전에 이용되고 그 다음에는 소비재 공업 발전에 이용되는 발전 모델을 지지했다.

 

3. 라틴아메리카 구조주의 전통에서의 종속 논의

 

역사적으로 종속이론은 유엔 중남미·카리브경제위원회(CEPAL) 사무총장에 임명되어 제3세계 행동주의를 이끌었던 아르헨티나의 경제학자 라울 프레비시의 영향 하에 라틴아메리카 구조주의 학파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 학파의 기본적인 인식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주변부 나라들은 구조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중심부의 선진국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라 주류경제학이 적용될 수 없으며 제국주의 때문에 불균등발전이 지속성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프레비시 가설’은 주변부 나라는 중심부 나라와의 교역에 있어 수출품이 수입품보다 상대가격이 저렴해져 교역조건의 악화를 겪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중심부 나라와 주변부 나라의 시장조직 차이가 그와 같은 교역조건 변화를 초래하는 측면이 크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중심부 나라의 제조업 생산물은 독과점 기업이 공급하는 반면 주변부 나라의 1차 산물은 영세 사업자들이 주로 공급하니까 주변부 입장에서는 국제시장에서의 상대가격이 불리하게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었다.

프레비시는 중심부 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의 조직된 힘이 강하므로 경제가 호황이 되면 임금 인상으로 호황의 결실을 누리고 경제가 불황이 되면 임금 인하를 저지할 수 있지만, 주변부 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해 세계체제 차원에서 불황에 따른 소득 손실 위험을 주변부 나라 노동자들이 교역조건 악화라는 형태로 부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국제무역이야말로 불균등발전을 조장하는 유력한 통로라는 것이었다.

정말로 교역조건이 주변부 나라들에게 불리하게 변해 왔는지는 실증 연구로 따질 만한 대상이다. 일례로 Caraballo and Jiang (2016)에서는 1995년-2008년 기간 국제투입산출모형 분석을 통해 수출품 가치에 있어 자국 내에서 생산되는 부가가치 몫이 줄어드는 현상에 대해 분석하면서 그 원인을 글로벌 가치사슬을 통한 해외로의 가치 유출에서 찾았다. 이와 관련해 UNCTAD (2016)는 수출품목 구성의 차이가 아니라 주변부 나라의 경제제도와 구조에서 교역조건 악화의 원인을 찾았다. 현재의 세계 무역 체제에서 주변부 경제는 제조업도 마치 1차 산업처럼 구조적 열위의 또 다른 원천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UNCTAD, 2016: 130).*

* 최근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종속 문제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재개되면서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적인 사실은, 종속에 대한 연구를 단일한 통일적 이론 체계에 가둘 필요가 없다는 데에 연구자들 사이에 합의가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Kvangraven, 2021; Madriana and Palestini, 2021; Alami et al., 2023). 그보다는 종속이라는 연구 주제를 둘러싼 다양한 이론적 접근법들이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연구 프로그램이나 프레임워크(사고 틀)로 발전시키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종속 연구의 틀이 갖추어야 할 원칙은 분명히 존재한다. Kvangraven (2023)에 따르면 그 원칙은 네 가지로 집약된다. 첫 번째 원칙은 개별 민족사보다는 세계사적 접근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계 자본주의의 양극화 추세에 대한 이론화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각각 세계적인 차원에서 생산이 이루어지는 구조에, 그리고 주변부 경제가 직면하게 되는 특수한 제약조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요구는 새로운 종속 연구가 이들 네 가지 요소의 결합을 고유한 특징으로 해야 한다는 일종의 방향 제시인 셈이다. 

 

4. ‘종속 = 저발전’ 등식의 검토

 

종속 이론가들은 선진국의 독점자본은 저발전국가의 산업발전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며 선진국 정부는 저발전국가의 집권 정부가 외국 자본에 끌려 다니며 자율적인 정책을 추구하지 못하게끔 그리고 내재적 발전의 꿈을 꾸지 못하게끔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보았다.* 그런 인식이 옳다면 중심부와의 고리를 끊어낼 때 비로소 주변부 나라의 경제적 자립이 가능하다고 볼 일이었다. 비교우위에 따른 특화로 미화되어온 중심부와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면 중심부의 자본수출과 불평등교환에 따라 잉여가 지속적으로 외부로 유출되므로 저발전의 현실을 타개할 수 없다는 전망이었다.

* 물론 그와 같은 인식의 타당성이 입증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 혹시 입증 불가능한 것은 아닌지에 대해 누군가는 정당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전망은 간단치 않은 여러 문제에 부딪혔다. 실제로 이후 전개된 현실은 종속된 주변부 혹은 반주변부 나라 중에서도 극히 일부 사례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경제의 충분한 양적 성장이 이루어진 경우가 출현했기 때문이었다.

종속 이론은 독점자본주의 정체 경향을 이론화한 점에서나, 저발전국에서도 유효수요 부족이 나타난다는 점을 분명히 한 점에서 긍정적인 기여가 인정된다. 그러나 문제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종속 = 저발전’ 등식을 고수한 것이 문제였다. 제국주의와 종속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그 등식의 논리를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했다. 이 대목에서 전통적인 오해를 확실히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종속은 기존에 저발전의 원인인 것처럼 잘못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그런 시각은 종속의 문제가 말 그대로 저개발국, 후진국에서만 나타나는 것처럼, 그리고 경제가 성장하면 종속이 약화되고 궁극에는 종속적 구조가 저절로 해체될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종속은 저개발국이나 후진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양적 기준으로는 성장했지만 경제적, 정치군사적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라가 있다. 반대로 저개발국이나 후진국도 경제성장의 양적 수준을 떠나 자주적 발전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주변부 경제에서 자주적 발전의 길이 아예 막혀 있다고 단정부터 할 일은 아니다. 경제적 자립이 필연적으로 양적 성장을 포기하는 길인 것도 아니다. 종속된 경제만이 성장한다고 볼 일도 물론 아니다.

그런데 종속 이론에 대한 비판들도 대개는 ‘종속 = 저발전’ 등식을 고수하는 잘못된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양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한 주변부 나라가 출현했다면 그런 경제는 종속이 해소된 것이고 따라서 식민지가 더 이상 아니라는 식의 비판이 바로 그렇다. 종속 이론을 비판한다면서 ‘종속 = 저발전’ 등식을 당연한 듯 전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우리는 주변부 나라들의 산업화 진전을 종속 해소 과정으로 봐도 좋은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종속이란 무엇인가.

진보적인 관점의 경제학에서 종속 문제를 다룬다고 할 때 그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몇 가지로 간추려질 수 있다. 그것은 먼저 현재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는 중심부(center)와 주변부(periphery)가 구분되며 전자는 체제 질서로부터 이득을 누리고 후자는 그에 수반되는 비용을 부담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종속에 대한 잘 알려진 (그러나 썩 만족스럽지 않은) 하나의 학술적 정의는 “어떤 나라의 경제가 다른 나라 경제의 발전과 확장에 따라 조건 지어지는(conditioned) 상황”이라는 것이다(Dos Santos, 1970). 그리고 종속에 대한 진보적 관점은 지구적 범위에서의 경제발전을 균등화나 수렴의 과정이 아니라 양극화 경향이 관철되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일차적으로 종속은 제국주의에 지배당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경제적 종속은 제국주의 지배로 인해 경제구조가 편파적이고 자기완결성이 결여된 특성을 갖게 되는 관계로 파악된다. 독자적인 재생산이 불가능한 편중된 경제구조가 종속의 징표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중개 무역 중심의 나라는 어떤가. 그런 나라는 경제적으로 종속된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나라는 제국주의에 지배당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 그 나라의 경제는 다른 나라 경제의 발전과 확장에 따라 조건 지어진다. 그 물음에 대해서는 중개 무역 중심의 나라는 경제적으로 특정 제국주의 나라가 아니라 세계경제구조에 종속된 나라라고 답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또한 그 나라는 제국주의에 지배당하는 나라는 아니라고 답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제적 종속이란 제국주의-식민지 관계를 필수적인 전제로 삼는 관계는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Dos Santos (1970)의 종속 정의가 불만족스러운 이유는 어떤 자본주의 나라도 경제발전 과정에서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유럽 선진국들의 경제 상황은 미국의 경제 상황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마련이고 유럽 내에서도 대부분의 나라들은 독일과 영국의 경제 상황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는 미국 경제도 유럽의 경제 상황에 의존한다. 어떤 나라도 그런 의존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전 세계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지 않은 나라는 없는 셈이다. 우리에게 그런 무익한 종속 개념이 필요하긴 한가.

한편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와 덜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 사이에 가치 이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분석하는 것으로 오늘날 제국주의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충분하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불평등 교환(unequal exchange)에 대한 국제가치론 자체가 바로 제국주의론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제국주의론을 그렇게 국제가치론으로 왜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레닌의 제국주의 5표지는 종합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표지 5는 왜 존재하는가. 제국주의와 식민지 간 관계가 결국 정치군사적 지배-종속 관계로 현상한다는 것이 표지 5의 결론적 의의가 아니겠는가. 왜 고전 제국주의론의 저자들은 20세기 초 독점자본주의를 제국주의라고 불렀는가. 그것이 가진 식민 정책의 특성 때문 아니었는가. 그런데 국제가치론에 따라 경제적 가치의 이전 관계에만 주목하게 되면 체제 표지의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는 근본부터 부인되고 만다. 더욱이 국제가치론 분석에서는 어떤 나라든 일부 나라들에 대해서는 종속국이면서 동시에 다른 일부 나라들에 대해서는 제국주의 나라가 되고 만다. 그런 접근법으로는 반제국주의라는 실천 과제가 유명무실하게 된다. 제국주의론을 국제가치론으로 해소시키는 이론적 해석의 실천적 효과는 반제 운동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 되고 만다.

어떤 연구자는 ‘경제적 제국주의’를 체계적인 가치 이전으로 잉여가 중심부로 유출되는 체제로 정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국주의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와의 보통의 교역 관계에서도 가치 이전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프랑스의 저명한 종속 이론가 아르기리 엠마누엘에 따르면 두 나라 사이에 상대임금 격차만 존재해도 잉여 유출이 일어난다.* 만약 제국주의와 (신)식민지 사이에서 잉여 유출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경제적 자립을 저해하는 수탈의 사례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신)식민지 관계가 아닌 두 나라 사이에서 가치 이전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두고 경제적 수탈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단지 생산의 국제적 분업 체계에서 두 나라가 차지하는 위치의 차이를, 그리하여 둘 중 어느 나라가 상대적으로 더 큰 부가가치를 누리고 있는지를 반영할 뿐이다.

* 엠마누엘의 불평등 교환을 둘러싼 논의는 최근 Ricci (2018, 2021) 등의 국제가치론 분석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상 논의로부터 제국주의는 (신)식민지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될 때에만 그 의미가 온전히 회복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가치 이전은 제국(들)과 제국(들)의 지배를 받는 나라(들) 사이에서 일어날 때 비로소 문제가 된다. 제국주의는 국내 독점자본의 이해관계를 추종하면서 국가 권력이 해외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순수하게 경제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비록 경제적 동기가 출발점에 있다 해도 제국주의 체제에서는 정치적, 군사적 측면도 매우 중요하다. 제국주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제국주의 나라(들)와(과) (신)식민지 나라(들)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만 제대로 정의될 수 있다. 현대 제국주의의 집단적 신식민주의 체제에서라면 미국 제국주의 및 그 종속적 연합국들을 한쪽으로 하고 신식민지 나라들을 다른 한쪽으로 하는, 그 둘 사이에서만 제국주의 개념이 의미를 갖는 것이다.*

* 주목할 점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계 구조를 지탱시키는 경제적 힘은 정치적 군사적 힘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으며 따라서 경제적 종속 관계는 정치적 군사적 종속 관계에 의해 일정 부분 고착화되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주변부 나라에 있어서는 국민경제 내에서 토착적인 내재적 동력이 작동하기에 앞서 역사적으로 먼저 정치적 군사적 종속 관계가 국내 지배 계급의 특성을 규정해온 점, 그리고 그 지배 계급이 국내적으로 경제적 영향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해당 사회의 경제적 사회구성체 성격이 확정되었던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다.

무역 관계에서 한 나라는 특정 국가에 대해서는 가치를 이전받지만 다른 국가에 대해서는 가치를 이전하는 관계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무역 관계 전체에 걸쳐 가치 이전의 순 합계를 계산한 다음 그것이 양(+)인지 음(-)인지 따지는 것도 그 나라의 세계경제에 있어 상대적 위치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그런 숫자를 기준으로 해당 나라가 제국주의 나라인지 아닌지를 판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뿌리부터 부정하는, 완전히 잘못된 접근법이다. 특정 나라의 (신)식민지성을 가치 순유출을 기준으로 판단할 문제도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경제적 종속을 그런 방식으로 다루어 왔지만 애초부터 그렇게 분석될 수 있는 관계는 제국주의-(신)식민지 관계와는 거리가 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독점자본의 국내적 영향력이 지배적이고 자본 순수출국이면서 자본 순수출에 따른 이득이 양(+)인 나라여도 제국주의 나라가 아닐 수 있다.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해석을 버리고 순수하게 경제적 관계에만 주목하면 어떤 나라든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인 것처럼 보이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제국주의는 (신)식민지와의 관계에서만 정의된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제국주의이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식민지이기도 한 그런 개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제국주의는 그런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렇게는 제국주의 나라와 아닌 나라를 구별할 수 없다. 그런 태도는 반제국주의 운동을 실천적으로 무력화시킨다.

실제로는 경제적으로 중심부나 반주변부 나라에 속해도 제국주의로 분류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례로 동아시아의 일부 공업국가 중에는 199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세계 자본주의 중심부에 가깝게 진입해온 것으로 평가되는 나라도 있다. 하지만 그 나라는 미국에 대한 완전한 군사적 종속, 미국의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 분단체제 지속에 따른 사회의식의 왜곡과 극우적 낙후성 등 전형적인 신식민지적 속성을 드러낸다. 그와 같은 신식민지적 속성은 세계경제가 위기적 상황에 처할 때마다 미국에 대한 명백한 경제적 종속이 강화되는 모습으로도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제국주의는 독점자본이 국가권력의 지원을 받아 해외 (신)식민지에 영향을 미치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 제국주의 체제에서 어떤 나라가 제국주의 나라인지 여부를 판정할 때에는 먼저 집단적 신식민주의 체제 내에서 그 나라가 차지하는 위치부터 따지는 것이 순서다. 단 그 과정에서는 고전 제국주의론의 표지 다섯 개 중에 1표지와 5표지를 중심에 놓되, 특정 표지에 집착하지 말고 종합적인 시각에서 제국주의적 특성을 갖추고 있는지 검토하는 편이 옳다.

*  유사한 이해방식을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23: 33-5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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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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