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전쟁 1954-1962》: 20세기에 일어난 반프랑스 민족해방전쟁을 생각하며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지난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의 무장저항조직인 하마스(Hamas)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반격을 가했다. 하마스가 로켓 미사일까지 발사하여 이스라엘에 반격을 가하자, 세계 언론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관심을 돌리게 됐다. 202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양측의 테러와 학살에 관한 기사들이 지속적으로 올라왔다.

물론 서구와 국내 언론들은 팔레스타인의 잔혹성만 부각시키기 바쁜 상황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10월 초 언론들은 하마스의 잔혹성을 얘기하며, “닭장 속에 아이를 가뒀다”는 뉴스나 “영유아를 집단 살해했다.”는 이른바 가짜뉴스들이 끊임없이 생산했다. 이러한 언론의 주장들을 찾아보면 실질적으로 신뢰할만한 증거는 없었다. 즉, 하마스가 아녀자 강간이나 영유아 참수 그리고 아이들을 오븐에 넣어 죽였다는 주장들은 허위사실이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쪽에서 퍼뜨린 가짜뉴스들이 넘쳐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마스라는 조직이 테러를 아예 저지르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 중에는 테러와 학살이 양측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로 이 테러와 학살 문제에서 극단의 정점을 찍고 있는 주체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라파를 포함하여 팔레스타인 전역을 공동묘지로 만들고 있다. 사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래로 이스라엘의 학살과 테러는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시기 미국이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위선적 주장들에 따라 우크라이나를 동정했지만, 팔레스타인의 참상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그것과는 비교불가 수준이었다.

하마스를 포함하여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학살과 폭력에 맞서 저항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스라엘로부터 빼앗긴 자신들의 주권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다.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과 비슷한 역사가 20세기에도 있었다. 그게 바로 알제리다. 알제리는 1830년부터 1962년까지 대략 132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경험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1954년 기준 알제리의 남성 85% 여성의 95%가 제대로된 교육혜택도 못받았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알제리인을 프랑스군에 편입시켰지만, 이들이 원했던 독립을 절대로 허용해주지 않았다. 이들이 독립을 요구하자 최신식 군사력을 동원하여 학살을 벌이기까지 했다.

알제리가 독립전쟁을 전개하게 된 것은 1954년에 이르러서였다. 1954년 프랑스는 베트남의 디엔비엔푸에서 혁명적 농민 군대에게 패전했고, 100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포기하게 됐다. 즉, 알제리의 독립운동 세력은 디엔비엔푸 전투와 프랑스의 패전을 보면서 이에 깊은 영감을 얻었고, 1954년 11월 독립전쟁을 게시하게 된 것이다.

알제리의 독립전쟁은 단순히 군사적 측면에서의 전투만 전개된 전쟁은 아니었다. 알제리의 독립운동가들은 대중적인 시위도 조직했다. 파업과 봉기가 알제나 오랑 콘스탄틴 등 알제리의 주요도시에서 일어났다. 뿐만아니라 이들의 독립운동은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프랑스의 영토 내에서도 일어났으며, 좌우연합과 더불어 국제적 지지확보에도 충실했다. 아마 이와 같은 지점이 알제리 독립전쟁만이 가진 고유한 특정일지도 모르겠다.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가 보인 모습은 너무나도 잔혹하고 추악했다. 전쟁 시기 독립운동을 주도한 세력들도 반대파나 친불파 그리고 프랑스인 거주지를 대상으로 학살과 테러를 저질렀고, 멜루자 학살이나 오랑 학살 등 다수의 사례가 존재하지만, 프랑스가 저지른 학살과 테러가 훨씬 더 많았다.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군 수만 명이 전사하고, 알제리인이 30~100만 명이 사망했는데, 대다수의 알제리인 사망자는 프랑스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아도 알제리 독립전쟁은 현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과 분명한 유사점이 있다.

이번에 읽은 노서경의《알제리 전쟁 1954-1962 –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은 국내에 출판된 유일한 알제리 독립전쟁 관련 책일 것이다. 책의 저자는 알제리인들의 저항과 정치활동, 프랑스의 지배 방식, 알제리 독립운동가 지식인들의 활동과 프랑스 지식인들의 활동, 그리고 이들의 출판과 프랑스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다루며 분석했다. 책 제목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붙다보니 일부 독자들은 전쟁사적인 측면에 기대할 수 있겠으나, 사실 이 책은 전쟁사를 다루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 얘기하자면, 당연히 알제리 항쟁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알제리에 주둔했던 프랑스군의 규모는 40만 명이 넘었고,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또한 이들에 맞서 사막과 마을에서 게릴라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프랑스는 이들과의 전쟁에서 탱크, 장갑차, 전투기, 군함 그리고 전투 헬기도 투입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군사적 측면의 연구가 필요한 것도 분명하다.

이 책은 이런 부분을 다루지 않지만, 읽을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특히나 현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벌어지는 일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1966년에 개봉한 영화 ‘알제리 전투’도 꼭 보길 추천하는 명작이다. 이 영화보다 알제리 전쟁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공부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한다.

마지막으로 프랑스가 알제리인들에게 자행한 최악의 학살인 세티프 겔마 학살에 관해 언급하고자 한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하던 시점에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에게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프랑스는 이를 탱크와 전투기 그리고 군함을 동원하여 진압했다. 프랑스는 1달간의 진압과정 동안 세티프와 겔마에서 무려 2~3만 명의 알제리 민간인을 학살했다.

학살 규모로 보았을 때, 1956년 헝가리 봉기나 1968년 프라하의 봄 그리고 1989년 천안문 시위에서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인명이 프랑스의 알제리 무혈진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런 학살은 세계사 교과서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한국과 서방의 역사 기억과 세계사 교육이 과연 공정한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결국 우리의 역사교육은 지극히 서구 제국주의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또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 세계가 준비해야할 다극화 체제에선 이런 서구 중심주의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생긴 이런 문제의식을 남기며 서평을 마무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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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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