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선공론(先攻論) 관련하여
이범주
이 나라 사람들이 김일성을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동족국가 조선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지금의 분단에 이르게 된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 북이 남침하면서 일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를 분단시킨 장본인이 김일성이라 생각하기에 김일성과 동족국가 조선은 남쪽에서 증오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문제가 그리 단순한가. 중대한 일이 생겼다면 그 일이 생기게 된 전후 사정이 있을 것이다. 6.25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그런 맥락과 배경에 대한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로지 ‘전쟁 발발일 6월 25일’만 사람들 의식에 남아 그 625를 일으킨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며 증오하게 되는 것이다. 처녀가 애를 배어도 사정이 있다는데 하물며 한 민족의 전체 운명을 갈라버린 엄청난 재난적 사건, 한국전쟁에 맥락과 배경이 없겠는가. 625는 오로지 그날 하루만 생각하라고 우리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있다.
아무런 심각한 갈등 없이 평화로운 시간이 흐르는 정황에서 느닷없이 전쟁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태평성대 평화로운 시간이 흐르는 6월 25일 북이 느닷없이 남침을 했다고 들어왔다. 남침설이다. 반면 북에서는 평화로운 공화국을 남이 먼저 침략했는데 그걸 반공격으로 받아치면서 전면적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북침설이다. 무엇이 진실일까. 그런데 누가 먼저 선빵을 날렸는가의 여부가 본질일까.
나는 정황과 맥락, 배경에 관심이 있다. 세상사 모든 일들은 그 정황, 맥락, 배경의 연장선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정황, 맥락, 배경.
– 1945년 8월 15일 이후, 북에서는 만주에서 관동군, 조선 주둔 일본군과 맞서 싸우던 항일유격대 성원들과 중국 관내에서 팔로군과 함께 싸우던 조선인들, 국내 사회주의자들, 조만식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반면 남쪽에선 만주 관동군과 간도 특설대, 조선의 일본군에서 하급장교로 근무하던 조선인들과 한민당, 자유당 등 국내 친일 정치세력, 대지주, 자본가, 친일 지식인들이 미군정의 후원을 받아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 만주에서 빨치산과 간도특설대로 맞서던 사람들이 해방 후에는 북과 남 군대의 핵심 세력이 되어 맞서게 되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에 이르게 된 큰 원인 중의 하나를 남과 북에서 각각 나라를 세운 핵심 세력들이 식민지 시절에 선택했던 정치적 입장-친일이냐 반일이냐-의 차이에서 찾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한국전쟁의 뿌리는 식민지 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건준, 인민위원회, 전평, 전농, 남로당, 김구의 한독당…등 (미군정을 등에 업고 권력, 경제력, 경찰 군대 등의 물리력 등을 장악하려는) 친일세력들의 부활에 반대하고 (일제에 이어 남쪽을 지배하려 했던) 미군정에 저항하며, 토지개혁 등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을 주장했던 세력들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이들은 미 제국주의와 분단을 반대하고 토지개혁, 친일파 척결,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등을 주장하며 빨치산까지 조직하여 투쟁했다. 하지만 이들은 미군과 미군이 무장시킨 경찰, 국군, 우익 청년단체(서북청년단) 등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분단이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참상이다. 이는 38선 이남 판(版), 남쪽 내부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보면 남쪽에서 한국전쟁은 전쟁 전에도 이미 일상이었다.
–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북침 무력통일’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는 “아침은 서울,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를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3.8선이 그어진 이후 지속적으로 특히 1948년도에 38선 부근에서 극심하고 일상적인 전투행위가 있었다(1년에 수백 회~수천 회라는 통계가 있다). 대대전투 이상 규모의 전투가 있었고 그 전투들 대부분은 남쪽 국군의 선공에 의한 것들이었다. 게릴라들을 북파하여 비정규전을 일으키기도 했다(호림부대). 말하자면 남북 간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일어난 게 아니었으니 그 이전에 이미 전투는 일상이었고, (남에 의한 것이든 북에 의한 것이든) 민족을 통일해야 한다는 게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시대정신이자 피할 수 없는 내부적 압력이었다. 이런 정황에서 ‘누가 먼저 공격했는가의 여부’가 시비(是非)를 가리는 본질적 기준이 될 수 있을까.
– (논란 분분한) 선공(先攻) 여부를 기준으로 정당성을 판단하는 것에는 명백히 모종의 의도가 있다. 어떤 의도? 상대방을 선공자(先攻者)로 몰아붙여 악마화하고자 하는 의도! 상대방을 악마화하면서 한편 이쪽이 가진 문제, 모순, 드러내기 싫은 진실들을 덮어버리고 정당성을 독점하고자 하는 의도! 그리고 전쟁에 이르게 된 맥락, 과정 등을 가리면서 전쟁의 진실 자체를 은폐하고자 하는 의도!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전쟁 발발일을 기념하지 않는다. 대신 종전일을 기억한다. 예컨대 아무도 미국의 남북전쟁 발발일을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그 내전에 이르게 된 남북 산업 및 인구의 구조와 정치적 맥락에 주목한다. 전쟁에 이르게 된 맥락과 배경을 살핌으로써 다시는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우리는 6.25 전쟁 발발일을 기억한다. 한편 사람들은 대부분 종전일이 1953년 7월 27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로지 거두절미하고 전쟁 발발일 6,25만 매년 주기적으로 상기, 기억하면서 북에 대한 증오심을 유지, 강화시키는 것이다.
–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미국이라는 존재를 빼놓고 625를 생각할 수 없다. 미국…북의 남침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었고 이후 한국 경제개발에서 크게 기여했다는 좋은 나라 미국. 그러나 미국은 한국전쟁 덕분에 2차 세계대전에 쓰려고 만들었다가 막대하게 쌓인 재고 무기들을 다 털어내 불경기를 탈출했고 빈사 직전의 군수산업을 화려하게 부활시켰으며 축소되어 가는 국방비를 합법적으로 늘렸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냉전체제를 세계적 차원에서 고착시키며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독점적 1인자 자리를 확립했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켜주러 왔다면서 반도 전역을 공중 폭격으로 콩가루로 만들며 남북 불문 조선 사람 수백만을 학살했다. 전쟁으로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전쟁 당사국 중에서 유일하게 이익 본 나라는 미국이었다(그리고 미국에 붙어 이익 챙기고 실제로 참전한 일본).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이익을 보려는 측이 전쟁을 벌인다. 미국은 전쟁 발발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남쪽에서는 아무도 미국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국이 얻은 막대한 이익은 전혀 예기치 않은 우연적 어부지리인가? “남쪽은 북의 침략을 받은 게 아니라 1945년 9월 8일, 미국의 침략을 받았다”고 말한 학자도 있다.
– 누가 먼저 공격했을까. 나는 모른다. 하지만 말할 수 있다.
“통일을 미룰 수 없다는 내적 압력이 터질 듯 팽배해 가는 조건에서, 38선 부근에서의 전투행위가 일상으로 된 상황에서, 무엇보다 ‘내부적 한국전쟁’이 국가 내부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정황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임계점의 끝에서 마침내 발발된 선공의 당사자가 누구인가 그 여부가 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 ‘6.25的 인식’ ‘선공론(先攻論)’ 기저에는 동족국 북에 대한 증오를 유지, 강화, 영구화 함으로써 분단을 고착하고자 하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깔려 있다. 폐기해야 한다. 폐기하고 총체적 진실을 새로 인식함으로써 북에 대한 적대를 풀어야 한다. 하여 일차적으로는 공존, 평화, 궁극적으로는 민족 통일에 이르는 장도에 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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