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와 무정부주의》 추천사1 무정부주의자들은 혁명을 말하며 혁명을 해(害)한다
– 이범주(4.27시대 연구원)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체제에서 산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데 자본주의 체제는 언제까지 영속할 수 있을까. 1990년대 초 소련 붕괴 후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은 ‘역사의 종언’을 외치며 자본주의야말로 인류가 구현한 사회 체제 중에 최고, 최선의 것이라 단언했다. 그런데 과연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류는 행복했고, 지금 자본주의 체제가 제시하는 인류의 미래는 낙관적인 것인가?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과는 달리 현재 인류의 상태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한편에선 통제되지 않는 무계획, 무정부적 생산으로 막대한 자원을 탕진하며 만들어 내는 상품들이 팔리지 않아 재고로 쌓이는데, 다른 한편에선 절대다수의 인민이 생활고에 시달린다. 거리에는 직업을 잃은 노숙자가 넘친다. 과도한 생산으로 인한 환경 오염은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부의 불평등이 극심해지고 민주주의는 타락하고 있다. 나날이 삶의 조건이 나빠지는 이런 조건에서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살아야 하고, 이런 삶이 우리에게 허용된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니… 이런 비극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고작 이렇게 살려고 수십억 진화의 끝에서 이 세상이 어렵사리 태어났는가?
그러나 이건 그들의 생각일 뿐 ‘역사적’ 산물인 자본주의 체제도 언젠가는 ‘역사적으로’ 소멸될 것이다. 맑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자본주의의 태내에서 발생해 그 존재를 키워 온, 자본주의의 불가피하고 유일한 적자(嫡子)인 사회주의를 제시한다. 맑스는 사회주의의 본질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 극소수 자본가들은 막대한 생산 수단을 개인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절대다수 노동자 계급을 착취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사회는 잉여 착취의 물적 기초인 기계, 공장, 토지, 도로, 기업 등의 생산 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한다. 생산 수단을 사회적으로 소유한다는 말은 전 인민이 생산 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것이니 그리되고 나서야 노동하는 인민 모두가 진실로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 국가는 지배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한다.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정치 행위는, 그 외양이 어떠하건, 본질적으로 소수 자본가를 위한 계급 독재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산 수단을 전 인민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노동 계급을 중심으로 한 노동 인민들이 소수 자본가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혹은 인민 독재를 실시한다. 이는 다수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 관철하고 한편으로는 혁명에 적대적인 제국주의 혹은 권력을 빼앗긴 소수 자본가 계급의 반격으로부터 노동자 권력(혹은 인민 권력)과 혁명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한 필수 불가결의 수단이다. 계급 독재 혹은 인민 독재는 노동자 계급 혹은 전체 노동 인민들의 이익과 지향을 체현(體現)한 지도자와 당의 지도를 받는다.
- 혁명은 혁명에 이해관계를 갖는 전체 인민의 역량을 모으고 조직·투쟁해야 성공할 수 있으며, 혁명을 지키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도 전체 인민대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혁명은 그들의 삶과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혁명의 과정, 혁명 이후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인민들이 진실로 주인이 되는, 참된 의미의 민주주의가 구현되어야 한다.
맑스, 엥겔스, 레닌 그리고 그 이후 사회주의를 향한 혁명의 과정은 이런 핵심적인 사항을 반대하는 제 정파들과의 비타협적인 투쟁의 역사였다. 그중에서도 맑스의 사상에 대해 가장 완고하고 집요하게, 가장 해악적으로 작용해 온 게 아나키즘(anarchism)이다.
왜 해악으로 작용했는가? 겉으로 그들은 모든 종류의 권력과 간섭을 거부하므로 인류의 궁극적인 자유와 해방을 지향해서 투쟁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인민들의 시야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의 권력이 비대해진다는 이유로 사회적 소유의 최고 형태인 생산 수단의 국유화를 거부한다. 그들은 각 지역의 자치 조직을 간섭할 수 있다는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혹은 인민 독재를 거부하고 진실한 사회주의당과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 단위로 사회주의 건설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인민들의 뜨거운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다.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은 계급이 소멸하지 않은 조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지키는 데 필수적인, 전체 인민을 위한 중앙 권력으로서의 국가조차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혁명을 말하며 혁명을 해(害)한다. 자본가 계급에 반대한다면서 실제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에 기여한다. 이런 연유로 그들은 혁명에 가장 해롭다.
말이야 늘 그럴싸했지만, 실제의 그들은 그 존재 조건상 혁명이 궁극까지 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이 가진 약간의 재산과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소부르주아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자본주의가 대세인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로 회귀한 러시아는 아직 사회주의로 복귀하지 못했고, 중국은 마치 동요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세상은 변한다. 그 변화는 자신이 내재한 본질적 모순의 결을 따라서 온다.
자세히 보면 격렬한 변화의 흐름이 읽힌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지도국인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위상이 이미 전에 비해 현저하게 약해졌다. 미국은 또한 내연(內燃)하는 국내 모순으로 극심하게 흔들린다. 반면 조선과 쿠바는 의연히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중국의 경제력은 이제 미국과 어깨를 견줄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미국에 필적한다. 남미에서는 사회주의 쿠바를 중심으로 해서 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진보적 국가들이 들어서고 있다.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은 과거를 날카롭게 평가하며 혁명적 전망을 다시 세우며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이제 말하자면 자본주의 체제의 유럽, 미국의 해양 세력의 힘은 명백히 퇴조하는 데 반해 한때 위기에 처했던 사회주의 세력은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변화는 사회주의를 향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유일한 적자(嫡子)이다.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체제의 변화를 부르는 혁명에 있어 맑스, 엥겔스, 레닌의 사상의 핵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외양이 어떠하건 자본주의 모순의 본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맑스와 레닌의 핵심적 가르침의 정당성을 부단히 상기하는 한편, 이 가르침에 반대하는 제반 사상 조류들 즉 무정부주의, 교조주의, 수정주의 등의 다양한 오류와 한계들에 관한 풍부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한번 읽어보자. 세상 보는 눈이 밝아질 것이다.
* 사진은 러시아 출신 아나키스트 혁명가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1814년 5월 30일 ~ 1876년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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