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계급성이란 무엇인가?

트럼프의 제국주의 협박에 맞서는 투쟁을 국가주의로 매도하며 가로막는 행위를 계급성으로 호도해서는 안 된다

트럼프의 통상협박, 주둔비 인상 등에 맞서 한국의 군사주권, 경제주권을 회복하여 자주성을 찾자는 주장에 대해 [노동자신문]은 “국가주의를 넘어서자”(2025-07-12)는 논평으로 이러한 투쟁이 국가주의, 애국주의 선동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노동자신문]은 이 시기 오직 필요한 것은 “세계노동자‧민중의 세계 자본가‧자본가국가에 대한 자주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민족자주를 부정하는 얼치기 혁명가들을 경계하라!”(2025년 7월 12일)을 통해 이러한 주장이 제국주의에 맞서 자주권을 찾자는 계급성을 협소하게 왜곡하여 민족자주, 민족해방 투쟁을 외면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리로 “국가주의를 넘어서자”는 주장을 옹호하는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 회원의 글이 게시되었다.

옳습니다.

‘국가주의ㆍ애국주의’ 가스라이팅.

세상에 존재하는 가스라이팅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주의 애국주의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기가 정말 힘들죠.

여기서 “국가주의ㆍ애국주의” 개념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자.

국가주의(國家主義, Statism)란 국가를 가장 우선적인 사회 조직으로 규정하고 국가 권력에 사회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통제력을 부여할 것을 주장하는 이념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국가통제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것이 극단화되면 전체주의가 되고 반대되는 이념으로는 개인주의, 자유지상주의, 아나키즘 등이 있다…

사회주의 좌익들의 지배 체제 비판도 결국에는 자신들의 독재정권(프롤레타리아 독재)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지 국가 자체를 비판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이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국가사회주의자(State socialist)라고 부르는 것이다.(나무위키)

국가주의, 애국주의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무정부주의 국가관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착취자들에 맞서 노동자 민중의 국가를 세우고 이를 지키는 투쟁을 국가사회주의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국가사회주의는 파시즘의 배외주의적인 주장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파시즘을 동류에 넣고 전체주의라고 배격하는 것이다.

실제 위 나무위키 문서에서는 “애국주의는 지구가 여러 개의 작은 지역으로 나뉘어 있고, 강철 문이 그 경계를 이룬다고 가정한다. 우연히 특정한 장소에 태어난 자는 다른 지역에 태어난 자보다 자신이 더 낫고 고상하고 위대하고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선택된 장소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싸우고 죽이는 것이 의무라는 것이다.”라는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인 ‘엠마 골드만’의 주장을 싣고 있다. 

애국주의 일반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들과 자주성을 배격하는 가짜 계급주의자들은 서로 닮아 있다

엠마 골드만은 특정한 지역, 나라의 사람들이 자기 우월성에 고취되어 다른 지역, 나라 사람들을 멸시하고 심지어 싸우고 죽이는 것이라고 애국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그런데 애국주의는 이것만 있는가? 나라를 잃은 식민지 민족이 자기나라를 그리워하고 나라를 빼앗은 제국주의와 싸우는 애국주의도 있지 않은가? 자기 지역, 나라의 강토를 자랑하고 아끼며 그 나라 사람들을 사랑하는 애국주의도 있지 않은가? 사회주의 애국주의도 있지 않은가?

레닌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애국관을 비판하며 사회주의 애국주의에 대해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민족적 긍지의 감정은 우리 대러시아인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에게 낯선 것인가? 확실히,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우리말과 우리나라를 사랑하며, 우리나라의 근로대중 (즉 우리나라 인구의 10분의 9)을 민주주의적·사회주의적 의식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우리의 아름다운 나라가 차르의 도살자들인 귀족과 자본가들의 손에서 학대와 억압과 능욕을 겪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스런 일이다. 이러한 학대와 억압이 우리의 한 가운데서, 대러시아인 속에서 반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이 속에서 라디쉬체프와 데카브리스트와 70년대의 혁명적 라즈노친치를 배출한 것, 대러시아인 노동자계급 속에서 1905년에 힘찬 혁명적 대중정당을 만들어낸 것, 대러시아인 농민 속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전환과 함께 성직자와 지주 타도 투쟁이 시작된 것에 우리는 긍지를 느낀다.(“대러시아인의 민족적 긍지에 대하여”, 1914년 12월)

스탈린을 비롯한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전통도 부르주아의 반동적 애국주의와 저항적 애국주의ㆍ사회주의 애국주의를 구별해 보고 있다.

세계주의는 그들의 유해한, 골수까지 부르조아적인 견해를 국제주의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제주의와 세계주의는 서로 어디까지나 적대하는 것이다. 세계주의는 민족성이 없는 것을 의미하고, 민족성의 외부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화라는 것이 생활의 현실적 기반 위에서 발생하고, 각각의 민족적 투쟁 속에서 발생하는 것인한, 세계주의는 반인민성을 의미한다. 세계주의란, 자유와 독립과 민족주권을 지향하는 여러 민족의 의지를 약하게 하려고 하는 부르조아·인텔리겐차의 발현형태이다.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는 민족을 인정하는 것, 민족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고, 인종이나 민족의 동등한 권리는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공산당과 소비에트국가는 각 민족의 문화적, 진보적 유산의 깊은 존중이라는 정신으로 국민을 교육하고 있다. 소련에서는 형식은 민족적이고 내용은 사회주의적인 문화의 발전, 다민족사회주의 국가의 건설과 강화에서의 노력에 부응하며, 각 민족의 공헌이 높이 평가된다…

민족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철저하게 투쟁하고 있는 것은 공산당에 지도되는 프롤레타리아뿐이다.

“애국주의란 고립된 조국의 수백 년, 수천 년이라는 기간에 굳혀진, 가장 깊은 감정의 하나이다.”라고 레닌은 말하고 있다. 착취적 사회라는 조건에서는 근로자의 애국주의는 조국에 대한 애정을 착취에 대한 증오에 결합하고, 착취자의 속박을 타파하기 위한 투쟁, 조국이 자유롭게 되고 독립하기 위한 투쟁, 조국이 그들에게 있어서 계모가 아니고, 그들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개화시키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주도록 하기 위한 투쟁에 결합한다.(아지쟌, 제2장 스탈린의 노작 《마르크스와 민족문제》에 대하여)

오늘날 세계화, 세계주의를 내세우며 민족성, 민족자주에 반대하는 것은 부르주아 사상이다. 이 부르주아 사상을 따라 민족과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오늘날 소부르주아 진영에서 유행하고 있다.

이현숙은 다른 글에서도 무정부주의 국가관을 따라 민족 자체를 혐오 배격하며 민족주의, 애국주의 일반은 반동적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사회주의 애국주의는 대치되는가”, 노동자정치신문, 2024년 6월 6일 글을 보기 바란다.)

엠마 골드만은 러시아혁명 이후 들어선 소비에트 권력에 대해서도 민중을 억압하는 또다른 독재권력이라고 비난했다. 

공산주의 정당은 정부 실권을 충분히 잡았다고 느끼자마자, 대중 운동의 범위들을 제한해가기 시작했다. … 새로운 독재 전(정)부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모든 정당과 모임은 사라져야 했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그 길을 그대로 쫓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1917년 혁명에서 등장했던 아래로부터의 요인들을 더욱 강화·발전시키는 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피억압 대중을 혁명의 주체로 만들고, 그들 자신의 자치기구에 권력이 쥐어져야 한다. 생산과 사회의 민주적이고 자주적 관리는 어떤 이유로도 가로막히지 말아야 한다.(전지윤, “길을 잃고 헤매던 레닌의 뒤를 그대로 쫓을 것인가, 다른 세상을 향한 연대, 2017.5.27 기사에 실린 엠마 골드만의 글)

레닌은 이에 대해 사회주의 건설의 현실성을 전혀 모르는 “쁘띠부르조아적이고 무정부적인 파괴”행위로 이는 “부르조아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될 뿐이기”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기관들은 ‘선출하는 생산자대회들 혹은 생산자대회’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 그리고 우리는 소비에트 국가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경제형태들의 건설이라는 실제의 업무를 계속하고 시정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업무에 대한 쁘띠부르조아적이고 무정부적인 파괴를 목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파괴행위는 부르조아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될 뿐이다(V.I 레닌, “러시아공산당 제10차대회의 결의. 우리 당내의 생디칼리즘적, 무정부주의적 편향에 대하여의 최초의 초안”)

레닌은 당시 유행하는 노동자통제 구호에 대해서도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의한 노동자통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각 공장별로 선출하는 생산자대회나 노동자통제는 전국적인 중앙집중적인 계획생산 체제가 아니라 각자의 분산되고 난립한 무정부적인 생산과 경제가 될 뿐이다. 이러한 생산체제가 지속된다면 이들 생산자기구 간에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시장이 형성되고 이는 사회주의 계획 생산체제를 파괴하고 자본주의 무정부주의, 무계획주의로 귀결될 것이다.(레닌, 같은 글)

레닌이 이를 “부르조아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될 뿐”이라고 강력 비판한 것은 이때문이었다.

엥겔스도 이를 이렇게 비판했다.

사회 혁명이 일어나, 오늘날 자신의 권위로 생산과 부의 유통을 관리하고 있는 자본가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고 가정해 보자…

대공장의 기계 자동화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소자본가들도 이제까지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정도로 훨씬 더 전제적이다. 적어도 노동 시간과 관련해서는, 이런 공장들의 대문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을 수도 있다; 들어가는 사람은 자치를 모두 놔둘 지어다! 인간이 지식과 창조적인 재능으로 자연의 힘을 굴복시키기는 했지만,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한,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사회 조직과 별개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전제주의에 놓이게 만듦으로써 인간에게 복수하고 있다. 대공업에서 권위를 폐지하기를 바라는 것은 산업 자체를 폐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레로 되돌아가려고 증기 방적기를 부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 혁명의 첫 번째 행위가 권위의 폐지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양반들은 혁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단 말인가? 분명히 혁명은 존재하는 가장 권위적인 것이다; 그것은 인구의 일부가 가장 권위적인 수단인 소총, 총검 대포로 또 다른 일부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강요하는 행위이다; 승리한 당파는, 싸운 것을 헛되지 않게 하려면, 자신들의 무기가 반동배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통해 이 지배를 지속시켜야만 한다. 빠리 꼬뮌이 무장 인민들의 이러한 권위를 부르주아지에 맞서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단 하루라도 버틸 수 있었겠는가? 반대로 빠리 꼬뮌에 대해서는 권위를 충분히 광범위하게 사용하지 않았다고 질책해야 하지 않을까?(엥겔스, 《권위에 대하여》, 맑스·엥겔스 저작집 제18권, 305-308면, 1872년 10월과 1873년 3월 사이에 씌어짐,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이경일 번역, 박종철 출판사)

《공산당선언》에서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생산수단의 국가수중의로의 집중”이 공산주의의 요체라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이나 이 저작을 따로 묶은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에서도 거듭 이 주장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무정부주의자들은 현존했던 소련과 동유럽사회주의를 국가사회주의라 비난하여 사회주의 국유화를 부정하며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자유인들의 연합체” 운운하며 이를 모토로 분산성과 무계획성을 옹호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회화의 가장 높은 사회화 형태인 국유기업, 국영농장을 아래로부터 민중의 열망과 무관하고 이를 억압하는 통제기구로 사고하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 생산과 건설에 대한 파괴행위이다.

우리가 이들을 범무정부주의라고 비판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미제 우두머리 트럼프의 통상압박과 방위비 분담금에 대해 “‘국가주의ㆍ애국주의’ 가스라이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무정부주의자들이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일반을 억압기구(누가 누구를 억압하고 지배하느냐로 보지 않고) 자체로 보고 거부하는 것처럼, 이들도 저항적 민족주의, 저항적 애국주의와 배외적, 반동적 애국주의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무정부주의자들에 뒤질세라 이들은 도대체 (제국주의)국가의 본질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상투적이고 비현실적 주장을 남발하며 이를 극복하는 방안도 모르며 실제로는 반미반제 투쟁에 기권을 선동하고 있다.

무정부주의자들이나 참칭 계급론자들의 혼란스럽고 왜곡된 주장과 다르게 국가주의, 애국주의란 무엇인가?

국가주의는 자본가들의 착취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반민중적 이해를 국가일반, 국가에 소속된 전체 사회구성원의 보편적 이해로 포장하고는 노동자ㆍ민중의 일방적인 양보와 희생을 끌어내는 것이다.

애국주의는 국가의 이해, 실은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자주권을 무시하고 경멸하여 침범하는 것이다. 이 애국주의는 민족 간, 국가 간 호혜와 평등이 아니라 배외주의를 내세운 지배와 침략에 있다.

이러한 애국주의, 국가주의는 자기 민족의 인종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인종주의와도 직접 연관이 있다. 파시즘이야말로 이러한 반동적, 침략적 애국주의의 전형이다.

제국주의 역시 애국주의, 국가주의를 내세워 자국인민을 통제, 동원하는 동시에 다른 나라, 민족에 대한 침략과 지배, 억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애국주의, 국가주의의 전형은 미제국주의 수괴 깡패 트럼프다

오늘날 깡패 제국주의의 우두머리인 트럼프가 이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을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MAGA)”라는 구호를 내세워 다른 나라에 대한 통상협박과  국내총생산 5% 군사비 증액을 강요하는 트럼프의 구호야말로 21세기 애국주의, 국가주의의 전형적 모습이다.

그런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내세워 통상협박과 주한미군 분담금 인상을 강요하는 트럼프와 미국에 맞서 군사주권, 경제주권, 통상주권을 지키자고 싸우는 것이 어찌 이와 똑같은 애국주의, 국가주의로 배격할 것이 되는가?

계급성은 무엇인가? 계급의식이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 계급에 맞서 계급의식을 가지고 자주적으로 싸워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계급의식은 자신의 직접적 요구*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와 역사적 문제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

*여기에도 당연 충실해야 한다. 임금인상처럼 이 요구는 빈곤과 불평등을 척결하며 사회의 진보에도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만, 자기조합만 잘먹고 잘살자며 연대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조합주의와 사회변혁이라는 운동의 궁극목표를 상실하고 당면한 이해에만 몰두하는 실리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계급은 민주주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싸워야 한다.

분단에 맞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평화협정을 맺고 우리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위해 싸우는 것과 미국 트럼프의 통상압박과 주한미군 분담금 폭등 겁박에 맞서 자주권을 위해 싸우는 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계급의식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아직 이러한 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 트럼프의 제국주의 강권과 협박에 맞서 전체 노동자들과 민중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시급한 과제이며 동시에 우리 운동에 만연한 조합주의, 경제주의를 넘어 진정으로 계급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현숙이나 노사과연은 미제의 횡포에 맞서 자주권을 쟁취하는 투쟁에 들불같이 일어날 것을 선전하고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애국주의, 국가주의로 비난하며 이 투쟁을 가로막고 있다.

이는 계급성을 심각하게 곡해하는 것이며 과학적, 역사적 인식의 결여이자 기회주의, 종파주의이기도하다.

이들은 자주권을 위한 투쟁이 애국주의, 국가주의 가스라이팅이라고 비난하는데 가스라이팅은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조종하여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는 행위”를 말한다.

과연 누가, 누구를 가스라이팅하고 있는가?트럼프의 애국주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 겁박에 맞서 노동자 민중의 저항적인 자주권을 행사하기 위한 투쟁을 도매금으로 묶어서 투쟁의 확산을 막는 거짓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의 발전과 진보적 실천에 대한 가스라이팅 아닌가?

* 사진은 민주노총 [노동과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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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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