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계급2 남북 민족문제의 특수성을 국제주의 일반으로 해소하는가?
하나의 편향에 대한 다른 편향이 답이 될 수는 없다
박문석 연구위원의 가장 심각한 편향적 인식은 다음 구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인 남쪽에서의 변혁노선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혁명일 것이다. 물론 남쪽 내부의 계급모순을 타파하는 문제가 선차적이다. 계급적 성격이 전혀 다른 또 하나의 국가인 북은 남쪽에 있어서는 ‘외부’일 수밖에 없다. 내부모순이 1차적이고 외부모순은 2차적인 것이라면, 남쪽 내부의 계급모순이야말로 1차적인 것이며, 외부모순인 남북간 모순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연대의 관점에서 대할 수밖에 없다. 남쪽의 계급모순보다는 몰계급적 관점에서의 민족분단 모순에 집착하는 엔엘 동지들의 비주체적인 태도가 문제이다.
엔엘 동지들이 맑스-레닌주의에 대해 관심 갖기보다는 “주체사상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통일이 되면 노동해방은 자동으로 된다.”, “민족문제 안에 계급문제도 포함되어 있다.”는 식의 주장은 주관적 관념론이자 비과학적인 주장일 수밖에 없다. ‘주체사상’ 또한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그리고 국제정치적 악조건과 특수한 필요 때문에 굴절되어 버린 이북의 주체사상”을 몰주체적으로 재단하고 있기에 이러한 인식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박문석 연구위원, “민족문제에 대한 계급적 접근을 위하여”, [노동사회과학], 2020년 12월 5일)
“남쪽 내부의 계급모순을 타파하는 문제가 선차적이다”는 선변혁론은 남쪽 내에서 계급투쟁에 집중하여 변혁주체를 형성하고 변혁을 달성하여 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이 주장은 남쪽 내부의 노동자계급의 ‘고유한’ 노자 간의 모순에 집중하여 투쟁하고 노동자의 변혁역량을 축적, 강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의의가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은 민족문제 해결을 근본 변혁과정에서 지렛대로 사용하려는 관점이 빠진 과거 피디(민중민주)노선의 오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심각하다. 민족문제를 논하면서도 정작 민족문제 해결의 수단과 방도는 없이 실업, 정리해고, 노동3권 같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고유한’ 문제만을 취급할 수 있을 뿐이다. ‘신식민지’라고 남을 규정하고 있으니 미제를 축출하는 과제도 고유한 계급문제 해결의 과제가 될 텐데 이 역시 남과 북의 민족전체 과제이다. 따라서 이 과제는 민족문제 해결의 전망이 빠진 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적으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를 보더라도 이는 북미 간 문제이며 남북 간 문제이기도 하다.
“내부모순이 1차적이고 외부모순은 2차적인 것이라면, 남쪽 내부의 계급모순이야말로 1차적인 것이며, 외부모순인 남북 간 모순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연대의 관점에서 대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논리적 모순덩어리 주장이다. 이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통일적 문제를 인위적으로 내외부로 나누는 것으로 비변증법적 주장이다.
분단으로 인해 남북으로 분단되어 두 개의 국가가 되었고 부르주아는 영구분단을 획책하지만 노동자계급은 이 분단론을 깨고 민족통일의 관점에 서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남쪽 내부 모순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모순은 근원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시작하여 직접적으로는 해방 이후 미제의 진주와 이승만 주구들을 내세워 자행한 이남만의 5.10단독정부단독선거로부터 비롯됐다. 따라서 남쪽 내부 모순을 남쪽 내부 모순으로만 사고하고 남쪽 내부의 계급투쟁으로 남쪽을 우선 변혁하자는 주장은 이러한 역사적 문제가 현재 진행형임을 외면하는 주장이다.
분단으로 인해 남쪽 내부의 반공주의는 더 강화되었고 미제와 남의 지배계급은 분단을 이유로 북을 적대시, 악마화 하여 지배계급의 사상인 반공주의를 고취시키며 노동자 민중을 억압, 착취해 왔다. 따라서 “계급적 성격이 전혀 다른 또 하나의 국가인 북은 남쪽에 있어서는 ‘외부’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남북간 모순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연대의 관점에서 대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민족모순의 특수성을 부정하며 분단을 어찌할 수 없는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사고하는 것으로 남쪽 내부의 모순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주장일 뿐이다.
남과 북은 같은 민족이다. 이 점에서 보면 남과 북을 고립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지역적 관점이다. 미국, 일본, 러시아 같은 국제적 관계로만 보고 그 모순을 국제주의로 푼다는 것은 민족문제를 말하며 민족문제를 사실상 도외시, 기권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로자 룩셈부르크가 국제주의를 말하며 민족자결을 부정한 것처럼, 공허한 국제주의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는 민족문제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계급문제 일반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해방된 사회주의 내에는 계급모순이 해결되어 착취계급이 없다. 따라서 민족문제 해결은 전 인민이 추구하는 공통의 과제가 된다. 그러나 해방되지 않은 사회 내 민족내부는 그렇지 않다. 그리하여 해방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민족문제를 두고 각 계급이 서로 다른 지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배하는 권력이나 지배자로 올라서려는 계급이나 민족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민족문제 해결의 저마다의 방책을 제시하며 민족구성원들을 자신들 방식으로 끌고 가려 한다.
주지하듯, 부르주아는 외세와 결탁, 외세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말로는 민족의 단합, 단결을 외쳐도 실제로는 민족 분열세력이고 같은 민족을 끊임없이 적대하고 대립하는 민족 배반자들이다. 남의 부르주아는 특히 미제, 더 나아가 일제와 한미일 전쟁동맹을 구축하고는 침략 전쟁 연습을 자행하고 같은 민족인 북을 고립말살 시키기 위해 경제제재에 골몰해 있다. 게다가 부르주아는 부르주아적 흡수통일 방식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반면 노동자, 민중은 민족의 분단 속에 고통을 받고 정치적 전망을 질식당할 뿐만 아니라 미군범죄의 희생자들이고 미군 주둔비를 지불해야 하고 최첨단 전쟁무기 수입 비용을 막대하게 지불해야 한다. 이는 신장되어야할 복지의 후퇴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앞서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노동자계급은 민중과 함께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통일을 추구하는 민족문제 해결의 주도자이다.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 착취체제 속에 살아갈 수는 없기에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통일은 부르주아 체제를 타파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주체사상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통일이 되면 노동해방은 자동으로 된다.’, ‘민족문제 안에 계급문제도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이 주관적 관념론이자 비과학적이라면, 그 반대편향으로 “‘맑스레닌주의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노동해방이 되면 통일은 자동으로 된다.’, ‘계급문제 안에 민족문제도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 역시 주관적 관념론이자 비과학적 주장 아닌가?
맑스레닌주의를 부정하고 주체사상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풍부한 원천이자 뿌리를 모르는 것이 되고, 반대로 맑스레닌주의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다고 한다면 맑스레닌주의의 구체적 상황과 조건에서 창조적 적용 없이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밖에 안 된다.
민족분단은 노동자 계급의 주도 하에 민족대단결로 해결하는 것이 합당하다
박문석 연구위원은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인용하여 모순관계를 파악했는데, 여기서 《모순론》이 나온 김에 모순을 처리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마오의 예를 들어보겠다.
질적으로 서로 다른 모순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무산계급과 자산계급과의 모순은 사회주의 혁명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인민대중과 봉건제도와의 모순은 민주주의 혁명방법으로 해결하며, 식민지와 제국주의 모순은 민족혁명전쟁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사회주의에서 노동계급과 농민계급과의 모순은 농업집단화와 농업기계화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공산당 내의 모순은 비판과 자기비판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사회와 자연과의 모순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과정이 변화하여 낡은 과정과 낡은 모순이 없어지고 새로운 과정과 새로운 모순이 발생하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도 따라서 다르게 된다.(마오쩌둥, 《실천론·모순론》, 김승일 옮김, 범우사)
마오의 이 주장은 모순의 특수성을 말하는 것인데, ‘민족문제’를 말하고 그 해결을 주장하면서 “질적으로 서로 다른 방법”인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제대로 모순을 포착하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모순을 해결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마오는 “서로 다른 모순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이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이 엄격히 준수해야할 원칙이다”라며, “자기들이 철칙이라고 하는 공식을 어디에나 천편일률적으로 억지로 틀에 맞추기만 하면”, “혁명을 좌절시키거나 또는 원래 잘 되어오던 일을 망쳐버릴 따름이다”라고 하고 있다.
민족문제는 남과 북의 분단이라는 민족분단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다시 민족의 대단결을 통한 통일과 그 통일을 가로막는 미제와 국내 반민족분단 고착세력에 대한 투쟁을 중심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분단이 휴전협정에 불과한 전쟁의 연장인 정전협정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로 해결해야 한다. 평화협정 체결의 방해자인 미제를 몰아내야 한다. 평화협정 체결은 남북 간 대립으로 생기는 긴장을 완화함으로써 국가보안법에 기반을 둔 통치체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힐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은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이기도 하기에 대북적대감을 약화시킬 것이다. 따라서 반북반공 이데올로기를 약화시키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여 우리사회를 보다 민주적으로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민족문제는 곧 계급문제이기에 계급문제만 해결되면 분단문제가 자동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민족분단이라는 문제에 계급해방이라는 과제를 무매개적으로 들이댈 수는 없는 것이다.(우리는 민족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민족문제 해결을 통한 해방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민족문제의 독자적 성격, 민족문제에 대한 경시는 다음 글에서도 나타난다.
상호 적대적인 국가와 정권이 몇 차례(8.4, 6.15, 4.27 공동선언 등) 공동선언을 한 바 있다. 이러한 공동선언에 대한 엔엘 동지들의 집착이 대단하다.
남과 북이 두 개의 국가로서 계급적 속성을 달리하고 있는데, 이러한 적대적인 관계를 기초로 두 정치집단이 무언가를 합의하여 ‘공동선언’을 하였다면, 그 합의 또한 한계가 분명할 것이다. “독점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요구”도 “노동자・민중계급의 정치적 요구도” 담을 수 없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선언)이 “지상의 것인 양하는 인식과 그에 기초한 실천”은 문제임에 분명하다. 요구되는 것은 국가와 정권의 계급적 속성을 간파한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태도와 실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언’의 의미를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덧붙인다.(박문석, 같은 글)
박문석 연구위원은 노사과연 채만수 소장의 입장에 기초하여 남북합의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인용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고 물론 ‘6.15선언’이나‘ 7,4공동선언’,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남북합의로서의 “민족 대단결”의 원칙 등을 무시하거나 폄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들은 남북간의 긴장과 적대를 완화시키고, 따라서 남과 북이 외부로부터의 과도한 압력으로부터 다소라도 자유로워져서 각자의 사회운동법칙에 따라서 발전해 갈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만큼 그것은 긍정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6.15선언’(‘7.4공동선언’도 물론)과 이른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의 분단과 적대를 절대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계급’, ‘계급적 분열’, ‘계급적 적대’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은, 물론 바로 그 ‘침묵’이라는 소극적인 방법을 통해서이지만, 분단과 적대의 기초에 있는 계급적 분열과 적대를 은폐하고, 그 문제의식조차 기각하고 있기 때문이다.(채만수, ≪피억압의 정치학(상)≫, 노사과연, p. 102.)
박문석 연구위원은 “남북 공동선언이 철저히 미제의 한반도 전략에 의한 것이고, 이러한 미제의 대북정책을 신식민지 대리정권이 집행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리하여 수많은 합의와 선언이 있었지만 번번이 이행이 무산되고 기대와 희망에 부풀었던 인민들을 실망케 하였다는 사실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우선 7.4 공동성명(박문석 연구위원의 인용문에는 8.4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7.4의 오기로 보인다)과 6.15공동선언, 4.27 공동선언을 일률적으로 비교하는데, 이는 4.27선언이 2017년 북의 핵무력 완성 이후에 합의되었다는 특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선언을 단지 “남북 공동선언이 철저히 미제의 한반도 전략에 의한 것이고, 이러한 미제의 대북정책을 신식민지 대리정권이 집행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2018년 4.27판문점 선언이나 9.19평양선언이 “미제의 한반도 전략에 의한 것이고, 이러한 미제의 대북정책을 신식민지 대리정권이 집행한 것에 불과하다”면 이 선언을 결사반대해야 한다. 앞서 말한 북의 핵무력 완성과 자력갱생의 승리가 선언을 이끌어 냈으며, 민족의 단결을 염원하는 민족구성원들의 압력이나 투쟁도 이 진단에서는 빠져 있다. 이 “‘선언’의 의미를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실상을 왜곡하거나 경시하거나 부정하고 있다.
4.27판문점 선언이나 9.19평양선언은 “남북간의 긴장과 적대를 완화시키고, 따라서 남과 북이 외부로부터의 과도한 압력으로부터 다소라도 자유로워져서 각자의 사회운동법칙에 따라서 발전해 갈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만큼 그것은 긍정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 선언은 “그만큼”의 의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자주, 민족자결, 민족대단결 선언은 제국주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한미일 전쟁동맹을 균열시키고 파탄 낼 수 있는 단초도 포함하고 있다. 이 합의는 “각자의 사회운동법칙에 따라서 발전해 갈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한다고 하는데, 남에서는 전혀 상반되는 상황이 조성될 수밖에 없다. 남쪽 체제의 물리적 근간인 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 및 국가정보원 해체 같은 문제들이 대두될 것이며, 북의 사회주의 실상을 노동자 민중이 직접 목격함으로써 반공주의를 약화시키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키우게 될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활력이 고조되고 정치의식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선언이 “독점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요구”도 “노동자・민중계급의 정치적 요구도” 담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그 선언이 실제로 담고 있는 정치적 의의를 경시함으로써 그 실현을 위해 투쟁해야 할 정치적 과제를 방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 선언이 명시적으로 “분단과 적대를 절대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계급’, ‘계급적 분열’, ‘계급적 적대’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분단과 적대의 기초에 있는 계급적 분열과 적대를 은폐하고, 그 문제의식조차 기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대단결과 남과 북의 적대의 해소와 평화와 우호의 증진은 해방 이후 터져 나왔던 외세를 척결하고 분단을 해결하고 통일로 나아가는 노동자 민중의 해방요구와 열망이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권은 민중의 열망을 무시하지 못하고, 또 부르주아적 열망을 가지고 선언에 합의하면서도 번번이 합의를 이행하지 않고 무산시키게 되는 것이다. 미제국주의 역시도 조미 간 합의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남북 합의도 무산시키기 위해 혈안이 됐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르주아는 “기대와 희망에 부풀었던 인민들을 실망케 하”지만 그럴수록 노동자 민중은 민족의 배반자들인 부르주아와 달리 민족문제 해결의 주체로 나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국가와 정권의 계급적 속성을 간파한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태도와 실천’인 것이다.”
“남쪽 내부의 계급모순을 타파하는 문제가 선차적”이라는 규정으로 민족문제를 경시하거나 기권하는 태도도 문제지만 반대로 자주파에서 흔하게 나타나듯, 분단문제의 선차적 해결이라는 명목으로 국내 자본가 계급이나 권력에 대한 투쟁을 소홀히 하거나 타협적으로 하는 것은 심각한 운동의 해악이 될 뿐이다.
노동자계급의 사활이 걸린 고유의 경제적 요구 생존의 요구 노동3권은 후차성이라는 명목으로 뒤로 밀리거나 소홀히 할 문제가 아니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고유한 실업, 정리해고, 비정규직, 최저임금 및 임금인상, 중대재해, 노동시간 단축, 노동3권의 문제를 통일 뒤로 미루거나 근본모순이나 주요모순이 아니라는 이유로 소홀히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지적, 정치적 성장의 주요한 계기가 되기 때문에 적극 지지하고 해방의 지렛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의 권리와 삶이 신장되지 않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의식이 높아질 수 없으며, 노동자들이 분단모순 해결과 통일이라는 정치적 전망 없이 해방사업에 참여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우리사회 좌파는 계급을 중시하되 민족을 경시하고 자주파는 민족을 중시하되 계급을 경시한다. 전자는 좌편향의 우려가 있고 후자는 우편향의 우려가 있다. 양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편향을 극복해야 한다. 상호 통일적 문제를 선차성, 후차성이라는 명목으로 나눠서 제기한 결과, 오늘날 자주파는 반제와 통일운동에 집중하고, 좌파는 노동자계급의 고유한 계급문제에 집중함으로써 양자의 편향성을 낳고 운동의 분열을 낳게 된 주요원인이 되었다. 양 정파는 한국사회 모순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순을 일면적으로 반영하여 각자의 의의도 있지만, 분열이 오래됨에 따라 오류도 점점 더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자의 노선은 상대를 전면 부정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단결된 전투당의 건설로 양자의 편향을 극복해야 할 문제다. 정세별로 어디에 더 역량을 집중할지의 문제는 정세마다 통일된 당적 관점으로 해결할 문제다.
앞에서 《모순론》의 예를 들어 모순의 성격에 맞게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언급했는데, 다음 주장도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이다.
제국주의가 전쟁으로 압박하지 않고 정치, 경제, 문화 등 비교적 온화한 형식으로 압박해올 때에는 반식민지국가의 통치계급은 제국주의에 투항하여 양자가 동맹을 맺고 인민대중을 공동으로 압박하게 된다. 이런 때에는 인민대중은 왕왕 국내전쟁의 형식을 취하여 제국주의와 봉건계급 간의 동맹을 반대하며 제국주의는 흔히 직접적 행동을 취하지 않고 간접적 방식을 취하여 반식민지 국가의 반동파를 도와 인민을 압박한다. 그리하여 내부적 모순의 특별한 첨예성이 나타난다.(마오쩌둥, 같은 책)
우리사회를 당시 중국과 같은 반(半)식민지라고 하거나 국내 통치계급을 봉건계급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위 인용문은 국내 통치계급이 미제국주의에 투항하여 동맹을 맺고 인민대중을 공동으로 압박함으로써 “내부적 모순의 특별한 첨예성이 나타”나는 우리사회에서 깊게 성찰해봐야 하는 문제다. 반제투쟁은 국내 통치계급과의 투쟁과 분리되지 않는다. 반제투쟁의 기치를 내걸면서도 국내 통치계급과의 투쟁을 소홀히 하고 심지어 계급협조를 하는 것은 이율배반적 행위이다. 제국주의와 동맹을 맺고 인민대중을 공동으로 압박하여 “내부적 모순의 특별한 첨예성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국내 통치계급과 투쟁을 회피하는 것은 계급 당파성을 저버리고 인민대중의 편에 서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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