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는 괴물이었는가? _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중심으로

카를로스 마르티네즈
2023년 12월 26일

https://socialistchina.org/2023/12/26/was-mao-a-monster/

 
마오쩌둥 탄생 13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는 마오쩌둥의 정치적 유산을 평가하고, 특히 그의 지도력과 관련된 가장 논란이 많은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카를로스 마르티네즈(Carlos Martinez)의 저서 《동방은 여전히 붉다 21세기 중국 사회주의》의 《만리장성은 없다: 중국혁명의 연속성에 대해》 장에서 발췌한 내용을 아래에 게시한다.(사회주의 중국의 벗’ 편집자 주)

 
오늘날까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 공산당의 기록을 함부로 폄하하는 가장 통속적인 방법은 1930년대 초반부터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일반적으로 중국혁명의 최고 지도자로 인정받았던 마오쩌둥의 이른바 범죄 혐의를 인용하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중국 인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그토록 헌신했다면 왜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같은 재앙적인 사업을 벌인 것인가?

 
대약진운동

 
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급속한 산업화와 집단화를 달성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가속화하고 수세기 동안 지속된 중국의 저개발과 빈곤에서 최종 벗어나기 위해 계획된 야심찬 사업이었다. 마오쩌둥은 “5년 안에 중국과 미국의 격차를 좁히고, 궁극적으로 7년 안에 미국을 추월한다”고 말했다. [1] 경제 전략에서는 중소분열의 초기 국면을 반영하여 “폭주하는 소련식 도시 산업화의 거부”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인들은 모스크바의 흐루시초프 지도부가 제국주의 열강과의 갈등을 피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중국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지원이 ‘평화 공존’의 제단에서 희생될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중국은 자신의 자원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대약진운동의 핵심은 인도 맑스주의자인 비자이 프라샤드(Vijay Prashad)가 간명하게 묘사한 것처럼 “소규모 산업을 농촌 지역으로 가져오려는 시도”였다. [3] 마오쩌둥은 농촌이 다시 한 번 “혁명적 사회 변혁의 진정한 원천”이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투쟁이 결정되는 주요 무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4] 농업 집단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인민대중의 혁명 정신에 대한 폭넓은 호소가 있었다.


지차오추(冀朝铸 당시 외교부 통역관이자 나중에 영국 주재 중국 대사(1987-91))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농민들에게는 자급 농업만을 위한 작은 토지가 남겨졌다. 다른 모든 활동은 공동이익을 위해 동등하게 공유되어야 했다. 간부들은 들판, 공장, 건설 현장에서 농민들과 합류해야 했다. 마오쩌둥도 손에 삽을 들고 사진을 찍기 위해 댐 건설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5]

대약진운동은 전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리우밍푸(刘明福)는 “대약진 운동은 영국과 미국을 능가하려는 목표를 실현하지 못했다. 이는 실제로 중국 경제를 정체시키고 불황을 초래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비정상적인 사망자가 발생했고, 중국의 세계 국내총생산 점유율은 1957년 5.46%에서 1962년 4.01%를 점하게 되었다. 이는 1950년 4.59%보다 낮아진 수치이다.” [6]
1960년 소련 전문가들의 갑작스런 철수와 일련의 끔찍한 가뭄과 홍수로 인해 흉작이 초래되면서 사회의 기본 경제 구조가 붕괴되었다. 한편,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징집되었기 때문에 “수확하고 타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7] 역사가 알렉산더 판초프(Alexander Pantsov)는 “철강을 위한 전투로 인해 중국 지도부의 관심이 곡물 문제에서 멀어졌고, 쌀과 기타 곡물을 수확하는 임무가 여성, 노인, 어린이의 어깨에 맡겨졌다… 곡물 부족 사태가 벌어지자 마오쩌둥은 대약진 속도를 늦추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8] 지차오주(冀朝鑄)는 “부종으로 이어지는 영양실조가 많은 지역에서 흔했고 농촌 주민의 사망이 증가했다”고 증언했다. [9]
대약진운동의 일부 목표, 특히 경작지의 관개 목표가 달성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고, 이로 인한 혼란은 빈곤과 영양실조 심화의 원인이 되었다. 대약진 운동은 1962년에 중단되었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 여전히 논란이 많은 주제로 남아 있다. 반공주의자에게 대약진운동은 중국공산딩, 특히 마오쩌둥의 괴물적이고 살인적인 성격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공한다. 서구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대약진이 기근을 야기하여 목숨을 잃은 추정 사망자 수를 3천만 명으로 추정한 것 같다. 인도 경제학자 우차 파트나익(Utsa Patnaik)은 엄격한 통계 분석을 바탕으로 중국의 사망률이 1958년 천명당 12명(토지 개혁과 전국적인 기본 의료 서비스 확대로 인해 역사적으로 낮은 수치)에서 최고치인 25.4명으로 증가했다고 결론 내렸다.

“1958년까지 중국이 달성한 천명당 12명의 현저히 낮은 사망률을 기준으로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이를 초과하는 사망자를 계산하면 총 1,150만명이 된다. 이는 ‘기근 사망자’의 최대 추정치이다.” [10]

파트나익은 1960년의 최고 사망률도 “같은 해 인도의 24.8명 사망률과 거의 다르지 않았는데, 이는 매우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중요한 요점이다. 영양실조는 그 당시 개발도상국 전체에 골칫거리였다.(안타깝게도 지구의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그렇다). 중국 역사는 1907년, 1928년, 1942년을 포함하여 끔찍한 기근으로 가득 차 있다. 바로 그 ‘괴물’ 중국공산당의 지도력 하에서 중국에서 영양실조가 과거의 일이 된 것은 현대에 들어와서이다.
즉 부르주아 학자들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냉소적으로 조작하여 중국 혁명의 역사 전체를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대약진운동은 반인륜적인 터무니없는 범죄가 아니었다. 이는 사회주의 선진사회 건설을 가속화하려는 정당한 시도였다. 그것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어 중단되었다.

 
문화대혁명

 
대약진운동의 여파로 마오쩌둥의 보다 급진적인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다소 소외되었고, 대약진운동의 주도권은 지속적인 계급투쟁보다 사회 안정과 경제 성장을 우선시하려는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이들 중 주요 인물은 류샤오치(중국 국가 주석,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널리 알려져 있음)와 부총리 덩샤오핑이었다. 류사오치, 덩샤오핑, 천윈(陳雲),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마오쩌둥 이후 경제 정책의 초석이 될 4대 현대화 (농업, 산업, 국방, 과학 기술) 개념을 제시했다 .
그 후 몇 년 동안 마오쩌둥과 그의 가까운 동료들은 계급투쟁의 우선순위를 낮추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복원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반혁명적 ‘수정주의’ 경향을 반영한다고 우려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이 보았듯이, 수정주의적 요소들은 지식인, 특히 교사와 학자의 지원에 의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주로 비노동계급 배경을 갖고 있으며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본주의와 봉건적 가치를 장려하고 있었다. 이로써 “수정주의 뿌리를 청산”하고 “자본주의의 길을 택하는 당내 권력자들과 투쟁”해야 했다. [11]

문화대혁명은 1966년 마오쩌둥과 좌파 지도부의 선동과 격려를 받은 대학생들의 대중운동으로 시작됐다. 스스로를 홍위병이라고 부르며 베이징에서 결성된 학생 그룹은 “학술, 교육, 저널리즘, 문학 및 예술 분야에서 반동적인 부르주아 사상을 철저히 비판하고 거부”하라는 마오쩌둥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12] 학생들은 권위 있는 반혁명 부르주아 요소에 대한 분석과 요구를 담은 ‘대자보(大字報)’를 제작했다. 마오쩌둥은 열성적으로 학생들에게 그들의 계획을 지지하는 서신을 보냈다. “나는 문화대혁명 운동에서 당신과 비슷한 태도를 취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성적인 지지를 보낼 것이다.” [13] 그는 혁명 대중에게 “사령부를 폭격하라”, 즉 당의 개혁가들과 “부르주아 분파들”에 맞서 일어서라는 호소를 하는 대자보를 직접 만들었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총화 되었으며, 1966년 8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을 채택했다.

“부르주아지는 타도됐지만 여전히 착취계급의 낡은 사상, 문화, 풍속, 풍습을 이용하여 대중을 타락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재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반대로 행동해야 한다. 이데올로기 분야에서 부르주아지의 모든 도전에 정면으로 맞서야 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사상, 문화, 관습 및 습관을 활용하여 사회 전체의 정신적 전망을 바꿔야 한다. 현재 우리의 목표는 자본주의의 길을 택하는 권력자들에 맞서 투쟁하고 전복시키는 것, 반동적인 부르주아 학문 ‘권위’와 부르주아지 및 기타 모든 착취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거부하며 사회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고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 사회주의 경제구조에 맞지 않는
교육과 문학과 예술 그리고 기타 모든 상부구조 영역을 변혁하는 것이다.” [14]

따라서 문화대혁명의 목표는 이른바 당내 수정주의, 자본주의 복원 세력에 맞서 대중투쟁을 자극하고 교육과 문화 영역에서 부르주아 사상 헤게모니를 중단시키며 사회주의, 집단주의, 현대적 새 문화를 확립하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또한 수정주의 질병 원인이 소련에 있다고 여기면서 중소 분열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이전에는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급진파의 주요 표적이 된 류샤오치는 중국의 흐루쇼프라고 낙인 찍혔다.)


리밍장(Li Mingjiang)은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소련은 체계적으로 악마화 되었다. 마오쩌둥이 모스크바를 중국의 주적으로 규정한 것처럼, 중국과 소련의 적대감은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15]

한수인*은 문화대혁명 초기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한다.

“광범위한 민주주의. 비판. 곳곳에 벽 포스터가 있다. 여행의 완전한 자유. 혁명적인 교류를 형성할 자유. 이것은 적위대에게 부여된 권리와 자유였으며, 그것이 그들의 머리에 떠올랐고 곧 완전한 허가가 된 것은 당연하다.”

* 필명 한수인(Han Suyin 韓素音,1917~2012)은 중국계 영국 인으로 의사이자 유명 작가이다.
그녀의 자전적 소설로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연인과의 이별을 다룬 ‘매우 찬란했던 일(A Many Splendoured Thing’, 1952)이 있다. 이 소설은 모정(慕情)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과 친밀하게 교류했는데 이후 마오쩌둥 전기 ‘대지의 별’(국내번역 일월서각) 저우언라이 전기 ‘첫 째 아들(Eldest Son)’의 저자이기도 하다.

1966년 8월, “부글부글 끓고 있던 문화대혁명이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폭발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시작한 대혼란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6]
광범위한 혼란이 있었다. 대학은 문을 닫았다.

“홍위병이 외교부를 점거하고 약탈한 반면 대부분의 대사는 정치 교육을 위해 베이징으로 소환되었다. 영국 대사관은 공격을 받았고 소련 대사관은 몇 달 동안 젊은 마오주의자들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17]

문화대혁명그룹(처음에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보고했지만 사실상 권력의 중심이 된 중국공산당의 기관)에 의해 고발된 사람들 중 다수는 끔찍한 운명을 겪었다. ‘유소기를 타도하자!’라는 슬로건이 적힌 대자보가 등장했다.

“덩샤오핑을 타도하라! 마오쩌둥 사상의 거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자”

류소기의 책은 천안문 광장에서 불태워졌다.

“그 책들은 유독한 잡초로 선언되었지만 1945~47년에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집권하게 만든 이론적 구성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모든 직위에서 추방되고 체포되었다.

“류는 반복적으로 고문과 심문을 받았고 난방이 되지 않는 감방에 갇혔으며 치료도 거부당했다. 그는 1969년 11월에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가명으로 은밀하게 화장되었다. 그의 죽음은 아내에게 3년 동안 공개되지 않았고, 대중에게는 10년 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19]

펑더화이(彭德懷) 전 국방장관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으로 대약진 운동을 비판한 뒤 1959년 강제 퇴직됐다. 마오쩌둥의 아내이자 문화대혁명의 주요 인물인 장칭(江青)은 펑이 살고 있던 쓰촨성(Sichuan)에 홍위병을 파견했다.

“깡패 떼가 그의 집에 들이닥쳐 그를 붙잡아 수도로 끌고 가서 감옥에 가두었다. 펑 씨는 수백 번 이상 고문과 구타를 당했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얼굴이 손상되었으며 폐가 손상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비판과 투쟁 모임에 끌려갔다.” [20]

그는 1974년 교도소 병원에서 사망했다.
문화대혁명의 극단주의에 대한 조용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충성했던 저우언라이 총리도 무사히 탈출하지 못했다. 한수인에 따르면 1966년 11월 홍위병이 그를 둘러싸고 고함을 지르고 22시간 만에 심장 마비를 겪었다.
마오쩌둥은 단 몇 달 동안만 지속할 계획이었지만 문화대혁명은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강도는 다양했지만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오쩌둥은 1967년 군대에 질서를 확립하고 생산을 재조직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1972년부터 ‘4인방’의 등장으로 문화대혁명이 다시 불붙었다.
자본주의 국가의 역사가들은 문화대혁명을 아주 피상적이고 공허한 용어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의 폭력과 권력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자 공산주의 전체주의의 긴 이력 중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신병리학이 역사의 주요 원동력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제로 문화대혁명은 급진적인 대중운동이었다. 수백만 명의 청년들이 사회주의를 향해 더 빨리 나아가고, 봉건적 전통을 종식시키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관료주의에 맞서고, 자본주의 계급의 출현을 막고, 노동자와 농민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수천 년의 유교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자랑스러운 사회주의 문화를 건설하는 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기여한다. 그들은 사회주의적 미래를 향한 빠른 길을 원했다. 그들은 마오쩌둥과 그의 동맹자들로부터 영감을 얻었고, 그들 역시 그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러한 운동은 쉽게 통제를 벗어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랬다. 마오쩌둥은 모든 과잉, 모든 폭력 행위, 모든 터무니없는 발언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지만(실제로 그는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여러 지점에 개입했다), 그는 운동을 광범위하게 지지했고 궁극적으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오쩌둥은 개인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이나 국가 헌법이 부여한 권한뿐 아니라 수억 명의 사람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킨 혁명 과정의 주요 설계자로서 얻은 권위도 있었다. 소련 인민에게 레닌이 그랬듯이 쿠바 국민에게는 피델 카스트로가 남아 있듯이 중국 인민에게는 마오가 그렇다. 그가 설령 실수를 했더라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이러한 실수를 받아들이기 쉬웠다. 한수인은 “마오쩌둥은 모순된 발언을 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발언 하나하나가 칙령의 힘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21]

 
문화대혁명의 유산

 
이제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대체로 잘못된 것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이는 “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당과 국가, 인민이 겪은 가장 심각한 좌절”이었다. [22] 운동의 정치적 가정 – 당이 반혁명분자들과 자본파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 당의 자본가 지지자들은 대중에 의해 타도되어야 할 것이고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계속 유지하려면 계속 혁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마오쩌둥 이후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의해 명백히 거부되었으며,

“타도된 ‘자본파들’은 … 모든 차원에서 사회주의 대의의 핵심 세력을 형성한 사람들로 당과 정부 조직의 간부들이었다”고 지적했다.” [23]

역사가 레베카 칼(Rebecca Karl)은 마오쩌둥 이후의 지도력이 사실상 문화대혁명의 혜택을 받았다고 단정한다. 이 지도력이 “혼란에서 중국을 구원한 구세주”로 여겨졌다는 의미이다. [24]

아마도 문화대혁명은 더 직접적으로 유용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결국 그 주요 목표는 당시 소련에서 일어나고 있던 이데올로기적 쇠퇴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이 이념적 쇠퇴는 사회주의 사업에 대한 소련 인민의 신뢰 상실과 궁극적으로 소련 사회주의 종말에 큰 기여를 했다. [25] 실제로 문화대혁명은 개혁과 개방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매개변수를 설정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는 덩샤오핑(Deng Xiaoping)의 4대 기본 원칙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다음 원칙을 계속 준수하고 있다.

1) 우리는 사회주의의 길을 견지해야 한다.

2)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옹호해야 한다.

3) 우리는 공산당의 영도를 견지해야 한다.

4) 우리는 맑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해야 한다. [26]
호주 학자 롤랜드 보어(Roland Boer)는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경제 개혁이 시작되는 시점에 4대 기본 원칙을 확인하고 강조하는 것을 왜 중요하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덩샤오핑은 ‘우’편향을 목표로 삼았다. 어떤 이들은 개혁개방을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자유화로 가는 길, 즉 맑스-레닌주의를 포기하는 길로 여길 수도 있다.” [27]

이처럼 4대 원칙과 문화대혁명은 기본 동기 측면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독일의 정치경제학자 이사벨라 M 베버(Isabella M Weber)는 또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의 사회 질서 붕괴”가 농민의 필요와 독일의 상황을 면밀히 이해하는 새로운 세대의 젊은 지식인을 양성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흥미로운 지적을 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산촌’으로 이주한 젊은 지식인 집단(1940~1960년생)이 농업개혁 과정에서 영향력 있는 개혁경제학자로 등장했다. 이전의 노련한 혁명가들처럼 그들의 지적, 정치적 형성은 농업 문제, 중국의 다수 농민, 물질적 복지를 위한 투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농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청년들과 노년 지식인들은 중국 개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특이한 동맹을 형성했다. 역사적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문화혁명 사업은 또한 초기 개혁의 돌파구가 된 도시와 농촌 영역 사이에 새로운 연계를 마련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28]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대혁명의 혼란은 국가 발전을 저해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끔찍한 비극을 가져왔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역사가들은 문화대혁명의 혼란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여전히 존경받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 인민에게 중요한 점은 그의 오류가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의 오류”였다는 것이다. [29]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의 오류

 
중국이 외국 통치로부터 해방된 것은 마오쩌둥이 주도하고 그가 주로 창안한 정치 전략에 기초한 중국 공산당이었다. 중국 공산당에 의해 나라가 통일되었고 봉건주의는 해체되었다. 토지가 농민들에게 분배되고 중국이 산업화됐으며 여성해방의 길을 닦았다. 영국 경제학자 존 로스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기까지 27년 동안 중국의 기대수명은 31년, 즉 연간 1년 이상 늘어났다”고 지적했다. 1949년 이후 30년 동안 중국의 기대 수명 증가율은 인류 역사상 주요 국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기록됐다.” [30]
마오쩌둥의 생애 말년과 관련된 과잉과 오류는 중국 인민을 위한 전례 없는 변혁적 진보의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혁명 이전 중국의 문자해독률은 20% 미만이었다. 마오쩌둥이 사망할 당시에는 그 비율이 약 93%였다. 중국 인구는 1949년까지 약 100년 동안 4억에서 5억 사이에 정체되어 있었다. 마오쩌둥이 사망할 무렵에는 인구가 9억에 이르렀다. 문학, 음악, 연극, 예술의 번성하는 문화가 성장하여 인민대중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땅은 관개되었다. 기근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보편적인 의료보장이 확립되었다. 100년간의 외국 지배 이후 중국은 주권을 유지하고 제국주의 공격으로부터 자위 수단을 개발했다.
따라서 괴물 서사로서의 마오쩌둥은 중국에서 거의 반향을 일으키지 않는다. 덩샤오핑 자신이 말했듯이 “마오쩌둥의 뛰어난 영도가 없었다면 오늘날에도 중국 혁명은 여전히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모든 민족의 인민들은 여전히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의 반동적 통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을 것이다.” [31] 더욱이, 실수조차도 폭군의 미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변화하는 일련의 상황에 대응하려는 창의적인 시도였다. 그것은 사회주의로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수행된 오류였다. 이는 필연적으로 위험과 실험을 수반하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과정이었다.

 

후주

[1] 리밍장(Li Mingjiang) 책에서 인용, 마오의 중국과 중소 분열: 이데올로기적 딜레마(Mao’s China and the Sino-Soviet Split: Ideological Dilemma). Routledge Contemporary China Series 79.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12년 55쪽

[2] 레베카(Rebecca) E 칼(Karl). 현대 세계의 중국 혁명: 간략한 해석 역사(China’s Revolutions in the Modern World: A Brief Interpretive History). 런던 ; 뉴욕: Verso, 2020년 129쪽

[3] 비자이 프라샤드Vijay Prashad. 가난한 국가: 남반구의 가능한 역사(The Poorer Nations: A Possible History of the Global South. London). London; New York: Verso, 2012년, 199쪽

[4] 칼, 앞의 책, 129쪽

[5] 지차오주(冀朝鑄). 마오쩌둥의 오른손: 하버드 운동장에서 천안문 광장까지, 중국 외교부 내부에서 나의 삶(The Man on Mao’s Right: From Harvard Yard to Tiananmen Square, My Life inside China’s Foreign Ministry), New York: Random House. 2008년 195쪽

[6] 류밍푸(刘明福), 차이나 드림: 포스트 아메리카 시대의 강대국 사고와 전략적 자세(The China Dream: Great Power Thinking & Strategic Posture in the Post-American Era). New York, NY: CN Times Books, 2015년 18쪽

[7] 한, 앞의 책, 271쪽(위 출처는 한수인의 책이 아니라 지차오주나 류밍푸 책의 인용문으로 보인다: 역주)

[8] 알렉산더 판초프(Alexander Pantsov)와 스티븐 1세 레빈(Steven I Levine). 덩샤오핑: 혁명적인 삶(Deng Xiaoping: A Revolutionary Lif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5년 196쪽

[9] 지, 앞의 책, 212쪽

[10] 우트사 파트나크(Utsa Patnaik) 2011, 중국의 대약진 기간 중 3천만 명의 기근 사망자 재검토(Revisiting Alleged 30 Million Famine Deaths during China’s Great Leap), MR Online, 24 January 2023년 1월 24일 접근,
<https://mronline.org/2011/06/26/revisiting-alleged-30-million-famine-deaths-during-chinas-great-leap/>

[11] 판트소프와 레빈(Pantsov and Levine)에서 인용, 앞의 책, 234쪽

[12]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회람(1966년 5월 16일), 맑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2023년 1월 24일 접속,
<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 문서/cpc/cc_gpcr.htm >.

[13] 마오쩌둥(Mao Zedong) 1966년, 칭화대학교 중학교 홍위병에게 보내는 서신, 맑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2023년 1월 24일 접속,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mao/selected-works/volume -9/mswv9_60.htm >.

[14]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 (1966년 8월 8일), 맑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2023년 1월 24일 접속,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peking -리뷰/1966/PR1966-33g.htm>

[15] 리, 앞의 책, 134쪽

[16] 한, 앞의 책, 327쪽(한수인 책 제목이 내용에는 나와 있지 않다. 마오쩌둥 전기 ‘대지의 별’ 중에서 인용문으로 보인다: 역주)

[17] 오드 아르네 베스타(Odd Arne Westad). 세계적 냉전: 제3세계의 개입과 우리 시대의 형성(The Global Cold War: Third World Interventions and the Making of Our Times). 1st pbk. ed. Cambridge ;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년, 163쪽

[18] 한, 위의 책, 253쪽

[19] 지, 위의 책, 333쪽, 333쪽

[20] 알렉산터 판초프와 스티븐 I. 레빈(Alexander Pantsov and Steven I. Levine), 마오: 실제 이야기 첫번째(Mao: The Real Story). First Simon&Schuster paperback edition. New York: Simon & Schuster Paperbacks, 2013년 518쪽

[21] 한, 위의 책, 387쪽

[2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우리 당 역사의 특정 문제에 대한 결의안(1981년 6월 27일), 맑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2023년 1월 24일 접속,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history/01.htm>.

[23] 위의 출처

[24] 칼, 20세기 세계의 마오쩌둥과 중국(Karl, Mao Zedong and China in the Twentieth-Century World), 위의 책, 119쪽

[25] 이 주제는 나의 저서 시작의 끝: 소련붕괴의 교훈(The End of the Beginning: Lessons of the Soviet Collapse)에서 자세히 논의되었다, 뉴델리: Leftword Books, 2019년

[26] 덩샤오핑 1979, 4대 기본원칙을 준수하자, China Daily, 2023년 1월 26일 접근, <https://www.chinadaily.com.cn/china/19thcpcnationalcongress/2010-10/15/content_29714546.htm>

[27] 롤랜드 보어(Roland Boer).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외국인을 위한 안내서(Socialism with Chinese Characteristics: A Guide for Foreigners). 싱가포르: Springer, 2021년, 108쪽

[28] 이사벨라 웨버(Isabella Weber). 중국은 어떻게 충격요법을 피했는가: 시장개혁 논쟁. 중국경제에 관한 루툴리지 연구(How China Escaped Shock Therapy: The Market Reform Debate. Routledge Studies on the Chinese Economy. Abingdon, Oxon ; New York, N.Y: Routledge, 2021년 154쪽

[29]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우리 당 역사에서 특정 문제에 대한 결의문(1981년 6월 27일), 앞의 출처

[30] 존 로스(John Ross) 2019, 중국의 사회 기적 70년(70 years of China’s social miracle), 사회주의경제회보(Socialist Economic Bulletin), 2023년 1월 24일 접근tps://www.socialisteconomicbulletin.net/2019/09/70-years-of-chinas-social-miracle/>

[31] 등소평(Deng Xiaoping) 1978년, “사상 해방과 실사구시로 일치단결해 앞을 보자(解放思想, 實事求是, 團結一致向前看)”, 중국일보(中国日报 China 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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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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