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의 변증법적 결합의 문제 -김웅진 선생과 Sam Song 씨의 논쟁에 대하여

2018년 10월 21일

김웅진 선생은 과학의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여 전문적 과학지식을 펼치고 있는 반면 Sam Song 씨는 심령의 존재를 인정하라며 인간 지식의 유한성과 상대적 진리를 인정하라고 합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과학주의에 입각하되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의 결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 사상에 입각해 인간의 지식은 현재로서는 유한하지만(상대적 진리) 그럼에도 인간의 지식은 끝없이 발전(절대적 진리)한다고 했습니다.
엥겔스를 비판하는 한 때 한국의 내노라하는 한 ‘맑스주의’ 철학자는 엥겔스가 <자연변증법>에서 주장했던 자연과학 일부가 틀렸다며 엥겔스 저작의 위대한 가치를 부정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엥겔스 저작을 풍문으로 접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엥겔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확고한 토대를 두어야 하며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롭게 변화발전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레닌도 1차 러시아 혁명의 패배 이후 엥겔스의 이 방법론을 들어 창신론자를 비판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그 트로츠키적 철학자는 수년 전에는 스웨덴 사민주의가 전망이라고 했는데 최근에는 종교로 귀의했다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그 때도 그 철학자한테 말했다시피 장고 끝에 악수를 둔 것이죠. 실천과 결합하지 않는 비맑스주의 방식으로 골방 속에서 철학을 탐구하다보니 자의식의 세계로 끝없이 도피하다 끝내 기독교로 귀의하여 안식처를 찾은 것이죠. 그 안식처는 위선의 도피처이지만요.
기본적으로 우리는 심령 따위의 비과학이 아니라 과학에 입각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물질(육체)을 떠난 정신의 독립성은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은 정신이 고도로 발전한 뇌운동의 물질적 산물이라고 보지만 그럼에도 정신은 물질 자체는 또 아니지요. 정신의 상대적 독자성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기계적 유물론이겠죠.
우리는 이처럼 매사를 과학에 입각하지만 그 과학도 상대적 진리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
지금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고 상대적 진리와 오류의 과정을 거치면서 절대적 과학적 진실로 규명된 것도 있지만 그러한 과정을 볼 때도 당대 인간 지식의 유한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어느 날 인간 지식의 확장으로 새로운 발견이 됨으로써 인간 과학지식의 끊임없는 진보와 발전을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절대적 진리로 향해 나아가면서 인간은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시대의 종교는 중세 시대처럼 무지하지 않고 과학을 일부 수용하면서 종교적 관점으로 과학을 운운하기도 하더군요.
대표적으로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폴 데이비스, 정신세계사, 정신과학총서 2, 2000년 8월) 같은 책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신과학은 기본적으로 비물질적으로 말미암아 비과학입니다. 게다가 종교과학은 근본적으로 비겁합니다.
인간 지식의 유한성을 말하며 상대적 진리를 말하지만 인간진리의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항상 불가지론으로 빠집니다. 불가지론의 끝에서는 항상 조물주가 버티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정신과학자들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인정합니다. 당시 종교마녀사냥이 횡행하며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를 종교물신주의로 화형시켰습니다. 그리고 갈릴레이마저 처형하려 했지요. 다행히 갈릴레이는 기지로 살아남았지만요.(물론 브루노의 화형은 종교주의자들도 인정하지만 갈릴레이에 대한 탄압은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비과학의 종교가 과학 기술발전으로 더 이상 절대적 진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자 나중에야 지동설을 진리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 종교의 비과학성을 인정해야할 텐데 저들은 인간 지식의 현재적 한계 너머로 또 도망가서 미지의 세계에서 피안을 얘기합니다.
저들은 항상 과학기술발전의 뒤로 도망가면서도 우주출현의 기원이라는 여전히 미개척한 과학의 영역으로 도망갑니다.
결론적으로 저들 관념론자들은 현대물리학의 과학으로 창조주를 발견하고 검증한 것이 아니라 지식 저 너머 무지라는 피안의 세계로 도망쳐버린 것입니다. 인간 지식의 현재적 유한성으로 과학을 부정하고 그 자리를 창조주니 조물주니 하는 것으로 채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논쟁의 결론은 무엇이 돼야 하는가?
인간 지식과 이성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에 대한 과학적 신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라는 속담처럼 민중의 건강한 생활의 지혜가 과학의 출발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 이성의 당대 제한성을 이용해 물신주의를 강요하는 비과학, 반과학과 싸워야 합니다.
무지, 편견, 독단, 독선, 왜곡으로 민중을 우민화 하여 통치하는 간교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해야 합니다.
실천과 인식을 통합해야 합니다. 마오쩌둥의 <실천론>의 철학적 테제처럼 실천, 인식, 보다 높은 실천과 인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현대과학의 성과를 지배계급의 탐욕적 이해 앞에 종속시킴으로써 민중 대다수를 도탄에 빠트리는 지배계급의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를 박살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과학적 발전과 이성의 발전이 노동자와 인민 전체의 정신적, 물질적 풍요와 행복에 복무하는 태평천국을 지상의 현실에서 구현해야 합니다.
계급투쟁과 혁명은 인류 역사 발전의 추진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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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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