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비론은 일비론이 되어 자본주의 옹호론자가 된다

신좌파 다원주의 노선 무엇이 문제인가?3

신좌파의 양비론적 철학적 태도

신좌파는 (현실)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자에 대해 다 비판적인 양비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신좌파 형성에 다양한 정치적 사조들이 영향을 미쳤는데, 이와 관련해 그 가운데 대표적인 프랑크푸르트학파(비판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의 태도에 대해 살펴보자.

1923년 어느 부유한 곡물상의 증여로 사회연구소(The Institute for a Social Research)가 프랑크푸르트에 설립되었는데, 이로써 프랑크푸르트파의 활동은 제도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파의 학풍은 1930년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가 소장직을 맡으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1930년 호르크하이머가 소장에 지명되면서부터 두드러진 정책적 변화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이 연구소의 참여자들은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의 개혁주의(reformism)나 모스크바 지향적 공산주의의 경직된 노선에도 반대했다…

호르크하이머와 그의 절친한 협조자 테오도르 아드르노(Theodor Adorno)는 서구와 소련 모두에 환멸을 느끼고, 마르크스사상으로부터 철학적 차원을 끌어낸 코르쉬 그리고 누구보다도 루카치 등과 같은 1920년대의 평의회 공산주의자(hte Council Communist)로부터 영감을 얻어냈다…

프랑크푸르트파가 그들의 견해에 대해 즐겨 사용한 명칭은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이라는 것이었다.(《마르크스주의 논쟁사》, 맥렐런, 인간사랑)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서 곡물상으로 대 부호가 된 독일인 헤르만 바일의 기부금으로 설립된 프랑크푸르트 대학 부설 사회연구소는 강단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륀베르그가 이 연구소 소장을 맡으면서 시작 되었다. 이 연구소의 성격은 서유럽에서의 실패된 혁명, 독일 노동운동의 와해,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 자본주의적 경향등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연구의 대상으로 암암리에 표방 되었다.(전석환 동국대 강사,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과 막스 호르크하이머>, https://m.cafe.daum.net/werfreiheit/4DUZ/7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기부금을 납부하여 연구소를 창립하게 한 “어느 부유한 곡물상’은 헤르만 바일이었다. 이 바일의 아들인 펠릭스 바일이 아버지의 돈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부유한 자본가의 자식들도 휴머니즘 전통에 바탕을 둔 교양을 익힘으로써 보편적 인권과 정의를 중시하는 진보적 사상의 옹호자로 성장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것이다.([김누리 칼럼] <얀 필리프 렘츠마와 펠릭스 바일>, 한겨레신문, 2022-08-09)

김누리 교수는 펠릭스 바일을 부르주아 자식으로 진보적 사상을 지닌 휴머니스트로 소개하는데, 1923년은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뒤에 전 세계가 공산주의냐 자본주의의 옹호냐를 둘러싸고 둘로 첨예하게 갈라지는 시점이었다. 이 당시 강단 맑스주의는 “보편적 인권과 정의”를 내세우며 진보적 이념을 표방했으나 당시 혁명적 이념은 사변적 이념이 아니라 러시아 혁명 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그 혁명으로 들어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지하느냐 마느냐로 결정이 되는 시점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맑스주의를 전면 부정하지 않고 표방하기는 했으나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둘러싼 첨예한 현실에서 한 발 물러나 지식인들의 강단 이념으로 출발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서유럽, 특히 혁명적 위기로 들끓었던 독일혁명의 패배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창설한 독일 공산당과 혁명적인 독일 노동운동의 와해, 그리고 이 패배의 여파로 인한 패배주의와 회의주의의 만연 속에서 혁명 사상의 약화, 칼 카우츠키 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배신자”(레닌)가 반소비에트 노선에 입각해 소비에트 연방을 관료적인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이래 이들 역시도 소련의 “국가 자본주의적 경향등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연구의 대상으로 암암리에 표방”(전석환 동국대 강사, 같은 글)하게 되었다.

호르크하이머(앞줄 왼쪽)와 아도르노(오른쪽). 뒷줄 오른쪽은 비판적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위에서 소개한《마르크스주의 논쟁사》에서는 “1930년 호르크하이머가 소장에 지명되면서부터 두드러진 정책적 변화가” 생기면서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의 개혁주의(reformism)나 모스크바 지향적 공산주의의 경직된 노선에도 반대했다.”고 하는데,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서구와 소련 사회주의 모두에 환멸을 느끼면서 출발했다. 이러한 양비론적 입장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이 학파의 입지점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적 태도를 결정했다. 그런데 뒤에 가서 더 살펴보겠지만, 대개의 양비론이 그러하듯,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그 무엇도 아닌 노선은 자본주의를 현실로 인정하면서 사회주의를 비난하고 적대하는 반공주의 노선으로 전락했다. 

승리한 사상이 옛날부터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그들도 겪고 있다. 승리한 사상이 기꺼이 비판적 요소를 포기하고 단순한 수단이 되어 기존질서에 봉사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자기 의지와는 반대로 예전에 선택했던 긍정적인 무엇을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질시키게 된다.(아도르노ㆍ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옮김, 문학과 지성사)

승리한 사상이 관료주의로 타락하고 급기야 자본주의로 변모했다는 입장은 트로츠키의 중심 사상이다. 신좌파는 이와 유사하게 기존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기존 체제를 타도하고 승리한 사상이 기존 체제와 유사하게 변해버렸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본주의로 복귀했던 구 사회주의에 대해 그렇다는 것만이 아니고 현존했던, 그리고 현존하는 사회주의 모두가 그렇다는 것이다. 

기회주의 양비론 철학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두 발을 걸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진보적인 인간의 이성과 사상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로 이어졌다.

“계몽으로 프랑스혁명이 가능했는데, 그 이후 인류는 왜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파시즘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스탈린주의라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저작 <계몽의 변증법>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바로 이것이다.(https://moongyebong.tistory.com/18246136)

이들은 결국 자본주의의 가장 배외주의적이고 테러적인 통치 형태인 파시즘과 그 파시즘에 맞서 2,700만 인민이 희생하면서까지 파시즘을 격퇴한 소련을 “스탈린주의” 체제로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로 동일시 할 정도로 정치적 분별력을 상실하였다.

그런데 현실의 첨예한 정치세계에서 이러한 양비론적 노선은 중립이나 초월적 이념이 아니라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프로파간다에 복무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들 노선은 자본주의, 제국주의 노선과 동일한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하여 “제국주의의 진보적 벗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파시즘과 스탈린시대 사회주의, 현존 사회주의에 대해 다 같이 권위주의 파시즘이나 유사 파시즘 체제로 보는데, 트로츠키도 적색 파시즘론을 제출하였다.

소련의 보나파르트 체제는 노동계급의 세계혁명이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등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똑같은 이유로 파시즘이 등장했다. 소련에서는 무제한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관료집단이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으며 서방에서는 파시즘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다. 이 두 현상은 동일한 원인의 산물이다. 즉 역사가 제기한 문제들을 세계 노동계급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 결론은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불가피할 뿐이다. 스딸린 체제와 파시즘 체제는 사회적 기초는 판이하지만 동일한 현상이다. 이 두 체제의 특징은 지독히 비슷하다.(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누가 혁명을 배반했는가? 혁명이 배반당한 것이 아니라 트로츠키가 혁명을 배반한 것이다.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관료체제를 정치혁명으로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배반당한 혁명》을 출간한 시점은 1936년인데, 이 때는 1933년 히틀러 파쇼 도당이 권력을 잡은 이후 전쟁의 기운이 감지되어 쏘련 공산당과 전체 인민이 전쟁을 막고 대비하기 위해 분투하던 시점이었고 독일 히틀러 파시스트는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한데 이어 1941년 소비에트 러시아를 침공했다.

트로츠키는 독일 파시즘의 소비에트 공격 시점을 정치혁명의 기회로 간주함으로 소비에트의 비판자에서 혁명을 노골적으로 배반한 반혁명 분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파시즘과 소비에트를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로 동일하게 간주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생겨난 반동 파시즘과 혁명을 수호하며 파시즘과 대결하는 소비에트를 “동일한 원인의 산물”로 규정하고, “스딸린 체제와 파시즘 체제는… 동일한 현상이다.”라는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야말로 “동일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 양자는 바로 현실의 첨예한 계급투쟁으로부터 벗어나 혁명성과 현실성을 상실하고 노동자계급에게 현실의 혁명은 실패하고 새로운 억압자가 등장한다는 체념과 회의주의를 유포한다. 이는 양비론과 중립노선으로 가장하지만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지배계급의 입장과 일치하게 된다.

마침내 양비론은 걸쳐 있는 한 발을 빼고 제국주의 프로파간다가 되었다

현대 제국주의 자유주의(리버럴) 사조들은 극단주의 배격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이들은 카우츠키나 트로츠키주의, 현대비판이론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척하며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양비론을 구사함으로써 파시즘 체제인 서방 제국주의를 비호한다.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문제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1938년, 히틀러가 칼 포퍼의 고향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포퍼는 전체주의 정치체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서를 저술하기 시작하는데, 이 책이 바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포퍼는 역사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열린 사회’를 옹호한다…

두 번째 책, 〈예언의 높은 물결: 헤겔, 마르크스, 그리고 그 여파〉에서는 포퍼의 비판이 헤겔과 마르크스를 향한다. 포퍼는 헤겔과 마르크스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후손으로 생각하였고, 이들이 20세기 전체주의의 뿌리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위키백과)

“지상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전체주의의 모든 시도는 비록 선한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하더라도 결국 지옥을 만들 뿐이다.” “인류 역사는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 간 투쟁의 역사다.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 열린 사회로 가는 길이 있을 뿐이다.”

칼 포퍼(1902~1994)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전체주의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비판한 책이다. 그는 1945년 출간한 이 책에서 나치즘과 마르크스주의 등 전체주의를 개인의 자유가 없는 닫힌 사회로 규정했다.

역사는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떤 목표를 향해 발전한다는 게 역사법칙주의다. 역사는 인간이 다룰 수 없는 힘에 의해 정해진 방향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역사법칙주의의 뿌리는 플라톤에게 있으며,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으로 구현돼 전체주의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게 포퍼의 견해다.

반증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는 없어

포퍼는 “개인의 책임을 집단의 책임으로 대체하는 민족주의는 평등주의와 인도주의를 지향하는 열린 사회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역사를 민족 대 민족의 대립항쟁으로 보는 관점이 20세기를 지배했고, 그 절정은 나치즘”이라고 규정했다.

포퍼는 전체주의에 맞서 ‘점진적 역사발전론’을 내세웠다. 그는 “사회는 혁명이란 수단을 동원해 정해진 목표를 향해 일거에 발전하는 게 아니다”며 “사람들 사이의 수많은 비판·토론과 시행착오를 통해 조금씩 발전하고 개선돼야 한다. 이게 열린 사회”라고 강조했다.

이 책의 핵심 중 하나는 ‘반증가능성 이론’이다. 과학에서 반증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가설 제기와 기존 이론이 지닌 오류를 찾아 반증하는 과정을 통해 더 나은 이론을 정립하면서 조금씩 진리에 접근한다는 이론이다. 포퍼는 “사회도 마찬가지”라며 “인간의 이성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서로의 비판을 허용하고 반증을 거쳐 점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플라톤의 철인왕과 마르크스의 노동자 계급은 역사법칙의 절대적 존재, 절대적 진리처럼 군림하고 있다”며 “이는 반증가능성이 없는 닫힌 사회의 대표적 사례”라고 꼬집었다.(홍영식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다시 읽는 명저] “열린 사회는 모든 비판을 허용하는 다원적 사회다”…전체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없는 ‘닫힌 사회’로 규정, 2019.06.24.)

카우츠키의 말년도 그랬지만, 비판이론의 정립자인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나 칼 포퍼나 모두 히틀러 파시즘의 폭압을 피해 망명객들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을 망명객 처지로 몰아넣은 파시즘에 대한 비판과 투쟁에 몰두하기 보다는 대개 전체주의 이론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파시즘과 소련사회를 동일하게 비판하였고 심지어는 비판을 소비에트 체제를 주된 비판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칼 포퍼는 열린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파시즘을 격퇴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파시즘을 격퇴하는 반파시즘 혁명을 한사코 반대했다. 칼 포퍼는 “역사를 민족 대 민족의 대립항쟁으로 보는 관점이 20세기를 지배했고, 그 절정은 나치즘”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파시즘의 민족억압과 파시즘에 맞서는 민족해방 둘 다를 부정하여 파시즘을 격퇴하는 민족해방 투쟁을 봉쇄하고 그럼으로써 파시즘에 날개를 달아주게 되었다.

칼 포퍼의 주장대로 “인간의 이성이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절대적 진리로 나아가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인 가설 제기와 기존 이론이 지닌 오류를 찾아 반증하는 과정을 통해 더 나은 이론을 정립하면서 조금씩 진리에 접근”하는 칼 포퍼의 철학적 인식은 당연하고 합리적인 진리인 것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이것이 “과학에서 반증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절대적 진리”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감으로써 불가지론, 회의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칼 포퍼는 “플라톤의 철인왕과 마르크스의 노동자 계급은 역사법칙의 절대적 존재, 절대적 진리처럼 군림하고 있다”며 노동자계급이 생산자이며 새 사회의 건설자라는 것을 부정하고 필연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인 “법칙”도 부정하고 있다.

칼 포퍼는 양비론적 입장에서 출발하여 자본주의를 파시즘과 분리하여 민주주의로 분류하고 현실 사회주의를 전체주의라 규정하여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칼 포퍼의 사상은 조지 소로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포퍼가 열린사회, 자유주의, 개인, 다원화사회의 가치를 철학으로 정립했다면 투자와 기부로 이를 실천해온 그의 추종자가 조지 소로스다.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포퍼와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 소로스는 런던정경대에서 사제 관계이기도 했다.

열린사회를 함께 꿈꾼 두 사람은 철학자와 전업 투자가로 이질적 삶을 영위했지만 지향점은 명확하게 같았다. 비영리 자선단체 ‘열린사회재단’ 등을 통해 소로스가 인권 반공 교육 복지에 기부한 게 80억달러가 넘는다고 한다…현대 자본시장에서 소로스만큼 용기 있게 전체주의와 독재 정권을 비판한 인물도 드물다.

아직도 ‘헤지펀드의 대부’ 소리를 듣는 그가 또 한 번 세계의 뉴스메이커로 떠올랐다. 지난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맹비판한 것이다. “시진핑은 열린사회의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했고, “IT로 국가 주도의 국민감시 시스템을 만들어 민주사회를 위협한다”고도 했다. 시진핑의 중국몽 정책인 ‘일대일로’에 대해서도 “중국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것이지, 수혜국을 위한 게 아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허원순 논설위원, [천자 칼럼] ‘열린사회의 가장 큰 적’, 한국경제신문, 2019.01.27.)

조지 소로스가 소비에트권 레짐 체인지(정권교체)에 나서기 위해 만든 재단도 포퍼의 영향을 받아서 ‘열린사회기금(the Open Society Fund)’이었다. 이 재단은 미국의 미국 민주주의 재단(NED), 미국 국제 개발처(USAID),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 등 공작 기관하고도 직접 연결돼 있었다.

미국 민주주의 재단(NED), 미국 국제 개발처(USAID),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 및 지배계급의 대리인인 조지소로스의 ‘열린사회(Open Society)’와 같은 단체들이 1990년대에 동구권에 몰려들어왔다. 이러한 단체들은 미국을 지지하지 않으며 선출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반민주주의 반대 운동과 선거부정을 공개적으로 후원했다.

이러한 단체들은 인기도 없는 독재자들을 불가리아(1991), 알바니아(1991), 러시아(1996), 그루지야(2003), 우크라이나(2004) 그리고 카자흐스탄(2005) 등의 많은 국가에서 지지한 것과 선거조작에 책임이 있다.

미국민주주의재단(NED)의 공동 설립자 알렌 웨인슈타인(Allen Weinstein)은 “우리 민주주의 재단이 오늘날 하고 있는 많은 것들은 25년 전에 CIA가 비밀스럽게 하던 일들이다.”라고 언급했다.-Gerald Sussman, “‘민주주의 후원’의 거짓말,” 먼쓸리리뷰(Monthly Review), 12. 2006.>(노동자정치신문 92호, 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20년 후(4), 출처: 진보노동당(Progressive Labor Party)의 정기간행물, <공산주의자(THE communist)> 2012년 겨울호)

조지 소로스는 이 재단을 만들어 자신이 실제 레짐 체인지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나는 1980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헌장77운동과 1981년 폴란드에서의 연대노조 운동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나는 1984년에 내 조국인 헝가리, 1986년 중국, 1987년 쏘련, 1988년 폴란드에서 따로 기금을 설립했다. 나의 업무는 쏘비에트 체제 붕괴를 가속화하도록 했다 … 그러나 나는 나찌즘이나 공산주의처럼 같은 범주에서 자본주의를 자유방임주의로 두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는 의도적으로 열린사회의 붕괴를 추구한다.(조지 소로스, “자본주의의 위협”, Atlantic Monthly, Volume 279, No. 2, February 1997)>(<조지 소로스와 ‘진보’를 가장한 반공주의>, 노동자정치신문, 2016년 2월 19일)

조지 소로스가 동유럽과 소련에 대한 반혁명에 자금을 직접 지원하면서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의 사례를 들었는데, 현실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여기는 트로츠키주의 국가자본주의자들은 폴란드에서의 반혁명 운동을 국가자본주의를 타도한 성공한 혁명운동으로 간주함으로써 제국주의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고 있다. 동유럽과 소련 사회주의가 해체된 지금 소로스의 타도 대상은 중국이 되었다.

조지 소로스는 국제투기꾼의 대표적 인사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착한 자본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외치면서 자본주의의 개혁자로 가장하고는 실제로는 사회주의의 파괴자 역할을 수행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나 칼 포퍼가 수행한 역할과 전혀 다르지 않다.

대개의 현대 제국주의 프로파간다, 특히 자유주의 리버럴 사조의 경우에는 히틀러 파시스트를 대놓고 지지하지 않는다. 히틀러 파시스트가 침략 전쟁과 집단학살을 통해 인류에게 너무나 많은 참상을 초래하였다는 것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제국주의자들은 파시스트가 독점자본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해 자본주의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철저하게 은폐한다. 그리고 위의 파시즘과 적색파시즘론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전체주의로 몰아감으로써 자본주의를 진보적이고 다양한 사회로 규정하고 반공주의를 설파하게 된다.

T. I. 오이저만이《맑스주의 철학성립사》에서 비판했듯이 이들 신좌파적 맑스주의는 반맑스주의 사상이며 실제로는 “반공주의의 일종”이다.

청년 헤겔학파의 ‘비판적 비판’은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과 기타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의해 계승되고 있으며, 그들의 이론적 구조물은 흔히 ‘네오맑스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 특히 그것의 독일판인 실존주의는 낭만적 반자본주의의 부활에 다름아니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반공주의의 일종(강조는 인용자)임을 곧 알 수 있다.(T. I. 오이저만,《맑스주의 철학성립사》)

게다가 페리 엔더슨《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에서 비판한 것처럼 이들의 이론은 인민대중과 담 쌓은 현학적 이론으로 “밀교주의”로 비판 받고 있다. 이들 현학 이론은 현실과 담을 쌓음으로써 자본주의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옹호자로 역할하고 있다.

양비론에서 출발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비판이론은 이제 자신들의 이론이 극우를 비판하는 체하며 실은 자본주의와 착취제제를 영속화 하는 반동적 체제 수호이론임을 노골적으로 자랑한다.

비판이론은 자본주의의 끝판왕 나라인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배웠다. 비판이론을 공부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더 오래오래 지속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의 최애가 오래오래 마음 놓고 돈 벌 수 있으려면 팬덤인 우리 모두가 잘 살아야 하니까 자본주의가 오래오래 잘 작동해야 한다. 그러려면 비판이론처럼 자본주의의 구멍들을 메워줄 철학이 필요하다.(“내 아들을 극우 유튜버에서 구출해 왔다” 그리고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노동자정치신문, 2025년 1월 24일)

난무하는 각종 신좌파 이론이 아무리 다양한 색채를 띤들 이 점에서 본질은 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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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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