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호 씨는 답하라! 지옥같은 한국 현실에서 어떻게 북유럽 수준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2018년 12월 26일
한석호 씨(전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는 “북유럽으로 가자”(매일노동뉴스, 2018.12.24.)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북유럽을 제안한다. 현 단계의 지금 여기에서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로 북유럽 청사진을 운동의 최소 공통분모로 만들고 대중에게 제시하자.”
북유럽, 그러니까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같은 북유럽 3국을 운동의 나아갈 길(청사진)로 하자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민주노총 내 상당수 간부들을 비롯해 많은 활동가들이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북유럽 청사진을 운동의 최소 공동분모”로 하자는 주장은 개량의 주장이다. 이 개량의 주장에 대해 “개량주의”라는 비판이 줄곧 제기되었고, 제기될 것에 대해 한석호 씨는 미리 알고 다음과 같이 연막을 치고 있다.
“이 제안에 대한 비판이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을 해야지 무슨 개량주의 주장이냐는 비판이다. 한때의 나 또한 격하게 동조했던 오래된 비판이다. 그 비판이 비판에만 머물지 않게 하려고 비록 화염병과 쇠파이프에 불과했지만 나름 노력했다. 아무튼 그 비판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이렇게 제안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일단, 그렇다, 일단이다. 일단, 북유럽으로 가자. 운동은 종교가 아니다. 운동은 지금 여기에서 노동자·민중이 좀 더 낫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모색하고 도모하는 것이다.”
“또 다른 비판이 있을 것이다. 북유럽에도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다. 무엇인가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보다는 무언가 문제점을 찾아내는 데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한국 운동의 특성상 그런 비판이 뒤따를 것이다. 나도 안다. 북유럽에도 이런저런 문제가 많다. 이 또한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다. 다만 역으로 제안하려 한다. 북유럽을 대신하는 운동의 한국 사회 청사진을 제발 그려 달라. 그러면 이 주장을 철회하고 따르겠다. 운동은 평론이 아니다. 운동은 지금 여기에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북유럽이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쏘련 사회주의와 가까웠고, 그러하기에 쏘련 사회주의의 성취물에 자극을 받았고, 노동자들이 한 때 사회주의를 전망으로 해서 격렬하게 투쟁하였고, 노동자들의 조직율이 높았고, 그리하여 자본과 정권이 노동자들한테 일정한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사민주의 타협 모델이 가능했던 자본주의 호황 대신에 공황과 장기불황이 지속되고 있으며 그리하여 사민주의 국가들 내에서조차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한 복지가 자본의 공세에 의해 박탈당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북유럽의 사민주의 정부가 “신자유주의” 공세를 펼치다가 정권을 잃어버리고 있으며, 이들 사민주의 정부가 이라크 전쟁 등 제국주의 전쟁에 동참하며, 제3세계 민중을 착취하고 수탈하고 있는 소수 재벌이 지배하는 나라다라는 등의 비판은 하지 않겠다.
다만 참고삼아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복지국가를 모델로 하고 있는 유럽 전반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기사를 하나 인용하겠다.
“유럽 내 좌파 정당의 입지는 최근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중도좌파의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계승하는 프랑스·네덜란드의 사회당 모두 지난해 대선에서 참패했다. 독일에서는 지난해 9월 총선 결과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일약 제3당으로 의회에 입성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은 창당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북유럽 국가에서도 최근에는 20~30대에서만 좌파 정당에 대한 지지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8개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좌파가 집권한 나라는 스웨덴, 그리스, 포르투갈,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몰타 등 6개국에 불과하다. 좌파가 몰락한 배경에 이목이 집중된다 … 경제난에 더해 시리아 내전 이후 2015년부터 본격화된 난민 위기는 유럽 각국에 극우·포퓰리즘이 확산되는 기폭제가 됐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난민들까지 들어와 정부 예산을 갉아먹고 자기들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불만이 헝가리,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사민주의 전통이 강한 북유럽에서조차 좌파의 입지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덴마크 사민당은 2015년 총선에서 예상과 달리 제1당을 차지하지 못했다. 핀란드 사민당은 역사상 최악의 성적을 거뒀다. 현재 북유럽에서 좌파가 집권하고 있는 나라는 스웨덴이 유일하다.(“유럽 ‘좌파 정치’ 설 땅을 잃어간다”, 박효재·최민지 기자, 경향, 2018.03.06.)
이 글에서는 분석하고 있지 않지만 시리아 내전 이후 본격화된 난민 위기는 미제국주의와 나토 제국주의가 시리아, 예멘 등에서 내전을 조장하고 제국주의 침략을 자행한 결과라는 점이다.
이 기사에서는 “좌파 정당들은 노동자 권리, 복지를 강조하는 등 본래 색깔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면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고 하면서 “EU의 긴축재정을 거부하는 그리스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정부는 2015년 9월 조기 총선에서 다시 승리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사는 일정 정도 유럽 현실에 대해 왜곡을 하고 있는데, 치프라스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트로이카(국제통화기금(IMF),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채권 약탈자들에게 굴복하여 긴축 정책을 사용하여 그리스공산당과 그 산하 노동조합 조직인 파베(PAME, 전 노동자투쟁전선)를 비롯해서 그리스 노동자 민중의 격렬한 저항을 낳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유럽의 장기 불황과 엄습하는 전 세계 대공황 그림자, 자본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위기, 청년실업을 비롯해 만연한 대량실업, 유럽연합 내부의 모순의 증폭과 그 단적인 예로 영국의 브렉시트 같은 유럽연합 탈퇴, 유럽 전반의 난민 위기와 극우와 신나찌의 준동, 신자유주의화된 기존 사민주의 정당의 몰락 내지 영국 노동당 내에서 제레미 코빈의 열풍에서 보듯, 기존 사민주의의 재편성과 노동자 계급의 투쟁성의 부활, 프랑스에서 마크롱 정권의 유류세 인상 등 노동자 민중에 대한 공세에 대항하는 폭동 수준의 거대한 민중의 투쟁, 그리스 공산당을 비롯한 공산주의 운동 진영의 전 세계적 결집과 21세기 혁명적 전망의 모색 등 거대한 변화는 한석호 씨와 같이 자본주의 혁신을 주장하는 자본주의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구체적인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할 인식 능력을 결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실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분석이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앞에서 예고했듯이 한석호 씨와 같은 개량주의 “확신범”의 전제에 따르려고 한다. 한석호 씨가 “이미 사회주의 혁명을 해야지 무슨 개량주의 주장이냐는 비판”이나 “북유럽에도 문제가 많다는 비판” 따위는 이미 연막을 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량주의자”, “의회주의자”라는 비판은 최소한 개량주의나 의회주의가 나쁘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자들이나 정치세력들에게는 효과적인 비판일 수는 있으나 한석호 씨처럼 개량주의를 운동의 청사진으로 대놓고 주장하는 “확신범”한테는 거기에 걸맞은 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혁명의 근본목표를 가지고 있는 맑스레닌주의자들 역시 개량을 거부하지 않고 있고, 한국사회 노동자들이나 대중들도 지금보다 삶이 나아지고 복지를 쟁취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기 때문에 한석호 씨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다.
한석호 씨는 “무엇인가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보다는 무언가 문제점을 찾아내는 데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한국 운동의 특성상”이라며 한국의 운동 풍토를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무엇인가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얘기이기 때문에 그도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한석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북유럽은 최소한 김용균 같은 죽음은 없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지도 않는다. 아니, 동일노동에서는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이 정규직의 시간당 임금보다 많다. 상·하위 노동자의 임금격차도 2배 수준에 불과하다. 장애인과 성소수자 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다른 나라보다 약하다. 환경에 대한 인식도 훌륭하다. 벌금도 부자가 더 많이 낸다. 열거할 사례는 숱하게 많다.”
한석호 씨는 “노동자·민중이 동의하고 움직일 수 있어야 세상이 바뀐다.”고 하는데 이에 적극 동의한다. 그런데 한석호 씨도 이는 부정하지 못할 것인데 우리는 북유럽이 아닌 한국에서 현실을 바꾸려고 운동을 한다. 한석호 씨는 북유럽을 복지국가 모델로 간주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최소한 북유럽 수준의 복지국가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한국에서는 김용균 같이 청년 노동자들을 비롯해서 연 24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전쟁 같은 일터에서 사회적 타살을 당하고 있고, 쌍용자동차처럼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와 가족들 수십 명이 자살을 하고, 철거민들이 용역깡패들한테 폭행을 당하고, 하루아침에 주거지를 박탈당하여 한강 물에 뛰어 들어 자살을 하고, 408일이라는 고공 농성 신기록을 세우고 자신들이 세운 신기록을 자신의 동료들이 경신을 하고, 장기 투쟁 사업장들이 아직도 원직복직을 외치며 싸우고 있고, 노동3권이 박탈당하고, 최저임금 몇 푼 올려놓고 최저임금법 개악으로 다시 그것을 빼앗아 가고 그것도 모자라 추가로 빼앗아가려 하고 있고, 40시간 노동제라는 법적 노동시간을 행정해석으로 68시간으로 올려놓고 그것을 52시간으로 돌려놓으면서 중복휴일 수당이라면서 50% 삭감하고 이제는 탄력근로제 확대로 그것조차도 무력화 시키려는 공세를 하고 있고, 공무원 연금을 개악하고, 국민연금을 개악하려고 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한국의 현실에서 한석호 씨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자본과 권력의 억압과 착취라는 현실을 극복하고 북유럽 노동자 민중이 누리는 성과들을 누릴 수 있는가?
한석호 씨는 “북유럽은 최소한 김용균 같은 죽음은 없다.”고 하는데, 한국의 국회는 비용 운운하면서 온전한 형태의 산업안전보건법 처리도 하지 않고 있다.
한석호 씨에게 묻겠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북유럽 노동자들이 누리는 권리를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에서 북유럽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신묘한 방책이 있으면 알려 달라! 그런데 한석호 씨는 북유럽 모델을 말하되, 어떻게 한국의 현실에서 노동자 민중들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고 북유럽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방책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석호에게 방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석호는 이 글에서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글에서는 “개량, 양보, 타협”(한석호,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이율배반)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석호는 “재벌과 자본가뿐만 아니라, 노동자들까지도 중심부·주변부 할 것 없이 제 몫 챙기기에 급급한 극단의 경쟁사회에서 나눔·양보·타협 등은 노동운동이 기피해야 할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중심부 노동자에게, 아니 모든 노동자에게 양보와 타협 정신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석호는 “재벌과 자본가”들에 “나눔·양보·타협”을 하라며 싸우지 않는다. 재벌과 자본가들에게 요구하지도 않는다. 한석호의 양보는 연대임금제로 정규직들이 비정규직들에게 임금을 양보해서 나누어 가지라는 말이다. 한석호는 자본가들과 싸워서 노동자들의 삶을 상향평준화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향평준화 시키라는 것이다. 한석호의 주장은 노동운동의 배반자 문성현이나 자본도 하고 있는 주장이다. 자본과 권력은 노동귀족이니 노동자 이기주의니 하며 공세를 취하여 노동자의 양보를 종용하고 있다. 자본과 정권의 공세에 의해 2018년에도 노동자 전반의 임금인상률이 대폭 하락하였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자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으로 나타나기는커녕 최저임금 공세로 나타났을 뿐이다. 자본의 노동귀족론, 임금양보론은 조직된 노동자들을 공격하여 예봉을 분쇄한 뒤에 미조직 노동자 등 노동자 전반에 공세를 취하여 최대한의 이윤을 늘리려고 하는 상투적인 수법에 불과하다. 한석호는 “나눔·양보·타협”을 설파하여 자본의 노동귀족론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어느 실패한 노동운동가의 꿈 [민미연 포럼] 왜 노동운동에 나눔·양보·타협은 금기어인가?”, (장제우 균형사회연구센터 연구위원, 프레시안, 2018.10.25.)라며 한석호를 옹호하며 “나눔·양보·타협”을 노동운동의 노선으로 정립하려는 자들과 세력들도 생겨나고 있다.
한석호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와 같은 신 노사정위원회로 북유럽 모델을 현실화 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주지하듯 노사정위원회는 과거에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등 노동악법을 도입한 반노동자 기구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경사노위를 통해 북유럽 노동자들이 누리는 권리와 삶을 누리자는 주장은 초현실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한석호는 북유럽을 말하면서도 같은 복지 국가 모델이라는 프랑스의 현실은 말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마크롱 정권의 유류세 인상 복지 공격에 맞서 폭동 수준의 격렬한 투쟁이 전개됐다.
한석호 씨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묻겠다.
과연 “현 단계의 지금 여기”, 지옥과 같은 한국 자본주의 현실에서 “북유럽 청사진”을 제시했으면 과연 어떻게, 어떤 수단과 경로로 북유럽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그 방책을 제시해보라!
투쟁이 아니고 과연 그러한 길을 한석호 당신이 제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길고 고통스럽고 험난한 투쟁 대신에 당신이 제시하는 장밋빛 청사진을 따라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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