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맑스레닌주의가 ‘제한적’이라는 명제에 대하여
맑스레닌주의 사상도 당연히 맑스 레닌 시대에 살았던 그 생전의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는 모든 진보적 사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맑스 레닌이 살았던 시대의 제한성이고 불가피한 인식의 제한성입니다.
《자본론》은 여전히 인류 최대의 지적보고이고 자본주의 구조, 심지어 사회주의 원리까지 꿰뚫어 보여주고 있지만, 시대의 제한성으로 말미암아 자본의 독점을 일반원리로만 제시했지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은 자본론의 원리 원칙을 바탕으로 현대제국주의를 분석한 레닌에 와서 창조적으로 계승발전했습니다.
맑스도 엥겔스도 파리꼬뮌의 경험 외에 사회주의 건설을 실제적으로 하지 못한 제한성이 있고 레닌도 첫 건설의 위업을 달성했으나 4년 여의 경험밖에 없습니다.
이 경험 건설이론의 확장은 마오, 스탈린 때 대폭 확장됐습니다.
특히 스탈린의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제 문제는 30년 사회주의 건설의 총화였습니다.
이는 중국 조선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북에서는 맑스레닌주의의 근본 제한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맑스주의는 사회력사를 객관적인 물질경제적 조건을 위주로 하여 고찰하였던 관계로 사회의 발전을 생산력 성격에의 생산관계의 적응의 법칙에 의하여 일어나는 생산방식의 교체의 력사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사회주의적 생산방식을 확립하면 혁명이 기본적으로 수행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사회주의적 생산방식을 공고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만 하면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맑스주의 유물사관의 원리로써는 사회주의제도가 선 다음의 혁명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 건설의 실천은 사회주의제도가 선 다음 사상, 문화분야에서 혁명을 계속하지 않으면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옳게 발양시킬 수 없고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을 끝까지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의미의 제한성은 당연히 맑스레닌주의에 있습니다.
맑스 레닌 당시에 ‘대안의 사업체계’를 발견할 수는 없었죠.
이는 당의 지도와 대중의 참여를 통일적으로 보면서 중앙집중의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관료주의를 경계, 그 폐해를 극복하고 인민대중의 민주주의를 제시한 북의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독특한 것이고 모든 사회주의 건설에서 참고할만한 것입니다.
북의 지도자도 이는 선행고전을 아무리 뒤져도 안 나왔다고 고충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근거지가 사실상 없는 적진 무장 한 가운데서 펼쳐친 반일 무장항쟁 유격전술도 고전을 아무리 뒤져도 안 나온다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제한성말고 맑스주의 철학 사상의 체계와 방법이 제한적일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가능한 것이고 그러한 인식이 타당하다 할 수 있나요?
유물론, 변증법이 제한적이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나요?
사적유물론이 제한적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제한적이라는 명제가 성립될 수 있나요?
“사회역사를 객관적인 물질경제적 조건을 위주로 고찰했다”고 하는데 “위주로 했다”는 말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이 과연 객관적인 물질경제적 조건만을 위주로 한 사상인가요?
과연 변증법적 유물론이 물질관계 중심으로 하며 인간의 주체적 행동 , 실천은 도외시한 사상인가요?
여러가지 문헌적 근거를 들어 얘기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독일이데올로기》서부터 인간의 혁명활동이 없이는 객관적 조건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인간 실천 심지어 전위활동 전위정당 노선을 끊임 없이 실천했죠. 인간, 자연, 사회 개조의 최고점인 혁명을 실천하는 사상이 맑스레닌주의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모순이 사회발전의 근원적 동인이라는 법칙을 북은 동의하지 않나요?
변증법적 유물론을 전제한다면 이를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를 역사발전의 근원으로 보는 건 사회발전의 법칙입니다.
그러면 법칙과 인간실천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스탈린이 《쏘련 사회주의 경제 제 문제》에서 발전적 해명을 했듯이, 법칙 자체를 그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인위적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법칙을 제대로 인식할 때만이 그에 합당한 올바른 실천을 할 수 있다고 했죠.
그런데 과연 이런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선행이론으로 보면 과연 사회주의 생산방식이 확립되면 혁명이 기본적으로 수행된 것으로 보는가요?
그때에는 사회주의 생산방식을 공고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만 하면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속혁명은 트로츠키의 대표 트레이드 마크인데 -그것도 왜곡되고 잘못된 방식의- 사실 계속혁명, 중단 없는 혁명은 맑스레닌주의의 근본원칙입니다.
사회주의 사상을 도외시하고 당적 지도를 경시하며 사회주의 생산방식만 수립하고 생산만 발전시키면 된다는 입장은 기회주의 수정주의 입장입니다.
스탈린도 《제 문제》에서도 이를 신랄하게 배격했지요.
이는 수정주의와 맑스레닌주의의 계선을 그리는 중대한 차이입니다.
북에서 계속혁명, 사회주의 건설 이후 사상 문화혁명의 강조는 사회주의권의 해체에서 볼때도 아주 중요한 절대적 원칙입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고전사상의 역사적 제한성을 도출한다는 것은 심각한 왜곡입니다.
인간의 본질문제는 맑스레닌주의에서 기본적으로 다뤘지만 자주성, 의식성, 창조성으로 이를 발전시킨 것은 북입니다.
맑스레닌주의 사상이 사회역사를 물질관계 위주로만 봤기에 제한성이 있고 수정주의적이라는(결국 그렇게 이해될 수밖에 없는, 이로써 맑스레닌주의를 전제했다는 주체사상과도 모순되는) 결론을 동의할 수 있는가요?
이 논쟁이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사회, 이남에서 변혁한다는 사람들이 취해야할 근본태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민족과 계급》에서 이를 인용한바 있지만, 김국방위원장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을 사회주의 건설에서 지나치게 강조하면 말공부가 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이남사회 계급착취 사회에서 그것도 제국주의 모순과 분단모순이 특수하게 중첩된 계급 대립 사회, 비자주 사회에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을 강조하는 것은 국내외 지배계급과 계급화해주의와 투쟁하는 절대적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이북에서 전제했다고 이 원칙을 고수, 학습 발전시키지 않으면 맑스레닌주의는 물론, 더 나아가 주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실천적으로도 우경에 빠집니다.
맑스레닌주의는 헤겔사상에서 머리로 선 관념적인 변증법을 보듯이 제한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수미일관한 체계이자 나날이 발전하는 방법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확고하게 세우면서 북의 사상과 역사문제에까지 인식을 확장시키고, 러시아혁명만 교조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우리 땅에 발을 딛고 세상을 개조해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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