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민족해방전쟁 승리 50주년을 맞으며
미제국주의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 세계혁명사에 빛나는 위업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1964~1972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싸웠을 때, 그것은 조직화된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조직화된 인간사이의 싸움이었으며 결국 인간이 승리했다.(하워드 진, 유강은 옮김, 《미국 민중사 2》, 이후, 2008, 207쪽.)
이 애기는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미국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United States)》에 나오는 구절이다. 위에서 언급된 인용문처럼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핵폭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베트남을 침략한 미제국주의는 결국 베트남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처참히 패배했다. 이것은 1776년 미국이 건국된 이래 최초로 전쟁에서 패배한 사례였고,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등에서 이러한 실수를 반복한다. 놀랍게도 미국은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존 F. 케네디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맡았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이후 1990년대에 쓴 베트남 전쟁 관련 회고록에서 미국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인도차이나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역주 1> 다만 맥나마라는 1964년에 베트남에 방문한다.) 그곳의 역사, 언어, 문화 또는 가치관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케네디나 러스크, 번디, 테일러, 그리고 다른 많은 인사들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베트남에 관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미지의 당을 대상으로 정책을 구사하고 있는 셈이었다. 더 나쁜 것은 우리 정부에 우리의 무지를 보완해줄 전문가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전문가 부재의 가장 큰 이유가 국무부의 최고위급 동아시아, 중국 전문가들(존 패튼 데이비스 주니어, 존 스튜어트 서비스, 존 카터 빈센트 등)이 1950년대 매카시 반공 광풍 때 숙청당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리러니하다. 우리는(나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의도를 심각하게 잘못 읽었고, 그들의 호전적인 수사를 지역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오판했다. 호찌민 세력의 민족주의적 성격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Robert S. McNaramra, In Retrospect: The Tragedy and Lessons of Vietnam, Vintage, 1996, p.32~33.)
이 회고록에서 맥나마라는 후세대에게 미국의 잘못을 가르칠 사명과 의무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내용은 현재 호찌민시에 있는 베트남 전쟁증적박물관(War Remnants Museum, Bảo tàng Chứng tích chiến tranh)에도 인용되어 있다. 아래는 필자가 올해 1월 베트남 방문 당시 발견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못된 일을 저질렀다. 정말 심각할 정도로 잘못된 일이었다. 우리는 후손들에게 왜 이 전쟁이 잘못되었고 잘못된 전쟁을 치르게 됐는지를 설명해야 할 막대한 의무를 지게 되었다.(2025년 1월 9일 전쟁증적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자료.)
그렇다면 왜 미국은 이런 잘못된 전쟁 그리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에 왜 참전한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베트남 전쟁은 어떻게 전개 되었고, 그리고 미국은 이 전쟁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고, 현재 베트남의 승리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베트남 전쟁 종전 50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되돌아 보고자 한다.
베트남 전쟁을 알기 위해선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알 필요가 있다. 베트남은 19세기에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프랑스는 자신들이 알제리를 지배했던 것처럼 인도차이나 반도를 대략 100년간 식민지 지배했다.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20세기 들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된 민족주의적 투쟁으로 발전했고, 이는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현재 베트남에서 국부로 평가받고 있는 호찌민(Ho Chi Minh)은 프랑스 파리와 소련의 모스크바 그리고 중국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30년에 이른바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결성했다.(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개정판)》, 창비, 2006, 359~361쪽.)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난 이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베트남을 점령했다. 젊은 시절부터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호찌민은 베트남을 떠난지 30년 만에 돌아와 중월국경지대에 있는 팍보 동굴에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을 창설했다. 이 당시 혁명군대를 지휘하게 된 사람은 20세기 명장으로 불리는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이었으며, 이들은 프랑스 및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독립운동을 벌였다.(Ken Burns, The Vietnam War episode 1 Déjà Vu (1858–1961), PBS, 2017.)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게 됐다.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과 전투를 치르던 미국은 반파시즘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여러 조직과 협력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CIA의 전신인 OSS(Office Strategic Services)는 북베트남 지역에서 반일투쟁을 하던 호찌민 휘화의 베트민과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그당시 호찌민을 만난 미국 OSS의 아르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Patti) 소령은 베트남 전쟁 이후 쓴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밝혔다.
우리들 중 몇 사람은 우리가 제공한 무기와 훈련이 언젠가는 프랑스 사람들과 싸울 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상대가 미국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옮김,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36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호찌민은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포하였지만,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 지배하기 위해 들어왔다. 프랑스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가지고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이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발발한 전쟁이 제1차 베트남 전쟁이라 불리기도 하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6년 11월 베트남의 항구 도시인 하이퐁(Hai Phong)이 프랑스 군함에 무차별 폭격을 받으면서 일어났다. 프랑스는 하이퐁을 무차별 폭격하여 최소 6,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고, 25,000명이 부상당했다.(Marilyn B. Young, The Vietnam Wars 1945-1990, Harper Prennial, 1991, p.18.)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베트민 부대를 상대했다. 그러나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프랑스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결국 프랑스는 이 전쟁을 치르면서 온갖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베트남 민중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호찌민과 베트민편에 서게 됐다. 당시 베트민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소설가 쑤언부(Xuan Vu)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도시에는 프랑스군이 있었으며, 그 밖에는 베트민 게릴라가 있었다. 나의 마을과 다른 모든 마을들은 베트민의 통제 하에 있었다. 마을 주민들의 마음과 영혼은 베트민에 속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운동의 한 부분이었으며, 그 운동을 지지했다.(윤충로, 《베트남 혁명과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138쪽.)
충격적이게도 미국은 이 전쟁을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로 인식했다.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 5일 뒤인 1950년 6월 30일부터 미국 공군의 C-47 화물 수송기 8대가 군수물자를 싣고 태평양을 건너 사이공 공항에 착륙시켰다. 이에 따라 미군사고문단(Military Advisor)이 구성됨과 동시에 인도차이나에 대한 군사원조 또한 급격히 증가했다. 1950년 초기에 미국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지불했던 전쟁 비용은 1,000만 달러였지만, 전쟁이 끝났던 1954년에는 10억 달러를 초과하여 프랑스가 부담했던 총 전쟁 경비의 80%를 초과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1,400대의 탱크와 340대의 비행기, 350대의 정찰 보트, 24만 정의 소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의 군사지원을 프랑스에게 했다.(유인선,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 2002, 378쪽.; 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이광일 옮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 윌슨에서 케네디까지》, 들녘, 2015, 410~442쪽.; 마이클 매클리어, 앞의 책, 2002, 83쪽.)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5월 7일 56일간의 포위 끝에 디엔비엔푸 전투(Battle of Dien Bien Phu)가 베트민 측의 승리로 끝나면서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293명이 전사하고, 6,650명이 부상당했으며, 총 11,721명이 베트민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100년간 지속된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종결되었음을 의미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속화된 탈식민주의화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거기다 약소국 베트남이 현대식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프랑스 제국주의의 최정예 부대를 섬멸하여 대승을 거둔 사건이었으니 그 상징성이 매우 큰 전투라고 할 수 있다.(유일상,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하나로애드컴, 2021, 200쪽.)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8년 만에 끝이 났다. 프랑스군은 대략 9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베트남인은 대략 50만 명이 죽었다. 베트남인들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축축하기 위해 이와 같은 적잖은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로 미국 때문이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전후로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베트남 문제를 놓고 회담이 열렸다. 거기서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 분단이 결정됐다. 물론 분단에는 이와 같은 전제조건이 붙었다. 그것은 바로 “2년 이내에 베트남 전역에서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미국이 이를 일방적으로 거부했고 남베트남에 분단정부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베트남 민중의 최소 80%가 호찌민과 공산당을 지지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Christopher E. Goscha,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Indochina War (1945–1954): An International and Interdisciplinary Approach,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1, p.88~89.; 이재원, 《인도차이나 전쟁과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 홍문각, 2023, 315쪽.; 이재원,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전투’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인식과 기억의 변화」, 《서양사론》 102, 한국서양사학회, 2009, 267쪽.)
미국은 남베트남에 자신들의 꼭두각시 정부를 세웠다. 정통성이 전혀 없는 정권이었다. 미국이 내세운 베트남의 이승만인 응오딘지엠은 말 그대로 미제국주의의 꼭두각시였다.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전개했던 비판적인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인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에 따르면, 1955년 중반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 미국의 승인 없이는 정책을 채택할 수도 없었다.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The Pentagon Papers)에 따르면, “응오딘지엠의 남베트남은 본질적으로 미국의 창조물이었다.”(Gareth Porter, “What Ken Burns Left Out of the Vietnam Story”, The future of Freedom Foundation, 2018.03.01.; The Pentagon Paper, “[Part IV. B. 1.] Evolution of the War. Counterinsurgency: The Kennedy Commitments and Programs, 1961 – The special American Commitment to Vietnam”, p.6~7.)
응오딘지엠 정권은 독재정치를 펼치며 자신에 대항하는 세력을 탄압하고 구금하고 심지어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가브리엘 콜코(Gabriel Kolko)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최소 12,000명 이상의 사람이 살해되었고, 1958년 말까지 약 40,000명의 정치범이 수감되었다. 『마오주의』의 저자 줄리아 로벨은 “응오딘지엠이 집권하는 동안, 7만 명이 학살당했고, 100만 명이 투옥 그리고 20만 명이 잔혹한 고문으로 영구 장애 신세가 되었다.”라고 책에 썼다. 이것만 보더라도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잔혹했는지를 알 수 있다.(Garbriel Kolko, Anatomy of a War, The New Press, 1994, p.89.; 줄리아 로벨, 심규호 옮김, 《마오주의 – 전 세계를 휩쓴 역사》, 유월서가, 2024, 341쪽.)
미국의 역사학자인 제프리 레이스는 이들의 학살이 그 당시 베트민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 보다 훨씬 심각한 테러를 저질렀다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책에 썼다.
정부의 테러 행위는 혁명운동(베트민이나 베트콩) 측 보다 훨씬 심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베트민 출신에 대한 소탕작전, ‘공산주의 마을’에 대한 포격 및 지상공격, 그리고 ‘공산주의 동조자들’에 대한 검거 등이 그것이다. 1960년에서 1965년까지 롱안(Long An)에서의 혁명운동이 계속 강화되었던 것은 바로 남베트남 정부 측의 이러한 테러전략 때문이었다.(Jeffrey Race, War Comes to Long An, University California, 1971, p.197.)
즉, 이러한 응오딘지엠의 폭압적인 정권과 지배에 맞서 남베트남 민중이 자생적으로 저항하게 됐고, 그게 바로 베트콩이었다. 베트콩은 1960년 남베트남 내부에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in South Vietnam, Mặt trận Dân tộc Giải phóng miền Nam Việt Nam)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탄생했다. 이들은 응오딘지엠 독재 정권에 맞서 정치 및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남베트남 정부를 지지하는 이는 사실상 거의 없었다. 민중들은 사회를 변혁하려는 해방전선 즉 베트콩을 지지했다. 거기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불교까지 탄압하여 불교도들의 극심한 저항에 시달렸다.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혼란의 연속이던 남베트남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미군사고문단(American Advisor)의 숫자를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던 1963년 당시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는 900명에서 1만 6,000명까지 증가한 상태였다. 남베트남의 군대는 매우 무능했다. 수도 사이공 근처에서 벌어진 압박 전투(Battle of Ap Bac)에서 200~300명 안팎의 베트콩에게 최신식 장갑차와 헬기로 무장한 2,000명 이상의 남베트남군이 패배하는 일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이 전투에서 베트콩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헬기를 격추했고, 장갑차도 막아내는 저력을 보여줬다. 미국의 역사학자 버나드 폴의 경우 200명의 베트콩에게 2,000명의 남베트남군이 패배했다고 책에 기록했고, 베트콩은 이 전투에서 헬기 5대를 완전 파괴 15대 중 14를 손실 그리고 장갑차 3대를 파괴하는 등 군사적으로 대승을 거두었다.(Bernard B. Fall, The Two Viet-nams – A Political and Military Aanlysis, Praeger. 1963, p.381.; 윤충로,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선인, 2005, 471~472쪽.)
1963년 6월 11일 남베트남의 고승인 틱광둑이 소신공양하자 응오딘지엠 정권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결국 미국 CIA에 지원을 받은 쿠데타가 일어나 응오딘지엠 정권이 무너졌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무너진 이후 즈엉반민(Duong Van Minh) 장군이 이끄는 새로운 정권이 남베트남에 들어섰지만, 1965년 응우옌 까오 끼(Nguyen Cao Ky)와 응우옌 반 티에우(Nguyen Van Thieu)가 일으킨 쿠데타가 있기 전까지 대략 10번 이상의 군사 쿠데타가 남베트남에서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남베트남이 무너질 기미가 보이자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통킹만 사건은 당연히 미국의 조작이었고, 데이비드 핼버스탬에 따르면, 통킹만 사건은 미국의 작전이었고 철저히 미국에 의해 계획된 사건이었다.(데이비드 핼버스탬, 송정은 옮김, 《최고의 인재들 – 왜 미국 최고의 브레인들이 베트남전이라는 최악의 오류를 범했는가》, 글항아리, 2014, 659~660쪽.)
1965년부터 미국의 존슨 정부는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이라 불린 대규모 북폭을 실행했다. 미군 롤링썬더 작전(이른바 북폭)은 1968년까지 매일같이 베트남민주공화국에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다리와 도로 그리고 미국 정보당국이 발견하는 그 모든 산업시설들을 파괴했다. 미국은 민간인 피해를 억제하기 위한 노력을 거의하지 않았고, 북폭 3년 기간 동안 총 258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1967년 한 해 동안 학교 391곳, 의료시설 95곳, 교회 80곳, 불교사원 30곳이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됐다. 심지어 프랑스군의 폭격기가 디엔비엔푸 전투 두 달 동안 퍼부은 폭탄은 롤링썬더 작전 당시 미 공군이 당일에 투하한 폭탄의 양과 같았을 정도다.(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옮김,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789쪽.; 오민영, 《처음 읽는 베트남사》, 휴머니스트, 2022, 384~387쪽.; Christopher Goscha, Vietnam; A New History, Basic Books, 2016, p.191.)
그리고 미국은 북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 그리고 남베트남을 연결하는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에도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고 고엽제를 투하했다. 남베트남의 휴양 도시인 다낭(Da Nang)의 미케(My Khe) 해변에 3,500명의 미 해병대가 상륙했다. 미해병대가 다낭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1965년 말까지 18만 4,000명 이상이나 되는 미국 정규군이 남베트남에 주둔하게 되었고, 1966년 중반에는 30만 명 1967년과 1968년 사이에는 그 규모가 54만 9,000명까지 증가했다.(박태균, 《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한겨레출판, 2015, 117쪽.)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전하게 된 미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작전에 투입된 미국은 ‘수색과 섬멸(Search and Destory)’라는 수식어가 붙은 작전을 펼쳐 움직이는 것은 모두 총으로 쏘아죽일 수 있었고, 그들은 얼마든지 베트콩으로 의심이 된다면 민간인을 살해해도 상관이 없었다. 가레스 포터에 따르면, 주월미군 총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는 베트콩이 장기적으로 통제하는 곳에 살고 있는 민간인을 무장한 전투원으로 간주하는 정책을 채택했으며, 1965년 9월 MAC-V(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의 지침 전문인 525-3은 공산주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지배를 하든 전혀 지배를 하지 못하든 간에 그러한 민간인 보호는 인구 밀집 지역에만 적용했다. 실제로 웨스트모어랜드는 자유사격지대가 설립된 시점에서 그는 “남아있는 누구도 적 전투원으로 간주해라!”, 그 지역에서의 작전은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두려움 없이 행해질 것이다!”라고 썼을 정도다.(Gareth Porter, 앞의 기사, 2018.03.01.)
그러나 미국의 최신식 화력에도 베트남인들은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이는 그 당시 북베트남의 지도자인 호찌민의 연설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
그들은 50만 명, 100만 명,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을 끌고 남베트남으로 들어와 공세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5년, 10년, 20년, 어쩌면 그 이상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민은 승리할 때까지 계속 싸울 것입니다. 집과 마을과 도시가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겁먹지 않습니다.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호치민 지음, 월든 벨로 서문, 배기현 옮김,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프레시안북, 2009, 290쪽.)
미국은 자신들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1967년이 지나고 1968년이 되어서 드러났다. 베트남의 대명절 구정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이른바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를 감행하여 미국을 놀라게 했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의 미대사관 1층 베트콩 측의 자살 특공대와 공병대에 의해 잠시나마 점령당했고, 옛 황궁이 보존 된 베트남의 대도시 후에와 항구 도시 다낭도 전투지역으로 변했으며, 라오스 국경 근처에 있던 케산도 포위했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포함 남베트남 도시 100개 이상이 기습 공격을 당했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감행한 구정 공세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땐, 베트콩 측의 결과가 혹독했다.
1달간의 공세 동안 대략 3만 7천 명 이상의 베트콩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1달 동안의 미군 전사자는 2,500명 정도였다. 구정 공세는 남베트남에 있던 미군 기자들을 통해서 미국 전역에 생중계가 되었는데, 생중계가 되었던 장면 중에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있는 미 대사관 1층이 베트콩에게 점령당하는 것과 옛 황궁이 있는 후에(Hue)가 1달 동안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게 점령당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장면들이 생중계되자 미국에서는 대규모의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결국 미국은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반전운동에 직면하게 되었고, 베트남에서 미국이 이기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린든 B 존슨은 대통령 선거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에 따라 베트남 전쟁의 문제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에게 옮겨졌다. 구정 공세와 68혁명의 여파로 반전운동에 직면하게 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1969년부터 ‘베트남화 정책(Vietnamization)’을 전개하여 단계적인 철수를 감행했다. 비슷한 시기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콩을 뿌리 뽑겠다는 명분으로 닉슨 정부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폭격하고 더 나아가 침공하는 짓을 벌이기도 했지만,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1972년 북베트남의 지도부는 미소, 미중 데탕트를 의식하여 소위 수백 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한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를 감행했다. 이 공세는 미군의 공군력으로 무력화되었다. 닉슨 정부는 마지막 협박으로 소위 ‘라인베커 작전(Operation Linebecker II)’을 전개하여 하노이와 하이퐁에 B-52 폭격기를 동원한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 마이클 매클리어에 따르면, 이 당시 미국이 라인배커 작전을 위해 동원한 폭탄 양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5개를 사용한 양이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북베트남군은 12일 동안 폭격을 감행한 미군 항공기 81대를 격추시켰으며, 이 중 34대는 B-52 폭격기였다. 또한 미군 조종사 40명 이상을 포로로 붙잡았다.(마이클 매클리어, 앞의 책, 2002, 552쪽.; 이미선 번역, 《베트남 전쟁 항미전쟁의 종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292쪽.)
하지만 라인배커 작전에도 베트남은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1973년 1월 미국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와 북베트남의 레둑토(Le Duc Tho)가 파리에서 평화협정에 체결하며 미국은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했다. 1974년 12월 북베트남 정부는 남부를 완벽히 통일할 계획을 세웠고, 1975년 3월에 이를 실행으로 옮겼다. 1975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대공세를 가했을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병력은 30만 명이 채 안되는 수준이었다. 탱크는 320대, 장갑차는 250대 그리고 화포는 1,000여 문 정도 있었다. 그에 반해 남베트남군은 병력 110만 명 이상에 탱크 2,000대, 장갑차 1,500대, 화포 1,500문을 가지고 있었고, 1,500여 대의 항공기와 헬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전선 전역에서 남베트남군을 궤멸시켰고, 1975년 4월 30일 수도 사이공을 점령하고 통일을 이룩했다. 남베트남은 북베트남군의 대공세 1달 만에 국가가 무너져버렸다. 이로써 베트남은 남과 북이 통일되었고, 전쟁은 북베트남과 베트콩 측의 승리로 끝났다. 베트남이 치른 민족해방전쟁은 이렇게 종결됐다.(오민영, 앞의 책, 2022, 426~427쪽.)
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120년간 지속된 역사 속에서 전개된 베트남인들의 독립전쟁 즉 민족해방전쟁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단하고, 남베트남에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세우며 베트남을 침략한 것은 명분도 전혀 없는 전쟁이었고, 말 그대로 미제국주의의 침략이자 전쟁범죄였다. 우선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이 명분없는 이유는 남베트남의 정통성 문제에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남베트남은 미국이 만든 정권이었고, 아무런 정통성이 없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호찌민과 북베트남 지도부가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찌를 때, 후에 남베트남 정치인이나 지도부가 되는 인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프랑스에 협력한 민족의 반역자들이었다. 1969년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대표로 회담에 참가했던 윌리엄 해리먼(William Harriman)은 남베트남 정권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남베트남에서의 투쟁의 승부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한쪽은 자기 민족을 억압한 식민지 세력에 협력한 사람들이 이끄는 집단이다. 다른 한쪽은 긴 독립투쟁과 반식민지투쟁에 몸바쳐 싸워온 사람들이 이끄는 집단이다. 어느 쪽 지도자들이 베트남인을 더 사랑하는 가는 분명한 사실이다. 민중의 사랑을 받는 쪽이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찬딘반, 김민철 옮김, 《불멸의 불꽃으로 살아》, 친구, 1988, 179쪽.)
이와 같은 발언만 보더라도 남베트남 정권은 한 마디로 망해도 싼 부정부패한 민족반역자 정권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었으며, 베트남인들이 미제국주의자의 침략에 맞서 싸운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인 것은 한국의 주류 사학계도 인정하는 팩트다. 아래는 한국 사학과에서 공부한 베트남인 학자 도미엔이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 쓴 내용을 보자.
베트남 전쟁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갈등이 복잡하게 뒤얽힌 복합전쟁이었다. 물론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통일전쟁이고 민족해방전쟁이었다.(도미엔, 《붉은혈맹 –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 전쟁》,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8쪽.)
베트남 전쟁은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한 전쟁이었다. 보통 베트남 전쟁의 사망자의 경우 미군 58,000명 전사, 남베트남군 25만 명 전사, 베트콩 및 북베트남군 100만 명 전사 그리고 남북베트남을 아울러 최소 20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보다 더 높은 수치도 있는데, 1995년 베트남 정부 스스로가 공개한 추정치에 따르면 남북베트남을 아울러 400만 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사망했고, 100만 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최대 5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얘기다.
《좌파세계사》를 쓴 닐 포크너의 경우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500만 명 중 5만 8,000명은 미군이었고 나머지는 베트남인으로 100만 명 정도는 군인이었으나 나머지는 민간인이었다.”고 추산했다. 그리고 사망자 대부분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책에 썼다.(Ken Burns, 앞의 영상, PBS, 2017.; Clay Claiborne, Vietnam: American Holocaust, 2011.04.18., <https://www.youtube.com/watch?v=rBDKzcjMHEs&t=679s>, 접속날짜: 2025.04.30.; David Michael Smith, Endless Holocausts – Mass Death in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Empire, Monthly Review Press, 2023, p.190.; 닐 포크너, 이윤정 옮김, 《좌파 세계사 – 네안데르탈인에서 신자유주의까지》, 엑스오북스, 2016, 654쪽.)
이 전쟁을 계획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Macnamara)는 1990년대 당시 아메리칸 대학 강연에서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베트남인 380만 명이 죽었다.”라고 고백했다. 일반적으로 베트남 전쟁 베트남인 사망자 추정은 보통의 경우 군인 100만 명과 민간인 2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인접국가인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무수히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1975년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라오스 인구의 1/10인 35만 명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죽었다. 캄보디아에서도 80만 명이 사망했다. 만약 앞서 언급한 500만 명의 베트남인 인명 피해와 라오스 캄보디아인의 인명피해를 합치면 미국의 베트남 침략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600만 명이 되는 셈이다.(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 존슨에서 오바마까지》, 들녘, 2015, 102쪽.;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 앞의 책, 2006, 422쪽.; 황성환,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 소나무, 2009, 395쪽.; 박태균, 앞의 책, 2015, 196쪽.)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은 침략세력이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전쟁범죄로 반드시 언급되는 학살은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미라이 학살은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William Calley) 중위 소속의 병사 30명은 미라이 지역 근처에서 대략 504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었다. 미군에게 학살당한 504명 중 17명은 임산부, 173명은 어린이 그리고 56명은 유아였다. 사실 미라이 학살은 그나마 진상이 규명된 미군의 전쟁범죄일 뿐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자행된 미군의 전쟁범죄를 생각해 보자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미라이 학살을 은폐한 죄목으로 기소당한 오렌 핸더슨 대령은 1971년 초 기자들에게 여단 정도 크기의 모든 미군 부대는 어딘가에 각자의 미라이를 숨겨두고 있다고 고백했다.(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현장을 가다》, 푸른역사, 2011, 123쪽.; 송필경, 《왜 호찌민인가?》, 에녹스, 2013, 16쪽.)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폴 토머스 체임벌린은 저서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아시아 1945-1990》라는 책에서 베트남 저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미라이 학살은 남베트남에서 보고된 수백 건의 대학살 중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며, 이 대학살 가운데 일부는 손미에서 벌어진 학살을 능가했다.(폴 토머스 체임벌린, 김남섭 옮김,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아시아 1945-1990》,이데야, 2023, 372쪽.)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이 미군과 남베트남 연합군에 의해 자행됐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무수히 많은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면서 남베트남에 있는 15,000개의 촌락 가운데 9,000개를 파괴했다. 500만 명 이상의 베트남 농민이 철조망에 휩싸인 난민캠프에 수용됐다. 1970년 당시 에드워드 허만(Edward Herman)이라는 미국의 학자는 베트남 전쟁의 잔혹행위를 정리한 얇은 저서에서 이와 같은 미군 전쟁범죄 행위를 폭로한 적이 있다. 이 책에서 허만은 미군에 의해 최소 100만 명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다.(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앞의 책 II, 2015, 73~102쪽.; Austin Murphy, The Triumph of Evil – The Reality of the USA’s Cold War Victory, European Press Academic Publishing, 2000, p.22.)
따라서 베트남 전쟁 시기 전쟁범죄와 민간인 학살 절대다수는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됐다. 반면 베트콩의 경우 테러나 학살을 거의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 규모도 매우 작았으며, 전남대 사회학과 최진기 교수에 따르면, “베트민이나 북베트남 당국에 의한 민간인학살 관련 소문은 주로 미국 정보당국이 제기하였지만, 별다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그 이후 헛소문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또한 윤충로도 “베트민이나 베트콩에 의한 살인과 테러도 존재했으나 이들이 용의주도한 대량학살작전을 써서 상당수의 비무장 민간인을 죽였다는 확증이 있는 경우는 거의없고, 오랜 세월에걸친 혁명철학 및 혁명전략, 기층주민들과 그들의 관계, 그리고 뛰어난 기강 때문에 그렇다.”고 논문에 썼다.(최정기, 「민간인 학살의 사회구조적 요인 비교: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2011, 339쪽(각주 10번 참고).; 윤충로, 앞의 책, 2005, 550쪽(각주 59번 참고).)
실제로 이와 같은 추정과 주장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인 닉 터스(Nick Turse)가 쓴 책 “Kill Anything that moves”를 보면, 1967년 메콩 델타 지역인 끼엔장(Kiên Giang)성에서의 난민을 대상으로 한 미국 측 연구 조사는 난민들 중 2/3 정도가 미국의 포격과 폭격 때문에 도망치게 된 것이라고 밝혔고, 끼엔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딘뜨엉(Định Tường)성에서는 난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최소 60% 이상이 미국과 남베트남에 대해 자신들을 전략촌에서 떠나게 만든 것에 대해 맹렬히 비난한 반면 베트콩에 대해 비난한 비율은 22%에 그쳤다. 1970년 꽝남성에서 난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미국 측 연구는 최소 80%의 난민이 미군을 포함한 남베트남 연합군이 마을을 파괴한 것에 대해 비난했고 18%는 양측의 교전에 의해 발생한 파괴에 대해 비난했으며 겨우 2%만이 베트콩을 가리켜 파괴를 초래한 것에 대해 비난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에 의한 학살과 테러에 대한 추정이나 주장들은 현실을 매우 과도하게 과장하거나 조작했다고 볼 수 있다.(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 Picador, 2013, p.69.)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 승전의 의의는 무엇일까? 우선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 자주와 독립 그리고 통일을 쟁취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베트남의 혁명 투사들은 미제국주의의 전쟁 기계를 무수히 많이 파괴했다. 이 전쟁에서 미군은 총 5만 8,000명이 전사하고, 26만 명이 부상당했지만, 미국의 수많은 전쟁 기계들 또한 베트남의 수렁 속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대략 3,700대 이상의 미군 항공기가 파괴되었고, 5,000대 이상의 헬기가 파괴되었으며 800대 이상의 미군 전차 및 장갑차가 베트남 전쟁에서 파괴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잃은 총 항공기는 대략 10,000대 이상이다. 이렇게 보자면, 미군 전사자에 비례해 무수히 많은 전쟁기계가 베트남에서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다.(김남기,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어깨걸고, 2021, 200쪽.)
그리고 베트남 전쟁은 결정적으로 냉전시기 제3세계의 반식민주의 민족해방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시기 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니카라과의 경우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이 베트콩을 따라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그리고 무장투쟁을 니카라과 안에서 전개했다. 산디니스타는 베트콩의 인민 전쟁 전략을 수용하여, 1979년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 외에도 라틴아메리카의 무수히 많은 국가들이 이 노선을 따라 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에 맞서 싸웠다. 이후 베트남 인민이 보여준 저항은 21세기에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진행됐고, 현재는 팔레스타인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현재 반미 진영 국가들이 미국에 협력하는 제국주의 앞잡이 세력에 맞서 그런 혁명전쟁을 벌이는 것은 어찌보면 베트콩의 위대한 저항정신과 역사가 만들어낸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이 종결된지 50년이 지났다. 현재 베트남 전역은 50년전에 쟁취한 승전을 축하하는 환호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은 냉전 시기 미제국주의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 앞으로도 세계혁명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다. 과거 베트남이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듯이, 현재도 미제국주의에 맞서 자주와 독립 그리고 주권을 지키려는 제3세계 민중의 투쟁이 지속되고 있다. 제3세계에게 있어 베트남 해방전쟁의 역사는 여전히 유효성이 있고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 50년 전 세계는 미제국주의가 베트남에서 어떻게 패배하는지 보았다. 그리고 4년 전 미제국주의는 거의 유사하게 아프가니스탄에서 패망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20년간 쏟아붇고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제국주의는 정신을 못차리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도발했다. 바이든 정부는 2022년 우크라이나에서 202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미제국주의가 얼마나 전쟁에 미쳐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미제가 일으킨 전쟁은 베트남의 사례에서 보듯이, 미제 침략자들의 패전으로 종결됐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의 역사는 미제국주의자들이 이기지 못하는 전쟁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지금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해방전쟁 50주년을 맞아 앞으로 우리가 깊이 새겨야할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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