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승리 주역이 영미 제국주의라는 서구의 선전과 노르망디 상륙작전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저자)
지난 6월 7일(프랑스 현지시각)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적지를 찾았다. 조 바이든은 1980년대 극우 반공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이 연설을 했던 장소에서 “우리 시대의 자유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나라 안팎의 침략에 맞서겠다”고 말했다. 바이든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졌던 ‘푸앙트 뒤 오크’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고 믿을 것을 요구하고 있고, 그래서 민주주의는 우리 각자와 함께 시작된다”고도 말했다. 사실 이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4년 공화당 출신의 극우반공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이 노르망디에서 했던 연설과 일맥상통한 이야기였다.(박윤수, “노르망디 찾은 바이든, 레이건 연설 장소서 “자유 민주주의 지켜야””, MBC 뉴스, 2024.06.08., <https://imnews.imbc.com/news/2024/world/article/6605828_36445.html>.)
또한, 노르망디상륙작전 80주년을 맞이하여 미국 연방 하원의원 8명이 현지시각 7일 프랑스 노르망디 상공에서 낙하산 점프를 선보이기도 했다. 참고로 이 8명은 참전용사 출신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80년 전 미군 낙하산 부대 소속 부대원들이 이용했던 항공기와 같은 기종의 오래된 항공기에 올라 낙하산 점프를 선보였다. 현재 미국 공화당 의원인 마이클 왈츠 의원은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80주년 행사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중요한 기념행사가 될 것이고, 가장 젊은 참전용사는 96세, 가장 나이 든 참전용사는 107세”라고 하면서, “우리는 그들을 기리고, 그들의 희생과 영웅담이 영원히 살아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박찬근, “미 하원 의원들, 노르망디 작전 80주년 기념해 ‘낙하산 점프’”, SBS 뉴스, 2024.06.09.,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7676430&plink=SHARE&cooper=COPY>.)
현재 독일의 총리인 숄츠도 집단서방의 노르망디상륙작전 80주년 기념행사에 맞춰 “1944년 6월 6일 D-Day를 해방의 날”이라고 불렀다. 이 행사에는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과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 배우 톰 행크스까지 참석해 화제가 됐다. 더 나아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현지시각 6일 노르망디상륙작전 80주년을 맞아 “이곳에 상륙한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자”고 말하며, 집단서방이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마크롱은 “오늘날 우리 대륙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 그들이 싸웠던 모든 것을 다시 도전받는 상황, 무력으로 국경을 바꾸거나 역사를 다시 쓰려는 사람들에 맞서 이곳에 상륙한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자”고 강조했는데, 이는 러시아를 겨냥한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김태윤, “노르망디 80주년‥마크롱, 러 겨냥 “우린 약해지지 않을 것””, MBC 뉴스, 2024.06.07., <https://imnews.imbc.com/news/2024/world/article/6605517_36445.html>.)
이처럼 2024년 6월은 노르망디상륙작전이 전개된 지 80주년이 되는 해다. 사실 노르망디상륙작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서구의 영화나 드라마는 제법 많다. 대표적인 작품을 뽑자면, 톰 행크스가 주연으로 출연한 1998년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오마하 해변의 상륙작전을 현실적으로 묘사하여, 큰 화제가 됐던 영화다. 또한, 미국에서 만든 전쟁 드라마 중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룬 것도 있다. 대표적으로 2001년작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가 그렇다. 이 드라마는 미군 공수부대인 101 공수사단의 이지 중대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1~2화까지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이들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이와 같은 영화나 드라마의 등장은 이후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콜으브듀티(Call of Duty)’나 ‘메달 오브 아너(Medal of Honor)’와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게임에서도 반영되어 나타났다.
아마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집단서방에게 있어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를 무찌르는데 크게 기여한 나라가 어디인지를 묻는 질문에 따른 프랑스 여론조사 기구의 조사 자료를 보면 이들의 역사인식이 어떻게 퇴보하는지 알 수 있다. 1945년 5월 당시의 조사에서는 응답자 중 57%가 소련, 20% 미국, 12% 영국으로 대답했지만, 1994년 미국 49%, 소련 25%, 영국 16%로 나왔다. 2004년에는 미국 58%, 소련 20%, 영국 16%였는데, 그로부터 11년 뒤인 2015년에는 미국 54%, 소련 23%, 영국 18%로 나왔다. 이와 같은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았을 때, 집단 서방이 제2차 세계대전 역사를 얼마나 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https://politics.stackexchange.com/questions/27016/did-most-french-people-change-their-opinion-about-who-contributed-most-to-the-de)
이와 같은 집단서방의 역사적 망각은 2024년 국제여론조사기관인 레드필드 앤 윌턴(Redfield and Wilton)을 보아도 알 수 있다. 2024년 6월 5~6일에 실시한 이쪽 여론 조사에서는 “나치 독일을 무찌르는 데 가장 많이 기여한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응답자들의 42%가 영국, 12% 미국, 6% 프랑스로 대답했는데, 놀랍게도 소련은 프랑스와 같은 수치인 6%를 기록했고, 반면 모른다는 21%를 기록했다. 즉, 이 여론조사의 응답 비율을 보면, 집단서방의 일반사람들은 영국이나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승전에 가장 많이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Redfield and Wilton Strategies Research Team, “Less Than One in Six British 18-24-Year-olds Know What ‘D-Day’ Was”, Redfield and Wilton Strategies, 2024.06.07.,
<https://redfieldandwiltonstrategies.com/less-than-one-in-six-british-18-24-year-olds-know-what-d-day-was/>.)
이와 같은 집단서방의 역사의식은 2022년에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래, 집단 서방은 이른바 루소포비아에 빠지면서, 우크라이나의 나치 협력자들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2023년 9월 22일에는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 캐나다에 방문했는데, 캐나다 하원 의장은 과거 나치 친위대 출신인 98세의 야로슬라브 훈카(Yaroslav Hunka)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침략군에 맞서 싸운 영웅”이라고 칭송했으며, “우크라이나와 캐나다를 위해 싸운 그에게 우리 모두는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다.(임병선, “나치 앞잡이에 기립박수… 캐나다 의회 ‘황당 실수’”, 서울신문, 2023.09.27.,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30927020002&wlog_tag3=naver>.)
현재 이와 같은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지는 현실이 바로 집단서방의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집단 서방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도 러시아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며, 이와 같은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잠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하도록 하겠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1944년 6월 6일 영국과 미국이 중심이 된 서방 연합군이 전개한 사상 최대 규모의 육해공군 합동작전이었다. 연합국은 6,500척의 선박과 12,000대의 항공기를 가동시켰고, 상륙 첫날에만 17만 명의 군인을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켰다. 미군 공수부대가 새벽에 노르망디 지역으로 침투하여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했고, 상륙부대는 오마하 해변과 유타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그리고 푸앙트 뒤 오크 지역에도 상륙하여 작전을 개시했다. 이 중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치러졌던 곳은 오마하 해변이었는데, 상륙 당일난 미군은 최소 3,000명에서 5,000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상륙에 성공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영미 연합군은 프랑스 영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고, 대략 43일 동안 노르망디 인근 지역에서 독일군에 맞서 전투를 치렀고, 8월 말에는 프랑스 파리를 레지스탕스와 더불어 해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개시되기 3년 전부터 소련의 스탈린이 서구 연합군에게 요구했던 사항이었다. 1941년 스탈린은 처칠에게 발칸 지역이나 프랑스에 동부 전선으로부터 적의 30~40개 사단을 빼낼 제2전선을 열어 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처칠은 1941년 당시에는 제2전선을 열수 없을 것이라고 스탈린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제프리 로버츠 지음, 김남섭 옮김, 『스탈린의 전쟁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냉전까지, 스탈린은 소련을 어떻게 이끌었나』, 열린책들, 2022, 194쪽.)
1941년 9월에 스탈린이 처칠에게 요구한 것이 바로 제2전선 구축이었지만 처칠은 이를 거부했고, 스탈린은 이에 대해 “수동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지금 영국은 오히려 나치를 돕고 있다. 이런 사실을 영국인들은 정말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힘이 빠지기를 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지음, 이광일 옮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 윌슨에서 케네디까지』, 들녘, 2015, 196쪽.)
따라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실행되기 3년 전부터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서방 연합국에게 강력하게 제기한 요구사항이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소련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현재의 집단서방은 부정하고 있지만,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가장 많이 기여한 주체는 바로 소련이었다.
모스크바 공방전이 있던 1941년 12월부터 1942년 11월까지 일군과 소련군 양측을 합하여 900만 명 이상의 병력이 동부전선에서 격전을 치를 때, 서부 전역에서는 북아프리카에서만 중요한 지상전이 있었고, 1942년 11월 영국이 엘 알라메인(El Alamain)에서 승리하여 추축군 6만 명이 손실을 입었을 때, 같은 달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소련군이 독일 제6군을 포위하고 기갑병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43년 7월 독일군과 소련군 200만 명이 쿠르스크에서 500만 명이 스몰렌스크에서 흑해 연안에 이르는 600km의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영미 연합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6만 명의 독일군을 몰아냈다.(데이비드 M. 글랜츠·조너선 M. 하우스, 권도승 외 옮김, 『독소전쟁사 1941~1945』, 열린책들, 2007, 356~357쪽.)
이와 같은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측 사망자 수치와 당시 독일군이 동부전선에 투입한 병력의 숫자를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 사망자 수는 제1차에 비해 다섯 배에 달하는 5,000만 명이었다. 놀랍게도 이 숫자는 동시에 벌어진 전쟁인 중일전쟁의 사망자 수를 뺀 수치다. 그런데 이 같은 천문학적인 사망자 수가 국가별로 고르게 분포되었던 것은 아니다.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독일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 거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7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그들은 2위에 그쳤다. 1위는 무려 2,700만 명이 사망한 소련이다. 소련의 참전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다는 점에서 이 숫자는 실로 충격적이다. 그 충격은 소련의 동맹국인 영국의 사망자 수를 비교해보면 배가 된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도 적은 45만 명의 사망자 수를 기록했다. 일부 폭격을 제외하면 영국이 전장이 된 적이 없었고, 영국군이 상대적으로 전력이 미약한 독일 병단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소련에 침공한 독일군의 병력은 250개 사단 규모였던 데 비해, 영국군이 북아프리카에서 상대한 독일군은 4개 사단 규모였다. 나치의 250개 사단을 홀로 상대했던 소련군의 입장에서는 제2전선의 늑장 개설에 원망이 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소련의 정치 지도자들과 민중은 영국과 미군이 일부러 소련군을 더 소모시켰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전후 반 서방 감정으로 이어졌다.”(노경덕, 『사료로 읽는 서양사 5 현대편 – 제국주의에서 세계화까지』, 책과함께, 2022, 236~237쪽.)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파시스트 군대를 격파했을까? 아래 내용을 보자.
“동부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소련군은 600개 이상의 적군 사단(독일군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해)을 궤멸시켰다. 특히 독일의 경우 동부전선에서 30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00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독일 총 전쟁 사상자의 75%), 히틀러의 추축 동맹국들은 100만 명을 잃었다. 붉은 군대는 4만 8,000대의 적군 탱크, 16만 7,000문의 대포, 7만 7,00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하지만 소련의 인명 피해는 독일보다 2~3배 많았다. 예를 들어 소련군 사상자는 80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약 1,600만 명에 달했다.”(제프리 로버츠 지음, 김남섭 옮김, 『스탈린의 전쟁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냉전까지, 스탈린은 소련을 어떻게 이끌었나』, 열린책들, 2022, 45~46쪽.)
이와 같은 사실을 보았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명명백백 소련이었지, 집단서방이 생각하는 이른바 영미 연합군이 아니었다. 물론 이들이 전쟁 승리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앞서 보았듯이 독일 측 전쟁 총 사상자의 75% 이상은 소련과의 전쟁에서 발생했다. 즉, 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바르바로사 작전 시점부터 영미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게시하기까지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소련은 대략 수백 개의 독일군 사단에 맞서 전쟁을 치렀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체는 당연히 소련이고 현재의 러시아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현재 집단서방에 의해 망각되는 것 같다. 집단 서방은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 정권을 지지하고 러시아를 적대하면서 이러한 망각에 더더욱 빠지고 있는 것 같다. 이번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미국의 대통령인 조 바이든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을 맞아 “우리 시대의 자유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나라 안팎의 침략에 맞서겠다”는 말을 하며, 의도적으로 러시아를 겨냥하는 행동을 벌이고 있다. 현재 집단서방이 일반인들에게 세뇌시킨 역사왜곡적 시각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와 같은 역사왜곡과 뒤틀린 집단서방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 이번에 열린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 행사라 볼 수 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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