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는 사실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인이 됐다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 서평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 저자)

 

미국 영화 마블(Marvel)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영화상에서 등장하는 악역 ‘하이드라(Hydra)’를 대충 알 것이다. 영화 주인공인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가 처음으로 맞서 싸운 대상이 바로 이 나치 소속인 하이드라였고, 이 하이드라는 다음 시리즈에서도 캡틴 아메리카의 적으로 등장한다. 놀랍게도 이 하이드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였던 이들은 70년 뒤인 미국의 여러 정치 및 군사 그리고 연구기관에 침투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지난 2023년에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제작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 시리즈의 마지막 시리즈인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Indiana Jones and the Dial of Destiny)’을 보면, 여기서 인디아나 존스의 적으로 등장한 악역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나치 과학자 위르겐 폴러(Jürgen Voller)다. 영화 설정을 보면, 위르겐 폴러는 1969년 아폴로호 착륙에 크게 기여한 미국의 과학자로 등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나 세계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적 설정이 바로 달 착륙에 기여한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10대 시절부터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탐사에 기여한 과학자가 베르너 폰 브라운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베르너 폰 브라운이 나치 과학자 출신인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아마 군복무를 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소방서(사회복무요원)에서 근무 도중 유튜브(Youtube)를 통해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그 다큐멘터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이 바로 베르너 폰 브라운이다. 다큐멘터리에선 베르너 폰 브라운이 나치에 협력했지만, 그리 순종적이지만은 않은 인물로 그려진다. 따라서 아주 적극적인 나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그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매체들을 통해 알 수 있거나 유추해볼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이것은 바로 적잖은 나치 협력자들이 미국에 정착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23년 11월 집 근처 도서관에서 책 구경을 하는 도중 제목부터 아주 재밌는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책이 바로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Operation Paperclip)』이었다. 책을 보자마자 나는 도서관에서 읽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챕터 2장까지 읽었다. 너무나도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많아 상당히 지적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학업이라는 본업과 사회운동 그리고 여러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완독을 하는 데는 좀 오래 걸렸다. 그래도 읽으면서 흥미로운 내용들을 일부러 SNS 및 컴퓨터에 메모하며 완독했으니 만족한다.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책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 이른바 나치 과학자들을 어떻게 이주시켰는지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가 어떻게 미국의 군사 및 과학기술 분야에서 활동했는지를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이들 중 대다수가 과거 히틀러와 나치에 충성을 맹세하던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중 대다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저지른 반인륜적 전쟁범죄에도 크게 기여하기까지 했다. 즉, 전범으로서 처벌받아 마땅한 행위를 한 이들이 미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정착했고 미국인이 되었으며 이후 후세대들에게 훌륭한 과학자로 기억 속에 남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달 착륙에 기여한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에 대해 얘기해보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르너 폰 브라운은 분명히 나치 소속의 과학자였다. 폰 브라운은 나치 소속의 과학자로서 미사일 개발에 많은 기여를 했고, 실제로 나치의 최신 미사일을 개발했다. 1944년 9월 나치는 영국 런던에 이른바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는데, 당시 사용된 무기가 바로 V-2 로켓 미사일이었다. 그것을 제작한 인물이 바로 폰 브라운이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미사일을 만든 공장은 독일 노르트하우젠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군 부대가 이 노르트하우젠에 입성하여 나치 독일의 무기 공장을 탐색했다. 그 결과 V-2 로켓미사일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수천 명의 노예노동자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처참하게 죽어있는 수백 구의 노예노동자 시신도 현장에 있었다.

즉, 폰 브라운은 노예노동자 수천 명을 강제노동에 동원하고, 적잖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책임이 있었다. 당시 베르너 폰 브라운은 나치 친위대 돌격대 지도자였다. 군 계급으로 치자면 대략 소령 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전쟁 말기 나치 독일은 V-2 미사일은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 점령 지역에 발사했는데, 이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대략 7,000명 정도였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숫자의 노예 노동자들이 폰 브라운이 실질적 책임자로 있던 군수공장에서 죽어나갔다. 그리고 폰 브라운에겐 이 노예노동자들이 반항하면 총살할 권한까지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내용이다.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군 앞에서 폰 브라운이 보인 행동도 정말 놀라웠다. 책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하겠다.

“공포의 V-2를 만든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미군에 체포되었다는 것은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될 엄청난 소식이었다. 그들은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잡으며 모두 미소 지었다. 폰 브라운은 V-2개발과 관련하여 으스댔다. 자신이야말로 V-2 발명가이자 독일 과학자들의 리더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다른 사람들은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미육군 제44사단 방첩대의 일부 인원들은 폰 브라운의 자만심을 눈치 챘다. 한 방첩대요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모든 미군 장병과 함께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사진 속에서 폰 브라운은 미소를 짓고 미군들과 악수를 하며, 호기심이 많은 표정으로 미군들의 훈장을 가리켜댔죠. 전쟁포로라기 보다는 유명인에 가까운 태도였습니다. 병사들을 대하는 태도도 마치 군부대 시찰 나온 국회의원마냥 상냥했습니다.””

애니 제이콥슨, 이동훈 옮김,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 인벤션, 2016, 117~118쪽.

책에서 폰 브라운 외에 주목한 나치 신봉자는 대략 21명이다. 그 중 폰 브라운을 포함하여 오토 암브로스, 테오도르 벤칭거, 쿠르트 블로메, 발터 도른베른거, 지크프리트 크네마이어, 발터 쉬버, 발터 슈라이버 등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 헤르만 괴링 등과 함께 일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독일의 권력 체계에서 과학자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인물들이었다. 21명 중 15명은 나치의 헌신적인 당원이었고, 또 그중 10명은 나치당 산하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SA)와 친위대(SS) 대원이었다. 이들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게시한 이른바 페이퍼클립 작전의 대상자였다.

이 페이퍼클립 작전의 목적은 나치 과학자와 기밀 군사계약을 맺고 그들을 미국으로 밀입국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나치 독일이 패망하던 1945년 5월부터 미국 정부를 위해 연구를 재개하게 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대략 1,600명이나 되는 나치 협력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됐다. 놀랍게도 이들 중에는 베르너 폰 브라운과 같이 미국인들에게 영웅으로 기억에 남은 이들도 상당히 많다. 물론 전쟁 이후 냉전 초기 이들에 대한 보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이 기밀 처리되었고, 냉전을 거치며 포장작업을 거쳤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들을 데리고 오자 미국 내에서도 문제가 생겼는데, 당시 미국이 보인 태도는 이들에 대한 비호였다. 아래 책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어느 익명의 정보원은 <뉴욕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1,000명 이상의 독일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입국하고 있다. 그들 모두 자발적으로 미국과 계약했으며 이들의 적응기간은 보통 6개월이고, 그 후 시민권을 신청하고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 <뉴스위크> 역시 이 기밀군사 프로그램의 이름이 “페이퍼클립 작전”임을 폭로했다. 육군부는 이 기사를 부인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대중들에게 기밀을 제외하고 프로그램 전체를 알리기로 했다. 즉 라이트 항공기지의 과학자 중 몇 명을 선발해 언론 및 라디오방송, 사진을 통해 알리고자 했다. 기지 개방 행사도 기획되었다. 물론 상세한 정보의 개방 수위와 사진촬영의 정도는 육군의 검열을 받았다. 행사의 목적은 미국에 들어와 있는 독일 과학자들이 결코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애니 제이콥슨, 이동훈 옮김,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 인벤션, 2016, 336~337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은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이른바 나치 전범들을 재판정에 세웠다. 나치 지도급 인사들은 사형 혹은 무기 징역을 받았지만, 전쟁범죄를 실질적으로 자행했던 이들 중 일부는 페이퍼클립 작전의 대상자였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 정부의 비호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미국인이 됐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나치 행적은 침묵되거나, 서류상 기밀 처리됐다. 미국은 이들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되기를 원했고, 특히나 소련과의 냉전이 시작되면서 그들의 행적을 묻지 않으려 했다.

책을 읽으면서 많이 놀랐다. 상당히 많은 분야에서 이들이 큰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지하 벙커를 설계한 기술은 페이퍼 클립을 통해 온 설계관여자에 의해 냉전시기 미국의 핵 대피소 기술로 사용됐다. 나치의 의학 기술이나 과학 기술이 미국의 의학 및 과학 기술에 크게 관여했는데, 이것은 당시 미국에 온 나치 협력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더글라스 맥아더가 731 부대의 책임자 이시이 시로를 살려주고, 731 부대가 확보한 연구 결과가 미국으로 갔던 것을 알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치의 기술이 이런 식으로 미국에 가게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미국에 정착하게 된 나치 과학자들은 미국의 독극물 개발에도 기여했다. 미국은 냉전의 흐름 속에서 자신들에게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지도자들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대표적으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나 콩고의 파트리스 루뭄바가 그 예시였다. 미국은 피델 카스트로와 파트리스 루뭄바를 암살하기 위해 독극물을 사용했는데(이러한 미국의 암살시도는 실패했다.), 그 독극물 종류가 나치 과학자에 의해 개발된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사용한 맹독성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의 경우 나치에 협력한 과학자가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총 4,315만 리터 이상의 에이전트 오렌지가 남베트남 국토의 전체 면적 24%에 뿌려졌다. 고지대와 삼림 500만 에이커, 경작지 50만 에이커가 초토화되었다. 이는 매사추세츠 주 만한 면적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나치 과학자 출신 인물들은 미국 과학기술 및 군사기술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영역에서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이 나치에 협력한 인사들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2년 전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비나치화를 외쳤고, 이러한 러시아의 주장은 푸틴의 선전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이것 또한 역사를 들어다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우크라이나 지역을 점령했었고, 이 과정에서 스테판 반데라나 로만 슈케비치, 디미트리 돈초프, 미콜라 레베드와 같은 우크라이나의 극우민족주의자들은 나치에 협력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과 폴란드인 학살 및 인종청소로 악명높은 나치들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은 소련에 맞선다는 이유로 이 나치세력을 반소-반공투쟁에 이용했다. 1980년대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한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기존의 소련사회에서 억눌려있던 극우민족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왔는데, 이들은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난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번창했다. 이들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 유로마이단을 전후해서였다. 이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유로마이단을 획책했고, 돈바스 내전에서 강력한 군대로 탄생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인 마리우폴 포위전 당시 우크라이나군의 주력부대였던 아조프 대대(Azov Battalion)가 있었다. 이들이 바로 돈바스 내전 당시 미국과 NATO의 지원을 받아 우크라이나군의 주력부대가 된 군대였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이 나치과학자들을 데리고 온 역사와 현재 미국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지원이 상당히 오버랩 됐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파시즘을 물리친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나치독일 패망과 일제 패망에 있어 미국의 공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련과의 냉전을 시작하면서 미국은 페이퍼클립 대상자와 같은 파시스트 지지자 및 협력자들과 결탁했다. 이와 같은 행위들은 소련에 맞서기 위함이라는 명분 아래 합리화됐다. 당시 미국이 소련에 맞서기 위해 그랬다면, 현재는 러시아를 상대로 그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애니 제이콥슨의 책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은 읽는 이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책이다. 간만에 지적 희열을 최고조로 느낄 수 있고, 올바른 역사를 알 수 있는 책 한권을 완독했다. 그리고 이 책은 현재 미국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문제에 대해 보이는 태도라는 측면에서도 상당히 깊은 교훈을 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 맨 마지막 장에는 ‘질문과 토론주제’ 목록이 있다. 이를 공유하며 긴 서평을 마친다.

1. 이 책에서 애니 제이콥슨은 전후에 미국 정부가 히틀러의 과학자들을 밀입시키려 했던 노력을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 책을 읽기 전에 페이퍼클립 작전에 대해 알고 있었는가? 이 프로그램에서 당신이 알게 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무엇인가?

2. 연합국 정보요원들이 전후 나치 과학자들의 처분에 있어 맞닥뜨린 가장 주된 질문 중 하나는 누구를 고용하고 누구를 처형할지였다. 당신은 이 질문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3. 전후 미국은 소련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정말 나치 과학자들이 필요했는가? 오히려 나치 과학자들의 고용이 미국과 소련의 갈등을 증폭시키지 않았는가?

4. 페이퍼클립 작전은 대중에게 선한 얼굴을 띠고 있었지만, 과학자들의 전시 행적에 대해 진실은 기밀로 처리되었다. 대중들은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는가? 미국은 대중들에게 정보를 공개해야만 했는가?

5. 이 책을 읽고 미국 정부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 달라졌는가? 과거의 정부기밀 프로그램 공개가, 오늘날 어떤 정부 기밀 프로그램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6. 페이퍼클립 작전에서 가장 끔찍하다고 느낀 부분은 무엇인가?

7. 1951년, 독일 주재 미국 고등판무관 존 J. 맥틀로이는 유죄를 선고받은 다수의 나치 전범들을 사면하고 란츠베르크 교도소에서 풀어주었다. 당신은 왜 그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는가?

8. 책에서 저자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정문에 적혀있는 독일속당 “누구나 과오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다”를 독자들에게 몇 번 환기시킨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 말은 옳은가?

9. NASA는 논란이 되는 베르너 폰 브라운, 쿠르트 데부스, 아르투르 루돌프의 전시 행적을 포함시키기 위해 그들의 전기를 수정해야만 했는가?

10. 개인적인 신념과 직업상 의무의 충돌로 인해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한 적이 있는가? 책에 나오는 어느 순간이 당신이 처했던 상황과 유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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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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