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 여성해방론 강연에 앞서
코민테른 여성해방론에서는 오늘날 유행하는 정체성 정치,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이니 젠더, PC(정치적 올바름)… 이런 논의들이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첨예한 사회문제, 여성문제를 전혀 해명하지 못하는 옛날 고리타분한 얘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신 코민테른 여성해방론은 여성억압이 자본주의 제국주의 착취질서 억압질서에 있기 때문에 여성을 혁명의 주체 기간대오로 조직해 혁명투사들이 혁명해야 한다는 얘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유행하는 정체성 정치의 근본한계를 지적하는 비판들도 결국 이러한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은이는 ‘인종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했던 과거의 해방적인 대중운동과 다인종적 엘리트의 정치에 결부된 현대의 정체성 이데올로기 사이에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정체성 정치는 1977년 미국 보스턴에서 결성된 흑인 레즈비언 단체 컴바히강공동체에 의해 처음 정치 담론으로 도입됐다. 이들은 ‘흑인 페미니스트 선언’에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의 억압에 가로막힌 흑인 여성들의 정치적 실천을 위해 ‘우리는 가장 심오하며 어쩌면 가장 급진적인 정치가 다른 누군가의 억압을 끝내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정체성에서 나온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지은이가 볼 때 이들의 주장과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된 정체성 정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컴바히강공동체는 결코 ‘정치가 정치와 연관된 개인들의 구체적 정체성들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들이 무엇보다 집중했던 것은 고정된 정체성에서 비롯하는 권리가 아니라 ‘정치적 이론과 실천을 구축하고 정의할 권리’였으며, 그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연대’였다. ‘인종주의 없는 자본주의는 있을 수 없다’고 한 맬컴 엑스, 혁명적 민족주의와 반동적 민족주의 사이를 구분했던 휴이 뉴턴 역시 억압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한 대중의 정치적 실천을 핵심 과제로 삼았다.”(최원형 기자, 현실 속 억압들 직시하며 ‘정체성 정치’ 극복하기
정체성 정치에 대한 사려 깊은 비판지배 계급의 ‘중립화’ 전략에 불과미 흑인운동의 역사·지향 천착 통해“추상적 권리 아닌 모두의 해방 추구”, 2021년 11월 12일)
결국은 흑인 여성억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위의 결론으로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 정체성 정치 비판글은 다음과 같이 기존 맑스주의 한계를 비판합니다.
“’계급이 우선’이라며 인종, 젠더, 장애, 연령, 국적 등 다양한 차원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모순들을 경제적 모순의 뒤로 미뤄놓는 좌파 일각의 태도 역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는 불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맑스주의(레닌주의)가 과연 그렇게 배타적이고 환원적이고 경제주의적 인가요?
이는 기계적 유물론이지 변증법적 유물론이 아닙니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만 봐도 노동자들은 인민의 호민관이 되고 사회전체의 문제, 심지어 다른 계급의 문제에 대해서도 유물론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유럽에서 흐르시초프 수정주의 책동 이후 반쏘 반스탈린 공세가 일어나고 공산주의 운동이 유로꼬뮤니즘으로 타락한 이래 등장한 68혁명 당시 등장한 상상력에게 권력을, 흑인 여성들의 민권운동 인권운동은 진보성이 있었지만 부르주아 제국주의자들이 이를 수렴한 이후 부르주아 제국주의의 세련된 분열정치 몰계급 정치 무정부의 정치로 되어버렸습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오늘날 유행하고 있습니다.
거대담론, 혁명 계급해방 민족해방 여성해방을 버린 정체성 정치가 일부 진보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보편성을 상실하면 배타적이거나 협소하거나 더 나아가 일부 반동적으로 되기조차 합니다.
아프간에서 젠더는 미제의 지배 학살을 은폐하고 정당화는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각자의 성적 민족적 장애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건 각성의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이것이 보편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혁명성과 결합하지 못하면 배타성 폐쇄성에 갇혀 버려 지배계급의 분열하여 통치한다는 계급지배 논리에 이용될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다원주의는 소부르주아정치이자 이로써 그 계급적 성격상 노동계급성 혁명성과 결합하지 못하면 부르주아 제국주의 정치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좌파 다원주의 사상은 결국 개인인권과 차별도 해결하지 못하고 분열 해체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이러한 다원주의는 객관진리는 인식할 수 없다는 비변증법적 불가지론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니 거대담론, 총체적 인식을 부정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정의당 녹색당이 바로 그 신좌파 노선의 당적 현실태입니다. 인권 녹색을 내세우며 부르주아 인권담론 반핵담론에 포섭되어 반북 반북핵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반중 반러도 그렇고요.
오늘날 한겨레의 반창간 정신도 이런 소부르주아 정치에서 비롯됩니다.
진보당도 상당부분 이 노선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진보당 내 청년들이 오늘날 유행하는 신좌파 사조의 영향을 받아 그렇습니다. 이를 진보당이 당적 사상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방치, 조장, 영합하면서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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