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미국을 다루는 프레시안 박인규 편집인의 글에 대해
2018년 12월 30일
“최고로 신뢰할 만한 회계자료에 따르면 지난 1차 대전 때 군인 1명을 죽이는 데 드는 비용은 약 2만 5000달러였다. 그런데 유럽의 어떤 대기업도 정부가 저지른 이런 극도의 낭비에 대해 단 한 차례도 항의하지 않았다. 살인을 개별 조폭들에게 맡긴다면 건당 비용은 100달러를 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 터지는 포탄 파편이 전선에 나가 있는 한 인간의 뇌와 심장과 내장을 파고드는 동안, 2만 5000달러의 대부분인 이윤은 무기 제조업자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의 공저자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은 1차 대전 당시 윌슨의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나이 위원회 조사는 윌슨이 사실상 국민을 속이고 전쟁에 참전했음을 보여주었다. 윌슨은 연합국들에 대한 대출과 기타 지원을 허용함으로써 중립정책을 해쳤고, 독일군의 만행을 의도적으로 과장했으며, 연합국들 간의 밀약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했다. 1차 대전은 민주주의 확보를 위한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고. 제국의 전리품을 나눠먹기 위한 전쟁이었다.”(“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153쪽, 박인규, ‘전쟁은 최고의 장사다’, 프레시안 2018.12.29.)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밝힌 것처럼 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 분할과 재분할을 위한 제국주의간 전쟁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전리품을 배분하기 위해 협정을 맺으면서도 그 배분에서 약탈품을 더 차지하기 위해, 더 이상 분할할 식민지.반식민지가 없을 때 기존 식민지.반식민지를 재분할 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고 종국에는 그 대립을 전쟁으로 해소하려 했다.
이 제국주의 전쟁의 배후에는 독점자본이 있었다. 그러하기에 레닌은 제국주의의 본질을 규명하면서 생산에서의 집적과 집중이 독점을 낳고 독점자본이 금융과두제가 되어 전체 사회를 지배하고 그 정점에서 국가마저도 자신들의 손아귀로 종속시킨다고 분석하고 있다. 독점의 기초 위에서 그 상부구조로서의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1차 세계대전에서 특히 미국의 전쟁 참여 배후에 제이피 모건이 있다는 것을 풍부한 자료를 들어 폭로하고 있다. 이 글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슨에 대해서도 흥미 있는 사례를 들고 있다.
우리에게 윌슨은 ‘민족자결주의’의 사도이고 그
민족자결주의가 1919년 3.1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모든 인식이 사기적 교육의 결과이다. 3.1운동은 러시아 혁명과 식민지 해방을 촉구한 레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등이 지배했던 식민지 국가를 그 누구도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경고이며 기존 영국, 프랑스 등 식민지 지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을 붕괴시키고 전후 미국 중심의 새로운
지배질서, 즉 전후 영국을 대신하여 제국주의 패권국가가 된 미국이 신식민지적으로 세계를 재분할하기 위해 취해진 노선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은 1913년부터 1921년까지 미국의 28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가이자 학자이다.”라고 나와 있다.
1차 세계 대전 직전부터 러시아 혁명 이후 수년 동안 전 세계 정치사에서 가장 중대한 시기에 미제국주의 대통령을 했던 것이다.
미국의 전후 정책은 신식민지적으로 제국주의 패권을 유지, 강화하는 것과 함께 그 일환이기도 한데 반쏘비에트 반공주의 정책을 펼치는 것이었다.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의 1차 세계대전과 독점자본의 문제를 다룬 이 글은 훌륭한 글이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이 식민지 분할과 재분할을 위한 제국주의 전쟁이라면, 2차 세계대전 역시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처럼 1차 세계대전이 낳은 직접적인 결과이면서 제국주의 간 전쟁이라는 성격은 그대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다만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반쏘비에트 반공전선이라는 성격이 추가됐다. 여기에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데 식민지. 반식민지 해방 전쟁에 대한 반혁명 전쟁이라는 성격도 중첩됐다.
전쟁과 그 중심에 있는 미국을 분석하는 박인규의 글은 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그 본질적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의 정점에 있었던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남침’이라는 통속적 관점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의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1차 세계대전을 다루던 깊이 있던 안목과 풍부함에서 급격하게 후퇴하여 소부르주아적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북이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맞선 투쟁이 베트남식이니 중국식이니 개혁개방을 목표로 한 것이다라는 부분이 그렇다.
심지어 “한국은 미국에 의해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다. 미국이 고마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라는 문장은 미국 숭배주의에 빠진 한국사회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심각한 역사왜곡이기도 하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남, 북, 만주 등지에서의 고난에 찬 식민지 해방투쟁과 쏘련의 반파쇼 인민전쟁의 승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빼면 박인규의 글은 볼만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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