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좌파 다원주의 노선 무엇이 문제인가?2
프랑스68혁명과 신좌파의 대두
신좌파 노선은 국제적으로 프랑스 68혁명을 계기로 국제적으로 전파되었다. 신좌파 노선은 반자본주의 기치 하에 오늘날과 다르게 비교적 급진적 실천을 하였다.
이들은 여성억압ㆍ차별 반대, 인종주의 반대, 베트남전ㆍ캄보디아 침공 반대 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이들이 구좌파라고 부르는 전통적인 맑스레닌주의 혁명파는 일반적으로 살펴보면 자본주의 착취질서를 근절하고 이를 비호하는 부르주아 정치권력을 타도하고 노동자ㆍ민중이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자본가들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기업ㆍ공장ㆍ토지를 국유화ㆍ집단화 하여 계획생산 하에서 운영하는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신좌파는 정치권력 장악에 전혀 관심이 없다.
예전 50여 년의 어느 해와는 달리, 1968년은 새로운 사회운동이, 즉 정치권력을 획득하지 않은 채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분출된 한 해라고 기억될 것이다. 파리에서 시카고, 프라하에서, 멕시코시티까지, 예기치 못했던 대중투쟁들이 전 세계적으로 발흥하여 기존질서에 도전했다.(1987년 영어판 서문, 《신좌파의 상상력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카치아피카스 지음, 이재원/이종태 옮김, 1999, 이후)
“예전 50여 년의 어느 해”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의미한다. 68년 혁명은 정치권력 획득없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68혁명의 분출에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저항들뿐만 아니라 프라하에서 일어났던 투쟁처럼 사회주의에서의 자본주의 반혁명도 혁명의 사례로 봄으로써 이들은 체제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본다.
1968년의 전 세계적 혼란은 일말의 경고도 없이 발발했으며, 자본주의와 현실 세계의 사회주의 양자 모두에, 또한 권위주의적 권력과 가부장적 권위 양자 모두에 직접적으로 대립하게 됐다.(같은 책)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가리지 않고 “권력ㆍ권위” 전반에 반대하는 것이 신좌파의 정치적 특성이기도 하다.
신좌파는…혁명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역사적 의제로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혁명의 문제는 과거의 혁명들이 획득한 권력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권력 문제를 포함하는 데에까지 확장됐으며, 혁명의 목표는 권력과 자원의 탈집중화와 자주관리(self-management)가 되었다.(같은 책)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사회주의혁명은 당의 지도를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한다. 민주집중제는 당의 운영원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을 극복하고 사회주의 생산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중앙집중화된 권력과 생산ㆍ계획체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 신좌파는 “과거의 혁명들이 획득한 권력의 문제”는 사실상 버리고 “일상 생활에서의 권력 문제를 포함하”여 “혁명의 목표는 권력과 자원의 탈집중화와 자주관리”로 삼고 있다. 이들은 혁명을 말하고 있으나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혁명의 목표와는 상반되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문화와 정치를 융합시켰던 신좌파는, 무장반란은 물론이고 영토 확보를 위한 군사공격이 없이도 공공영역에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더군다나, 결정적으로 선진 산업 국가에서 외쳐졌던 신좌파의 열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민중에게 권력을”,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로”라는 구호에서 엿보이는 열망이었다.(같은 책)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자와 민중의 대중권력을 의미한다. 이 대중권력은 강력한 힘으로 구사회 복고세력들의 반혁명 책동을 막고 프롤레타리아와 인민의 민주주의와 참여라는 원칙을 가지고 사회를 운영해 간다. 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끌어가는 선진적 조직이다.
신좌파에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민중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독재, 즉 중앙위원회 독재로 변질되고 이 정점에 있는 개인독재로 변질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 신좌파가 말년에 공산당을 창당하고 독일혁명을 기도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에 주목하는 이유는 로자가 한 때 레닌과 논쟁하여 볼셰비키당의 운영과 노선을 이런 관점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중앙집중적인 제3차 인터내셔널과 달리, 신좌파가 이뤄낸 국제적인 정치적 단결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계에 흩어져 있는 대중운동들의 요구와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같은 책)
이들은 “민중에게 권력을”을 외치지만 실제로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로”는 구호에서 보듯, 모든 권력을 억압기구로 보고 반대한다.
위로부터의 단결을 부정하고 배척하며 아래로부터의 단결을 강조하고, 의식성을 부정ㆍ배척하며 자발성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신좌파의 특성은 조직성을 혐오하는 무정부주의의 특성을 그대로 안고 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대중운동들의 요구와 열망”은 어떻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 이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조차도 구좌파의 낡은 인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위와 아래, 지도자와 대중, 당과 대중조직, 의식성과 자발성, 중앙집중과 참여를 대립시키며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분산성과 자치, 참여, 자발성을 절대적 가치로 중시하는 것이 신좌파의 정치적 특성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당과 혁명을 여전히 강조하면서도 위 양자의 통일을 스탈린주의ㆍ전체주의의 산물로 강조하는 것에서 볼때, 이질적으로 보이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신좌파의 정치적 특성을 상당부분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 현실 사회주의에 비판적인 트로츠키주의와 신좌파들의 정치적 특성도 일치하고 있다.
경제의 국유화나 의사결정의 국가집중을 통해 신좌파가 제시한 자유로운 사회의 형태를 정의내릴 수는 없다.(같은 책)
신좌파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생산의 가장 높은 수준의 사회화된 형태인 국유화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과연 이들은 국유화가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요구와 열망과는 대립된다고 보는 것인가?
이탈리아의 신좌파만이 현존 좌파 조직들에서 독립한 것은 아니었다. 전 세계적 운동으로서의 신좌파는 ‘철의. 장막’을 둘러싼 양쪽 모두의 권력구조에 도전했다…1968년에 동유럽에서 일어났던 운동들은 교조주의, 관료적 권위주의와 문화적 순응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서쪽에 있는 자신들의 친구들과 주목할만한 유사성을 보였다.(같은 책)
신좌파는 이른바 제3세계에서의 민족해방투쟁도 신좌파의 가치로 해석하고 있다.
근대세계 체제에서는 국가들과 지역들이 서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각 국가와 지역을 단순히 ‘자유세계’와 ‘공산주의권’, 혹은 ‘핵심부’와 ‘주변부’라는 용어로 정리할 수는 없다.(같은 책)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ㆍ대결, 제국주의 핵심부에 대한 주변부의 민족해방투쟁 이런 가치들은 신좌파에게 의미가 없다. 이로써 각국과 지역이 서로 우애와 평등의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착취와 피착취,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싸우고 있는데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러니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가 사회주의고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가 민족해방투쟁이라는 개념도 신좌파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신좌파의 도덕적 기반이 됐던 개인적 자유의 존엄성 및 사회적 정의와 가치들의 우위성은, 소비에트 맑스주의의 객관적 유물론에 반대되는 [새로운] 주체성에 관한 자신들의 철학적 확신을 보여준다.(같은 책)
이들 신좌파의 맑스주의 유물론에 대한 반대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문화적, 정치적 양식을 규정하여 개인들의 인식과 삶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경제결정론”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혁명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철폐하고 새로운 생산양식을 갖추려는 투쟁을 반대한다.
인간 내부의 정신과 욕구를 재구성하는 작업ㅡ즉 문화혁명ㅡ은 새로운 유형의 혁명, 즉 정치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혁명, 정치를 위로부터의 행정이라는 관념에서 자주관리라는 관념으로 전환시켜 정치의 영역을 국가에서 일상생활로 이동시키는 혁명에 기반을 놓는 작업인 것이다. 새롭게 건설되는 사회 속에서 이런 혁명이 전세계적으로 실현된다면,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정치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같은 책)
신좌파가 ‘객관 유물론’이라고 규정하는 맑스주의 유물론은 반영론이다. 인간의 의식도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역사와 외부 조건에 영향을 크게 받는 반영론이다. 인류의 문화도 개인들의 사적인 기호와 취미의 산물이기보다는 한 사회의 생산양식과 역사적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고 형성된다. 이를 반대하는 신좌파는 자본과 국가와의 투쟁보다는 일상생활에서 개별적인 사안들과의 대결로, 개인의 의식을 전환하는 노력으로 인식과 문화가 바뀌고 일상생활이 바뀌게 되고 이것이 전세계적으로 된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정치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해 말하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와의 계급적ㆍ민족적 투쟁은 이들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다. 체제를 바꾸는 투쟁 보다는 개인들의 신사회 운동이 더 의미가 있고 이것이 세계를 전환하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신좌파의 구호도 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피시주의(PC)로 개인들의 인식과 행동을 끊임없이 즉석에서 비판하고 전환시키는 방식도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독일의 신좌파는 미국의 반문화와 같은 문화정치를 종합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독일의 신좌파는 사회민주주의라는 기회주의가 배신했고 나찌의 대량학살과 스탈린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면책으로] 파괴되었던 유산, 즉 독일노동계급의 혁명전통을 오랫동안 방치하도록 만들었던 냉전의 합의를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반대했다.(같은 책)
스탈린이 지도자로 있었던 소련이 인민 2700만의 막대한 희생을 치러가며 투쟁해 독일 파시즘 히틀러를 격퇴했다. 스탈린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면책은 공산주의자들은 반파시즘 통일전선을 통해 파시즘에 맞서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연대해 싸우자고 한 것인데, 이를 독일노동계급의 혁명전통을 파괴했다고 볼 정도로 신좌파는 역사적 현실에 무지하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배신은 이들이 독일혁명을 파괴하고 파시즘에 협조한 것인데, 이들 독일 신좌파가 독일노동계급의 혁명전통을 계승했다고 하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1948년, 30만명 이상에 달하는 1백45개 대학 학생들의 대표자들은 <전일본 학생 자치회 총연합>, 혹은 후에 널리 알려진 <전학련>을 창출해 냈다. <전학련>최고 대변인 중의 한 명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정권 모두 다 “평화, 민주주의, 학생 자유의 적”이라고 선언했으며, 만약 세계 초강대국들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평범한 사람들의 선천적인 양식이야말로, 정권을 통해 최소 통제력만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모스크바에 대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전학련>은 1960년에 일본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했으며, 대중집회를 통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자신의 일본 방문 계획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1966년 가을경,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일본의 좌파들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이에따라 1967년에 점증하던 미국의 베트남 참전 반대와 더불어, 학생들은 또다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또 수상이 비행기로 사이공에 방문하려 하고, 곧이어 미국을 방문하려 하자, 일본 주둔 미군기지들을 공격하여 그와 맞섰다…
1968년 6월에는,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말이 새겨진 마오의 대형 포스터가 도쿄 대학의 정문에 장식됐다.(같은 책)
전학련 건설 당시인 1948년은 스탈린과 공산주의자들이 독일 파시즘을 격퇴하고 동유럽 전역이 파시즘에 맞서 사회주의가 되고 전 세계적으로 민족해방투쟁이 일어날 시점이다. 일본 공산당도 당시에는 혁명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전투적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분열됐다.
그 해가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가 열렸던 때입니다. 1956년 2월로 후르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게 됐죠. 이 대회는 그 동안의 공산주의 운동의 모든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했지요. 이후 일본에 트로츠키도 들어오고 그람시도 소개되게 됩니다. 그것만이 아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노동신문운동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노동신문도 소개되는 등 20대를 중심으로 많은 정보가 유입됩니다.(일본 공산당의 폐쇄성이 좌파운동 분열의 원인 <8> 일본 신좌파 운동의 대부, 무토 이치요우 ①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이영채 케이센대 교수, 프레시안, 2011-12-04)
일본 공산당은 초기에는 좌경적인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다가 나중에는 우경적인 소련공산당을 지지했다.
1947년부터 시작하여 1950년에 맥아더 군정 체제 하에서 매카시즘 공세에 맞서 격렬하게 투쟁하기도 했던 일본 공산당은 결국 이후 천황제와 미제국주의를 인정하고 반북을 견지하는 의회주의로 극단적으로 우경화 되었다.
일본의 진보적 학생들은 중소분쟁과 일본 공산당의 우경 바람 속에 한 때 일본공산당을 반대하고 마오쩌둥을 지지하기도 하고 전공투를 결성하여 60년대, 70년대 안보투쟁을 격렬하게 전개했다.


이 시기 일본 학생운동 신좌익운동파는 마오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서구 신좌파의 영향을 받았는데 테러도 불사하는 비대중적인 극단적인 투쟁과 “내부폭력 및 연합적군파의 동료살해사건 등으로 급격히 퇴조하게 되었다.”(프레시안, 같은 기사)
일본 내에도 이러한 격렬한 운동을 거치면서 그 반대편향이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서구 68혁명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서구형 신좌파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이 : 60년대 후반은 서구에서 68혁명이 나타나는 시기이고, 이전의 운동과는 다른 결을 갖는 운동이 출현합니다. 일본의 경우도 그렇게 해석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무토 선생이 책<아메리카 제국과 전후 일본 국가의 해체> 중 전후 일본 국가와 혁신세력의 해체’에서 68혁명으로 인한 패러다임 전환의 특성을 11가지로 정리한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1)기존의 정당계열 식 운동의 변화 2)자율적 운동의 상식화 3)일상적인 사회관계에서 나타나는 권력의 해체의 추구 그러면서 정치의 재(再)정의 4)개발 및 근대화에 대해서의 비판적 시각의 정착 5)전국 정치투쟁을 보편적 집약점으로 하는 구조(구미다테, くみたて)로부터 개별과제(이슈) 별 운동으로의 전환 즉 매크로 운동으로부터 마이크로 운동으로의 전환 6)종적인 강고한 조직으로부터 네트워크형 조직으로의 전환 7)감성적인 해방 등을 열거했습니다.(“후쿠시마 사태, 전후 일본 국가 형성 논리의 파산” [수정일본사회 탐방]<9>일본 신좌파 운동의 대부, 무토 이치요우 ②,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이영채 케이센대 교수, 프레시안, 2011-12-25)
이를 정리하면 혁명적 전망을 거대담론이라고 폐기하고 미시적 담론이고 개인 인권을 강조하는 현대 신좌파 운동으로의 전면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이 기사를 총 13번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