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연대> 최일붕의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ㅡ신좌파 다원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의 비판에 대해 ㅡ 국가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중심으로

최근 <노동자연대> 최일붕 씨가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ㅡ신좌파 다원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해 두 번에 걸쳐 장문의 비판을 하였다. 이후 이에 대한 전면 반비판을 하겠지만 여기서는 사전 논쟁의 정리를 위해 이미 제출했던 우리의 ‘국가자본주의론’ 비판 글을 정리해서 올린다.

<노동자연대> 최일붕의 글이 우리의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전면 비판의 형식으로 진행됐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형성이 소련이나 스탈린의 사상,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 점에서 이와 일치하는 <노동자연대>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현실 사회주의를 보는 관점에 대한 비판은 필수적이다.

최일붕은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 비판을 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좌파, 정체성 정치, 트로츠키주의를 지나치게 넓은 하나의 적대 진영으로 포괄하고 그 반대편에 계급, 민족, 국가, 권력, 혁명, 국유화의 언어를 세우며 도식화”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최일붕은 “트로츠키주의가 프랑크푸르트학파나 구조주의 등이 전파한 ‘전체주의 반대 이데올로기’를 설파해, ‘미제를 위시한 제국주의의 인권, 인도주의를 빌미로 한 레짐체인지 공작에 이용된다’고 몰아간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최일붕의 비판을 간략하게 반비판한 글에서 우리는 “현실사회주의를 타도해야 하는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노동자연대 식의 트로츠키주의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나 프랑스의 구조주의 등 포스트모더니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데올로기가 구사하는 전체주의 반대 이데올로기(처럼), 즉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체하며 현실사회주의나 반미자주 국가들을 전체주의로 비난함으로써 미제를 위시한 제국주의의 인권, 인도주의를 빌미로 한 레짐체인지 공작에 이용되고 맙니다.”라고 했다. 우리는 “트로츠키주의가 프랑크푸르트학파나 구조주의 등이 전파한 ‘전체주의 반대 이데올로기’를 설파”했다는 식으로 트로츠키주의와 후자의 학파들이 같은 철학을 가졌다고 한 것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프랑크푸르트 학파나 프랑스 구조주의가 서로 다르면서도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서 제국주의의 레짐체인지 공작에 이용된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과학은 보편성 속에서 차이를 발견하거나 차이 속에서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일붕은 “도식화”라는 표현을 썼는데, 복잡하고 서로 다른 대상들 속에서 합리적 핵심으로 공통점을 뽑아내기 위해 “계급, 민족, 국가, 권력, 혁명, 국유화”라는 “언어”를 가져왔다면 이야말로 과학인 것이다.

그것이 비판받아야 하는 “도식화”라면 최일붕은 “계급, 민족, 국가, 권력, 혁명, 국유화”라는 “언어”가 아닌 그 무엇으로 대상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인가?

우리가 무정부주의를 비판하면서 노동자연대 같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무정부주의는 아니나 중앙집중성과 사회주의 국유화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지도자와 대중을 대립시키고 분산성과 자치, 자율, 아래로부터를 일면적으로 외치는 것에 대해 무정부주의와 정치적 특성을 공유하는 유사 무정부주의, 범무정부주의라고 비판했던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와 트로츠키주의, 특히 국가자본주의론은 현실사회주의에 적대적인 태도에서 유사하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이는 양비론적 철학적 태도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트로츠키주의가 사상기반이 다르다 해도 정치는 실천적 결론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와 연결시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최일붕 스스로도 “핵심 쟁점으로”,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 국가주의와 관료 지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라고 하고 이를 전면에 부각시키기 때문에 최일붕에 대한 반비판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이와 유사한 정치적 특성을 보이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비방과 적대를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정치세력의 행적과 과오는 그것을 전면 자기비판하여 쇄신하지 않고 계속되는한 다시 들춰 내어 강력하게 비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노동자연대>의 입장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현실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반공사상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노동자연대>(최일붕)는 “노정협은 노동자연대가 ‘현실사회주의를 타도해야 하는 국가자본주의로 본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우리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1928년 이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됐다고 본다. 그러나 노정협이 이를 두고 서방 자본주의 타도와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왜곡이다. 1947년 이래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구호는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니다’였지, ‘모스크바도 워싱턴도 아니다’가 아니었다. 순서가 중요하다.”며 이것이 양비론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미제국주의 비판을 우선적으로 하면서 소련 비판도 같이 한 것이기 때문에 양비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 양비론이 항상 두 대상을 동일한 수준에 두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비록 워싱턴 비판을 중심에 두었다 할지라도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를 타도해야 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보고, 진보적 인류의 비극이었던 소련해체를 환영하고 바웬사가 중심이 된 폴란드의 연대노조 운동 같은 동유럽에서의 반혁명을 지지하면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제국주의 이해에 복무했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노동자연대>는 “노정협의 반박에서 가장 위험한 논리는 스탈린주의 체제를 비판하면 제국주의의 ‘레짐체인지’ 공작에 이용된다는 주장이다.”라며 쏘련 등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제국주의 이해와 하등 상관이 없고 반공주의와도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쿠바 반혁명 시위를 민주주의 투쟁이라며 적극 지지했던 <노동자연대>의 행적을 보라.(이에 대해서는 “우리는 쿠바 사회주의 권력의 굳센 벗들이다 _ 쿠바 반혁명 시위에 대한 제국주의 벗들의 논평을 규탄한다”와 “쿠바 반혁명 시위를 지지하는 제국주의의 국내 ‘진보적’ 벗들의 실체를 보라!”라는 우리의 글을 보기 바란다.)

이들은 미국의 내정간섭을 비판하면서도 쿠바 반혁명 시위를 지지하는 것으로 미제의 이해에 봉사했다. 더구나 이 주장은 진보진영의 이름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더 위험한 것이었다.

<노동자연대>는 자신들이 정치가 “제국주의의 ‘레짐체인지’ 공작에 이용된다”는 주장을 극구 반박했지만 리비아, 시리아, 이란 등지에서 미제의 레짐체인지 공작으로 일어난 시위에 대해 민주주의 시위라고 지지하면서 미제의 정권교체에 부응했다. 물론 여기서도 이들은 미국의 개입을 반대한다는 알리바이를 대지만, 그것은 미제가 리비아, 시리아에 대해 내전을 일으켜 정권교체를 성사시킨 것을 봤을 때도 제국주의의 이익에 봉사한 것이었다.

특히 쿠알라룸프르 공항에서의 소동을 두고 반북을 내건 이들의 구체적인 행적을 보면 이들이 진보의 이름을 내건 반공ㆍ반북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 소동을 소환하여 환기할 수밖에 없다.

두 사진을 비교해보라. 독극물을 확인해보는 방호복을 입은 이들의 긴박한 사진과 밑의 이른바 방호복 없이 이를 촬영하는 기자들과 지켜보는 시민들

1. 반공주의 소동을 다시 소환하며

한 때 북에 의한 김정남의 암살사건으로 규정되어 서방 언론과 한국언론의 떠들썩한 비난은 결국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태산이 떠나갈 듯 떠들썩하였는데 나온 것은 겨우 쥐 한 마리) 같은 헤프닝으로 사건이 사실상 종료됐다. 그런데 이 의문투성이 사건에 대해 제국주의 언론과 “대북 소식통”이라는 국정원의 발표를 그대로 보도하는 한국언론이 보여준 태도야 평소 저들 언론들의 반북적인 보도 태도에 비춰볼 때 의당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 희대의 사기적 종북몰이에“맑스주의”를 자처하는 정치세력이 동참했다. 바로 <노동자연대>였다. <노동자연대>의 입장 글은 처음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김정남 피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사건 직후부터 북한, 남한, 미국, 중국 등 관련 국가들이 현지 수사를 놓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부검과 시신 인도 여부를 놓고도 각국의 물밑 외교전이 벌어졌다. 수사 결과에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당국이 어떤 수사 결과를 내놓아도 이는 소동을 가라앉히기는커녕 새로운 논란과 의문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김영익, 김정남 피살로 드러난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성, <노동자 연대> 197호, 2017.2.17)

이 사건에 대해 글 처음에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 같던 <노동자연대>는 글 뒤로 가면서 100% 상반된 태도로 돌변하고 있다.

그러나 피살 사건의 맥락과 파장에 더 주목해야 한다. 그러려면 물음을 던져 봐야 한다. 1990년대만 해도 서방 세계에서 김정일의 후계자로 유력하다고 예상돼 온 김정남이 어쩌다 말레이시아에서 홀로 객사하는 신세가 됐나? … 김정은이 김정일의 권력을 물려받은 2010~11년 김정남은 주로 일본 언론과 접촉해 3대 세습을 공개 비판 하고 북한의 개혁·개방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에선가 그는 동생의 권력 승계를 못마땅해 했고 이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 이때 김정은한테는 이복형 김정남이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좀먹는 골칫거 리였을 것이다. 2011년 서른도 안 된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했을 때, “백두혈통”이라는 것이 권력 세습을 정당화하는 핵심 이데올로기였다. … 그런데 북한 외부에서 3대 세습에 흠집을 낸 “백두혈통”(심지어 김정일의 장남)이 있었던 것이다.(같은 글)

이어서 이 의혹사건에 대한 <조선일보>의 견해를 보자!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의 암살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부 당국자는 14일“아무리 정치적 영향력이 없다고 해도 일개 공작 부서가 ‘백두 혈통’을 제거하긴 부담스럽다”며 “이유는 불분명하나 김정은이 김정남 암살을 최종 허가했 을 것”이라고 했다…안보 부서 관계자는“김정남은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 김 씨 왕조의 적자(嫡子)라며 “김정일의 서자(庶子)로 정통성 콤플렉스가 심한 김정은으로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라고 했다. 김정은이 잠재적 라이벌 제거를 위해 이복형 암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 이다.(이용수 기자, 권력 위기 느꼈나… 김정은, 고모부 이어 이복형까지 제거, 조선일보, 2017.02.15.)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노동자연대> 기사와 극우 파쇼 <조선일보> 기사의 인식 수준이 이 사건에 있어서는 한 치라도 다른 게 있는가?

‘비운의 북한 황태자’김정남이 이복동생의 치명적 경계심으로 마침내 비명에 갔다.(최일붕, 스탈린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자 연대> 198호, 2017.2.24)

참으로 비운의 ‘맑스주의자’다. 이게 3류 반북 극우 찌라시에서나 나올법한 얘기지 맑스주의를 자처하는 조직의 기관지에, 또 그 조직의 리더라는 사람의 글에서 나올 소리인가? 반공주의적 적대감, 편견, 무지에서는 <조선일보>도 울고갈 지경이다.

“김정남 피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기에는 어려움이 많”고, 각 국 가들이 “현지 수사를 두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고, “부검과 시신 인도 여부를 놓고도 각국의 물밑 외교전이 벌어졌”으며, 특히 “수사 결과에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데다, “말레이시아 당국이 어떤 수사 결과를 내놓아도” “새로운 논란과 의문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며 스스로 의구심을 품는 사건에 대해 어떻게 “‘비운의 북한 황 태자’김정남이 이복동생의 치명적 경계심으로 마침내 비명에 갔다.”고 저토록 확신을 가지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이 사건에 대한 말레이 경찰의 공식발표가 나오기 전에 이미 국내 언론에서는 국정원 발표를 근거로 “암살 사건”으로 규정하고 앞다퉈 보도를 했다. <노동자연대>의 이 사건에 대한 인식은 국정원 발표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이 사건의 원인이 형제간의 권력 다툼이라는 인식도 저열하기 그지없다.

<노동자연대>는 이 점에서만은 지난 날 맑스, 엥겔스가 부르주아적 사회주의,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진정한 사회주의로 규정했던 전례를 따라서 극우 반동적 “맑스주의”라고 규정할만하다.

도대체 무엇이 “맑스주의”를 자처하는 정치조직으로 하여금 국정원과 지배계급의 반동적인 인식 수준으로 이 첨예한 정치적 사건을 바라보도록 했는가?

이른바 “좌파”진영 내에서 반소, 반공주의는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등장 이래 전 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유로꼬뮤니즘조차도 노골적으로 현실 사회주의를 타도하자는 입장을 자신들의 주요 노선으로 삼지는 않았다. <노동자연대> 같은 트로츠키 단체의 반동적 인식과 북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감은 어디서 비롯됐는가?

물론 북한의 3대 세습, ‘왕자’들의 갈등은 마치 북한만의 독특한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특수성을 예외성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트로츠키(1879~1940)가《연속혁명》독일어판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일국의 특수성들은 세계경제의 운동 과정의 기본 특징들이 일국 내에서 독특하게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

‘비정상’처럼 보이는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이런저런 현상과 제도 등은 물자가 부족하고 해외에 손벌릴 곳도 없는 낙후하고 빈곤했던 나라가 급속한 공업화를 추구하면서 봉착한 문제들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형성되고 확립된 것이다. 더구나 여기에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이라는 더 큰 맥락이 있다.

처음 북한이 권력세습(김일성→김정일)을 선택한 것도 북한 국가 자본주의가 거듭 모순에 봉착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김영익, <노동자연대>, 같은 글)

북이나 쿠바와 같은 현실 사회주의가 “국가자본주의”라는 노선이 적대감과 혐오감의 원천인 것이다. 이 국가자본주의론은 “북한”의 “일국의 특수성들은 세계경제의 운동 과정의 기본 특징들이 일국 내에서 독특하게 결합”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미제국주의를 위시한 제국주의 진영의 북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고립, 말살 책동을 “물자가 부족하고 해외에 손 벌릴 곳도 없는 낙후하고 빈곤했던 나라가 급속한 공업화를 추구하면서” 나타난 “국가자본주의”의 문제라는 인식은 구체적인 역사성을 결여한 지극 히 비과학적인 인식이다. 왜냐하면 “물자가 부족하고 해외에 손 벌릴 곳도 없는 낙후하고 빈곤했던 나라가 급속한 공업화를 추구”했던 대표적인 사례는 오히려 한국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고립과 말살이 아니라 국제 자본주의 질서에 적극 편입했던 정반대 사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세계경제의 운동 과정의 기본 특징”이 “일국 내에서 독특하게 결합된”다고 하더라도, 자본의 집적과 집중에 의한 독점의 형성, 자본의 국제화, 국제적인 상품 교환과 완전히 다른 사례가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북에서 과연 이런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는가?

“국가자본주의론”의 비과학성과 몰역사성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다루는 걸로 하고, 여기서는 북이 “국가자본주의”라는 이들의 이론적 인식이 말레이시아 사건을 이토록 극우 반공주의적으로 규정하게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데 물론 그러한 관점이 있어도 요즘 유행하는 말인 이른바 팩트(Fact)체크를 한다면, 이 사건에 대해 충분히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의 “국가자본주의론”자체가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극도의 종파주의와 적대감을 기초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합리적 이성을 상실하고 맹목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게 됐던 것이다. 이들의 반북 반공주의 노선은 “맑스주의”라는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더 강력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위험한 것이다.

사회당이 반자본주의 반조선노동당을 내걸고 ‘종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래, 이 말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투쟁을 상습적으로 사용하는 지배계급의 언어 표현이 되었다.

국가자본주의론자들에게 주적은 사적 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사회주의 체제였다. 1991년 소련 해체에 대해 이들은 그것이 자신의 깃발인줄도 모르고 해체를 환영하고 나섰다.

나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토니 클리프의 분석을 소개하면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소련과 소련류를 모종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바로 서방에 존재하는 착취적 사회체제의 변종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동유럽 혁명들이 일어나기 7년 전에 쓴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동방 블록의 “실재하는 사회주의”는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사회주의의 부정이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체제의 타도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강조는 필자)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전망에서 스탈린주의의 붕괴는 애도가 아니라 축하할 일이었다.(알렉스 캘리니코스,《마르크스의 사상》, 북막스, 13쪽)

이들은 맑스주의의 사상적 기치 하에 “노동자 계급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는 소련과 동유럽, 북과 쿠바 같은 사회주의 “체제의 타도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지금도 일관되게 그 주장을 하고 있다. 구체적인 역사적 인식도 착취에 대한 과학적 인식도 없이 극악한 종파주의 노선에 입각해서 반소 반공주의 노선을 이렇게 대놓고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을 위해 북과 쿠바 같은 “체제의 타도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실천지성”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실천지성”답게 국가자본주의 노선을 선전하기 위해 조중동, 종편 같은 극우 파쇼 언론, 국정원과 손잡고 반북 이데올로기 공동선전을 하거나, 대북 풍선을 날리고, 더 대담하게 실천적으로 중국 국경지대로 가서 ‘탈북자’들과 접촉하거나 심지어 국가자본주의론을 들고 북 내부에 직접 침투하여 “타도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해야”하는 것 아닌가?

미국에서 역시 마이애미에서 반쿠바주의자들과 합세하여 반쿠바 공동선전을 하거나 제2의 피그만 침공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이게 아니면 쿠바 내에 여행객으로 가장하여 쿠바 노동자계급이 반혁명 책동에 떨쳐 일어서도록 정치투쟁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국제주의자”들 아닌가?

제국주의와 별개로 주관적으로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일군다.”는 혁명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타도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한다면 결국 이 노선은 제국주의자들과 같은 전열에 서는 반동적인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자본주의와 함께 사적 자본주의를 분쇄한다는 저들의 노선도 끊임없이 동요하고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이 리비아, 시리아 등에서 정권 교체(레짐 체인지)를 위해 제국주의자들이 내란을 배후 공작해서 체제 전복에 나서는 반군들을 민주주의 투사라고 지지하고, 이 반군들이 “독재 권력”을 분쇄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볼 때, 이들은 제국주의의 어릿광대 노릇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세력들인 것이다.

결국 국가자본주의론으로 “이런 전망에서 스탈린주의의 붕괴는 애도가 아니라 축하할 일이었다.”며 소련 해체 축하연을 벌이고 있을 때 대체 인류에게는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가? 소련에서 공적 소유 체제가 전면 붕괴하고 사유화가 자행되면서 인민들에 대한 대규모 약탈이 자행됐다. 인민 복지가 전면적으로 무너졌다. 인민의 참상 위에서 올리가리히라는 독점자본이 급성장했다.

러시아 인민들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고 평균 수명이 대거 단축됐다. 게다가 동유럽과 소련 해체 이후 벌어진 민족 간 분규와 제국주의자들의 개입으로 벌어진 유고 내전으로 수십만이 희생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미제국주의는 제국주의 진영의 승리를 등에 업고 1993년 이라크를 공습했다. 북과 쿠바의 경제적, 정치적 고립이 가중되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노동자들의 복지에 대한 공세가 더 노골화 됐다. 한국에서도 청산주의 노선이 득세하면서 노동계급 운동이 심각하게 후퇴했다.

그런데 소련 해체 이후 한국의 대다수 정파들은 이 반동적인 국가 자본주의 노선을 수용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70여 년 동안 존재했던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성과와 한계, 오류, 해체 원인에 대한 진지한 과학적 탐구 대신에 “스탈린주의”라는 한 마디로 역사를 부정하고 짓밟는 난폭한 정치적, 지적 만행이 횡행했다. 유고의 시장사회주의 노선과 후르시초프의 수정주의 노선, 그 수정주의 노선의 정점에 있었던 고르바초프의 수정주의 노선이 “반스탈린주의” 깃발을 내걸었다는 점은 이들에게는 합리적 의심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와 함께 베트남, 중국, 조선, 쿠바가 국가자본주의라는 인식은 수천 만 인민이 사망하면서 독일 파시즘과 미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국주의 포위라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 사회주의를 일궈가면서 분투했던 수많은 진보적 인류의 투쟁 을 관념으로 기각하는 초현실적인 노선에 불과하다.

수억이 넘는 진보적 인류의 분투를 외면하고 현실의 구체적 역사로부터 탈출하는 얼마나 손쉬운 방법인가? 그런데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 해체 직후 과학적으로 이를 탐구할 정치적, 지적 능력의 결여 상태,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수용한 이론을 30년도 더 지난 지금도 그 독단과 독선의 맹목적 노선을 고집한다는 것은 심각한 지적 게으름이고 정치적 타락행위이다. 그 동안 국가자본주의 노선의 정치적 반동성과 이론적 오류가 많이 폭로되면서 지적, 정치적 흐름이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상당수 정치세력들이 이 반동적 노선을 고집하고 있다. 이 초현실적 관념론의 뿌리는 무엇이고, 그 상속자들의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2. 국가자본주의론의 뿌리와 그 상속자들

1) 토니 클리프 《소련 국가자본주의》: 학문적 신뢰의 결여

카우츠키는 한때는 “맑스주의의 교황”이라 불리며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대두하는 수정주의의 대표적 주자인 베른슈타인과 맞서 싸 우며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상의 계승자였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조국방어 입장에 빠지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사실상 방조했다.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을 “사회배외주의”로 폭로하면서 그 기회주의의 이론적 옹호자인 카우츠키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카우츠키의 정치적 우경화는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극에 달해서 레닌은 카우츠키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배신자”라고 낙인찍었다.

한때 맑스주의의 교황으로 추앙받던 카우츠키의 정치적 말년은 혁명 러시아와 쏘련과 싸우는 것이었다.

카우츠키는 “레닌과 볼셰비키가 내전과 테러 독재 폐허 위에서 국가의 새로운 군국주의 관료제 기관을 창설하고 새로운 전제 국가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카우츠키는 마침내”6.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인가?(6. Is Soviet Russia A Socialist State?, 출처: http://www.marxists.org/

archive/kautsky/1930s/demvscom/ch06.htm )라고 묻는다.

카우츠키는 스탈린 시대에 관료주의 국가경제를 창설했는데 그것은 새로운 산업 기구를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상당수 재정을 오로지 노동대 중들의 새롭게 창출된 잉여가치로부터 최대한 뽑아냈다고 비판한다.

카우츠키는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이는 인민들이 아니라 정부라고 하면서 러시아 혁명 이후 들어선 정부가 인민들의 주인이라고 비난한다. 카우츠키는 프랑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결과는 모든 계급의 폐지가 아니라 구 계급을 새로운 계급들로 교체한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한다.”(강신준 교수의 자본해설을 둘러싼 논쟁 비평(3) –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배신자’카우츠키주의의 복권, 노동자정치신문, 2014.1.27)

이처럼 카우츠키의 소련에 대한 입장은 “국가자본주의론”입장의 원조격이 된다.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규정하고 상부구조, 즉 당과 국가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한 트로츠키의 입장도 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카우츠키의 반볼셰비키, 반레닌주의적 입장은 소련에 대해서 반공주의적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련을 극도로 적대시한 카우츠키는 정작 독일에서 부상한 나찌에게 아내와 자식들을 잃고 1938년 망명지인 암스테르담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카우츠키가 진짜 적대시해야 하는 대상은 독일 파시즘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파시즘을 격퇴시킨 것은 그가 저주하던 스탈린을 지도자로 하던 소련 사회주의였던 것이다.

토니 클리프의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은 카우츠키의 입장과 같지만, 그 시기만 다르다. 그는 소련이 공업화와 농업 집산화를 본격적으로 개시했던 1928년부터 소련이 국가자본주의로 반혁명 국가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토니 클리프는 이렇게 주장한다.

본원적 축적기 동안 영국보다 훨씬 더 많은 피가 소련에서 흘렀다.

스탈린은 몇백 일만에 영국에 몇백 년 걸려서 한 것을 이룩했다. 그가 그것을 한 규모, 그리고 그가 수행해 낸 성공도는 써덜랜드 여공〔『자본론』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장에서, 농민의 토지를 대대적으로 수탈한 대표적 사례로서 인용되고 있는 영국의 상업적 농업 경영 지주-옮긴이〕의 행동을 완전히 왜소하게 보이도록 한다. 그 규모와 그 성공도는 관료의 가차없는 지시 하에 국가의 수중에 집중된 현대 공업경제의 우월성에 대한 준엄한 증거이다.”(토니 클리프『소련 국가자본주의』정성진 옮김, 책갈피, 1993년, 65쪽)

토니 클리프의 《소련 국가자본주의》는 한국사회에서는 소련 해체 전부터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는데, 해체 이후에는 혼란에 빠져 있는 많은 활동가들에게 엄청난 지적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서 자본주의 전환의 해로 말하는‘초공업화’와 농업 집산화에 대해 논하기 전에 먼저 토니 클리프의 이 책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책인지 몇 가지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레닌과 트로츠키 하에서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국가로부터조차도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컨대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토니 클리프, 같은 책, 31쪽)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1920년 말부터-1921년 3월까지 <직업동맹 의 역할과 과제에 대하여>라는 소책자를 시작으로 레닌과 당에 반대 하여 노조의 “국가기구화, 군사화”를 주장했던 것은 트로츠키였다.

이 논쟁은 급기야 <완충기 그룹>, <노동자반대파>, <민주집중제> 그룹 등 당내 반당적 분파를 만들어내 “당의 위기”를 낳은 원인이 되었다. 레닌은 트로츠키에 맞서 <직업동맹, 현 시기 그리고 뜨로츠끼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 <당의 위기>, <다시 한 번 직업동맹, 현 시기 그리고 뜨로츠끼 동지와 부하린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를 통해 당을 위기로 몰아간 반당 세력들과 심각한 정치투쟁을 전개하였다.

레닌은 트로츠키의 노조의 입장에 반대하여 사회주의에서 노조 역시 노동자 계급의 물질적, 정신적 이해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과 트로츠키 하에서”가 아니라, 레닌과 볼셰비키가 트로츠키 및 부하린 등의 반당적 분파주의에 맞서 싸워 승리하면서 사회주의 하에서도 노동자 계급의 물질적 정신적 이해에 복무해야 하는 노조의 임무가 제대로 설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토니 클리프는 “그들 자신의 국가로부터조차도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면서 사회주의에서 노조의 성격을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적대적인 노사관계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무정부주의의 일종이다. 그러나 레닌은 노조가 노동자의 물질적 정신적 이해에 복무하면서도 동시에 “지배하고 통치하는 기구, 정부 구성권을 갖는 계급의 조직, 독재를 실현하는 그 계급, 국가적 강제를 실현하는 그 계급의 조직”인 동시에“이것은 바로 국가적인 조직이 아니고 이것은 강제의 조직이 아니며, 바로 이것은 교육적인 조직이고 참가시키고 배워주는 조직이며, 이것은 학교, 통치의 학교이며 바로 경영의 학교이고 공산주의의 학교”(레닌, 직업동맹, 현 시기 그리고 뜨로츠끼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 번역 임채희, 노동자정치신문 44호, 2008.10.02)라고 주장하였다.

쏘련에서 노조는 통치하고 계급의 독재를 실현하는 기구로서 입법발의권, 노동자의 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기구, 국가사회보험, 연금경영자, 요양, 진료소, 휴일, 보양시설 운영자, 노동자 주거의 공동행정 주체, 노동자 문화교육을 위한 학교, 쏘비에트 공화국 내에서 스포츠와 여행 조장자 및 조성자의 역할, 대외 정책의 수단이라는 폭넓은 기능과 역할을 가졌다.(기연수, “소련의 노동조합과 정책참여”, 《슬라브 연구》, 5권, 1989.1., 한국외국어대학교 소련 및 동구문제연구소, pp. 89-90, 김해인, ‘쏘련 국가자본주의론’비판을 위한 시론, 노동사회과학 사회주의 20세기와 21세기, 제2호, 2009.6)

“(1932년~49년) 이 기간 동안 노동자의 상태에 대한 심대한 변화- 예컨대 7시간 노동제의 폐지, 스타하노프주의와 많은 가혹한 법률 의 도입 등-가 있었다.”(토니 클리프, 같은 책, 31쪽)

토니 클리프의 이 주장을 그대로 인정한다 해도, 1931년까지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7시간 노동제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 그런데 1932년-1949년 사이에는 무슨 격변이 있었는가? 나찌 침공을 대비하고 나찌와 전쟁을 벌여 격퇴하고 전후 폐허가 된 소련을 부흥시키는 엄청난 역사적 격변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처럼 역사의 거대한 격변을 무시하고 마치 진공 속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했던 것으로 가정하여 소련을 중상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토니 클리프는 사회주의에서의 생산성 향상 운동인 스타하노프 운동을 “자본주의적 착취의 가장 정교화된 방법인 테일러주의”(같은 책, 37쪽)와 유사하다고 비난하기 위해 레닌이 “기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로 비난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작 레닌의 글은 직접 읽지 않고 레닌이 쓴 글 제목만 인용하여 사태를 완전히 거꾸로 이해하는 촌극을 펼친다.

레닌은 “테일러 시스템- 기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노동자정치신문, 제51호, 임채희 번역)에서 자본주의 생산관계 내에서의 테일러 주의와 비교해서 사회주의에서 테일러시스템의 도입은 생산을 합리 적으로 조직하고 생산성을 향상시켜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시키고 더 많은 복지를 제공하면서 “자본에 의한 시스템의 노예화로부터 벗어나 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레닌의 테일러 시스템에 대한 태도와도 같은 사회주의에서의 생산성 향상 운동인데, 이 운동이 노동자들의 자발성에 기초하여 영웅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에서 착취가 종식되 었고, 노동자들의 노동이 사회 전체의 발전과 함께 자신들의 물질적 성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토니 클리프는 “집단화의 대물결 이후 연간 도살된 가축의 수는 이전에 도살된 가축 수에 결코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토니 클리프, 같은 책, 48쪽)라고 하여 집산화에 극렬하게 저항했던 부농이 가축 수천만 마리를 도살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은근하게 집산화 수행 주체들이 도살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게끔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2) 공업화와 집산화: 피의 강물이 흘렀다는 선정적 왜곡과 부르주아 역사관

토니 글리프는 “모순과 놀라움으로 가득찬 변증법적 역사 발전은, 관료층이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을 서둘러 해 내겠다는 주관적 의도를 가지고 내디딘 첫걸음이 국가자본주의의 건설의 토대가 되는 역설적 현상을 가져왔다”(토니 클리프, 같은 책, 149쪽)고 주장한다.

그런데 초공업화와 집산화를 “서둘러 해 내겠다는 주관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정작 프레오브라젠스키 같은 트로츠키주의자였다. 그는 이미 1923년부터 소련에서 “사회주의에서의 원시적 축적” 이라는 이름으로 공업화와 사회주의 부문의 확대를 위해 사적 부문의 희생(수탈)이 필요한데 그 희생을 농민이 주로 전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1924년에는 이를 보다 정교화 했다. 트로츠키 역시 일찍부터 공업 집산화 정책의 지지자였다.1)

1928년부터 시작된 공업화와 집산화는 “주관적 의도”의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대외적으로는 급성장하고 있는 나찌와의 전쟁에 대비해야 했고, 소련 내적으로는 1922년 말부터 발생한 높은 공업 생산품과 낮은 농업생산품의 격차 심화로 나타난 “협상 가격차 위기”(일명 가위 위기)가 2013년 10월에 정점에 달했는데, 이때 부농이 농업 생산물을 시장에 내놓지 않음으로써 도시 노동자들은 식량위기를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내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러시아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신경제정책(NEP)이 시행되었는데, 이 정책은 그 성공에도 불구하고 네프맨이라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과 부농의 성장이라는 폐해가 나타나는 계기도 만들었다.

1) 이와 관련해서는 제8회 맑스 코뮤날레에 제출된 노경덕 교수의“스탈린-트로츠키 경제

‘논쟁’ 재고, 1923-1927: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연결성 조명”을 보라. 이 글에서 노경덕 교수는 트로츠키가 제 12차 당 대회에서 1923년 4월에 공업 우선 원칙을 내세웠지만 농민을 수탈하는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글에서 “1920년대 스탈린과 트로츠키 간의 정권다툼, 스탈린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국 다수파의 승리, 그리고 그들 주도의 정책 추진, 이 모두는 실상 레닌주의의 실천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서론에서 언급했던 보수진영 학자들의 생각처럼,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는 연속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제국주의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일방적인 프로파간다에 가까웠던 쏘련과 관련 한 논의에 대해 “소련 공산당의 주요 회의였던 당 대회 및 당 협의회 기록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기존 연구들은 접근할 수 없었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문서 및 정치국 회의록 등” 실제적인 자료들을 가지고 새롭게 쏘련 사회의 역사를 탐구하는 최신 조류의 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스탈린이 서기국 장악으로 당내 권력을 장악했다는 제국주의 진영과 트로츠키 진영의 일방적 주장에 대해서도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이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1927년까지 스탈린은 서기국 조직을 통해 당원 인사권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그들을 자기 의사에 맞게 조종할 수도 없었다. 달리 말해, 동시대 스탈린 반 대파들의 수사적 언사들과는 달리 서기장 지위와 스탈린의 집권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소련역사에 대해 실사구시하는 흐름이 국내외적으로 생겨나고 있다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소련에서 공업화와 집산화는 필연적이었다. 다만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어느 계급이 중심이 되어, 어떠한 사상적 관점으로 추진하느냐가 문제였다.

스탈린과 당지도부가 1928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촌 집산화를 추진했던 것은 집산화된 농업에 트랙터, 콤바인 등을 공급할 수 있는 일정 정도의 공업의 발전과 농촌 내에서의 집단농장의 부분적 실험의 성공이라는 객관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물질적 조건이 결여된 상태에서 조급한 집산화는 농민과의 농맹을 위험에 빠뜨리고 집산화를 실패로 몰아가는 모험주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2)

토니 클리프는 이 상황을 간과한 채 공업화와 집산화를 “주관적 의도”라고 규정하는 관념론적 역사관에 빠져 버렸다. 집산화는 당시 농민이 압도적 다수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소련 농촌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로의 비약적 전환이었다. 특히 이미 혁명 이후에 주요 산업이 국유화가 되었던 공업부문과 다르게 농촌에서 수행된 집산화는 격렬한 계급투쟁으로 수행될 수밖에 없었다.

2) 집산화와 관련해서 스탈린이 처음에는 좌익 반대파의 입장을 비판하다가 나중에는 “좌익 반대파의 옷을 훔쳤다”고 비판하는 주장도 있다. 영국의 저명한 맑스주의 경제학자인 모리스 돕은 이와 관련해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만약 1925년에 틀렸다면, 3년 후에도 역시 틀린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1928년에 옳았다면 1925년에는 그 비난이 오류였다는 것이 이로써 증명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1928년 혹은 1929년에 실천 가능한 것이, 공업과 농업이 더 허약했던 이전 시기에도 필연적으로 실천 가능했다고 볼 수 없다. 혹은 1928년 상황에서는 절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농촌과 곡물시장에 대한 부농의 영향이 더 작았던 시기에도 똑같이 요구된다는 식으로 결론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모리스 돕, 임희철 역, 《쏘련경제사》, 형성, 1989, 238-239쪽)

1905년 이후로 예언자 트로츠키가 연속혁명론을 주장했는데 1917년에 트로츠키의 예상이 맞았다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은 비판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격렬한 계급투쟁에 대해 “본원적 축적기 동안 훨씬 더 많은 피가 소련에서 흘렀다”며 사태를 극도로 과장해서 선정적으로 이야기 한다. 그런데 이들은 농민의 희생을 강조하는데 이는 지극히 몰계급적인 관점이다. 집산화는 부농과 네프맨 대 주로 빈농과 중농 같은 기층 농민들과의 격렬한 계급투쟁이었다. “누가 누구를”은 누가 지배하고 누가 지배를 당하느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계급투쟁 슬로건을 농민(일반)의 희생이라는 부르주아적 휴머니즘의 관점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 반공주의 역사가들이나 극우 파쇼 언론처럼 이들은 파시즘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스탈린을 파시즘과 같은 학살자, 도살자로 묘사한다. 그런데 쏘련 적색 파시즘론은 소련과 파시즘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파시즘의 악랄함과 파시즘의 배후에 독점자본이 있다는 것을 은폐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다.

토니 클리프의 이 책 전체는 일방적인 통계와 주장으로 현실의 구체적인 쏘련의 모습을 왜곡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것을 다 반박할 수는 없다. 다만 “피가 소련에서 흘렀다”고 할 때, 자본주의 반혁명의 근거가 된다는 집산화 과정은 실제 어떻게 수행됐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과장된 수사를 사용하여 일방적인 주장으로 쏘련 역사를 비방하는데 단 한 번도 실제적으로 진행된 집산화 과정을 다루지 않고 있다.

수많은 반공주의 도서에 따르면 집산화는 당의 지도부와 스딸린에 의해 ‘강요’되었고 테러를 통해 수행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거짓이다. 집산화라는 격렬한 사건이 일어난 동안, 가장 억압받던 농민대중에게서 본질적인 추진력이 나왔다.…

집산화 기간 동안 볼셰비끼당의 노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30년 직전에 농촌에서 국가와 당 기구가 — 반쏘주의자들에 의해 형성된 ‘끔찍한 전체주의 기관’이라는 모습과는 정반대로 — 극히 미약했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기구들의 무력함은 꿀락들이 새로운 사회에 대항하는 사악한 전투에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이유의 하나였다…

2만 5000명의 노동자들은 꿀락들에 맞선 투쟁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먼저‘꿀락의 선전 선동(Kulak Agit-Prop, 꿀락들이 날조한 흑색선전)’이라고 불린 소문과 비방이라는 끔찍한 군대와 대결했다. 미개한 여건에서 생활하는 문맹의 농민 대중은 사제들(Pops, 그리스 정교회 성직자)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쉽게 조종당했다. 사제들은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꿀락은, 꼴호즈에 가입한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와 협정을 맺은 자들이라고 덧붙였다.

2만 5000명 중에서 많은 이들이 공격을 당하고 두들겨 맞았다. 꿀락들에 의해 수십 명이 총이나 도끼로 살해 되었다. …1928년에서 1929년에, 동일한 유언비어가 쏘비에뜨 전국 도처에서 퍼졌다. 꼴호즈에서는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공동소유(Collectivized)로 한다는 것이다. 꼴호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거대한 담요 아래서 잠을 잔다는 소리도 있었다. 볼셰비끼 정부는 수출용으로 여성들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도록 강요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볼셰비끼는 신원확인을 위해서 여성의 이마에 표시를 했다는 말도 있다. 그들이 지방의 주민들을 러시아화(Russify) 하려 한다고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꿀락들이 농촌에서 필수적인 생산력인 말과 소를 죽여서 집단 농장이 시작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농지에 대해 그들이 한 일은 바로 사역용 가축에 대한 것이었다. 꿀락들은 그 가축들 중 반을 죽였다. 그들은 그 가축을 집단농장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도살하였고, 똑같은 짓을 하도록 중농들을 자극했다.

1928년 농촌의 3,400만 마리의 말 중에서, 1932년에는 단지 1,500만 마리의 말만 남아 있었다. 어떤 볼셰비끼는, 마치 계급처럼 말도 청산되었다고 간결하게 표현했다. 7,050만 두의 소 중에서 1932년에는 단지 4,070만 두만 남아 있었다. 2,600만 마리의 돼지 중에서 겨우 1,160만 마리만이 집산화 기간 동안 살아남았다.

물론 이러한 생산력의 파괴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1932년에 대기근이 들었는데, 이는 꿀락들이 저지른 사보타지와 파괴가 부분적인 원인이었다. 그러나 반쏘주의자들은, 꿀락들의 범죄 행위로 야기된 죽음에 대해서, 스딸린과‘강요된 집산화’를 비난한다…시베리아에서 1930년 처음 여섯 달 동안, 꿀락들에 의한 1000 건의 테러행위가 기록되었다. 2월 1일부터 3월 10일까지, 4000명 이상의 꿀락들이 연루된, 19개의‘반란을 모의하는 반혁명 조직들’과 465개의 ‘꿀락의 반쏘비에뜨 단체들’이 적발되었다. 쏘비에뜨 역사가들에 따르면, ‘1930년 1월부터 3월 15일까지의 기간 동안 꿀락들은, 전연방에서(우끄라이나는 제외하고) 당과 쏘비에뜨 관리들 및 꼴호즈 활동가들에 대한 살인과, 꼴호즈와 집단 농장 농부들에 대한 파괴를 수반하는, 1,678건의 무장 시위를 자행했다’.…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 덕분에 농업 생산물은 1948년경에는 1940년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산화 시기에 650만 명의 꿀락들이,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350만 명이‘대학살’을 당했다고‘계산’한 콘퀘스트와 같은 비밀-파시스트를 대했을 때, 그는 이러한‘불충분한’ 추정치를 억지로 옹호하였다!97)”(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 《스딸린 바로 보기》, 정세와 노동, 노사과연)

이처럼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완전한 사회주의 건설의 조건 속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포위와 내부의 구 지배계급과의 투쟁 속에서 진행되었다. 더욱이 중세 짜리즘의 유산과 문맹 상태에 있는 대다수 농민들, 이 농민들의 의식과 삶에 수백 년 이상 영향을 미쳤던 성직자들과 그들이 유포하는 혁명에 대한 종교적 비방, 성직자와 결탁한 꿀락의 대대적인 반란 속에서 추진되었다.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생산수단의 공유에 대해 부인 공유제를 주장한다는 부르주아의 비방에 맞서 싸워야 했듯이, 콜호즈에서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공동 소유할 것이라는 비방과도 싸워야 했다.

집단농장의 탁아소를 저들은 저렇게 악의적으로 비방하며 집산화에 맞섰던 것이다. 특히 쿨락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볼셰비키와 콜호즈 활동가들에 대한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소련에서의 집산화는 러시아 10월 혁명 때보다 더 격렬하게 농촌에서 계급투쟁을 낳았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농촌에서 사회주의 생산 관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와 이에 맞서는 반혁명의 계급전쟁이 평화롭 게 진행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 집산화의 주력 대오는 조상들에 이어 평생을 가난과 모욕 속에서 살아온 빈농들이었다. 볼셰비키들은 빈농의 혁명적 열정에 기대면서도 때로는 지나침을 바로잡으려고 애썼다.

이 미증유의 계급투쟁의 결과 쏘련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안정 적으로 자리 잡았다. 집산화를 두고 콘퀘스트와 같은 제국주의 선전 기관의 첩자가 된 역사가들의 선전을 가지고 “본원적 축적기 동안 훨씬 더 많은 피가 소련에서 흘렀다”고 주장하며 쏘련을 비방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며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것이다.

제국주의 진영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일방적인 악선전만 들었는데, 이 글에서는 집산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면 제한으로 인해 집산화 과정을 다 소개할 수는 없다. 이 책을 보면 한국사회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일련의 운동세력들이 사회주의 건설의 구체적 과정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왜곡을 일삼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3. 무기경쟁: 국가자본주의 최후의 도피처이자 투항론

소련이 국가자본주의라는 주장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 내부(제4 인터내셔널 경향)와 외부에서 “관료가 어떻게 자본가일 수 있는가?”, “착취가 종식되고 사적 자본 간의 경쟁과 소자본의 파산과 독점이 없는 소련이 어떻게 국가자본주의인가?”라는 반박이 제기됐다.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맑스가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분석한 《자본론》의 원리로 쏘련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도피처는 소련이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군사적, 경제적 경쟁을 했고 이것이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만들었다는 주장이었다.

우리가 러시아를 일단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맥락에 놓고 보면, 사태는 달라진다. 왜냐하면 소련이 세계체제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는 소련 경제에서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가 군비 생산에 있다는 사실로 반영되는데, 실제로 러시아에서 군비 생산은 국민총생산이 12~14%라는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20년대에 집산화와 공업화 정책을 처음 결정한 것은 스탈린의 악의와 권력욕의 소산이라기보다는 객관적 상황의 압력 -서방의 군사력에 맞설 필요-의 결과였다. 오늘날에도 동일한 압력이 러시아를 세계체제에 계속 결박하고 있으며, 잉여노동을 연합한 생산자들의 복지 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생산을 증대하기 위해 재투입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 결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분석한 것과 원리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목적은 소비가 아니라 축적, 즉 생산을 위한 생산이다…. 그리하여 소련에서 지배적인 생산관계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이다. 노동자계급은 서방 자본과 경쟁하는 국가관료한테 집합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다.(알렉스 캘리니코스÷마르크스의 사상』북막스, 251쪽)

그런데 “모순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변증법적 역사 발전은, 관료층이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을 서둘러 해내겠다는 주관적 의도를 가지고 내디딘 첫걸음이 국가자본주의의 건설의 토대가 되는 역설적 현상을 가져왔다”는 토니 클리프의 주장과 “1920년대에 집산화와 공업화 정책을 처음 결정한 것은 스탈린의 악의와 권력욕의 소산이라기보다는 객관적 상황의 압력 -서방의 군사력에 맞설 필요-의 결과”라는 주장은 서로 완전히 배치되지 않는가? 모름지기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해먹는다고 했는데, 손련을 반혁명으로 변질됐다는 집산화의 계기에 대해 이렇게 자기들의 “사상의 은사”와 정반대의 얘기를 해서야 어디 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나?

이들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객관적 상황의 압력”으로 “서방의 군사력에 맞설 필요”를 들고 이를 근거로 소련이 자본주의처럼, “축적, 즉 생산을 위한 생산”을 하는 체제가 되었고, 자본주의와의 군사적 경쟁이 작용하면서 “소련에서 지배적인 생산관계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라고 비약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무기생산의 주된 목적이 과연 자본주의에서의 생산의 목적처럼 판매(교환)를 통해 잉여가치를 수취하기 위한 생산이었는가?, 제국주의로부터 체제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는가? 스스로의 입으로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소련에서 무기생산이 “객관적 상황의 압력”으로 “서방의 군사력에 맞설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들은 그 상황을 어떻게 회피할 것인가? 소련에서 무기생산은 인민의 복지로 돌려야 할 생산의 결과를 제국주의와의 대결로 쏟아 붓게 하는 손실이었다. 제국주의에서는 군산복합체처럼 전쟁과 무기 판매를 통 해 독점자본에게 거대하게 이윤을 남기는 수단이 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 무기 생산은 주로 불가피한 손실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 손실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이 “객관적 상황의 압력”을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는가?

핵과 미사일은 결코 제국주의에 맞서거나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북한 지배자들의 행태는 북한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또 다른 착취·억압 체제임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다.

북한의 핵개발은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 관료적 국가자본주 의 체제의 지배계급인 북한 관료들은 자본주의적 경쟁 논리에 따라 독자적으로 핵무장 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북한 지배자들의 호전적 대응이 보여 주는 것 북한 국가자본주의 의 본질과 모순, 김영익 | <레프트21> 102호, 2013.4.13)

핵과 미사일이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지만, 핵을 가진 나라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위력적인 무기는 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객관적 상황의 압력”으로 “서방의 군사력에 맞설 필요”가 “또 다른 착취·억압 체제임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는가? 과연 서방의 군사력에 반제국주의 정신의 힘만으로 그 객관적 상황의 압력을 돌파할 것인가? 제국주의와의 군사적 경쟁으로 인해 자 본의 경쟁원리가 작동하고 이것이 쏘련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규정하게 되는 요인이라는 논리적 비약도 문제지만, 이들은 “객관적 상황의 압력”을 피할 아무런 대책이 없다. 결국 “서방의 군사력에 맞설 필요”에 의해 방어용으로 만드는 쏘련이나 사회주의 체제의 무기생산을 부정한다면 남는 것은 무장해제뿐이다.

무장해제론은 투항론이다.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서 사상적 무장해제를 하는 것과 같이 제국주의 군사적 공세에 맞서 무장해제를 주장하는 것 역시 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에 사회주의 권력을 통째로 넘겨주는 이적행위이다. 더욱이 제국주의 공세에 맞서 인민 복지에 돌려야할 재원을 고통스럽게 무기생산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의 현실을 부정하고 이를 근거로 자본주의 착취와 억압체제라고 악선전을 하는 것은 제국주의자들의 이해에 놀아나는 반동적 행위와 다름없는 것이다.

소련의 군비 생산이 “객관적 상황의 압력 -서방의 군사력에 맞설 필요-의 결과”였고“오늘날에도 동일한 압력이”가해지고 있다고 하면서 “북한의 핵개발은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이중잣대는 또 무엇인가? 소련과 중국, 1962년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에 나오듯이 핵미사일 개발과 배치 시도와 “북한의 핵개발”은 다 제국주의의 군사적 위협에서 체제를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

오늘날 미제국주의와 나토 제국주의에 의해 전토가 박살내고 주권을 강탈당한 이라크, 리비아와 시리아,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군사적, 정치적 공세를 보라!

“핵과 미사일”이 없이 “국제적 연대를 위한 수단”만으로 매해 사상 최대 규모를 갱신해가며 연례적인 군사책동을 전개하고 평양 침투작전과 “참수작전”으로 군사적으로 말살시키기 위해 공세를 취하고 있는 제국주의 진영의 공세에 맞설 수 있는가? 과연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 계급은 자국 내에서 제국주의 전쟁 책동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것이 있었다면 오늘날 제국주의가 치르는 전 세계적인 전쟁과 살육, 파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의 핵개발”을 반대하며 “국제적 연대”를 강조하던 <노동자연대>는 정작 소련과 북을 타도해야 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규정하고 중상과 비방을 일삼으면서 제국주의 진영의 이해에 복무해 왔을 뿐이다.

이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국가자본주의론의 근거이자 스탈린을 악마화하기 위해 즐겨 인용하는 문장이 있다.

스탈린은 외부와의 경쟁을 위해 축적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이렇 게 말했다. “공업화 속도를 늦추면 뒤처진다. 뒤처지면 패배한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이나 뒤져 있다. 10년 안에 이 격차를 메워야한다.”(박노자 교수와의 논쟁② 옛 동구권과 현 중국 사회의 성격, 그리고 제국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김영익|<노동자 연대> 149호, 2015.5.29)

그런데 스탈린의 유명한 이 연설 문구는 스탈린과 소련을 중상모략하기 위해 트로츠키 진영 내에서 즐겨 인용하는 부분이다. 이들이 앞뒤 잘라먹은 연설문의 실제 내용을 좀 더 소개해보겠다.

자본가들이 어떻게 경제 공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가를 보자. 그들은 노동자들의 임금과 원료 값을 최대한으로 낮춘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 소비품인 공업품과 식료품 가격은 조금도 진정으로 낮추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기본적인 상품 소비자들을 희생시켜, 즉 노동자, 농민, 근로인민들을 희생시켜 공황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우리의 우월성은, 우리가 과잉생산 공황을 모르며 우리에게는 수백만의 실업자들이 없으며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우리가 계획경제를 실시하기 때문에 생산의 무정부성을 모른다는 데 있다. … 그러나 우리에게는 보다 더 무겁고 중요한 다른 의무가 있다.

그것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앞에 부여 받은 의무이다. … 소련의 노동계급은 세계 노동계급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소련 노동계급의 노력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세계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승리하였다. … 우리는 자본가들에 맞서 그들을 지지하며 세계 혁명의 위업을 확대 발전시키자고 말하도록 전진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 노동계급의 기대를 실현하며 그들 앞에 부여받은 우리의 임무를 실행하여야 할 것인가? 그렇다.”(스탈린, 경제일꾼들의 과업에 대하여, 1931년 2월 4일)

스탈린은 이 연설에서 1929년에 발발한 자본주의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자본주의 국가가 대량실업과 빈곤과 낭비에 빠져 있을 때 소비에트 체제 계획경제의 우월성을 확인하며 경제일꾼들에게 국제적, 국내적 임무를 강조했다. 스탈린은 이 연설에서 볼셰비키 경제일꾼들이 관료주의에 빠지지 말고 과학기술을 습득하고 생산과 경제운용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과업을 수행치 않으면 자본주의 국가에 짓밟혀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과 스탈린을 비방하기 위해 “일국사회주의론”이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자본축적을 위한 것이라며 인용하는 것과 다르게 여기서 스탈린은 쏘련 사회주의의 성공적 발전과 “세계혁명의 위업을 확대 발전”하는 국제주의적인 임무를 통일적으로 사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쏘련에서 공업화와 집산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1928년에는 파 시즘의 위협이 현실적인 위협이 됐고, 1932년에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다. 1939년에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1931년에 스탈 린이 이 연설을 했는데 정확히 “10년 안”인 1941년에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다. 1941년 6월 22일부터 1945년 5월 9일까지 히틀러의 소비에트 연방 침공에 맞서 “대조국 전쟁”이 전개됐다. 이 전쟁에서

독일 히틀러 파시즘이 패배하고 동부 유럽 국가들이 파시즘의 지배에서 해방됐다. 추축국(樞軸國)의 중심에 있었던 독일 히틀러 파시즘의 패배 이후에 소련은 1945년 8월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을 괴멸시키면서 일본 제국주의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내몽고와 조선에서의 식민통치가 종결됐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패배 이후에 중국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국가자본주의론자들 뿐만 아니라 트로츠키 자신을 포함해 (정통)트 로츠키주의자들은 위대한 “대조국전쟁”에서조차도 스탈린에 대한 중상을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스탈린의 혜안이 없었으면 어떻게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그 공업화와 집산화 개시 11년 내에 폴란드가 침공당하고 13년 내에 쏘비에트 연방이 침공을 당했다.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쏘비에트 조국을 사수하기 위한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과 스탈린의 지도력과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발전이 있었다.

소련의 방어 기반을 형성하고 조직하는 것에서 노동자 계급의 소비에뜨 권력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앙계획 경제와 생산수단의 사회화로 인한 이점들 때문이었다. 노동자 계급과 함께 인민 대중의 선도적 역할 때문이었다. 혁명적 노동자 전위로서 공산당의 역할 때문이었다. 이는 현재와 미래의 혁명 운동에 매우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다.

10월 혁명 이후 벌어졌던 내전이 종식되고 나서 20여 년 동안에, 의식적으로 계획된 사회-경제적, 문화적 발전, 사회주의 건설의 진로를 따르는 거대한 성과의 과정이 없었더라면, 소련의 수호는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테러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었고, 생산이 지속될 수 있도록 수천 개 공장과 기업들을 서부지역에서 소련의 내륙지역까지 이전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 인민들이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독일군이 지역을 파괴했을 때 전쟁 와중에 그들 인민들은 파괴된 지역을 재건했다.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전선에서 싸웠던 남성을 생산에 서 대신해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00만 명 이상의 여성들이 콜호즈(협동농장)에서 운전자와 정비사가 되었다. 100만 명이 전선과 빨치산 부대 투쟁에 참여했던 동안에 20만 명 이상이 생산단위를 책임지고 콜호즈의 책임자가 되었다.(1945년 5월 9일, 제2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 종전과 인민의 위대한 반파시즘 승리 70주년을 맞이하여, 2015년 4월, 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 노동자정치신문, 2015년 8월 13일)

결국 여기서도 이처럼 현실의 사회주의 역사를 중상모략하는 것이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을 포함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4. 중공업 우선 정책 비난: 생산과 소비 관계에 대한 이론적, 실제적 무지

노동자연대와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쏘련에서의 집산화와 공업화 정책을 “객관적 상황의 압력-서방의 군사력에 맞설 필요”만으로 왜곡할 뿐만 아니라, “중공업 우선 정책”에 대해서도 대중의 소비를 경시한다면서 비난을 퍼붓는다. 게다가 이들은 공업화를 “강제 공업화” 라고 중상모략하면서 “소위‘계획’이라고 하는 것이 관료의 생산수단 축적에 대중의 소비를 완전히 종속시킨 것에 지나지 않음도 보여준다.”라고 주장한다.(토니클리프 국가자본주의론, 크리스 하먼의 서문, 23쪽)

자본주의 하에서 대중의 소비는 축적에 종속된다. 어떤 때는 축적과 동시에 소비가 증가하며, 다른 때는 축적은 증대하는 반면 소비가 감소한다. 그러나 어느 상황에서나 기본적인 관계는 여전히 남는다.

우리가 만일 10월혁명부터 소련의 역사를 추적해 오면,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러한 종속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때 이후부터는 그것이 전례없이 잔인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토니 클리프, 46-47쪽)

토니 클리프는 “전례없이 잔인하게 나타나고 있”는 사례로 “생산수단과 소비수단으로 총생산량의 분배”라는 통계를 인용하는데, 이 통계는 1927-1928년에 생산수단 생산은 32.8%인 반면 소비수단 생산은 67.2%이고, 1932년에는 생산수단 생산이 53.3%이고 소비수단 생산이 46.7%로 역전되는 통계를 제시한다. 그런데 토니 클리프는 “전례없이 잔인”하다는 표현으로 이 역전을 억압과 강제, 착취를 연상시키려 하는데, 사실 이는 소비수단 생산 중심에서 생산수단 생산으로 비중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중공업 우선 정책을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이라며 이윤추구가 목표인 자본주의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축적과 무매개적으로 뒤섞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스탈린은 맑스의 《자본론》을 인용하여 사회주의에서의 생산과 소비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맑스의 재생산론의 다음과 같은 기본 명제 즉 사회적 생산을 생산 수단 생산과 소비재 생산으로 구분할 데 대한 명제, 확대 재생산에서 생산 수단 생산의 우선적 성장에 대한 명제, 제1부문과 제2부문 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명제, 축적의 유일한 원천으로서의 잉여 생산물에 대한 명제, 사회적 폰드의 형성 및 그 사명에 대한 명제, 확대 재생산의 유일한 원천으로서의 축적에 대한 명제 – 이 모든 기본 명제는 비단 자본주의적 구성태에만 타당한 것이 아니며 그것을 적용하지 않고서는 어느 사회주의 사회도 인민 경제를 계획화할 수 없는 바로 그러한 명제인 것이다. … 맑스를 본다면 그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 법칙의 연구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며 따라서 <자본론>에서 자기의 재생산 도식이 사회주의에 어떻게 적용되겠는가 하는 문제는 연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론>, 제2권, 제20 장, ‘제1부문의 불변자본’이라는 절, 즉 제1부문 내에서의 제1부문 생산물의 교환을 설명하고 있는 절에서 맑스는 이 부문에서의 생산물 교환은 사회주의 하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단히 진행될 것이라고 부언하고 있다.”(스탈린, 소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적 제 문제)

사실상 맑스주의 재생산론은 현대 사회가 해마다 축적하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 없으며 똑 축적은 해마다 확대 재생산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하고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집중화된 대규모적인 사회주의적 공업은 맑스주의적 확대재생산론에 의해서 발전되고 있다.(스탈린, 소련에서의 농업 정책의 제 문제에 대하여)

자본주의 생산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생산에서도 축적과 확대재생산을 하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 없다. 맑스의 재생산 표식론은 생산수단 생산이 소비재 생산의 견인차임을 밝히고 있다. 모리스 돕에 의하면 소련에서 중공업 우선 정책으로 소비재 생산수단 부문이 상대적인 비율로는 줄어들기는 했으나 양적으로는 소비재 생산 역시도 87%나 증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생산과 소비는 절대적으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생산이 소비를 강화시킬 수 있다.

소련에서 공업화와 집산화와 같이 추진됐던 것은 공업화를 통해 집단농장에 콤바인, 트랙터 등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반대로 집단농장에서는 공업에 필요한 공업용 곡물원료와 도시 노동자에게 식량을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었다. 소련에서 공업화와 집산화는 지극히 후진적인 봉건적 유산이 남아 있는 소련을 현대 공업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하고 무상주택,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보육, 연금제도 등 무상복지 체제의 근간을 마련하도록 했다.

<노동자연대>는 이 중공업 우선 정책을 근거로 소련과 마찬가지로 ‘북한’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근거로도 이용하는데, 북의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도 중공업과 경공업 생산을 둘러싸고 첨예한 논란이 있었다.

당이〔경공업 및 농업과 동시에 중공업을 건설하겠다는〕노선을 발표하였을 때 당내의 종파주의자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또 몇몇 해외의 동지들도 우리 당의 정책에 간섭하였다. 종파주의자들은 중공업에 너무나 많은 중요성을 부과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즉 그들은 “기계가 어떻게 쌀을 생산하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우리에게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잘살고 그리고 그 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도 모든 자원과 외국 원조를‘먹어치워버릴 것’을 요구하였다. 우리 당은 중공업에 우선을 두지 않으면 인민대중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없으며, 우리의 방어력이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자립적인 민족경제의 기반을 마련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러한 노선을 거부했다. 사실 기계가 쌀을 생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공업은 농업과 경공업 발전의 기초다. 우리가 더욱 많은 농업용 기계를 생산할 때 더욱 많은 쌀을 생산할 수 있다. 우리가 더욱 많은 장비를 만들 때, 우리는 더욱 많은 집을 짓는다. 그리고 배를 사용하여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2, 돌베개, 67-68쪽)

<노동자연대>는 개별 가정에서 빵소비의 문제가 아니라 수천만, 수억의 빵소비의 문제를 앞에 두고 빵을 손으로만 만들려고 하는가? 빵 기계의 생산, 빵기계의 생산을 발전시키는 기계제 공업의 발전에 대한 집중적 투자와 발전은 빵생산을 앞당기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쌀 생산 역시 기계화와 비료 생산, 토지의 합리적 이용을 위한 과학기술의 발전, 계획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집단농업의 발전 없이는 증대될 수 없을 게 너무나 명확하다. 전 사회적 계획에 바탕을 둔 중공업 우선 정책은 소비재 생산을 추동해낼 것이며 인민경제를 안정화 시키고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체제를 보호하게 할 것이다.

<노동자연대>와 해외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와 혁명적 사상에 충실하지 않았을 뿐더러, 단 한 번도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를 현실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관념적으로 진공 속에서의 완전한 사회주의 상을 머릿속에 그리고 현실의 사회주의가 자신들이 고안한 상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것을 비난하고 심지어 왜곡해서 중상모략하는 극악한 종파주의 선전에만 골몰해 왔던 것이다.

5. 이른바 (정통) 트로츠키주의: ‘정통’기회주의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오랫동안 비판이 제기되고 이 노선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반동적인 노선으로 파산하게 되자 최근에는 국가자본주의론을 포기하고 (정통) 트로츠키 노선으로 돌아가 그 파산을 구제하려는 흐름이 생겨나고 있다. 그런데 (정통)트로츠키는 국가 자본주의 노선의 기회주의, 종파주의 노선을 극복하는 노선이 아니라 그것을 낳은 정통적 기회주의 노선에 불과한 것이다.

1900년대 초부터 1917년 혁명 몇 달 전까지 트로츠키는 레닌과 볼셰비키를 비난하면서 멘셰비키 진영에 발을 담그기도 하면서 반볼셰비키 진영에 있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 혁명의 물줄기가 볼셰비키 쪽으로 향하자 그제야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진영에 가담했다.

정치 활동에서 수십 년 동안 취했던 기회주의 노선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트로츠키는 자신의 오류는 오직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화해론”뿐이었다고 강변하며 자신의 기회주의 노선을 정당화한다.

그런데 혁명 이후에도 역시 트로츠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트 강화 조약, 노동조합 논쟁 등에서 반레닌적 입장에 서서 당내 위기를 조장하면서 당을 분열시켰다. 레닌은 트로츠키를 비롯한 분파주의자들의 행위를 거듭 경고하며 당내 당인 분파의 금지와 당의 단결을 거듭 외쳤다. 레닌 사후에도 트로츠키는 계속해서 당조직에 반하는 행위를 하였다.3)

트로츠키는 1936년 《배반당한 혁명》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트로츠키는 이 책에서 스탈린 시대의 쏘련을 프랑스 혁명 당시 급진파 자코뱅을 축출하고 들어선 보수파 지롱드당의 권력 찬탈과 비교하며 “대중에 대한 관료집단의 승리”(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옮김, 갈무리, 132쪽)이라며 “소련에서의 테르미도르 반동”이라고 주장했다. 봉건제로의 완전한 복귀는 아니지만 지롱드 같은 반동적 정치세력이 권력을 찬탈하여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배반했던 것처럼 소련에서도 마찬가지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3) 트로츠키에 대한 레닌의 공식 비판과 당 중앙위원회의 공식 비판은 “AGAINST

TROTSKYISM THE STRUGGLE OF LENIN AND THE CPSU AGAINST

TROTSKYISM, PROGRESS PUBLISHERS Moscow) 책에 소상하게 정리되어 있다.

트로츠키는 이 책에서 소련의 경제적 성취를 긍정하고 경제적 토대 를 유지하면서도 “테르미도르 반동” 체제인 소련의 상부구조, 즉 당과 국가를 정치혁명으로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의 경제적 성취와 사회주의 발전이 당과 지도자의 지도력 없이 객관적 조건의 덕택이었다는 것은 트로츠키의 경제주의 소산이다.

관료집단이 노동자국가를 집어삼킬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계급이 이들을 쓸어 없애 버릴 것인가? 이 문제에 소련의 운명이 달려 있다.

소련 노동자의 절대 다수는 아직까지도 관료집단에 대해서 적대감을 품고 있다. 농민 대중 역시 이들에 대해서 건강한 인민의 증오심을 품고 있다.”(트로츠키, 같은 책, 284쪽)

이것이 1936년에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고립되고 추방된 트로츠키의 쏘련에 대한 정치적 태도였다. “소련 노동자의 절대 다수”와 “농민대중”이 스탈린 “관료집단”에 대해 적대감과 증오심을 품고 있다고 볼 정도로 트로츠키의 정치감각은 초현실적이고 초주관주의적이다.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은 토니 클리프의 《소련 국가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쏘련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을 가지고 중상모략으로 가득차 있다.4)

1936년의 정치 상황은 볼셰비키당과 소련 내부의 인민들의 정치적 단결과 신뢰, 결속이 가장 높을 때이다. 볼셰비키 공산당과 인민들은 1929년에 발발하여 30년대 내내 주요 자본주의 국가를 강타한 초유의 세계 대공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대한 사회주의 건설의 성과를 바탕으로 전진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파시즘과의 임박한 대결전을 준비해가고 있었다.

(정통) 트로츠키 노선이 국가자본주의자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노선은 소련 및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방어노선이었다. 그런데 파시즘과 쏘비에트 체제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준비해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소련의 경제적 토대는 방어하되 상부구조, 즉 당과 국가를 타도한다는 노선은 쏘련을 국가자본주의 착취제제로 보고 타도해야 한다는 “국가자본주의”노선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트로츠키의 (군사적) 방어노선은 입에 발린 립 서비스를 빼면 1936년의 정치적 상황에서 실제 어떠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

4) 트로츠키는 이 책의 서문과 본문, 보론 등에서 시드니 웹(Sidney Webb)과 베아트리스 웹(Beatrice Webb) 부부의 공저인“소비에트 공산주의: 새로운 문명(Soviet Communism: A New Civilization)을 여러 차례 비판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심지어 크리스 하먼조차도 《민중의 세계사》에서도 이 책을 인용하는데, 하먼은 이 책에서 웹부부가 이 책 초판을 낼 때에는 “Soviet Communism: A New Civilization?”이었는데 재판에서는“A New Civilization”이라고 제목에서 물음표(?)도 없애가며 웹부부가 소련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트로츠키는 웹부부의 “페이비언주의자”로서의 정치성향을 들먹이며 이들 부부가 “보수적이면서도 현학적인 사회주의의 가장 권위있는 대표자들”이라고 비난하며 이들을 “교양있는 부르주아들을 위한 볼셰비즘” 또는 “급진파 관광객들을 위한 사회주의”라고 비꼬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1935년(Longmans)에 출판되었는데, 제국주의 진영의 소련에 대한 무지막지한 중상이 고조될 시점에 출판되어 전 세계적으로 소련의 참된 실상을 밝히는데 기여했다. 그렇기 때문에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여러 차례 이 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과 함께 쏘련을 비방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도 이 책의 출판은 뼈아픈 일이었기 때문이다.

웹부부는 말년인 1942년 “쏘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진실(The truth about soviet russia)”이라는 얇은 책을 다시 발행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스탈린 헌법”제정 당시에 전 쏘비에트 인민들이 공장, 직장, 지역 내에서 이 헌법을 가지고 용광로적인 열정으로 집단토론을 하는 소비에트 체제의 민주적 작동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웹부부의 “The truth about soviet russia”은 구글 검색으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Soviet Communism: A New Civilization”은 국회도서관에 영국왕립도서관 기증 1권과 2권이 있다. 해외에서 구매해서 볼 수는 있다. 이 책은 트로츠키의 일방적인 비난과 다르게 웹 부부다운 학문적 성실함으로 방대하게 소련 사회주의 구체적 면모를 살펴보고 있다.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 그것도 개량주의의 대명사인 “페이비언주의자”들도 “새로운 문명”이라고 찬사를 보낼 만큼 소련의 성취는 거대했던 것이다. 소련에 대한 제국주의 진영의 프로파간다와 트로츠키진영, 흐루시초프를 포함한 수정주의 진영에 의해 일방적으로 편향되고 정치적으로 각색된 소련을 넘어 스탈린 시대의 쏘련 사회주의, 현실 사회주의의 진짜 모습을 보려는 과학적이고 양심적인 태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현재 소련 해체 뒤에 “냉전”이 끝나자 쏘련의 진짜 모습을 학문적으로 살펴보려는 학자들이 국내외적으로 생겨나고 있는데,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국가보안법이 이 사회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로막고 있다.

‘테르미도르 소수 독재자들은 … 테러주의적 방법에 매달린다. …쏘련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임무는 여전히, 이러한 테르미도르 관료제도의 전복으로 남아 있다. … 오직 억압받는 대중의, 승리하는 혁명적인 반란만이 쏘비에뜨 체제를 소생시키고 사회주의를 향한 앞으로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다. 쏘비에뜨 대중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지도할 능력이 있는 오직 하나의 정당이 있는데, 바로 제4인터내셔널이다.’36)

모든 뜨로츠끼주의자 분파들이 자신들의 기본 강령으로 여기는 이 문서에는 놀라운 문장이 포함되어 있다. 언제 이러한 ‘반란’과 ‘봉기’가 일어날 것인가? 뜨로츠끼의 대답은 너무나 솔직해서 놀라운데, 뜨로츠끼는 히틀러가 쏘련을 침략했을 때를 그의 반란의 시기로 꼽았다.

‘쏘비에뜨 노동자들이 혁명적 봉기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 그 추진력은 아마도 국가 외부의 사건에 의해서 제공될 것이다.’37)

다음 인용문은 이중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1933년에 뜨로츠끼는 독일의 스딸린주의자들의 ‘주요한 잘못’은 파시즘에 대항하는 사회 민주주의와의 연합 전선을 거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1933년에 권력을 잡을 때까지, 사회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단결하자는 독일 공산당의 제안을 계속 거절했다. 1940년 5월, 유럽 지역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지 8개월 후에 ‘연합 전선’의 가장 위대한 전문가인 뜨로츠끼는 붉은 군대(Red Army)에게 볼셰비끼 정권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라고 제안했다! 그는 쏘비에뜨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그의 공개서한에서 이렇게 적었다:

‘제4인터내셔널의 목적은 … 기생적인 관료제를 정화함으로써 쏘련을 재생시키자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가능하 다: 그것은 압제자들과 기생충들이라는 새로운 특권계급(카스트, caste)에 대항하여 봉기하게 될 노동자, 농민, 붉은 군대의 군인, 붉은 함대의 수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대중 봉기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당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제4인터내셔널이다.’38)

히틀러가 쏘련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 선동가 뜨로츠끼는 붉은 군대에게 쿠데타를 실행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건은, 파시스트 탱크에 국가전체를 열어주어, 대재앙이 되었을 것이다!”(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 스탈린 다시 보기(8장 끝), 정세와 노동, <노사과연>)

“쏘비에뜨 대중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종용하고 이를 “지도할 능력이 있는 오직 하나의 정당”인“제4인터내셔널”의 건설, 이것이 바로 트로츠키의 반소 반공주의 노선의 가장 명확한 슬로건이다. 소련 인민 내부로부터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고립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을 타도할 수 있는 “그 추진력은 아마도 국가 외부의 사건에 의해서 제공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추진력”, 즉 히틀러가 소련에 대한 전쟁을 감행할 때 그 힘을 등에 업고 범죄적인 반소비에트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것이다.

6. 정치적 과제

소련 사회주의는 오류와 한계가 없었는가? 무수한 오류가 있었다.

인류 사상 최초로, 그것도 짜리즘의 유산과 제국주의의 공세, 반혁명 분자들의 내란에 맞서 싸우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하는 소련 인민들이 무수하게 오류와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소련의 성취는 인류 최대의 성취였고, 소련의 한계는 인류의 한계였다. 흐루시초프 등장 이래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굴절됐다고 해도 이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소련은 해체했지만 우리에게는 두 개의 무기가 손에 쥐어져 있다. 첫째, 소련 해체의 경험이다. 이제 우리는 전인미답의 길이 아니라 소련으로부터 배우고 소련보다 더 전진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이 있다. 둘째, 우리에게는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생산력이 있다. 우리의 출발점은 짜르 전제와 아시아적 후진성이 아니라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이다. 변혁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더 성숙해 있다.

소련 해체 이후 부르주아는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다짐했지 만 그 이후 몇 차례의 세계적 공황과 전쟁의 재앙으로 “자본주의는 더 이상 대안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그 대신 나온 저들의 구호는 “착한 자본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착할 수도, 인간의 얼굴을 할 수도 없다. 전쟁과 인민 다수의 참혹한 빈곤과 억압, 착취, 범죄, 공동체의 파괴, 연대를 대신하는 극도의 개인주의가 자본주의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혁명적 주체를 세울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다시 맑스-레닌주의의 과학적, 혁명적 사상으로 무장해야 한다. 교조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과 역사 위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종파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제국주의와 부르주아의 프로파간다에 맞서 소련 및 현실 사회주의의 참모습을 실사구시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제국주의의 포위 말살 공세에 맞서 현실 사회주의가 자주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

소련 해체 원인에 대해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전쟁과 실업, 빈곤과 약탈로 얼룩진 자본주의 모순을 척결하고 다시 인류의 진보적 발전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노동자연대 #국가자본주의론 #맑스주의와포스트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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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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