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제국주의와 21세기 기회주의자들
“극소수 선진제국에 의한 지구상 압도적 다수의 식민지적 억압과 금융적 교살의 세계체제”는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총체적 규정이다. 이러한 제국주의 체제는 “금융자본과 독점의 시대로서, 어디에서나 자유가 아닌 지배에 대한 열망을 가져온다. 정치체제가 어떠하든간에 이들 경향의 결과는 어디에서나 반동이며, 정치영역에서의 대립을 극도로 심화시키는 것이다. 특히 민족적 억압과 병합의 열망, 즉 민족자주의 침해는 더욱 심화된다.”고 레닌은 주장하고 있다.
현대제국주의에 어떠한 현상적 변화가 있든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본질적 규정은 여전히 진리의 빛을 발한다. 식민지적 억압과 금융적 교살의 수단, 방식이 다양하게 변화하든 한 줌도 안 되는 극소수 선진제국의 압도적 다수의 민족, 나라, 인민에 대한 억압과 교살은 계속되고 있다.
현대제국주의는 쇠퇴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미제국주의를 우두머리로 하여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제국주의가 패권을 유지하며 자국민에 대한 억압과 함께 다른 나라, 민족, 인민을 억압하고 금융적으로 교살하는 세계체제이다.
특히 제국주의 우두머리 미국은 침략적, 반동적 성격을 노골화 하며 전 세계 곳곳에 대한 침략과 파괴를 자행하고 있다. 내전을 조장하며, 레짐체인지(정권교체)까지 기도하며 다른 나라의 자주권을 압살하고 있다. 금융적 지배와 통제,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인 동시에 제국주의와의 결전을 회피하게 하고 혼돈, 혼란케 하는 기회주의와의 투쟁이기도 하다. 그런데 레닌의 시대와 지금은 다르기 때문에 위의 총괄적 규정을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며 과거 카우츠키가 수행했던 역할을 대행하는 현대판 기회주의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먼저 레닌시대의 제국주의는 “극소수 선진제국”이 맞았지만 지금은 독점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독점을 가진 나라들이 모두 제국주의 반열에 이르게 됐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극소수 선진제국”에 대한 규정이 변화했다고 보기에 극소수 선진제국에 의해 억압을 당하는 그 대극의 “지구상 압도적 다수”의 민족과 나라의 규정도 변화했다고 본다.
이리하여 결국 “식민지적 억압과 금융적 교살의 세계체제”는 사라지고 “불평등한 상호의존, 경쟁, 협력의 관계”(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관계부, “이른바 세계반제국주의 플랫폼과 그 파괴적이고 혼란스러운 입장에 대하여”, 2023년 4월 10일)로 전환되게 된다.
주지하듯 레닌은 제국주의의 경제적 기초가 독점이라고 했다. 독점을 경제적 기초로 하지 않는 제국주의는 없다. 그러나 독점이 곧 제국주의는 아니다. 독점을 기초로 해서 “극소수 선진제국에 의한 지구상 압도적 다수의 식민지적 억압과 금융적 교살의 세계체제”로 나아갈 때 비로소 제국주의가 되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신)식민지적 억압과 교살의 세계체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독점적 단계 혹은 독점자본주의단계라고 할 때의 ‘독점’이란 세계 자본주의의 국제적 관계에서의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 제국의 ‘독점적 지위’와 그의 실질적인 기초가 되고 동시에 세계지배의 주체가 되는 ‘독점체’의 형성-소위 ‘국내체제’와 ‘세계체제’-을 통일시켜 파악할 수 있는 총괄적인 단계 원리로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독점자본주의는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이고, 새로운 단계의 ‘특수성’을 그의 기본적인 경제적 측면에서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완전한 내용으로 규정할 경유에는 그것의 ‘정치적 특성’을 이루는 “금융과두제의 억압과 자유경쟁의 배제에 관련하는 모든 면에서의 반동과 민족적 억압” 또한 경제과정의 국가적 총괄을 매개로 하여 전개되는 자본주의 열강간의 국제적 대항, 총괄하여 경제적 제모순과 그것의 ‘해결’이 ‘정치’를 매개로 전개되고 실현된다는 제관계를 포함해야 한다.(‘제8장 제국주의의 역사적 위치’, “제국주의론”, 혼마 요치로本間要一郞, 박민옮김, 도서출판, 한울)
이처럼 제국주의는 국내적 독점을 기반으로 하지만 다른 나라, 민족을 억압하는 반동적인 “세계체제”라는 점을 망각하고, 폭력적, 반동적, 야만적이라는 제국주의의 정치적 본질을 망각하는 경제주의에 빠짐으로써 제국주의에 대한 전적으로 잘못된 인식을 하고 이를 근거로 심각한 정치적 이탈을 하고 결국 제국주의와의 결전을 혼돈, 혼란, 회피케 하고 기회주의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리스공산당을 필두로 이를 무차별적으로 추종하는 국내의 세력들이 바로 그렇다.(이에 대해서는 “‘제국주의 피라미드론’은 제국주의론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제주의론”, “우리는 ‘허수아비 때리기’가 아니라 허수아비를 때렸다”, “무엇이 채만수 소장을 경제주의적 제국주의론의 옹호자로 되게 했는가?”- 제국주의에서 침략성·지배성을 제거하는 노사과연의 경제주의적 제국주의론비판 1, 2를 보라.)
이들 기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체제는 어느 정도 불평등하기는 해도 “상호의존, 경쟁, 협력의 관계”라고 보기 때문에 민족억압과 민족자주의 대립관계는 사라진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란, 레바논, 예멘, 베네수엘라, 니제르 등 전 세계에서의 반제자주의 진보성에 대해 부정한다. 이들은 민족해방과 자주는 민족부르주아의 자립적 발전의 열망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수억, 수십억 인민의 제국주의에 맞서는 해방 열망을 외면, 왜곡한다. 이는 실제 민족해방을 외면하는 것이며 민족억압을 자행하는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교란, 회피하는 것이다.
반미반제와 민족해방투쟁의 회피가 정치적 목표
이들 기회주의자들은 현대제국주의는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한 줌의 제국주의 체제가 아니라고 본다. 이들은 중국도 제국주의고 러시아도 제국주의고 심지어는 독점을 형성한 모든 나라가 제국주의라고 보고 있다. 이들에게는 미제를 비롯해 서방제국주의의 일극 지배체제에 맞서는 투쟁으로 형성되고 있는 다극체제도 그저 “다극화된 제국주의”, “제국주의 다극화”에 불과하게 된다.
미제와 서방 제국주의의 통치자, 변호인들은 자신들이 자행하는 제국주의 지배와 폭력, 약탈이 너무나 명백하여 더 이상 은폐할 수 없게 되자 이를 양비론적으로 전가하여 제국주의의 반동성을 은폐하고자 한다. 이들은 중국과 러시아가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에 대한 새로운 신식민주의 약탈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부르주아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항상 진보진영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이들 동조자들로 하여금 은근하게든, 노골적으로든 제국주의를 미화, 변호하는데 앞장서게 한다.
한국 사회의 많은 이들이 대미 동맹을 여전히 냉전 시기의 틀로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대중 긴장 역시 이 틀로 해석하려 한다…
비록 아주 소수이지만, 이런 주류적 틀에 반발하며 이를 뒤집은 시각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중국을 여전히 모종의 ‘사회주의’ 국가라 바라보며 시진핑 체제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미국의 제국주의 패권에 맞서 남반구 국가들 혹은 다극화된 새 세상을 위해 분투한다고 믿는다…
패권에 맞서 남반구 국가들 혹은 다극화된 새 세상을 위해 분투한다고 믿는다. 이들 중 일부는 이 시각을 연장해, 우크라이나 침략을 자행한 푸틴의 러시아조차 다극화 세계를 열기 위해 싸우는 전사라 추켜세운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냉전 향수병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21세기 지구정치경제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신, 구 두 제국 중 어느 한 쪽의 지정학적 지배 전략에 맞서겠다고 다른 쪽의 지배 전략에서 자유나 해방의 가능성을 찾을 수는 없다. 그것은 지배자들이 만들어놓은 가상 세계 안에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짓일 뿐이다. 우리에게 ‘지정학 비판’은 필요하지만, ‘대항 지정학’은 필요하지 않다. 해방의 가능성은 오직 지정학 세계 바깥에 있다.([장석준 칼럼] ‘차이메리카’ 시대의 파국…미·중 충돌은 ‘제국들의 충돌’이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익’이 지배하는 세계, 프레시안, 2022.11.14.)
이들에게는 “가치 동맹”이라는 미국식 가치에 근간을 두고, 미국 식 패권주의가 “규칙에 기초한 국제질서”로 불변해야 할 최상의 가치 실현으로 보고, 미국 식 “인권과 인도주의”를 내걸어 다른 나라를 침략, 지배, 개입하는 패권질서가 “21세기 지구정치경제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저항하는 새로운 세계질서는 “어느 한 쪽의 지정학적 지배 전략에 맞서”는 “다른 쪽의 지배 전략에” 불과하며 이를 통해 “자유와 해방의 가능성을 찾을 수는 없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가상 세계 안에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짓”이라고 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미제국주의 일극 지배체제와 이것의 구현인 나토 제국주의 체제, 아시아판 나토가 우크라이나에서 대리전을 조장하고 팔레스타인 침략과 학살을 부추기며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미일한 동맹의 구축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이를 위한 역사왜곡, 대북, 대중, 대러 침략 책동과 봉쇄, 이로 인한 전쟁위기의 가속화, 이에 대한 윤석열 정권의 맹목적인 추종과 대북 적대, 국가보안법을 앞세운 민주주의 억압체제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제국주의 세계질서에 맞서는 투쟁도 “다른 쪽의 지배전략”이자 “지배자들이 만들어놓은 가상 세계 안”에 불과하기 때문에 저항적 의미도, 진보적 의미도 없다. 역사의 어느 편에도 정의는 없고 진리도 없다. 현실을, 그것도 첨예한 현실을 가상으로 보는 것도 망상의 일종이다. 이처럼 이들의 초현실적 사고는 현실적 억압을 무마시키고 저항의 의미를 훼손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을 억압과 모순을 직시하게 하고 투쟁하게 하는 대신에 안주하고 회피하게 하는 “인민의 아편”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들은 1차 세계대전과 같이 지금의 국제정세를 제국주의 간 대립과 충돌로 보고 있다. 그 양상은 미중 패권대결, 미러 패권대결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전망은 무엇인가?
백 년 전, 진지한 혁명가들은 이를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로 표현했다. 우리에게 더 익숙하게 번안하면, “제국 간 투쟁을 내부의 투쟁으로 전환하라” 쯤 될 것이다. 홉슨의 해법을 계승한 훙호펑의 정식화로는, 각 진영이 제국 간 전쟁이 아닌 내부 재분배를 통해 과잉축적, 과잉생산 능력을 해결하게 만드는 세계사적 전환이다. 지정학적 충돌과는 달리, 이 전환의 열쇠는 양 진영의 지배자들이 아닌, 각 진영과 국가 내부의 민중에게 있다.(장석준, 같은 기사)
그렇다고 하여 장석준 같은 신좌파 개량주의자가 제국주의 전쟁을 내란으로, 혹은 내부투쟁으로 전환하여 혁명을 하자는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다만 반미반제 투쟁에 기권하는 것이며 국제정세를 양비론으로 일관하여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이 기회주의 양비론의 결과가 과연 그러한지 보자.
그러나 막상 단극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뚜렷이 드러나는 또 다른 진실도 있다. 그것은 미국 주도 단극체제(혹은 얄타체제?) 덕분에 이 험한 세상에서 주권국가, 국민국가를 유지하는 비용이 전례 없이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실은 세상이 국민국가들로 가득 차게 된 것 자체가 세계사상 이 시대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국민국가들(신생국이 더 많은) 중 상당수는 단극체제 덕분에 상대적으로 적은 안보 비용(제1차 세계대전 이전 독립국들에 비하면 확실히 그러한)만 지불하며 독립을 구가하고 전쟁을 피하며 경제성장을 추구했다. 그 중에 대한민국도 있었다.([장석준 칼럼] “미국의 바짓가랑이 잡는 외교정책, 낡았고 극단적이다. 반전운동과 미국 단극 시대의 퇴장”, 프레시안, 2024-05-14)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의 세계지배 질서 속에서 그나마 주권국가와 국민국가가 유지됐던 것은 소련을 위시로 한 공산주의 진영과 민족자주와 자결을 위해 투쟁한 인민들의 투쟁 덕분이다. 그러나 이를 외면하고 제목과 달리 핵심 이들의 결론은 “미국 주도 단극체제”가 주권국가, 국민국가를 유지하게 했고, 전쟁을 피하고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했다는 미국 지배체제에 대한 찬사를 하고 있다.
이들은 더욱이 소비에트권의 해체 이후 더 강화된 미국 주도 단극 체제 하에서 유고내전과 학살이 벌어졌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침략과 파괴, 쿠바와 조선에 대한 경제제재와 고립말살 책동, 베네수엘라 제재와 레짐체인지(정권교체) 기도, 반중 가치동맹에 의한 규칙 위반 질서의 강조와 우크라이나 대리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극 지원 등 인류사의 전쟁과 분쟁 전부에 족적을 남긴 야만 체제에 대한 인식이 없다. 도리어 미국 일극 지배체제의 야만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는 다극화가 중국, 러시아제국주의가 주도하는 혼돈과 대결의 시대니만큼 미국의 안정된 일극 지배체제가 차라리 살기 좋았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결국 중러 제국주의론은 미제의 패권질서의 지속을 염원하며 미제의 이해에 복무하는 반동적인 논리다. 이를 통해 볼 때도 이들의 무정부주의적, 관념적인 사고와 공산주의를 내건 세력들의 세계관, 인식이 크게 차이가 없다는 점이 개탄스럽다.
민족과 민족해방을 부정하는 ‘참세상’, 좌익공산주의, 노사과연의 대동단결
민중언론 ‘참세상’도 이러한 관점으로 세계를 보고 있다. 참세상은 지난 7월 제국주의에 대한 특별 심포지엄이 마르크스주의 저널인 “과학과 사회(Science and Society)”를 통해 발표됐다고 하면서 여기에 실린 논문을 집중 번역했다. 참세상은 [편집자 주]에서 무엇을 위하여 이 논문들을 대대적으로 소개하고 있는지 그 취지를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반제국주의-반미투쟁 지상주의 또는 반제국주의를 넘어 친러시아, 친중국으로까지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도 필요한 문제다.
여기에서도 맑스주의를 자처하는 이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특별 심포지엄이 반제투쟁에 대한 회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미반제 투쟁을 “반제국주의-반미투쟁 지상주의”라며 폄하하며 반러시아, 반중국으로까지 반제투쟁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이들이 얼마나 반미반제 투쟁을 혐오하는지 보자.
독일의 사회주의자 아우구스트 베벨은 반유대주의를 “바보들의 사회주의”라고 일컬은 바 있다. 그는 반유대주의자들이, 유대인이 착취자일 때만 자본주의 착취를 인정하고, 그 외의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발생하는 착취에 눈을 감는다고 비판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바보들의 사회주의는 자칭 “반제국주의” 좌파에 의해 부활했다. 이들은 미국과 다른 서방 강대국들, 혹은 그들이 지원하는 정부가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을 행할 때는 이를 비난하면서도, 단지 워싱턴과 적대 관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억압적이고 권위적이며 독재적인 국가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거나 심지어 옹호하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중국, 니카라과, BRICS, 그리고 다극화의 사례를 통해 이러한 “반제국주의자” 좌파의 뒤얽힌 논리와 퇴보적인 정치적 입장을 논의하고자 한다…
‘반제국주의자’들은 자주권의 개념을 민중이나 노동자 계급이 아닌, 자신들이 옹호하는 국가의 통치자들에게로 되돌려놓았다. 20세기의 반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 투쟁은 제국주의 강대국의 간섭에 맞서 국민의, 국가 그 자체가 아닌, 자주권을 방어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 자주권을 외부 간섭 없이 국내에서 착취하고 억압할 수 있는 “권리”로 사용한다…
새롭게 등장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다원주의는 전 세계의 대중 투쟁에 더 큰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 다극적인 세계가 된다고 해서 새롭게 부상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축들이 기존 중심지보다 덜 착취적이거나 억압적인 것은 아니다…
미국은 가장 강력한 국가이자 경쟁하는 범죄 국가들 중 가장 위험한 범죄자일 수 있다. 우리는 워싱턴이 새로운 냉전을 조장하고, 러시아를 공격적인 나토 확장으로 자극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게 만든 것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반제국주의” 좌파는 미국과 그 동맹국이 유일한 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서방 대 그 외의 세계”라는 마니교적 서사 – 세계를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두 대립하는 힘의 싸움으로 파악하는 이원론적 세계관 – 이다. 이와 같은 선악 이분법적인 스타워즈식 서사는 단일한 ‘악의 제국’에 맞서는 정의로운 싸움을 그리며, 결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는다.(윌리엄 I. 로빈슨(William I. Robinson), “‘반제국주의’ 좌파의 참을 수 없는 마니교주의”, 참세상, 2024.08.20.)
맑스주의자이기를 자처하면서 왜 미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미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나라들을 옹호하는 “반제국주의” 좌파에 대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혐오하고 있는가? 자신도 스스로 “미국은 가장 강력한 국가이자 경쟁하는 범죄 국가들 중 가장 위험한 범죄자”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지 않는가?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가장 위험한 범죄자”들인 파쇼 추축국에 맞서서 반파시즘 국제연대가 있지 않았나? “가장 위험한 범죄자”에 대해 가장 집중적인 투쟁을 하고 여기에 맞서는 나라들과 연대하거나 통일전선을 하는 것이 왜 이토록 마땅치 못한 것이고 혐오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 투쟁이 미국지배 체제에 맞서는 새로운 지배자들을 옹호하는 것이라 그런가?
“서방 대 그 외의 세계”의 대립구도는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의 구도이다. 이란과 같은 나라들이 내적으로 볼 때 이들 주장대로 ‘독재권력’이라 하더라도 이란을 지지하는 것이 정당한 이유는 첫째, 이란이 “가장 위험한 범죄자”들인 제국주의와 맞서기 때문이고 이를 통해 미제를 비롯한 서방 제국주의 패권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둘째, 이란이 미국과 대립하고 이스라엘과의 직접적인 군사적 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민족억압을 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들과 아랍 민족, 민중을 고무하고 지지,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란은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내정간섭을 자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란 내부의 내정조차도 상당부분은 제국주의의 책동과 경제봉쇄로 인한 측면들이 있기에 여기서도 반미반제 투쟁을 해야 할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내정에 개입하지 않는 한 내부 문제는 내정의 문제이고 이란 민중이 자주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서방 대 그 외의 세계”라는 당파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이들은 결국 양비론에 빠지며 그 양비론을 실은 첨예하게 (서방)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 투쟁을 회피, 기권케 하며 결국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게 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운운하며 우크라이나 신나찌를 내세워 돈바스 민중을 억압하고 반러 적대감을 조장하고 러시아에 대한 동진으로 군사위협을 하여 전쟁 원인을 제공하고 평화협정을 파탄시키며 전쟁을 지속시키고 있는 미국과 나토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책동을 무시하고 있는 것도 그 중 하나다.
노동자 민중의 이해와 나라의 자주권을 대립시키며, 자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대해 “외부 간섭 없이 국내에서 착취하고 억압할 수 있는” 부르주아지의 투쟁이라며 이 투쟁을 부정하는 것 역시 이들이 민족해방을 외면하고 제국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회피함으로써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더 이상 부르주아의 요구가 아닌 것처럼, 민족 자주권과 민족자결 역시 더 이상 부르주아의 요구가 아니다. 부르주아는 민족전체의 대변자이자 민족이익의 변호자이기를 멈췄다.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협소한 이해를 위해서 외세와 결탁하여 전 민족적 이해를 배반하고 있다. 반미가 한국 부르주아의 자립적 발전의 요구라면서 반미투쟁을 폄하하는 주장도 있는데, 위 국제 좌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관점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부르주아지가 단 한 번만이라도 부르주아의 자립적 발전을 위해 외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추구한 적이 있었나? 4.27판문점 선언이나 9.19평양공동선언의 파탄에서 보듯, 한국 부르주아지는 민족자주와 민족통일의 과제 역시 미제국주의의 요구대로 배반하지 않았나?
민족 자주권을 위한 투쟁을 계급협조로 부정하는 것은 신식민지 체제를 구축하며 제국주의 지배를 하고 있는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노사과연이 “우리민족끼리 반미자주 하자”는 주장에 대해 몰계급적인 계급협조이며 심지어 “범죄”라고 극단적으로 매도하는 것도 위 국제좌파와 인식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출발부터 그랬지만 좌익공산주의자들도 마찬가지 인식을 하고 있다.
지금 진행 중인 두 전쟁은 민족주의 기치 아래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노동자들이 착취자를 위해 죽고, 계급적 이익을 잊도록 설득하는 대표적인 거짓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좌파’ 세력, 특히 ‘혁명적’이고 ‘국제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세력 상당수는 ‘반(反)제국주의’ 또는 ‘차악(次惡)’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에게 한쪽 또는 다른 쪽을 지지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보기를 들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 ‘조국 수호’를 지지하기 위해 러시아의 제국주의 야욕을 비난하고, 스탈린주의자들은 ’러시아 방어‘를 촉구하기 위해 미국과 나토 제국주의의 군사력을 비난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마스에 대한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는 하마스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논거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하나의 팔레스타인 국가나 하나의 이스라엘 국가 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국가는 계급으로 나뉘며, 팔레스타인 국가 또는 이스라엘 국가라는 것은 실제로는 팔레스타인 또는 이스라엘 자본가계급의 국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반제국주의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투쟁이며,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계급투쟁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레닌은 식민지의 정치투쟁이 제국주의 열강을 뿌리까지 뒤흔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후 탈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탈식민지화는 경제 권력 구조에 거의 변화를 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민족해방을 위한 진보적인 전쟁은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反)식민지 투쟁 중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이어진 것은 하나도 없으며, 단지 새로운 반동 세력이 노동자를 착취하고 제국주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데 그쳤을 뿐입니다.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의 결과는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다른 제국주의 세력으로의 대치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민족 자결권, ‘민족 해방 전쟁’ 또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주장은 현재 ‘반식민지 운동’으로서의 하마스 또는 ‘반제국주의 세력’으로서의 후티 반군 등의 사상과 일맥상통합니다. 이들은 민족해방투쟁이 억압에 반대하기 때문에 반(反)제국주의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주장은 많은 나라에서 억압당하는 소수가 있으므로 사실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수가 자신의 지배계급 또는 부르주아지 일부와 동일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노동계급을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도록 유인하는 것은 그들을 자본주의 도살장으로 유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투쟁은 반(反)제국주의 투쟁이 아닙니다. 민족주의 운동은 단지 군사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제국주의 강대국에서 후원자와 지지자를 찾는데 의존합니다…
‘민족해방’ 또는 ‘민족 자결권’에 대한 모든 이론과 구호는 계급 안에서 민족주의적 균열을 조장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 통제 아래 두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국주의 전쟁에서 한쪽 편을 들어 노동계급 운동이 발전한다거나 혁명적 국제주의의 부활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입니다. 어떤 구실이나 명분으로도 전쟁에 참여해서 전쟁에 맞설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국제주의자의 첫 번째 임무는 민족 부르주아지와 국제 제국주의의 수많은 촉수로부터 노동계급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와 전쟁을 거부하고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위한 혁명적 대안을 옹호해야 합니다.(<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4강> “제국주의 전쟁과 국제주의(발제)”,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이형로)
레닌이 “좌익공산주의 소아병”을 써서 이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이래로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조롱과 무시의 대상의 됐을 수는 있어도 진지하게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거나 취급된 적은 없었다. 물론 여전히 좌익공산주의자들이 독자적으로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의미 있는 주장을 하거나 실천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이처럼 제국주의와 민족과 민족억압, 민족모순을 부정하고 이러한 모순들과 계급억압과 모순을 절대적으로 대립시키며 ‘추상적인’ 국제주의와 공상적인 국제적인 혁명을 갖다 붙이는 좌익공산주의자들과 국제 좌파와 교조주의적인 ‘맑스레닌주의자’들은 세계관이나 이 세계관이 낳는 국제문제에 대한 태도에서 일치하고 있다.
말로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을 혐오해 왔던 한국의 자칭 ‘맑스레닌주의자’가 이들을 쫓아 무슨 주장을 하며 대동단결하고 있는지 보자.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조국은 없다…배타적으로 사랑(편애)할 조국과 민족은 없다…
민족은 몰계급적인 개념이다…따라서 사실은 “민족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계급문제로 불러야 한다…
“해방” 이후에 한국에서 노동계급의 혁명 진영은 몰살되었다. 혁명이론이 실종되었다. 노동자 국제주의도 잊혀졌다. 결국 “반미 반제 통일운동으로 표현된 민중의 항쟁”은 “저항적 민족주의 운동”이라는 부르주아지의 이념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문제: 부르주아 민족주의인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인가?, 이현숙/자유기고가)
필명을 쓰고 있는 이현숙은 노사과연의 핵심 이론가이다. 이처럼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라는 《공산당 선언》의 테제는 이현숙에게로 수렴되면서 민족과 민족문제를 부정하고 이를 절대적으로 대비시켜 하다못해 일국적 차원의 계급문제도 넘어서 “세계적 차원의 계급문제”로 저 너머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는 명제로 전락해 버렸다. 노동자 국제주의가 “반미 반제 통일운동으로 표현된 민중의 항쟁”을 “부르주아지의 이념”으로 부정하는 극단적인 사상적 반달리즘으로 흑화 돼 버렸다.
“제국주의로부터 신식민지 민족국가의 해방이라는 민족문제”는 현대제국주의 체제 하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민족문제는 순수하게 노자 간의 계급적 문제로, 사회주의 혁명의 문제로, 노자 간의 국제주의적 문제로 전화”됐다고 하는 자칭 맑스레닌주의자 이현숙이나 “국제주의자의 첫 번째 임무는 민족 부르주아지와 국제 제국주의의 수많은 촉수로부터 노동계급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와 전쟁을 거부하고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위한 혁명적 대안을 옹호해야 합니다”라는 좌익공산주의자 이형로는 “반미 반제 통일운동으로 표현된 민중의 항쟁”을 부정하는 “부르주아지의 이념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2024년은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에 “점령군”으로 이 땅에 들어와 여전히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정신적으로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강점 79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미국이 점차적으로 쇠퇴하고 반미투쟁이 촉발되고 있는 전 세계적 상황과 달리 한국사회에서 미국은 정치적 지배만큼이나 정신적 지배를 공고히 하면서 미국 숭배를 공고히 하고 있다.
반미를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반미를 과학화해야 한다. 반미의 과학화를 가로막고 있는 부르주아, 제국주의 사상과의 투쟁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대제국주의의 본질을 왜곡하고 제국주의와의 결전을 혼란, 혼돈, 회피케 하고 제국주의를 직간접 변호하는 기회주의 사상과의 투쟁 역시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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