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더글라스 맥아더의 추악한 진실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올해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1953년 7월 27일에 조인된 정전협정은 아직도 유효하다. 윤석열 정부 들어 남북과의 적대관계를 부추기고 있고, 역으로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추세다. 2023년 6월 25일 윤석열은 “한미 함께 흘린 피 잊어선 안 된다.”고 말하며,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이 성장과 번영을 일구었고 자유·평화·번영의 인도·태평양 지역을 만들어 나가는 데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로 도약했다.”고 강조했다.(이정은, 「윤 대통령 “한미 함께 흘린 피 잊어선 안 돼”」, MBC뉴스, 2023.06.25.)
더 나아가 윤석열은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지난 지금, 전쟁의 참혹함을 잊어서는 안 되며”,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한미 양국이 함께 흘린 피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도 재차 강조했다. 또한 “3년여 전쟁 동안 미군 3만 7,000명이 대한민국을 위해 전사했다.”는 사실도 빠지지 않고 언급했다. 한국전쟁 73주년을 맞아서 개최된 행사에는 여당인사들 뿐만 아니라, 친일파 백선엽의 후손도 참가했다.(이정은, 「윤 대통령 “한미 함께 흘린 피 잊어선 안 돼”」, MBC뉴스, 2023.06.25.)

분단 78주년이지만, 여전히 한국사회가 아직도 ‘반공(Anti Communism)’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위에서 언급한 윤석열의 발언들은 기본적인 한국 현대사 지식만 있어도 그것이 말이 되지 않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우선 해방 이후 한반도에 입성한 미군은 해방군으로 들어온 것이 아닌 점령군으로 입성했다.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국은 1945년 당시 7만 5,000명의 미군을 주둔시켰고, 군정통치를 시작했으며, 여운형을 포함한 자주적인 세력들이 건설한 단체들을 해산하고 과거 일제 때 협력하던 친일파들을 자신들의 군정통치에 활용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대구 10.1항쟁과 제주 4.3항쟁 그리고 여순항쟁이 일어났으며, 봉기한 민중들은 지리산으로 숨어 빨치산 투쟁을 이어나갔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군정 통치기간 동안 최소 10만 명의 남한 민간인이 작은전쟁을 통해 학살당했다.(David Michael Smith, 『Endless Holocausts – Mass Death In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Empire』, Monthly Review Press, 2023, p.172를 참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심층적으로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가 『한국의 민중봉기』라는 책에서 쓴 아래의 내용을 보자.

“1945년에서 1950년까지 한반도 남쪽에서 미국의 제국 체제에 저항하다가 10만 명이나 되는 조선인들이 살해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의 공식 개시 이전에 남한의 운동은 다음과 같이 뚜렷한 발전 단계를 보였다. 1945년 조선인민공화국의 창출, 자주적 노동조합과 농민협회, 여성단체의 조직화, 1946년 대규모 총파업과 민중봉기, 1948년 게릴라전, 그리고 외국 열강에게서 조국을 해방시킬 모든 방법이 실패하자 미국을 축출하고 봉사하는 자들을 타도하기 위한 전 민족의 무장투쟁까지 이어졌다. 운동 발전의 각 국면에서 미국 제국주의는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더 강력한 폭력 수단을 제한없이 사용했다. 1945년 미국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화했고 그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1946년에는 파업을 파괴하고 농촌의 봉기대를 진압하라고 경찰과 미군에게 명령했다. 1948년 미군 장교들은 준군사적인 우익 청년 그룹과 새로 구성된 한국 경찰을 앞세워 무장봉기를 진압했다. 1949년 미국은 대규모 진압 작전을 조직했고, 즉결재판을 통해 수천 명의 빨치산 혐의자들을 살해했다.”(조지 카치아피카스, 원영수(역), 『한국의 민중봉기 – 민중을 주인공으로 다시 쓴 남한의 사회운동사 1894 농민전쟁 ~ 2008 촛불시위』, 오월의 봄, 2015, 122~123쪽.)

미국 역사가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

앞서 인용한 자료를 본 사람이 기본적인 상식만 있다면, 해방 이후 미국의 통치가 소위 자유와는 거리가 동떨어진 것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에서도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다는 주장은 허구일 뿐이다. 이는 당시 미국이 수행하던 전쟁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미군은 매일 500대에서 1천500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를 출격시켰고, 개전 후 1953년 4월 말까지 미국은 26만 발의 중·대형 폭탄, 2억여 발의 탄환, 약 40만 발의 로켓탄, 약 150만 발의 네이팜탄을 사용하였다.”(권영진, 「’6.25 살상’ 다시 본다」, 『역사비평』 8, 1990, 302쪽.)

계속해서 카치아피카스의 얘기를 들어보자.

“나는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인 최기옥에게 공포스런 경험을 직접 물었다. 평양에서 미국의 네이팜탄 공중폭격으로 근처에 있던 수십 명이 사망했고, 그녀는 알아볼 수도 없게 된 시체들을 수습해야 했다. 끔찍한 파괴로 전쟁의 폭격이 멈추자 평양 전체에서 건물이 제대로 서 있는 곳은 겨우 두 블록 밖에 되지 않았다. 북한의 거의 모든 주요 주거지는 폭탄과 포격으로 완전히 파괴됐고, 4명 중 약 1명꼴로 죽었다. 미국은 60만 톤의 무기를 사용했고 제2차 세계대전 전 기간 동안 사용했던 것의 5배나 되는 네이팜탄을 한국에서 사용했다. 미군은 화학무기와 생물학무기를 배치했고 댐과 제방을 폭격했다. 이는 미국이 뉘른베르크에서 나치들을 재판하면서 전쟁범죄로 간주했던 행위였다.”(조지 카치아피카스, 원영수(역), 『한국의 민중봉기, 민중을 주인공으로 다시 쓴 남한의 사회운동사 1894년 농민전쟁~2008 촛불시위』, 오월의봄, 2015, 207쪽.)

즉,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한 행위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 아닌, 나치의 게르니카 폭격(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 런던 대공습(폭격으로 최소 5만 명의 영국 민간인 사망), 스탈린그라드 공습(스탈린그라드 전투 초기 48시간 동안 도시를 폭격하여 최소 2만 5,000명에서 4만 명의 소련 민간인 학살.)과 같은 전쟁범죄 행위였다. 이런 참혹한 전쟁에서 소위 유엔군 총 사령관을 맡았던 인물이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였고, 그가 수행한 전쟁방식은 위에선 언급한 전쟁범죄와 다를 게 없는 행위들이었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한국 사회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으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현재까지도 인천에 있는 자유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버젓이 서 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 정권이 무너질 시기에도 더글라스 맥아더 동상에는 시위대에 의해 기념 헌화가 받혀질 정도로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인물이었다.(자유시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2회 – 맥아더와 한국전쟁 1부 태평양의 시저”, (제작일) 2003.05.11., <https://youtu.be/fZKsE0ykCkk>.)

맥아더에 대한 찬양과 칭송은 소위 박정희 시대에도 지속됐다. 아래 대한뉴스의 내용을 보자.

“(나레이션): 6.25 동란 중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감격을 되새기는 기념행사가 인천자유공원에서 펼쳐졌습니다. 이 날 행사에는 26년 전 인천상륙작전의 주력부대였던, 미 해병 제3사단 참전용사와 우리 해군 참전용사들이 참석해서 그 날의 감격을 되새겼습니다.”(아까이브, “대한뉴스 제 1100호-인천상륙작전 26주년 기념식”, (제작일) 1976.09.21, <https://youtu.be/pBcNkBqPPaQ>)

관련 영상을 보면, 수많은 시민들과 군인들이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을 향해 경례를 하고 헌화를 바친다. 물론 이러한 행사는 현재까지도 맥아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진행하고 있으며, 여전히 한국 극우 보수들에게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2016년에는 박근혜 정부에서 적극지원한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개봉하여, 무려 700만의 관객을 동원했다. 심지어 영화에서 맥아더 역을 맡았던 리암 니슨이 맥아더 동상에 헌화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장아름, 「’인천상륙작전’ 리암 니슨, 맥아더 장군 동상 헌화 직접 참석」, 뉴스1뉴스, 2016.01.13.)

맥아더 동상 앞에서 미점령군을 규탄하는 반미 활동가들

한국사회가 찬양하는 더글라스 맥아더는 그 이면을 알면 아주 추악한 인물이다. 국내 사회에는 태평양 전쟁을 끝낸 영웅 혹은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다르다. 1880년 1월 26일 미국 아칸소 주 리틀록 병영에서 태어난 맥아더는 전통적으로 군인 출신이었다. 맥아더와 미군은 절대 분리할 수 없는 존재였고, 실제로 맥아더 또한 군대 복무를 아주 명예롭게 생각했다. 맥아더의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명예훈장을 받은 군인이었고, 미국-스페인 전쟁과 미국-필리핀 전쟁에 군 장성으로 참전한 인물이기도 했다. 젊은 장교시절 맥아더 또한 미국-필리핀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맥아더 부자가 참전한 전쟁이 어떠한 성격이다. 19세기 당시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하고 있었고, 이러한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은 미국의 알프레드 머핸과 같은 이들을 통해 잘 드러났다. 머핸은 해양력에 주목했으며, 그의 저작은 이후 미국이 해상 패권을 거머쥐게 되는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사고관을 바탕으로 미국이 일으킨 식민지 전쟁이 바로 미서전쟁과 미국-필리핀 전쟁이었다.
미국 필리핀 전쟁은 정말 참혹하고도 추악했다. 미국 필리핀 전쟁 당시 미국은 12만 6,000명의 병력을 필리핀에 보냈고, 필리핀에 보내진 미군들은 필리핀인들을 대상으로 온갖 학살과 잔혹행위를 일삼았다. 또한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이들에 의해 만연했으며, 필리핀 독립운동세력을 소탕하겠다는 명분으로 부락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 행위가 벌어졌다. 당시 미군들은 필리핀을 인간 이하의 생물로 간주했으며, 그 결과 여성,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미군에 의해 아주 잔혹히 학살당했다. 최대 100만 명 이상의 필리핀인이 미국의 강점으로 학살당했다.(David Michael Smith, 『Endless Holocausts – Mass Death In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Empire』, Monthly Review Press, 2023, p.144를 참고.)
이런 전쟁에서 미군 사령관을 맡은 이가 더글라스 맥아더의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였고, 장교로 참전한 이가 맥아더 그 자신이었다. 맥아더는 1903년부터 필리핀에서 장교로 근무했으며, 처음으로 전투를 치렀고, 기마라스 섬에서 그가 말한 ‘악당들(무고한 필리핀 민간인이거나 독립운동 무장 단체 인사들)’을 처단했다. 즉, 맥아더는 필리핀에서 이런 학살을 자행하던 미군 군인의 장교였다.(대니얼 임머바르, 김현정(역), 『미국 제국의 연대기 – 전쟁, 전략, 은밀한 확장에 대하여』, 글항아리, 2020, 243쪽 참조.) 더글라스 맥아더의 아버지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아래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1900년 초 필리핀 주둔 미군 사령관이던 아서 맥아더(Arthur MacArthur) 장군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내키지는 않지만 필리핀 대중이 아기날도와 그가 이끄는 정부에 충성을 바치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 때문에 미국의 전술을 완화하거나 반란 세력의 환심을 사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가혹한 조취를 취했다. 미국의 군사작전은 점차 더욱 체계적이고 악랄하고 잔혹해졌다. 포로로 잡은 필리핀 게릴라를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했고, 몇 개 섬에서는 전 주민을 소개(疏開)하기도 했다. 즉, 주민을 강제수용소에 억지로 몰아넣고, 그 사이 마을을 완전히 파괴했다. 더욱 야만스러워진 미군 병사들은 필리핀인을 거의 인간 이하로 보게 되었고, 때로는 무차별적인 살상에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앨런 브링클리, 황혜성 외 옮김,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2: 하나의 미국 남북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휴머니스트, 2011, 463~464쪽.)

미국인들은 미개한 민족에게 문명을 전파했다는 생각으로 이 전쟁에 대해 자위했으며, 아서 맥아더나 그의 아들 더글라스 맥아더 또한 마찬가지다.

맥아더 아버지 아서 맥아더

더글라스 맥아더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아무런 반성 없이, 오랜 기간 필리핀에 주둔했다. 맥아더는 멕시코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는데, 멕시코 전쟁 또한 미국의 식민주의적 제국주의 시절 멕시코의 주권과 독립을 방해한 제국주의적 전쟁이었다. 거기서도 맥아더는 군인으로서 활약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으로 참전했을 당시에는 미 육군 보병 사단장까지 진급한 상태였다.
1930년대 당시 맥아더는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 사령관이었는데, 그가 좋아하던 필리핀 주둔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잠시 종결됐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는데, 이와 동시에 필리핀도 침공했다. 필리핀을 침공하자, 수적 열세였던 필리핀 주둔 미군은 일본에게 내주게 됐다. 일본군 초기 공격에 미군은 풍비박산이 났고, 맥아더는 호주로 피신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연합군에게 유리해지자, 1944년부터 미군은 필리핀 탈환에 나섰고,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은 1945년에 필리핀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미국의 맥아더 행정부는 새로운 독립국 필리핀의 초대 대통령으로 마누엘 록서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마누엘 록서스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했던 부역자였다. 마찬가지로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필리핀의 친일 세력들이 맥아더 정부 하에서 여러 관직을 차지하게 됐다. 반면에 반일 게릴라 투쟁의 선봉이었던 필리핀 공산당과 그 휘하의 후크발라합 등은 합법적으로 정치무대에 참여하고자 했지만, 맥아더를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무산됐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점령에 맞선 또 다른 항전이 필리핀에서 게시됐다.
후크발라합이 주도한 민중봉기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심화되어 왔던 불만과 부정에 그 뿌리가 있었다. 미국 식민지 체제와 연결된 엘리트의 폭력과 불법, 전후 반일 레지스탕스 군에 대한 맥아더 행정부의 야만적인 탄압에 따른 결과였다. 미국은 지주계급 중 필리핀의 친일세력에게 지원을 보냈고, 레지스탕스 소탕에 전념했다. 당시 미국은 후크발라합을 진압하기 위해 우익 정부에 미군 고문단을 보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에드워드 랜스데일 장군이었다. 참고로 랜스데일은 이후 남베트남의 부패한 응오딘지엠 정권을 적극 후원한 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이 필리핀에서 활용한 반게릴라토벌전을 남베트남에 그대로 적용하여 활용했다.(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 임채정(역) 『미국 대외정책론』, 일월서각, 1985, 271~272쪽.) 반게릴라전이 끝나던 1954년 기준으로 최소 12,000명 이상의 인명이 이러한 진압작전으로 목숨을 잃었다.(David Michael Smith, 『Endless Holocausts – Mass Death In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Empire』, Monthly Review Press, 2023, p.174)
이처럼 맥아더의 추악한 이면은 단순히 한국전쟁 당시 야만적으로 수행한 군사작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맥아더는 태생부터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적인 유산을 물려 밭았다. 그랬기에 필리핀에서 광적인 학살을 벌여놓고도 한 평생 이에 대해 단 한 번도 반성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필리핀에서 지배자적인 모습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멕시코 독립운동 세력을 진압하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점령정책을 통해 민중을 탄압하는 폭력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더 나아가 한국전쟁에서는 나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을 법한 전쟁범죄를 전쟁수행방식에 활용했다. 심지어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핵폭탄을 쓰겠다면 협박까지 했다. 이런 전쟁광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인물이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다. 따라서 맥아더 동상은 우리 역사의 수치이며, 지금 당장이라도 철거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옳은 일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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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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