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과 성자립 김대 총장의 논쟁으로부터 보는 맑스레닌주의와 자주사상의 관계에 대해

아래 기사는 중앙일보 기사라 그 저변에는 (세련된 ) 반공주의적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만,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있는 시기에 남북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인 가진 논쟁적 대화라 흥미 있게 볼 수 있다. 더욱이 이 기사는 짧은 기사라 한계는 있지만, 김대총장의 답변 속에 북의 철학적 입장들이 비교적 잘 표현돼 있어서 북의 사상의 핵심이 무엇인지, 맑스레닌주의와 북의 사상의 관계는 어떠한지 우리가 인식하는데 도움이 된다.
“물질에 대하여 인간 의식의 주동성을 강조한다면 주체철학은 유심철학이 관념론이 되고 마는 것 아닙니까?”는 도올의 질문은 1980년대 한국사회 이른바 “맑스레닌주의자들”이 가졌던 사고였고 “의식성”과 의식의 문제를 같은 것으로 사고하는 문제가 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주체철학의 본질이 잘 표현되어 있다.

“허허! 주체철학은 유물론을 부정하지 않아요! 포용합니다! 인간의 의식자체가 물질로부터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 가운데서 가장 발전한 사람이 덜 발전된 주위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해 나간다는 것이에요. 인간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며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하는 위대한 사상무기를 근로인민대중에게 안겨준 것이죠.”(도올 고함孤喊, 성자립 김일성대학 총장에 도발적인 질문을 하다, 중앙일보, 2016.12.20)

여기에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전제했다고 하면서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운명개척의 문제를 밝혔다고 하는 주체철학이 잘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맑스주의 제한성을 말하는 아래 부분은 진리탐구 앞에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문제이고 논란이 되는 문제이다.

“-주체철학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주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마르크시즘은 사회발전의 일반적 합법성을 유물론적 변증법에 의하여 규명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도무지 자연과 사회의 지배자, 개조자로서의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밝힐 수 없습니다. 묻겠는데 사회발전의 동력이 무엇입니까?”

과연 사회발전의 합법성, 즉 합법칙적 발전을 유물변증법으로 규명한 것으로 자연과 사회의 지배자, 개조자로서의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밝힐 수 없는 것인가?
맑스주의는 사회발전의 궁극적인 원동력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이로부터 인간의 능동적 주체적 개조자적 면모를 밝힐 수 없다는 말인가?
맑스주의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궁극적인 사회와 역사발전 원동력이라고 보는 것이 인간의 주체적 노력과 투쟁을 무시하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맑스주의에서는 법칙에 대한 인식과 인간, 특히 그 중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계급의 개조자적 특성, 이것의 가장 높은 형태인 혁명은 가장 높은 수준의 개조자적 특성으로 둘은 대립되어 있지 않고 통일되어 있다.
법칙과 실천은 어떻게 통일되어 있는가?
사회발전의 법칙은 자연사적 과정처럼(특정 사회마다 다르다는 특성이 있지만) 인간의 의지, 정책과 다르게 필연적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인간이 사회법칙을 제대로 인식할 때만이 여기에 부합해서 제대로 된 실천이 나온다.
이를 합목적적이라고 한다.
맑스주의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어떻게 개조자적 특성과 연결되는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자본주의를 놓고 볼 때,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사적, 자본가적 전유라는 근본모순을 낳는다. 생산력은 계속 발전하는데 사회적 생산력 발전의 혜택과 성과를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이 독점했기 때문에 모순을 낳는다는 것이다.
무계획적, 무정부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 발전으로 생산물은 쏟아져 나오는데 이윤추구를 근간으로 이 체제는 인민대중의 상대적.절대적 빈곤을 낳음으로써 이 생산물들을 소비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과잉생산과 공황을 낳고 빈곤과 실업, 전쟁, 민족억압 같은 자본주의, 제국주의 모순을 낳는다. 이 체제는 인간을 도구화 하고 경시하며 인간존엄성을 끊임 없이 박탈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계급투쟁과 민족해방투쟁, 민권투쟁 등을 낳는다.
노동자들과 인민들은 이러한 적대적 사회모순을 인식하고 계급투쟁을 하고 새 사회로의 변화발전을 위한 혁명투쟁을 한다.
진보적 인간, 특히 그 중심에 있는 노동자계급은 이리하여 사회 변화의 중심에 서고 사회와 역사발전의 견인차가 된다.
당은 그 투쟁을 조직하는 중심체이고 그 가운데에 지도자도 있다.
지도자와 대중은 통일적 관계에 있다.
《독일이데올로기》에서도 이미 맑스와 엥겔스는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면서 역사에서 지도자의 역할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와 《공산주의 좌익소아병》에서 지도자와 (인민)대중을 분리시키는 비변증법적 주장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맑스(레닌주의)가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사회발전의 긍극적 요인으로부터 인간의 주체적 개조자적 역할을 끌어내는 관계는 대체로 그렇다.
맑스주의는 사회발전의 원동력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개조하는 실천 투쟁을 통일적으로 결합한다.
맑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마지막은 지금까지 철학과 달리 유물론은 해석을 넘어 사회개조에 있다고 한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맑스주의는 사회개조를 위한 당파적 세계관이자 혁명적 실천의 무기이다.

“잘 아는구만. 그 모순을 운동 계기로 삼아 사회주의 사회가 도래했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해결치 못한단 말이오. 바로 그 사회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한 것이 주체철학이오.”(같은 기사)

변증법적 유물론은 특정 시기만 적용가능한 진리인가?
사회주의에서는 인식과 실천의 도구가 아닌가?
맑스와 레닌의 사상도 당연히 시대적 제한성을 가진다. 맑스는 독점의 원리를 논리적으로 밝혔지만 제국주의의 도래 이전까지 살았기 때문에 독점자본주의를 제기할 순 없었다. 엥겔스는 맑스 사후 초기 트러스트의 모습으로 대두하는 독점의 면모를 언급했다.
1880년대 후반 1900년대 초반 들어 자유경쟁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고 1914년 발발한 제국주의 전쟁을 보면서 레닌의 현대제국주의의 면모를 밝힐 수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사회주의 설립자지만 실제 건설자는 스탈린이다.
각 시대는 각자의 제한성을 지닌다.
그러나 맑스주의 변증법과 유물론이 제한적일 수는 없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과학발전에 따라 날로 풍부해지는 사고와 인식의 방법이고 확고부동한 체계이자 전일적인 원리이다.

“유물론은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 있어서 그 선차성을 물질에 부여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수동적이 되고 말아요. 주체철학은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본질적 특성이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를 대하는 관점과 입장을 밝혔지요.”(같은 기사)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서 선차성을 물질에 두는 것이 과연 인간을 수동적으로 되게 하는 것인가?
위 주장은 맑스주의를 전제했다는 주사의 기본출발과도 배치되며 변증법적 유물론의 반영론에 대해서도 왜곡하는 것이다.
반영론은 인간의식이 하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 의식 바깥의 객관세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이 먼저라는 관념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물질의 선차성을 주장하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것인가?
주지하듯 변증법적 유물론의 반영론은 인간의식이 상대적 제한성이 있지만 객관세계를 잘 인식하고 이것이 실천의 검증을 통해 (절대적)진리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
객관세계 인식의 주체 역시 인간이다. 인간이 아닌 동물이 객관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실천으로 진리를 검증해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자체가 물질로부터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 가운데서 가장 발전한 사람이 덜 발전된 주위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해 나간다는 것이에요.”(같은 기사)

성자립 김대총장의 위 인식은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반영론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위 주장과 “유물론은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 있어서 그 선차성을 물질에 부여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수동적이 되고 말아요.”라는 주장은 배치되는 주장이다.
도올의 논쟁적 대담이 학술토론에 제출된 입장이 아니고 짧은 인터뷰라 대담자의 입장이 더 풍부하게 소개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기사지만 이를 볼 때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우리는 맑스레닌주의와 자주사상의 관계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북의 사상에는 기존 맑스레닌주의에서 온전하게 다루지 못한 혁명의 계승 문제, 공산주의 건설에서 정치사상을 중심에 두면서 기술, 문화혁명을 하는 문제, 스탈린 시대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를 더 확장시킨 자력갱생의 원칙, 계급투쟁의 원리를 포함하지만 더 폭넓은 자주성의 원칙과 개념, 군을 혁명의 중심에 세우는 선군사상의 문제, 사회주의 건설에서 중앙집중과 참여를 결합시키고 사람사업으로 당적 지도를 강조한 “대안의 사업체계” 등 새로운 내용들도 많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북이 내세우는 자주사상으로부터 나왔다.
북의 사상과 체제를 모르고 남북으로 분단되고 계급으로 분열된 남내에서 온전한 인식, “전국적” 관점을 가질 수 없고 우리 조건과 풍토에 맞는 변혁경로와 전망을 가질 수는 없다. 이는 남북관계가 적대관계로 전환된 시점에는 더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는 과제이다.
그러면 우리의 원칙은 어떠해야 하는가?
변증법적 유물론, 맑스레닌주의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 원칙에 충실한다는 것이 교조주의를 정당화 하지 못한다.
우리는 21세기 한국사회, 분단사회라는 구체적 현실에 발을 딛고 한국사회를 변화, 개조시키려 한다.
맑스레닌주의를 현대화ㆍ현지화 해야 한다. 혁명적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도그마를 부정하고 창조적으로 적용, 발전시켜야 한다.
특히 분단사회에서, 미제와 그 하수인들의 전쟁책동, 대북적대시 정책으로 민족간 적대와 불화가 극에 달한 지금 시점에서 전쟁을 막고 민족관계를 복원시키려는 투쟁에 집중해야 한다.
북에 대한 국가보안법적 반공인식에 맞서 진리를 탐구하는 정신으로 북의 사상과 체제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사상 기치를 자주적 맑스레닌주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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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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