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시대에 변혁사상의 버팀목이자 나침판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읽고
조남수 l 노동전선
1. 들어가는 말
이번 미국-이란의 협상 소식을 접하면서 저 자신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미국이 설마 이란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발발하겠는가라는 일말의 기대를 가졌으리라고 믿는다. 물론 이는 많은 이들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주관적 기대 심리의 작용 때문일 것이다. 즉 최고도로 발전한 물질 문명의 풍요와 학문의 발전속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 물론 인류의 대다수가 이 물질문명의 풍요와 정신적 지적 역사적 발전의 성과를 함께 향유하지 못한다. 소위 역사의 종언이라는 시대에도 전쟁이 발발하고 계속되고 있는 것은 인류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사회 구조가 그것을 필연적으로 강제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이란 전쟁기간 언론에서 전쟁의 참상을 접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이 사회에 너무나도 많은 미국 신민(臣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언론은 미국 제국주의 언론을 베끼고 미국 제국주의 입장을 전파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물론 이런 일이 비단 이번 전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항상 있어왔다. 이 사회의 주류 언론들은 정확하게는 예전에는 일본 제국주의 지금은 미국 제국주의 신민으로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언론에서 마주치는 트럼프는 온갖 요설을 늘어놓으면서 이란을 비난하고 있다. 그 비난의 근거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 미국을 향하고 있다. 백주대낮에 일국의 지도부를 암살하지 않았나, 또 바로 얼마 전에는 베네수엘라를 침공하여 대통령을 납치하지 않았나? 온갖 불법과 비상식으로 전세계에서 뻔뻔하게 공개적으로 테러를 자행하는 나라가 미국이지 않은가? 트럼프가 이란에 퍼붓는 비난의 내용은 바로 미국 제국주의가 전세계 인민을 상대로 저지르는 끔찍한 테러 행위일 뿐이다. 이번 전쟁으로 자본주의 최후의 단계인 제국주의하에서 전쟁은 필연적이라는 만고의 진리는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이 잔혹하고도 파렴치한 제국주의에 의한 전쟁 도발에 대하여 이 사회에서 반전반제국주의 투쟁이 활화산처럼 타오르지 않는 사태에 대하여 일종의 무력감과 더불어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
필자는 지난 윤석열 퇴진 투쟁의 광장에서 최근의 역사에서 느끼지 못한 대중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다시 한번 접하였다. 전세계적인 보수화 경향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도 급격한 보수화경향을 우려했지만 남녀노소를 포함한 대중들의 힘찬 투쟁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열린 광장의 무대에서 접하게 되는 대중들의 집단적인 열기와 다르게 백가쟁명식의 구호와 내용들은 “나무만 보고 숲을 지나친다”는 인상을 지울 순 없었다. 광장에서는 이 사회 구석구석의 모순들이 분출되었고 다기다양한 억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서로 공유했다는 점은 의미 있었다. 그러나 광장에 모인 대중들이 향후 어떻게 그런 모순들을 지양하고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부족하였던 것 같았다. 심하게 말하면 향후 나아갈 방향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의 부재로 우리는 지난 박근혜 퇴진운동에서 한 발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소위 변혁을 지향하는 운동진영이 사회의 다양한 현안들과 모순을 총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중대한 과제가 산적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즉 노동, 성소수자, 동물권, 환경, 인권, 제국주의, 통일, 국가보안법 등등. 이에 필자가 속해 있는 운동진영의 논객 중 일원인 <전국노동자정치협회> 소속 동지가 이상과 같은 과제에 부응하여 시의적절하게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발간하였다. 이에 필자는 지금의 이론적 정세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를 수행한 것에 대하여 축하의 마음을 전하고, 이 책의 내용을 대중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강한 의무감으로 이 책에 대한 소개를 간략하게 하고자 한다.
2. 현실 사회주의
운동진영에 한때나마 몸담았던 많은 사람이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기존의 ML주의 변혁이론을 접고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기존의 현실 사회주의에 대하여 극도의 협오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논지는 아래에서 살펴보는 것처럼 대동소이하다. 요즈음 국내에 많이 번역되어 소개되는 대표적인 논자 중의 한 사람인 사이토 고헤이(齋藤幸平)의 현실 사회주의 소련에 대한 견해를 소개한다.
요컨대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가를 대신해 관료가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경제체제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 경제학자 오타니 데이노스케(大谷祖之介, 1934~2019) 는 소련을 ‘국가자본주의’1)라고 불렀습니다.
소련에는 많은 국영기업이 존재했고, 농업에서도 솝호스나 콜호스라 불리는 농장이 있고, 그곳들이 계획경제 아래 관리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업에서 생산한 물건을 주고받는 데에서 는 시장에서 화폐를 이용한 상품 거래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또 각 기업의 목적은 잉여가치를 최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자본을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는 자본주의 의 본질적 특징이 소련에 존재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2)
한마디로 사이토 고헤이는 소련 사회는 관료가 자본가 역할을 하면서 노동자에게서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이 책의 저자는 소련 사회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없는 사회주의 사회라고 주장하면서 현실 사회주의권 패배의 원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게다가 이들이 청산주의, 패배주의에 사로잡히게 된 계기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해체 때문인데, 이들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들이 인식하는 것과 정반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당독재의 문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해체되었다. 당이 제국주의와 싸우면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이해를 철저하게 대변하고 인민대중을 중심에 세우면서 군대와 노조, 사회 전체를 올바로 이끌어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3)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는 사회주의의 핵심적인 정체성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해서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하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 현실 사회주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서 가장 먼저 규명되어야 할 것은 과연 사회주의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맑스와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철학, 정치학 및 경제학 등에서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엥겔스의 간략한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개괄적인 상을 들여다 보자.
[•]내 생각으로는, 이른바 ‘사회주의 사회’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회 상태들처럼 지속적인 변화와 개조 과정에 놓여 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사회주의 사회와 오늘날의 상태의 중대한 차이는 물론 무엇보다도 모든 생산 수단에 대한 국민의 공동 소유를 기초로 하는 생산 조직에 있습니다. 나는 이 변혁을 내일부터 즉, 점차적으로 실시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 노동자들은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4)
엥겔스는 사회주의 사회는 이제까지 존재했던 다른 역사적인 사회구성체와 다르게 인간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건설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장구한 변화와 개조 과정을 겪게 되는 이행기 사회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의 결정적인 차이는 잉여가치를 낳은 생산수단의 소유가 사적으로 소유되는가 아니면 공동 소유로 되어있는가의 차이라고 간결하게 해명한다.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어떠한 문제들을 야기하고 그것의 극복된 형태인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른지를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규명한다.
사회에 의한 생산 수단의 점유 획득과 함께 상품 생산은 제거되며, 그럼으로써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도 제거된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는 계획적이고 의식적인 조직화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개체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중지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결정적으로 동물계를 벗어나고, 동물적 생존 조건으로부터 참으로 인간적인 생존 조건의 길로 들어선다. 인간을 에워싸고 지금까지 그들을 지배해 온 생활 조건의 전역이 이제는 자기 자신의 사회화의 주인이 되기 때문에 또 사회화의 주인이 되면서 처음으로 자연에 대한 참다운 의식적인 주인이 된 인간의 지배와 통제 아래로 들어온다. 5)
자본주의 사회는 구조적 위기인 공황, 자본 축적의 역사적 경향에 따른 양극화와 실업, 이에 따른 대중의 빈곤, 소생산자의 몰락, 자본의 무한한 이윤증식 욕구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 노예상태인 이주 노동자 등을 자랑(!)한다. 이 사회는 다수의 인민에게 그야말로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아비규환의 지옥도이다. 엥겔스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 빚어진 자본주의 사회의 이러한 질병들을 치유하고 극복한 사회가 사회주의라고 주장한다. 이 사회는 인간에 의한 생산물과 생산과정에 대한 통제를 실현함으로서 동물계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벗어난 진정한 인간의 세계라고 강조한다. 그러면 위에서 언급한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 특징이 현실 사회주의에도 존재하였는가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회주의 사회는 적어도 인간 생존의 위협이 되는 실업 문제는 해결하였고 인간이 살아가는 필요한 최소한의 생존조건은 보장하였다는 것을 역사적 사료6)는 보여준다.
저자는 현실 사회주의의 한계, 의미 그리고 그것의 몰락의 현실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언급한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회주의와 현존하는 사회주의가 제국주의의 부단한 개입과 말살 공세속에서, 저발전한 구시대의 생산력과 구래의 낡은 인식으로 출발해 한계를 가지고 부단히 오류와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의 발전은 전 인류의 발전이었고 사회주의의 진보는 전인류의 진보였다.
사회주의권의 해체는 내란과 민족갈등, 학살, 무상복지체제의 붕괴와 기업 사유화와 올리가르히(재벌)를 불러왔다. 사회주의권의 해체는 제국주의 전쟁과 민족억압, 내정간섭을 극도로 조장하고 서방 나라 노동자 민중의 임금인하와 복지체계를 무너뜨렸다. 7)
인류 최초로 전인미답의 길로 나아갔던 현실 사회주의는 국내외적인 조건상 불가피하게 한계를 가지고 부단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것은 ‘노동자 직접적인 참여와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봉건적이고도 자본주의 잔제가 광범위하게 있었던 소련에서 한 순간에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였다. 그리고 ‘노동자 직접적인 참여와 통제’는 비역사적이고 현실에서 논증이 불가한 순수한 형태의 사회주의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회주의 내부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소멸되고, 외부에서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려는 제국주의가 존재하지 않고, 공산주의 문화가 습관이 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즉 소련은 내부 소생산자들에 의한 자본주의로의 복귀, 제국주의에 의한 고립과 봉쇄, 호시탐탐 닥쳐오는 침략의 위협 앞에서 방어를 위해 강력한 국가기구와 군대가 필요했다. 흔히 회자되는 현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존재하였다고 전해지는 권력의 범죄적 남용, 관료제, 부패, 무자비한 갈등 등은 공산주의 사회로 가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시행착오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의 중대성과 크기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천문학적인 비리와 범죄의 규모와 비교해야 할 것이다. 즉 사회주의 사회에서 벌어졌던 부패, 비리, 범죄 등의 사회적 악의 규모와 양은 자본주의의 그것과 비교하면 한마디로 조족지혈이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도 아비규환과 지옥도로 점철된 자본주의의 최후의 단계인 제국주의와 비교해서 사회주의 사회가 어느 만큼 전진하였는가를 비교해야 한다. 기존의 사회주의 사회 자체를 놓고 그것이 완벽한가 아닌가는 실로 검증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다음으로 현실 사회주의를 논의할 때 학계뿐만 아니라 운동진영 전반에 회자되는 사회주의 지도자에 대한 평가이다. 주로 사회주의 지도자 개인에게만 자세, 자질, 품성 등에 의거해서 평가가 이루어진다. 즉 모든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 모두가 잔인무도한 폭군이었다고 한다. 맑스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개인적인 의식에 의존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사회적인 환경과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개인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그 자신의 생각에 따라 판단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변혁의 시대를 그 시대의 의식에 근거해서 판단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의식을 물질적 생 활의 모순에 근거해서, 즉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현존하는 충돌에 근거해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8)
예를 들어 레닌은 갓 태어난 사회주의 국가를 생존시키기 위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였고, 스탈린은 파시즘의 부상에 따른 다가올 전쟁을 앞두고 내부의 정비를 위하여 불가피한 대숙청을 단행하였고, 영미제국주의자들의 독일을 통한 소련 말살 의도를 저지하기 위해 독소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파시즘을 상대로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전인류를 파시즘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켰으며,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제국주의진영이 사회주의권을 고립·봉쇄시켜 끊임없이 고사하려는 기도에 맞서 사회주의권을 방어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미국의 진보적 사상가인 마이클 파렌티(Michael Parenti)9)는 진보진영에 만연하고 팽배한 사회주의 지도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의 근본적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득력있게 주장한다.
순수 사회주의자들은 정기적으로 좌파 자체가 겪는 모든 패배를 비난합니다. 그들의 후일담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혁명적 투쟁이 그 지도자들이 너무 오래 기다리거나 너무 빨리 행동하기 때문에, 너무 소심하거나 너무 충동적이기 때문에, 너무 고집스럽거나 너무 쉽게 동요하기 때문에 실패한다고 듣습니다. 우리는 혁명적 지도자들이 타협적이거나 모험적이고, 관료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이며, 경직되게 조직되었거나 불충분하게 조직되었고, 비민주적이거나 강력한 지도력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듣습니다. 하지만 지도자들은 항상 노동자들의 “직접 행동”에 대한 믿음을 두지 않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노동자들은 좌파 비판가 자신의 작은 그룹으로부터 이용 가능한 그런 종류의 지도력만 주어진다면 모든 역경을 견디고 극복할 것처럼 보입니다. 불행히도, 비판자들은 그들 자신의 국가에서 성공적인 혁명 운동을 생산하는 데 그들 자신의 지도력 천재성을 적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토니 페보(Tony Febbo)는 순수 사회주의자들의 지도자 탓 증후군을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레닌, 마오, 피델 카스트로, 다니엘 오르테가, 호치민, 로버트 무가베—그리고 그들을 따르고 함께 싸운 수백만의 영웅적인 사람들—같이 똑똑하고, 다르고, 헌신적이며, 영웅적인 사람들이 모두 대체로 같은 자리에 도달했다는 것은, 어떤 회의에서 누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는 회의 후 그들이 돌아간 집의 크기보다 말입니다….
이 지도자들은 진공 상태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휘몰아친 흡입력, 힘, 권력은 900년 이상 이 지구를 뒤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이론이나 저 지도자를 비난하는 것은 맑스주의자들이[해야 할] 그런 종류의 분석을 위한 단순한 대체물입니다.”(가디언, 1991년 11월 13일) 10)
즉 모든 무정부의 사조들은 사회주의 국가 자도자들이 너무 앞서가면 너무 앞서나간다고 비난,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너무 느리게 가면 너무 더디게 간다고 음해한다는 것이다. 운동진영내 일부 반공산주의 흐름의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의 보수적인 이데올로그들이 행한 비판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역사와 그것의 평가는 단순히 역사책에 기술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향후 사회주의 운동진영이 의지해야 할 하나의 나침반이다. 그러므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3. 포스트모더니즘
80년대 노동자·민중의 정치적 진출이 폭발적으로 분출하여, 이에 기반한 사회주의 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권의 패배 이후 그 찬란했던 변혁 운동이 물결처럼 왔다가 쓸려간 자리에 소위 사회주의 사상이 기반했던 근본적인 철학적 사유를 제거하고 기괴한 다양한 색조의 사상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는 ‘지배 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 아니었던 시대가 존재하였던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던 사상이 넓게는 포스트모더니즘11)이고 좁게는 신좌파12)라고 불려진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좌파는 다른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과학적 사회주의 관점에서 양자에 접근하면 양자의 차이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앞으로 이 글은 양자 거의 유사한 정치적 의미를 표현하므로 혼용하기 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을 부정하고 이성의 기반인 인간 중심성을 부정한다고 알려져 있다. 즉 이들은 근대가 인간 이성 및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인간 중심성에 갇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 이성의 부정이다. 이러한 인간 이성의 부정은 자연, 인간 등을 포함한 세계에서 인간이 가지는 지위와 역할을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에 따라 인간 중심성을 부정하면 과연 인간이 존재할 때부터 역사 발전에서 이룩한 거대한 성과물, 즉 지적 성과인 학문과 과학기술문명의 발전 소산인 문명의 이기를 다 부정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한 주요 노력 및 학문이 모조리 부정된다. 간단하게 평가하면, 이들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회의 시공간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인식과 이성의 불완전성에서 이성 그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비약한다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다.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학문, 사회, 역사, 문명의 이기 등이 존재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평가는 간략하게 이상에 한정한다. 이하에서는 주로 모순덩어리의 자본주의 사회를 보는 변혁적 관점에서 구체적인 실천 문제를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다루고자 한다.
이 책은 신좌파를 쉽게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좌파, 즉 구좌파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규명한다. 이 책의 저자는 전통적인 좌파,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인민들의 간고한 투쟁으로 그 현실적인 힘으로 형상화되었고, 지금도 미약하나마 엄연히 사회주의 국가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구좌파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서술한다.
이에 반해 신좌파는 노동자·민중이 정치혁명으로 부르주아 권력을 타도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자본주의를 폐지하여 계획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신좌파는 현존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대하여 상당히 부정적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저자는 지금 한국에서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운동진영 내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전제로 의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민주주의 경향과 체제전환운동과 같은 모호한 전략과 전술에 의지하는 정치집단의 정치적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한국사회 ‘진보적’ 지식인들, 노조 활동가들, 인권 활동가들, 단체들도 상당 부분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신좌파’적 정치적 사조, 흐름은 여전히 현존했던 사회주의와 현존하는 사회주의에 부정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이기조차 하다. 이들은 최근 ‘체제전환 운동’이라며 자본주의 착취 체제, 분단체제,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반대하는 투쟁 대신 비(또는 반)혁명적인 신좌파의 (유사)무정부주의 노선을 그대로 지속하고 있다. 다원주의 노선은 이들의 정치적 정체성이기도 하다.
당의 지도성,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치혁명, 중앙집중화 노선을 명령경제· 지령경제라 부정하고, 위와 아래, 지도자와 대중, 중앙집중과 참여, 통일과 자치를 비변증법적으로 대립시키며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분산적 계획, 자치와 참여를 일면 강조하는 것도 신좌파 다원주의의 (유사)무정부주의적 사조, 경향의 특성이다. 14)
신좌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계획 경제, 등을 부정하고, 모든 여성, 동물권, 성소수자, 인권, 인종 등에 기반한 다원주의 운동을 표방하고 있다. 신좌파가 다원주의를 기치로 내거는 정치적 의미는 자본주의 체제내에서 부문의 정체성 운동에만 몰두하여 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고 철저하게 옹호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부정하겠지만,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노선의 정치적 의미는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관철된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좌파가 공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다원주의 사상을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그리고 핵심적으로 비판한다.
다원주의 사상은 하나의 객관적인 진리, 통일된 인식을 부정한다. 다원주의는 사회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부정한다. 생태, 여성, 노동, 장애, 인권 등 다양한 모순들을 나열하고 개별적으로 나누어서 모순을 해결하려 한다. 노동이 이 사회의 주된 모순이고 그 모순을 해결할 중심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중심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개별화된 모습들은 따로 나뉘어 분단이나 해방 등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설사 인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애매하고 불확실한 것이기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 사회는 복잡하고 통일되어 있지 않고 진리는 다양하고 다원적인데 이를 하나로 인식하여 이 사회를 전복하고자 하는 노력, 실천은 무용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리가 다양하다면 이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이고 진리가 될 수 없다. 결국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곧 사회에 대한 과학적, 역사적, 통일적 인식의 포기와 같다. 이에 따라 모순의 집단적 해결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노력, 투쟁을 부정하고 기존 체제 내에서 개인들의 인권, 자아를 인정받고 보호받는 것으로 대신하게 된다. 15)
요약하면, 다원주의는 생태, 여성, 노동, 장애, 인권 등 다양다기한 사회 모순들을 병렬적으로나열하면서 개별 한 부문에 집중하자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다원주의는 이러한 다양한 사회적 모순을 총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의 개별적 모순을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들 다원주의가 추구하는 현실에서 정치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지적한다.
이는 인류의 지적 성과를 부정하고 ‘인식할 수 없다’라는 명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식은 다양한 사회현상을 총체적으로 해석하고 근본모순을 파악함으로써 다양한 개인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통일전선으로 묶어 세우고, 당적으로 통일시켜 이 사회를 변혁시켜 나가는 혁명적 방향을 제시할 수 없다. 16)
그러므로 이 사회의 근본적이고 주요한 모순인 임노동 자본 간의 문제를 회피함으로써 노동계급해방, 민족해방 그리고 분단모순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개인의 인권 향상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저자가 강조하다시피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모순은 노동과 임금노동 간의 모순이고 이 모순을 해결할 근본적인 주체는 노동자계급이다. 엥겔스는 이러한 다양한 사회 현상을 인식하는 데 사회 전체적인 총체적인 인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설명한다.
[..] 유물론적 역사 파악에 따르면, 역사에서 종국적인 결정적 계기는 현실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입니다. 17)
맑스와 엥겔스는 인간의 생활수단과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생산수단의 재생산이 궁극적으로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나의 고찰은 다음과 같은 결론, 즉 법 관계들과 국가 형태들은 그것들 자체로부터 파악될 수 있는 것도, 또 이른바 인간 정신의 보편적 발전으로부터 파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헤겔이 18세기의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의 선례를 따라 ‘시민 사회’라는 이름 아래 그 총체를 총괄하고 있는 물질적 생활 관계들에 뿌리박고 있다는, 그러나 시민 사회의 해부학은 정치 경제학에서 찾아져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 관계들에 들어선다. 이러한 생산 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 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제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방식이 사회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18)
즉 물질적 생활 관계, 즉 사회의 경제적 구조가 법 관계들, 국가 형태들을 포함한 사회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의 생태, 여성, 노동, 장애, 인권 등의 제 모순도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구조가 조건 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원주의가 착목하는 사회의 다양한 제 모순들도 다원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다양한 부문의 단순한 모자이크식의 조합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구조을 중심으로 다양한 영역의 문제들이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1990년대를 전후로 광풍처럼 휘몰아친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요하게 혹세무민하고 있는 지점 중의 하나가 사회, 역사 그리고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 담론을 우선시한다고 개탄하고 있다.
사실 역사와 사회를 전면적으로 인식하고 변화시키는 투쟁과 집단주의 속에서 개인과 인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가 집단주의 정신의 정수이다. 개인도 역사 속의 개인이고 사회 속의 개인이고 집단 속의 개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인간이고 그러기에 정치적 인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성과 역사성을 상실한 인간은 고립적 인간이고 개별적 인간으로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본질적, 본연의 모습이 될 수는 없다. 포스트 담론들은 이를 대립시켰다. 집단 대신 개인을, 사회 대신 개별을 대치시켰다. 그러나 사회로부터 고립된 개인, 개별화된 개인은 철저하게 소외된 개인이다. 소외된 개인들, 개인들의 운동은 개인들의 인권, 존엄, 생명을 보호할 수조차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구호는 탈주, 해체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 모더니즘의 시대라는 의미다. 모더니즘 시대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지금은 후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기가 왔다는 것인가? 19)
저자는 인간이 결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역사와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므로 개별과 사회와 역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다원주의가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통일적이고도 총체적 인식을 할 수 없다고 간파한다. 그러면 개인들, 즉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당연한 질문이 제기된다.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맑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양식 Weise 은 무엇보다도 기존의 생활 수단 및 재생산될 생활 수단 자체의 성질에 의존한다. 생산의 이러한 양식은 개인들의 신체적 생존 Existenz 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만 고찰되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이미 이러한 개인들의 활동의 특정한 방식 Art이며, 그들의 삶을 나타내는 특정한 방식, 그들의 특정한 생활 양식이다. 개인들은 그들이 그들의 삶을 나타내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이 무엇인가는 그들의 생산에,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에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어떻게 생산하는가에 일치한다. 따라서 개인들이 무엇인가는 그들의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에 달려 있다. 이러한 생산은 인구의 증가와 함께 비로소 출현한다. 인구의 증가는 그 자체 다시 개인들 상호간의 교류를 전제한다. 이 교류의 형태는 다시 생산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20)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이 무엇인가는 단순히 신체적 생존의 재생산이라는 측면과 아울러 인간이 무엇을 생산하고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가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한마디로 인간이 무엇인가는 그들이 수행하는 생산의 물질적 조건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는 인간 생산과정에서 맺는 자연과의 관계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산에서 필연적으로 맺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포함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현실 투쟁에서 노정하는 심각한 문제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 국가 문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과 한 몸이 되어 철저하게 자본의 이해를 일관되게 대변한다. 현 시대에 국가는 자본주의 최고단계인 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점자본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반하는 행위가 있으면 일사불란하고도 잔인하게 그것을 진압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니즘이나 신좌파는 국가 권력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국가의 일시적 활용문제에 대하여 철저히 방기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국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레닌은 일찍이 《국가와 혁명》에서 “혁명의 근본 문제는 국가권력의 문제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국가권력은 군대, 경찰, 관료기구 등 억압기구를 가지고 있고 이 기구를 가지고 기존 착취와 억압, 수탈의 질서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 억압기구로 이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이 국가권력은 또 법을 이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도구로 제정하여 법에 의한 지배라는 명목으로 민중을 억압하기도 한다. 노동자 민중이 투쟁에 나서기만 하면, “법을 준수해야 한다”, “불법이다”라며 으름장 놓는 국가권력의 모습을 볼 때 ‘법치주의’는 노동자 민중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탄압의 수단에 불과하고 그 억압질서를 옹호하는 이념이다. 이 사회의 국가권력은 중립적이고 공평한 중재자임을 자처하면서도 항상 자본가들, 부자들, 기득권 분자들의 이해를 일방적으로 대변해왔다. 21)
그런데 다원주의는 자본주의 국가 권력을 어떻게 해체하고 제국주의, 자본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개괄적 그림이 없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근본적인 변혁운동에 개괄적인 전략과 전술에 대한 고민이 부재한 가운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론, 국유화와 중앙집중 계획 대신 참여와 자치노선인 ‘어소시에이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소련도 교육, 의료 등을 무상으로 제공했기 때문에 복지국가와 차이점을 알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국유화가 먼저 선행되었죠. 반대로 복지국가의 경우,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려는 사회운동이 선행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마르크스는 ‘어소시에이션’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마르크스 자신은 ‘사회주의’나 ‘코뮤니즘’과 같은 표현을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다가올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할 때 그가 반복적으로 사용한 단어는 ‘어소시에이션’입니다.
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정당, 모두 다 어소시에이션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NGO나 NPO도 해당됩니다. 마르크스가 지향한 것은 소련과 같은 관료 지배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를 기초로 한 민주적 사회였습니다. 22)
사이토 고헤이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정당이 어소시에이션이고, 이것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를 기초로 한 민주적 사회 건설을 주장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노동자 당은 철처히 자본주의 한계내에서만 작동하는 사회적 기제이다. 그러므로 이들 사회적 기구에서 일정 정도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운용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완전한 상호부조와 연대는 자본과 국가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차단되고 있다. 심하게 표현하면, 자본가들이 이윤추구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고, 자본가들끼리 노동자·민중에 대한 적대 전선에서는 철처하게 상호부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호부조와 연대도 누구의 그것인지 명확하게 밝혀줄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상호부조와 연대는 너무 추상적인 슬로건이다.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추상적인 해답은 전형적으로 ’대답하고 대답하지 않기‘이다. 핵심은 어떠한 사회구조가 상호부조와 연대를 진정으로 가능하게 할 것인지이다. 다음으로 맑스가 자본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어소시에이션’은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는지 살펴보자.
끝으로 기분전환을 위해서, 공동의 생산수단들을 가지고 노동하고 자기들의 다양한 개인적 노동력들을 의식적으로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연합체를 생각해보자. 여기에서는 로빈슨의 노동의 모든 규정들이 다시 나타나는데, 다만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다시 나타난다. 로빈슨의 모든 생산물들은 전적으로 그의 개인적 생산물이었고, 따라서 직접적으로 그를 위한 사용대상들이었다. 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다시 생산수단으로 이용된다. 그것은 여전히 사회적이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연합체 구성원들의 생활수단으로서 소비되어 버린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 사이에 분배되어야 한다. 이 분배의 양식은 사회적 생산유기체 자체의 특수한 종류 및 생산자들의 그에 상응하는 역사적 발전도(發展度)에 따라서 변화할 것이다. 단지 상품생산과 비교하기 위해서이지만, 생활수단에 대한 생산자들 각자의 몫은 그의 노동시간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전제하자. 노동시간은 따라서 이중의 역할을 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계획적인 노동시간의 배분은 다양한 욕구에 대한 다양한 노동기능들의 올바른 비율을 규제한다. 다른 한 편에서, 노동시간은 동시에 공동노동에 대한, 그리고 따라서 또 한 공동생산물 가운데 개인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생산자들의 개인적 몫의 척도로서 이용된다. 사람들의, 그들의 노동이나 노동생산물들에 대한 사회적 관련은 여기에서는 생산에서도 소비에서도 언제나 투명하고 단순하다.23)
맑스가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자유인들의 연합체’, 즉 ‘어소시에이션‘은 두 가지 조건과 결부되었다. 그곳에서는 개인들이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고, ’개인적 노동력들을 의식적으로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지출’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의미하고 후자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생산과 생산과정을 계획, 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존재했고, 지금 존재하고 있는 현실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골격이다. 사이토 고헤이는 ’탈성장 코뮤니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요컨대, 마르크스가 상상한 미래 사회는 ‘코먼의 재생’에 다름 아닙니다. 코먼(common)에 기반한 사회야말로 코뮤니즘 (communism)입니다. 쉽게 말해, 사회의 ‘부’가 ‘상품’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모두가 공유하고 자치 관리하는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정상형 경제 사회를 만년의 마르크스는 구상했던 것입니다. 이때 어떻게 부를 코뮌으로 공유하느냐 하면, 이렇습니다.
각자는 그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그의 필요에 따라! (「전집」 제19권 21쪽) 24)
사이토 고헤이는 어소시에이션, 상부상조, 연대, 공유, 민주적 사회, 자치 관리, 코먼 등으로 향후 미래 사회의 핵심적 구성요소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이 현실에 기초한 사회적 관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사회주의 이론에서 개념은 현실에 존재하는 물질적 제관계를 추상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사이토 고헤이의 개념과는 엄연히 다르다. 예를 들면 생산력, 생산관계, 생산수단의 사유화, 계획 경제 등은 현실 사회에서 존재하는 구체적 물질적 관계들을 포착한 개념이다. 이러한 사이토 고헤이의 방식은 이전에 프루동이 사용했던 방식과 유사하다. 그러면 맑스는 이러한 프루동의 현실 분석 방법을 어떻게 비판했는지 살펴보자.
물질대사의 현실적 법칙을 연구하고 그에 기초하여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자연상태(naturalté)’나 ‘친화성(affinite)”이라는 ‘영원한 이념’에 의해서 물질대사를 개조하려는 화학자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누군가가 고리대는 “영원한 정의(justice éter- nelle)’나 ‘영원한 형평(équité éternelle)’이나, ‘영원한 상호부조(mutualité étermelle)’나, 기타 ‘영원한 진리(vérités éternelles)’와 모순된다고 말할 때, 그는 ‘고리대’에 관해서, 신부(神父)들이 그것은 ‘영원한 은총(grace étermelle)’과 ‘영원한 신앙(foi éternelle)’과, ‘신의 영원한 의도(volonté thermelle de dieu)’와 모순된다고 말했을 때에 그들이 고리대에 관해서 알았던 것보다 과연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인가? 25)
즉 맑스는 프루동이 현실에 존재하는 제 관계에 기초하여 개념을 추상하지 않고, 먼저 개념을 설정하고 그것을 가지고 현실에 끼워맞춘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사이토 고헤이도 마찬가지로 어소시에이션, 상부상조, 연대, 공유, 민주적 사회, 자치 관리, 코먼 등의 추상적인 구호만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어소시에이션, 상호부조, 연대, 공유, 민주적 사회, 자치 등의 개념은 이미 사회주의와 경쟁하면서 나오는 것인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실현되지 않았고, 그것의 정의상 향후 인류가 지속될 때까지도 결코 현실에서 실현될 수도 없는 피안에 존재하는 손에 잡히지 않는 별과 같은 존재들이다. 물론 이것은 누군가는 실현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낮은 차원에서. 그의 주장은 현실 사회주의에서 제기된 생산재 생산부분과 소비재 생산부문의 운용, 우선 순위의 문제, 자원 배분의 문제, 어느 분야에 어느 만큼 생산할지 등의 사회 전체적으로 제기될 경제문제보다도 더욱 후퇴하여 초기 아나키즘으로까지 후퇴한 느낌이다.
4. 정체성 정치
이 책의 저자는 지금 광장에서 유행하고 있는 소위 정체성 정치, 즉 노동, 환경, 여성, 인종, 인권 등의 각 부문별 문제에 대하여 천착하자는 신좌파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신좌파들은 사회, 역사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계급투쟁, 민족해방 투쟁을 ‘거대담론’이라고 무시하고 배격한다. 이러한 ‘거대담론’이 개인의 인권이나 차별, 억압 등의 문제를 무시하기에 이러한 구체적인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26)
요약하면 신좌파는 자본주의 사회의 지양과 민족해방이라는 산을 넘어 사회주의 건설에 이르는 거시담론보다 환경, 여성, 인권, 인종 등과 같은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것에 착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저자는 신좌파의 구체적 미시담론에 대한 강조를 아래와 같이 논박한다.
노동의 문제, 여성의 문제, 제 민족의 권리, 인권의 문제, 전쟁 등은 이 자본주의, 제국주의 체제 하에서, 바로 이 체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거대담론은 개인의 삶과 인권, 권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적 해결을 모색한다. 반면 ‘거대담론’을 부정하며 개인의 인권을 내세우고 차별과 배제를 극복하는 운동들은 오히려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외면하면서 개인적인 문제 해결도 벽에 부딪히게 된다. 27)
즉, 저자는 이 각 부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모순이 결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이윤추구와 분리되어서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여성 억압의 문제는 자본주의 착취와 억압과 연관되어 있고, 자본의 무한한 이윤추구 때문에 생태계의 파괴가 자행되고 있으며, 더 무한한 부를 차지하기 위해 제국주의에 의한 전쟁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다. 즉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는 부문적 의제는 자본주의 그리고 특히 고도로 발전한 제국주의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이므로 그것의 근원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을 부정하고 각 부문의 해결을 강조하는 것은 그 부문의 문제 해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엥겔스는 이러한 고립된 개별에 대한 강조는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자연을 그 개별 부분들로 분해하는 것, 서로 다른 자연 과정들과 자연 대상들을 일정한 부류로 나누는 것, 유기체 내부를 그 다면적인 해부학적 형상들에 의거해 연구하는 것 등은 최근 사백년 동안 자연에 대한 인식에서 이룩한 거대한 진보의 근본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습관을 우리에게 남겨 놓기도 하였다. 자연의 사물과 자연 과정을 개별화시켜서 거대한 전체적 연관의 외부에서 파악하는 습관; 따라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지하고 있는 것으로서 파악하는 습관;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 불변한 것으로서 파악하 는 습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는 것으로서 파악하는 습관. 그리고 이 고찰 방법은, 베이컨과 로크에 의해 이루어진 바와 같이 자연 과학으로부터 철학으로 옮겨짐으로써 최근 수세기에 특유한 협소함, 즉 형이상학적 사유 방식을 만들어 냈다. 28)
즉 엥겔스는 각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실천은 그 자체로 상당한 과학적 역사적 지적인 인류의 성과이지만 그것을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총체성을 상실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인종, 민족, 성, 환경 그리고 다양한 정체성은 역사 속에서 변해왔고, 특정한 물질적 힘들의 역사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인종주의를 사례로 든다.
맬컴 엑스의 ‘인종주의 없는 자본주의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결국 인종주의는 순전히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 착취와 억압제도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을 말한다. 실제 맑스가 말한 바처럼,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임노동과 자본>)고 할 수 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은 역사적으로 이른바 ‘상업무역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어 자본주의 시대에도 계속된 흑인노예 사냥과 강제이주, 학살, 착취와 억압이라는 현실에서 파생된 의식이었다. 29)
부언하자면, 흑인 노예 휠씬 이전에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전쟁, 부채, 범죄 등으로 발생한 백인 노예도 일찍이 존재하였다. 11세기까지 바이킹은 북유럽과 러시아를 돌며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포획해 노예로 팔았다. 17세기 美 담배농장 노예는 백인이었다. 그리고 중세 이슬람 제국의 백인 노예를 일컫는 ‘화이트 골드’가 17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숱하게 존재하였다.
또한, 저자는 정체성 정치에서 정체성 또한 무수한 정체성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많은 대중이 많은 정체성으로 고립·분산되어 각 문제의 해결 전망은 난망하다.
개인의 성적 정체성이 억압과 차별 혐오에 맞서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위의 제국주의 리버럴 프로파간다에서 부추기는 것에서 보듯, 그 개인별 정체성 구별이 수십, 수백 개의 분열로 나아가서 부르주아,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활용 수단이 될 수 있는데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보편적 인식으로 확장되어 억압구조, 착취체제에 맞서는 싸움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30)
마지막으로 정체성 정치에서 생각해볼 지점은 각각의 정체성은 고립·분산되어 있다. 그러나 변증법은 각 사물 현상을 그 자체로 고립된 채로가 아니라 항상 다른 사물들과 상호연관된 것으로 고찰할 것을 요구한다. 정체성은 정의상 문자 그대로 독특하기 때문에 다른 정체성과 연관성이 보이지 않고 고립된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것은 각각의 정체성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각각의 정체성을 강조하다 보면 정체성 사이에 충돌이 생길 때 과연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가치 판단의 잣대 문제도 부각된다.
따라서 이러한 개별 의제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이러한 정체성들 배후에 작동하는 물질적 힘들, 그것들 둘러싸고 진행되는 계급 투쟁들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체성 정치는 특정 정체성에 우선권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됨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노동하고 억압받는 인민들을 고립시키고 분열시키는 데 크나큰 기여를 할 수 있다.
5. 제국주의 선전
이 책에서는 제국주의 선전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어떻게 행해지고 있는지, 서구에서 전후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부흥에 맞서 어떻게 CIA가 현대 좌파를 창조하였으며, 좌파 내의 반공주의가 철저하게 제국주의 이해에 봉사하고 있으면, 민주주의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 등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소위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라는 것이 파시즘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다룬다.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을 다루면서 가브리엘 록힐은 ‘언론의 자유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것은 추상적으로만 존재하지,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언론의 자유 문제를 권력과 소유권 문제로부터 분리하려 함으로써, 그것을 고립된 개인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추상적 원리로 변모시키려 한다. 이러한 접근은 통신수단과 누가 그것을 소유하고 통제하는가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한 어떤 실질적 분석도 막으려 한다. 32)
당연하게도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국가는 그들의 이해에 반하는 어떠한 사상이나 이론이 대중들과 접하고 실제 힘을 구축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가브리엘 록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회자되고 있는 ‘언론의 자유’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가르킨다.
부르주아지가 주창하는 언론자유의 권리는 지배 계급이 통신수단을 소유할 자유에 해당한다. 33)
즉 자본주의 하에서 언론의 자유는 결코 존재하지 않으면 가진 자들이 언론을 소유하므로 가진 자들의 사상에 기반하여 가진 자들의 이해를 일방적으로 대변한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이 거의 대부분의 언론을 장악함으로서 대중들이 지배계급의 사상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레닌은 지배계급이 언론을 장악하고 있고, 지배계급의 사상이 오랜 역사를 가지므로 계급사회에서 노동계급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아래와 같이 강조한다.
노동자 대중 자신이 그들 운동의 진행 속에서 마련해낸 독자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다면, 문제는 오직 다음과 같을 뿐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냐 아니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냐, 여기에 중도는 없다(인류는 ‘제3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고안해낸 적이 없으며, 또한 계급모순으로 찢겨진 사회에서는 계급 외적, 또는 계급을 초월한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축소시키는 것, 그로부터 멀어지려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건 간에 그 자체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킴을 의미한다. 34)
6.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
가브리엘 록힐은 “미국은 한 번도 민주주의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의 실체를 아래와 같이 폭로하고 있다.
다변수 통계 분석에 기반을 둔 매우 중요한 연구에서, 마틴 길렌스와 벤자민 페이지는 ‘경제 엘리트와 기업 이익을 대표하는 조직화된 집단들은 미국 정부 정책에 상당한 독립적 영향을 미치는 반면, 평균적인 시민들과 대중 기반 이익 집단들은 거의 또는 전혀 독립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 금권정치 통치 형태는 물론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작동한다. 미국은 그 어디에서나 자신의 반민주적 ᆞ기업 통치 형태를 강요하려 시도해 왔다. (…) 나는 물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형식적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표현들이 다양한 이유로 이러한 형태의 금권정치를 지칭하기 위해 종종 사용된다는 것을 안다. 또한 금권정치 통치 아래 특정 형식적 민주적 권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노동자 인민들에게 중요한 승리이며, 그 중요성이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사실이고 강조할 가치가 있다.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변증법적 평가이다. 이는 미국에서 국가에 대한 과두적 통제와 계급투쟁을 통해 획득된 중요한 권리들을 포함하는 통치 방식의 복잡성을 설명하는 평가이다. 35)
가브리엘 록힐은 독점자본이 미국 정부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평균적인 대중들은 결코 정부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미국은 금권정치 통치형태를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도 강요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가브리엘 록힐은 소위 미국 제국주의가 전세계적으로 강요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형식적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는 실제로는 금권정치를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가브리엘 록힐은 미국 제국주의가 세계에서 어떠한 만행을 구체적으로 자행하는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때부터 2014년 사이에, 윌리엄 블럼의 꼼꼼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은 50개 이상의 외국 정부를 전복하려 기도했으며, 그 대다수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들이었다. 미국은 금권 제국이며, 그 용어의 어떤 의미 있는 또는 실질적인 의미에서도 민주주의가 아니다. 36)
걸핏하면 미국은 인권과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면서 다른 나라에 대한 테러와 전쟁을 서슴지 않고, 지금도 러-우 전쟁에서 우크리이나 신나찌를 지원하고, 이스라엘 시오니스트 참략자들을 지원하여 가자지구를 폭격하고 아기와 어린이를 포함해 팔레스타인인 십수만을 학살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베네수엘라를 침공하여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면, 이란에 폭격을 가하여 이란 최고 지도자를 포함하여 지도부 성원 일부를 암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야말로 미국은 뻔뻔하게 남의 나라 지도자를 납치하고 압살하는 기상천외한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의 석유 봉쇄 조치 여파로 쿠바 주민들의 일상이 사실상 마비되어 쿠바 인민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 자본주의 특히 제국주의에서는 결코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고 오로지 독점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적 군사적 행위만이 난무한다는 것이 최근 국제 정세는 웅변하고 있다.
7. 나가는 말
지금 미국은 이란과의 명분없는 전쟁을 치루고 있다. 이 전쟁은 자본주의의 심각한 구조적 모순을 앓고 있는 미국 제국주의의 모순을 반영한다. 그래서 미국은 해외의 원료와 상품 시장을 강탈하기 위하여 전쟁이라는 수단에 의지하고 연명하고 있다. 세계차원의 분업 구조가 확립된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동에서의 전쟁은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 질서의 불안정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전세계 인민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정체성 정치를 추구하는 신좌파가 제국주의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전쟁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출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가브리엘 록힐은 “미국은 한 번도 민주주의가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포스트모던니즘은 자본주의 하에서 벌어지는 여러 모순들로 주의를 분산시켜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을 회피한다. 그리고 그들은 한 발 나아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중상과 모략으로 점철하여 패배주의를 유포시키고 현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 체제에 굴복하게 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현실 변혁운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중들에게 세뇌시키는 폐해와 그 정치적 의미를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사회주의는 인류가 희생을 무릅쓰면서도 쟁취해야 할 세계가 아니었다.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중상비방으로 인해 사회주의는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는 공상이며 새로운 착취 체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만연하여 체념과 패배주의를 심어 놓았다. 37)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진영내부에서도 부르주아 사상이 백가쟁명식으로 난무하고 있다. 사회주의권의 패배의 단초는 “레닌의 이름”으로 “레닌 죽이기”를 정교하게 도모하면서 시작되었다. 지금 세계는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 질서가 전세계 인민들을 벼랑끝으로 몰아넣으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엄혹한 시기에 놓여 있다. 이 심각한 파국에 애써 눈을 가리는 일부 정치적 사조는 버젓이 진보라는 미명 아래 “맑스의 이름으로 맑스 죽기이기”를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다. 진정한 변혁사상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발본적인 분석에 기초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고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제시하는 사상이다. 변혁사상의 확고한 기초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에 이 책이 단단한 버팀목이 되고 변혁을 지향하는 운동에 나침반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후주
1) 소련 사회성격 논쟁에 대하여, 이정구 「국가자본주의론의 현재적 의미」, 볼세비키 그룹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하여」, 백철현 「위대한 러시아 혁명의 산물:쏘련 사회주의 그 깃발을 짓밟은 소부르조아 반동 ‘맑스주의자들’」 , 레프트 대구 13호를 보라
2) 사이토 고헤이,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arte(아르테)
3)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 밥북 77쪽
4) 「엥겔스가 브레슬라우의 오토 폰 보에니크에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 6, 박종철출판사 506쪽
5)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5』, 박종철출판사 311쪽
6) 백남운 『쏘련인상』 , 선인, 이태준 『쏘련기행 중국기행외』 소명출판
7) 같은 책, 148쪽
8) 레닌 「마르크스」, 82쪽, 아고라
9) 미국의 진보주의 사상가 중 하나이다. 1962년 예일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이후 많은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대학을 비롯하여 종교, 노동, 평화, 공공단체등에서 강연하기도 했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출연해 중요한 현안이나 본인의 작품에 대해 토론했다. 현재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거주하고 있다. 최근작 : 『카이사르의 죽음』 원제 : The Assassination of Julius Caesar: A People’s History of Ancient Rome, 『비주류 역사』 원제 : History As Mystery ,<전쟁과 평화> 등 총 56종
10) 마이클 파렌티(Michael Parenti) 「좌파 반공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난폭한 중상자들」 현장과 광장 14호
11) 포스트모더니즘(영어: postmodernism) 또는 탈근대주의(脫近代主義)는 일반적으로 모더니즘(근대주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서양의 사회, 문화, 예술의 총체적 운동을 일컫는다. 특히 근대주의의 핵심인 이성(理性) 중심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경향의 총칭이다. 위키백과
12) 신좌파(新左派, 영어: New Left)는 서구 세계에서 1960년대에 생겨난 구조주의, 사회비판이론,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기존 사회 문화의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생겨난 좌파적 조류를 의미한다. 계급투쟁과 노동운동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좌파와 달리 다문화주의, 동물권, 여성주의, 성소수자 운동, 환경 운동, 기타 소외 계층에 대한 인권 신장 운동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신좌파는 이전 시대에 비해 사회 정의에 더 치우친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좌파와 다르다. 위키백과
13)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밥북 26~27 쪽
14) 같은 책, 159 쪽
15) 같은 책, 86-87쪽
16) 같은 책, 93-94쪽
17) 「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 6, 박종철출판사 508쪽
18) 칼 맑스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 』 2, 박종철출판사 477-478쪽
19) 같은 책 81~82쪽
20) 맑스, 엥겔스 「독일이데올로기」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 』1, 박종철출판사, 197쪽
21) 같은 책, 83쪽
22) 사이토 고헤이,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arte(아르테), 179~180쪽
23) K 맑스, 채만수 역, 『자본론』 1-1, 노사과연, 136~137쪽
24) 사이토 고헤이,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arte(아르테), 211쪽
25) K 맑스, 채만수 역, 『자본론』 1-1, 노사과연, 100 쪽
26) 같은 책, 51쪽
27) 같은 책, 96-97쪽
28) 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 』 5, 448 쪽
29) 같은 책, 119 쪽
30) 같은 책, 173~174
31) 가브리엘 록힐은 비판이론 공동연구모임(Critical Theory Workshop/Atelier de Théorie Critique)의 공동 대표이자 펜실베이니아 주 빌라노바 대학교의 철학 교수이다. 그는 현재 다섯 번째 단독 저서인 『지적 세계대전: 맑스주의 대 제국주의 이론 산업(The Intellectual World War: Marxism versus the Imperial Theory Industry)』(먼슬리 리뷰 프레스, 출간 예정)을 완성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32) 같은 책, 가브리엘 록힐과 쟈오딩키 대담 「제국주의 선전과 서방 좌파 지식인의 이데올로기」 , 226 쪽
33) 같은 책, 가브리엘 록힐과 쟈오딩키 대담 「제국주의 선전과 서방 좌파 지식인의 이데올로기」, 228 쪽
34)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 , 박종철출판사
35) 같은 책, 가브리엘 록힐과 쟈오딩키 대담 「제국주의 선전과 서방 좌파 지식인의 이데올로기」 , 225~226 쪽
36) 같은 책, 같은 책 가브리엘 록힐과 쟈오딩키 대담 「제국주의 선전과 서방 좌파 지식인의 이데올로기」, 225쪽
37) 같은 책, 25쪽

이 기사를 총 8번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