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그라드 전투: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을 뒤집은 소련의 위대한 반파시즘 투쟁의 승리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2023년 2월 2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소련의 승리로 끝난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전 80주년을 기념해 러시아의 남부 도시 볼고그라드(구 스탈린그라드)에선 승전 축하 불꽃이 터졌고,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승전 기념 연설을 했다.
푸틴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80년 전처럼 승리할 것이다. 우리의 승리를 확신한다.”는 말을 승전 기념 연설에서 했다. 1년 전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염두에 두고 한 연설을 통해, 현재 러시아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를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푸틴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이룩한 소련의 승리는 분명히 자랑스러운 역사다. 왜냐하면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전반적인 전황이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유리하게 전환됐기 때문이다.
올해 2월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80주년인 만큼,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현재 우리 사회와 서방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과 소련 그리고 스탈린에 대한 편견을 반박해보고자 한다.

 

1. 스탈린그라드 명칭과 위치?

 

스탈린그라드는 현재 러시아의 볼고그라드에 위치해 있다. 볼고그라드의 원래 이름은 차리친이었으며,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고 있다는 볼가강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과거 이 곳은 훈족과 투르크족이 지배했던 곳이기도 하고, 과거 몽고 제국은 이 볼가강을 중심으로 킵차크한국이라는 자신들 통치 지역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현재도 유럽-러시아와 아시아-러시아 사이에 위치해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카자흐스탄 서쪽 국경지대하고도 그리 멀지 않으니 말이다.
볼고그라드가 과거 차리친이라는 이름에서 스탈린그라드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전개된 이른바 적백내전에 따른 것이다.
러시아 적백내전은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을 위시한 제국주의 열강이 혁명 러시아에 다시 차르를 중심으로 하는 반동정부를 세우고자 일으킨 전쟁이다. 적백내전 당시 스탈린은 볼셰비키가 조직한 적군의 지휘관으로서, 군대를 통솔했는데 차리친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그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스탈린의 업적을 기린다는 의미로 1925년부터 이 도시의 이름을 차리친에서 스탈린그라드로 불렸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도 이 명칭을 유지했다. 1953년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하면서, 1961년에 현재의 명칭인 볼고그라드로 바뀌었다.

 

2.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개 과정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300만 대군을 동원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소위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아주 신속히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향해서 진군해갔다.
개전 초 소련군은 독일군의 기습 공세에 맥을 못 추렸다. 독일군의 총 공세로 소련군은 공격 당일 1,200대의 항공기를 잃었을 정도다. 레닌그라드가 포위당했으며,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는 개전 3개월도 안 돼서 나치가 점령했으며, 수도 모스크바도 그 해 겨울엔 외각 근처에서 양측의 전투가 벌어졌다.
소련군은 개전 3주 만에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또 다른 수십만 명이 나치 독일군에게 포로로 붙잡혔고, 1만 대의 탱크와 4,00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1941년 말까지 붉은 군대는 전투에서 거의 200개 사단을 잃었고, 무려 430만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함락시키는 데 실패했으며, 1941년 개전 초기 가을과 1942년 봄에 소위 라스푸티차(비가와서 땅이 뻘로 변해 통행이 힘들어지게 되는 시기)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모스크바 함락에 실패한 독일군은 방향을 코카서스 지역에 있는 바쿠 유전과 스탈린의 도시 스탈린그라드를 목적으로 러시아 남부 방향을 향해 거침없는 진격을 했다. 1942년 8월 독일군은 바쿠 유전지대는 아니지만 캅카스 산맥 정상까지 도달했고, 그달 말에는 스탈린그라드가 위치한 볼가강까지 도달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위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 대규모 공습을 퍼부으면서 시작됐다. 2일 동안의 폭격에서 독일의 공군(루프트바페)은 총 2,000회를 출격하여 최소 2만 5,000명에서 4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했다. 당시 스탈린그라드 인구가 60만이었다는 점에서 폭격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 독일 공군은 600대의 폭격기를 포함해 2,000여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스탈린그라드를 폭격했는데, 말 그대로 무차별 폭격을 가했으며, 도시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렸다. 이후 독일군 지상병력이 9월에서 10월 쯤 스탈린그라드 도심에 진입했고, 추축국 동맹 국가들의 병력(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등으로 구성됨)들도 독일군을 뒤따라 스탈린그라드 지역에서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도심으로 진입한 시점부터 스탈린그라드의 진짜 전투가 시작됐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2년 말 스탈린그라드에 아주 매서운 한파가 들이 닥치기까지 했다.
거기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나 게오르기 주코프, 바실리 추이코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세묜 티모셴코 등이 스탈린과 잘 조율하여 훌륭하게 군사작전을 수행하게 됨에 따라, 독일군들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11월 중순까지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의 90% 이상을 점령했지만, 소련군이 계획한 천왕성 작전이 성공하면서 스탈린그라드에 있던 수십만 명의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포위되고 만다.
1942년 12월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만슈타인이 이끄는 기갑사단이 출동했으나, 히틀러의 지시를 받고 스탈린그라드에서 철수했다. 포위된 독일군은 항공 물자지원에 의존하며 버텼지만, 제공권 또한 소련 측으로 넘어간 상태였고, 독일군 항공기들도 겨울이 되면서 제대로 된 임무 수행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 소련군은 1943년 1월에 총 반격에 나섰으며, 당시 포위된 독일군 총 지휘관이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히틀러에게 항복 허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요청을 거부했으며 전선 사수만을 주장했다. 히틀러가 진급을 시켜줬음에도 불구하고, 1월 30일 파울루스는 소련군에게 항복했으며, 그가 지휘하던 9만 명의 독일군 병력들도 소련군에게 집단 항복했다.
1943년 2월 2일에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방어선 책임자 및 병력들이 소련군에게 항복하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다. 대략 5~6개월간 진행된 이 전투에서 양측의 사상자는 합쳐서 최소 200만 명을 기록했고, 적어도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항공 폭격과 독일군이 전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전투를 지휘하는 소련군 장교

스탈린그라드 폐허 속에서 진격하는 소련군 병사

 

이런 엄청난 인명 손실과 물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통해 확실히 동부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에 맞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가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작용한 셈이다.

 

3. 스탈린그라드 전투 관련 서방의 그릇된 편견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서방 사회에서도 제법 유명한 전투일 것이다. 아마도 역사나 군사 쪽으로 관심이 있는 이들(역사 덕후 혹은 밀리터리 덕후들)이라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소련의 모습은 서방에 의해 가공된 이미지들이 많다. 예를 들어, 2001년에 개봉한 헐리우드 영화 <에너미 엣더 게이트>나 <태극기 휘날리며>로 유명한 강제규 감독의 2011년 영화 <마이웨이>등에서 나온 소련군의 이미지는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오리엔탈리즘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 영화에서 비춰진 소련군의 모습은 야만적인 이반의 군대라는 기존 서구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너미 앳더 게이트>는 200명 이상의 독일군을 저격 사살한 소련의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를 다룬 영화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영화의 배경이다. 작중 초반에 묘사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군에 대한 편견이 가득 차 있다.
영화상에서 소련의 정치위원들은 자신들은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겁먹은 소련군들은 팀 킬하는 악랄한 존재로 묘사된다. 또한 전선에 투입된 소련군들에게 제대로 된 탄약과 무기도 지급하지 않은 채, 무조건 앞으로 돌격시키는 존재로도 묘사된다. 따라서 영화 <에너미 앳더 게이트>는 소련군을 후퇴하는 다수의 병사를 기관총과 기관단총으로 무차별 학살하는 독일군보다 더 무자비한 전쟁범죄자로 표현되는 셈이다.
2003년에 액티비젼이라는 게임회사에서 만든 FPS 게임(총 쏘는 게임)인 <콜오브듀티 1> 또한 영화 <에너미 앳더 게이트>의 오리엔탈리즘적 장면을 완전 그대로 복사함으로써, 소련군을 마치 야만적인 군대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 및 콘솔게임 서사는 역사적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소위 소련군의 무자비함을 강조하는 사례로 언급되는 스탈린의 ‘행정명령 제227호’의 경우 “승인 없는 후퇴금지는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규정을 담고 있으나, 이것이 앞에서 언급된 무차별 팀킬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행정명령 제227호’의 경우 엄밀히 말하자면 전쟁 초기부터 스탈린이 견지한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후퇴하는 소련군을 무차별적으로 팀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독전대라는 것도 영화상에서 묘사되는 무차별적인 학살자와는 거리가 멀다. 독전대는 어디까지나 전투를 격려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지, 후퇴하는 병사를 팀킬 학살하려고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스탈린의 ‘행정명령 제227호’가 내려진 후 소련군 내에 193개의 독전대가 조직되어 8월 1일부터 10월 15일까지 14만 755명을 억류했고, 억류자들 중 3,980명이 체포, 1,189명이 총살, 2,961명이 형벌 대대나 형벌 중대로 이송, 나머지 13만 1,094명을 소속 부대로 돌려보냈다. 그 어디에서도 후퇴하는 다수의 병사를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오히려 영국의 역사학자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스탈린의 ‘행정명령 제227호’는 전선에서 복무하고 있는 군인들의 지지를 받았고, 사기를 진작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즉 이 명령의 목적은 위반자들 처벌이 아닌 동요하는 자들을 억제하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의무를 다하기로 결심한 자들에게 규율을 깨뜨린 편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붙잡혀 가혹한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방법이 다소 과격했다고 얘기할 수는 있어도, 서방이 생각하는 그러한 이미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투입된 내무인민위원부(정치위원) 소속의 병력은 8월 1일부터 10월 15일까지 4만 명 이상의 병사들을 구금했는데, 이중 900명을 체포, 700명을 총살 그리고 1,300명을 형벌 대대로 넘겼으나, 대다수의 구금 병력은 소속 부대로 복귀시켰다.
거기다 이 내무 인민 위원부 또한 제프리 로버츠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이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영웅적이기까지 했다. 내무인민위원부는 보안과 방첩 활동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전투에도 활발히 참여했고 많은 사상자를 낳았으며, 실제로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수많은 파괴 활동도 벌였다.
따라서 영화 <에너미 앳더 게이트>에서 묘사된 소련군 내무 인민 위원들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서방의 편견이 영화로 만들어 낸 가상의 존재다.

 

4.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체는 바로 소련

 

제2차 세계대전은 대략 6,500만 명에서 7,000만 명의 인명을 죽인 역사상 가장 많은 죽음을 부른 전쟁이었다. 이 중 2,700만 명 이상은 소련의 희생이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은 수많은 인명 피해와 물적 피해를 경험했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 무려 2,500만 명의 소련인이 집을 잃었고, 1,700여개의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만 2,000개 이상의 공장, 65,000km의 철도, 약 10만의 콜호즈와 소호즈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 국부의 1/3이 날아간 셈이다.
히틀러의 침략으로 소련이 입은 물질적인 피해 6,800억 루블을 포함하여 소련의 전쟁피해는 총계 2조 6천억 루블이나 됐다. 독일군은 후퇴하는 동안에도 고의로 소련에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살랐으며, 2,000곳의 도시, 7만 곳의 마을, 40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들이 전부 혹은 일부분 파괴됐다.
앞에서 언급한 인명 피해의 경우 1,000만 명 이상은 군인 전사자고, 1,700만 명 이상은 민간인 사망자다. 서방 사회에서 나치의 범죄로 강조하는 이른바 홀로코스트는 사실 소련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홀로코스트로 학살당한 유대인 600만 명 중 대다수는 소련 출신의 유대인들이었다. 거기다 나치에게 학살당한 소련 민간인 비율만 보더라도 홀로코스트 희생자 600만 명보다 3배에 달하는 규모다.
나치는 이른바 게네랄플란 오스트라 불리는 동방총계획이라는 아주 끔찍한 인종청소 계획을 구상했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에스토니아인 50%, 라트비아인 50%, 체코인 50%, 우크라이나인 65%, 벨라루스인 75%, 폴란드인 80~85%, 리투아니아인 85%, 라트갈레아인 100%가 제거될 예정이었다.
즉, 이런 끔찍한 학살을 구상한 존재가 바로 히틀러 나치스였고, 그러한 끔찍한 학살로부터 전 세계를 구출한 존재가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과 소련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소련은 반파시즘 항전을 전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를 서구 사회는 자꾸 망각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사실을 망각한 채, 서구 제국주의 언론과 정치권 그리고 반공 학계들은 히틀러와 스탈린을 동일시하려는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서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업적들을 이룩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1년 9월부터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에게 제2전선을 열어달라고 요구했지만, 처칠과 루스벨트가 제2전선을 열어준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44년 6월에 이르러서였다.

최근 볼고그라드에 세워진 스탈린 동상

소위 서방 사회에서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자주 제작하고 선전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스탈린이 서방에게 강력히 요구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그 이전까지 소련은 동부전선에서 수백만 명의 독일 침략군에 맞서 고전하고 있었고, 전쟁을 통틀어 독일군 전사자 75%는 동부전선에서 발생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에 따르면, 당장 1945년 베를린 전투에서 발생한 소련군 사상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발생한 미군 전사자 수치와 거의 비슷하다.
이러한 비율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을 물리치고 전 세계를 파시즘이라는 마수로부터 구한 주체는 바로 미국이 아닌 소련이라는 사실이다.

 

5.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독일 측 레오파르트 탱크

 

2022년에 시작된 러우전쟁으로 현재 국내와 서방에서는 반러감정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2013년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된 CIA의 유로마이단 폭동은 돈바스 내전으로 이어졌고, 서방과 NATO의 동진정책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발발하도록 자극했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미국과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중이고, 심지어 이제는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위해 군수물자를 지원해주고 있다. 최근 들어, 미국과 독일이 우크라이나에 M1 에이브람스 탱크와 레오파르트 탱크를 지원해줬다고, 언론에서 난리를 피우고 있다. 더 나아가 국내 언론들은 러시아군의 탱크가 부족하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중이다.
이러한 무기 지원에 대한 맞대응으로 러시아의 푸틴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전 80주년을 맞아 의도적으로 레오파르트 탱크를 언급했다. 푸틴은 “독일제 레오파르트 전차가 다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러시아가 독일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은 전쟁 상황에서 나치 친위대 문양이 들어간 탱크와 장갑차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네오나치 성향의 아조프 부대는 우크라이나군의 정규군 역할을 했으며, 전쟁 초기 전 세계에 있던 네오나치들이 우크라이나군에 편입되기도 했다. 즉, 그런 점에서 러시아가 독일의 전차 지원을 그렇게 비꼰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러시아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상기하는 것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서방 사회는 우크라이나에 물자를 지원하는 것을 지금 당장이라도 멈추고, 평화협상을 해야 한다.

 

6. 소련의 반파시즘 항전 업적을 부정하려는 이들을 보며

 

마지막으로 러우전쟁과는 별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도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며 반박하겠다.
국내에 있는 트로츠키 진영에서는 마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은 스탈린이 동부로의 팽창 정책을 추진했고, 히틀러의 침공에 전혀 대비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스탈린은 독일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침공을 대비한 군사력을 길렀다. 대숙청이 끝나가던 1938년에 150만 명이었던 병력이 1941년 6월에는 500만 명으로 증가했고, 1940년부터는 당시 독일의 주력전차보다 우수한 T-34나 보로실로프 전차(KV 중 전차) 생산을 했다.

소련군의 주력 전차인 T-34

 

실제로 이 중형 전차들은 개전 초기 독일군 주력 전차를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성과를 올리기까지 했다. 즉, 국내의 모 트로츠키주의 단체는 이러한 군사적 성과와 역사적 성과를 모르니, 기본 맥락도 파악하지 않은 채 아무말 대잔치를 한 것이다.
스탈린이 오판한 것은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지, 독일군 침공에 대비를 아예 안했다는 모 트로츠키주의 단체의 주장은 말 그대로 언어도단이다. 거기다 스탈린이 전쟁에서 전혀 지도력을 보이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것도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쪽 분야의 전문 역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나 제프리 로버츠 등은 스탈린이 모스크바 전투와 스탈린그라드 전투 그리고 쿠르스크 전투에서 전시 지도자로서 탁월한 지도력을 보였으며, 이들의 의견과 견해를 잘 조율하여 군사적으로 잘 지도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모 트로츠키주의 단체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관련 논평은 이런 역사적 맥락을 빼먹은 셈이다. 마지막으로 제프리 로버츠가 집필한 ≪스탈린의 전쟁≫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스탈린그라드 때부터 쭉 있었던 일은 스탈린이 더 많이 귀를 기울였고, 자문이 좋을수록 그것을 더 잘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 뿐 아니라 소련 장군들도 전쟁 1일 차부터 가파른 학습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바로 이 쓰라린 패배 경험을 통해 장군들은 더 좋은 사령관이 되었고 스탈린은 더 나은 최고 사령관이 되었을 뿐이다.”(제프리 로버츠, 김남섭 역, 《스탈린의 전쟁(제2차 세계대전에서 냉전까지, 스탈린은 소련을 어떻게 이끌었나)》, 열린책들, 2022,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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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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