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엥겔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타오르기를 멈춘 이성의 등불이여! 뛰기를 멈춘 심장이여!’ 사회주의의 위대한 창시자 중 한 사람에 대한 레닌 동지의 헌사

블라디미르 일리이치 레닌

맑스레닌주의영국공산당(CPGB-ML)

2020년 9월 18일 금요일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칼 맑스와 함께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현대 사회주의 운동의 아버지였다. 엥겔스의 노동자계급을 위한 사심 없는 헌신은 그의 겸손과 관대함만큼이나 끝이 없었다. 또한 그와 맑스의 평생 동안 우정은 확고하고 충실한 것으로 유명했다.

올해는 칼 맑스와 함께 과학적 사회주의의 공동 창시자이자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스승 중 한명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서거 125주년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위대한 혁명 투사이자 스승인 그의 이름과 공헌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노동자 계급의 운동에 대한 그의 거대한 공적에 비춰 지나치게 겸손한 천재인 그의 혁명적인 사상을 전파하려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1895년 엥겔스의 사망을 추모하며 레닌 동지가 쓴 글을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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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기를 멈춘 이성의 등불이여! 뛰기를 멈춘 심장이여!’

1895년 8월 5일,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런던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친구 칼 맑스(Karl Marx, 1883년 사망)에 이어 엥겔스는 이 문명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훌륭한 학자이자 스승이었다. 운명이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맺어줬을 때부터 두 친구는 평생을 대의에 바쳤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한 일을 이해하려면 맑스의 가르침과 당시 노동계급운동의 발전을 위한 활동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맑스와 엥겔스 저작의 중요성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자 계급과 그들의 요구가 현재 경제 체제의 필연적 소산이라는 것을 최초로 보여줬다. 이 체제는 부르주아 계급과 함께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창조하고 조직한다. 그들은 숭고한 개인들의 선의의 노력이 아니라, 인류를 억압하는 악에서 인류를 구원할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보여줬다.

맑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과학적 저작을 통해 사회주의가 공상가들의 발명품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최종 목표이자 생산력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지금까지 문자로 기록된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고, 타인에 대한 지배의 지속과 특정한 사회 계급의 승리였다. 그리고 이것은 계급투쟁과 계급지배의 기초 즉 사유재산과 무정부적 사회생산의 기초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심은 이러한 기반의 파괴를 요구하고, 따라서 조직된 노동자들의 의식적인 계급투쟁은 그것에 맞서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또한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이제까지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들은 맑스와 엥겔스의 이 관점을 채택해왔다. 그러나 1880년대에 두 친구가 사회주의 문헌과 당시의 사회운동에 참여했을 때 그들은 아주 특별했다.

그 당시엔 재능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정직한 사람이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과 왕과 경찰, 성직자들의 전제주의에 대항하는데 집중했다. 그들은 이러한 투쟁 가운데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의 이해관계의 대립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독립된 사회세력으로 활동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공상가들도 많았고, 그 중에는 천재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통치자와 지배계급에게 현대 사회질서의 부당함을 납득시키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세상의 평화와 보편적 복지가 쉽게 자리 잡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투쟁 없는 사회주의를 꿈꿨다.

마지막으로, 당시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 계급의 후원자들은 대개 프롤레타리아를 사회의 병폐로만 여겼고, 산업 성장과 함께 프롤레타리아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극도로 두려워하며 지켜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부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추기 위해 산업과 프롤레타리아 발전을 저지할 방법을 모색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의 발전에 대한 일반의 두려움을 공유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지속적 성장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프롤레타리아가 많을수록 혁명계급으로서 더 강력해지고, 사회주의가 한층 더 가까워지고 가능해진다. 맑스와 엥겔스가 노동자 계급에게 바친 기여는 다음과 같이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들은 노동자 계급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각하도록 가르쳤으며, 몽상을 과학으로 대체했다.

그렇기 때문에 엥겔스의 이름과 삶은 모든 노동자에게 알려져야 한다. 지금 우리의 모든 출판물들 기사의 목표는 러시아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는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두 위대한 스승 중 한 명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삶과 업적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해야 한다.

엥겔스는 1820년 프로이센 왕국 라인 지방의 바르멘(Barme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조업자였다. 1838년 엥겔스는 가정이 처한 상황으로 인해 고등학교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브레멘의 상점에 직원으로 들어가야 했다.

상업 업무도 엥겔스가 과학과 정치 교육을 추구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전제정치와 관료들의 폭정을 증오하게 되었다. 철학 공부는 엥겔스를 더 나아가게 했다. 당시 헤겔의 가르침은 독일 철학을 지배했고, 엥겔스는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비록 헤겔은 전제적인 프러시아 국가의 숭배자였지만, 베를린 대학 교수 재직 당시 그의 수업은 혁명적이었다. 인간이성과 그 권리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발전을 한다는 헤겔철학의 근본 테제는 현존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베를린 철학자라는 일부 제자들을 투쟁으로 이끌었다. 기존의 잘못되고 만연한 악에 대항하는 그 투쟁은 영원한 발전이라는 세계의 법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만물이 발전하고, 만일 한 종류의 제도들이 다른 것들에게 자리를 내준다면, 프러시아 왕이나 러시아 짜르의 전제정치, 압도적 다수를 희생하여 얻은 극히 소수의 부, 또는 인민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와 같은 것들이 영속되어야 하는가?

헤겔 철학은 이성과 인식 발전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것은 관념주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이성의 발전으로부터 자연, 인간, 그리고 인간과 사회적 관계의 발전을 밝혔다. 영원한 발전 과정에 대한 헤겔 사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맑스와 엥겔스는 편견에 찬 관념론을 배격하고, 생활로 관심을 돌렸다. 그들은 자연의 발전을 설명하는 것을 인식 자체의 발전에서가 아니라, 반대로 자연과 물질에서 파생되는 것이라 봤다.

헤겔이나 다른 헤겔 신봉자들과 달리 맑스와 엥겔스는 유물론자였다. 그들은 유물론적으로 세계와 인류를 인식하면, 물질이 모든 자연현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처럼 인간사회 발전도 생산력, 즉 물질적 힘의 발전에 좌우된다고 봤다.

생산력 발전으로 인간은 인간의 욕구 충족에 필요한 생산물들의 생산하면서 서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 사회생활, 인간의 열망, 사상과 법률의 모든 현상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다.

생산력 발전은 사유재산에 따른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생산력 발전은 다수의 소유를 빼앗고 극히 소수의 손에 집중하게 한다. 그것은 현대 사회질서의 근간인 소유를 폐지하고, 바로 그것이 사회주의자들이 설정한 바로 그 목표로 향하게 한다.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해야 할 일은 현대사회에서 자신들의 처지로 인해 사회주의를 성취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회세력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이해와 역사적 임무를 이들이 자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세력이 바로 프롤레타리아이다.

엥겔스는 영국 산업의 중심지인 맨체스터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가 출자한 상업 회사에 근무하면서 1842년에 정착을 했다. 이곳에서 엥겔스는 그저 공장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가둬 놓은 빈민가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가난과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 관찰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 대해 연구된 모든 문헌을 읽고, 입수할 수 있는 모든 공문서를 면밀하게 연구했다. 이러한 연구와 관찰의 결실이 1845년에 나온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이다.

우리는 이미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집필하면서 엥겔스의 최고 업적이 무엇이었는지 언급했다. 엥겔스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고통을 묘사하고 그들을 도울 필요성을 지적했었다.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가 고통 받는 계급이며, 그들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이 그들을 계속해서 나아가게 하고 궁극적인 해방을 위해 투쟁하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를 도울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운동은 노동자의 유일한 구원이 사회주의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반면 사회주의는 그것이 노동자 계급의 정치투쟁의 목표가 될 때 하나의 세력이 된다.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 관한 엥겔스 저작의 주요 사상은 현재 모든 사상과 프롤레타리아들의 투쟁에 사용된다. 하지만 그 당시는 완전히 새로운 사상이었다. 이 사상을 담은 책은 영국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함을 가장 진솔하고 강렬한 묘사와 흡입력 있는 문체로 써졌다.

이 책은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었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엥겔스의 책은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상태를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것으로 도처에서 인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실, 1845년 이전과 그 후 어떤 것도 그토록 놀랍고 진실하게 노동자 계급의 비참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엥겔스는 영국에 와서야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맨체스터에서 그는 영국 노동운동에 활동했던 사람들과 접촉하고 영국 사회주의 출판물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1844년 독일로 돌아가는 길에 파리에서 이미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맑스와 친분을 쌓았다. 당시 맑스도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과 프랑스 생활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여기서 두 친구는 공동으로 <신성가족>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이 책은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출간 1년 전에 발행됐다. 제일 중요한 부분은 맑스가 썼는데 혁명적인 유물론적 사회주의의 근간을 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위에서 설명한 주요 사상이다.

‘신성가족’은 바우어(Bauer) 형제, 철학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붙인 익살스러운 별명이다. 이 신사들은 일체의 현실, 정당과 정치를 초월하는 비판을 설교했다. 모든 실천 활동을 거부하고 단지 주변 세계와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비판적으로만’ 바라봤다. 이 신사들, 바우어 형제는 프롤레타리아를 무비판적인 대중으로 얕보았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 터무니없고 해로운 경향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지배계급과 국가에 짓밟힌 현실의 인간, 노동자들의 이름으로 관망하지 말고 더 나은 사회질서를 위해 투쟁하라고 호소했다. 물론 그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이 투쟁을 할 수 있고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라고 여겼다.

<신성가족>이 등장하기 전부터 엥겔스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그의 비판적 논설을 맑스와 루게(Ruge)의 독불연보(Deutsch-Französische Jahrbücher)에 실었다. 이 논설에서는 현대 경제질서의 주요 현상을 사회주의적인 관점에서 검토하여 사적 소유 지배의 필연적인 결과로 간주하였다. 분명히 엥겔스와의 만남이 맑스가 그의 작업 중에서 진정한 혁명을 낳았던 과학인 정치경제학 연구를 하기로 결심했던 주된 요인이 되었다.

1845년부터 1847년까지 엥겔스는 브뤼셀과 파리에 거주하면서 과학적 연구와 브뤼셀과 파리의 독일 노동자들 사이의 실천 활동을 결합했다. 여기서 맑스와 엥겔스는 비밀결사였던 독일공산주의동맹과 접촉했다. 그 동맹은 맑스와 엥겔스가 세웠던 사회주의 주요 원리를 자세하게 설명해 줄 것을 그들에게 위임했다.

이리하여 맑스와 엥겔스의 유명한 공산당 선언은 1848년에 책으로 출간됐다. 오늘날까지 이 소책자의 정신은 문명 세계의 조직되고 전투적인 전체 프롤레타리아를 고무하고 인도하는 중대한 가치가 있다.

프랑스에서 먼저 발발한 뒤 다른 서유럽 국가들로 확산된 1848년 혁명은 맑스와 엥겔스를 모국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라인강 유역의 프로이센에서, 그들은 쾰른(Cologne)에서 출간된 민주주의 신문인 ‘신라인신문’을 맡았다.

그 두 친구는 라인강 유역 프로이센에 있는 모든 혁명-민주주의적 열망의 심장이자 영혼이었다. 그들은 반동 세력에 맞서 자유와 인민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최후까지 싸웠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반동세력들이 우세를 차지하면서 신라인신문은 탄압을 당했다.

망명 중에 프러시아 시민권을 잃은 맑스는 추방되었다. 엥겔스는 무장 인민봉기에 참여하여 세 번의 전투에서 자유를 위해 싸웠으며, 반란군의 패배 후 스위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했다.

맑스도 런던에 정착했다. 엥겔스는 다시 직원이 되었고, 그 후 40년대에 일했던 맨체스터 상업 회사의 주주가 됐다. 1870년까지 그는 맨체스터에 살았고, 맑스는 런던에 살았지만, 그들의 활발한 교류는 여전했다. 그들은 거의 매일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서신을 통해 두 친구는 견해와 새로운 발견들을 교환했고 과학적인 사회주의 연구를 하는데 협력을 계속했다. 1870년 엥겔스는 런던으로 이주했고, 가장 열정적이었던 그들의 지적 탐구는 맑스가 죽은 188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결실로 맑스는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에 관한 가장 위대한 저작인 자본을, 엥겔스는 크고 작은 많은 저작들을 내놨다. 맑스는 자본주의 경제의 복잡한 현상을 분석하는 작업을 했다. 엥겔스는 종종 간단한 글들은 물론 보다 총체적인 과학적 문제와 유물론적 역사 개념의 정신과 맑스의 경제 이론에 있어서의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현상들을 다루었다.

엥겔스의 저작 중에서 우리가 언급해야할 것은 철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분야에서 아주 중대한 문제들의 분석인 반듀링론,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러시아 정부 외교정책에 관한 기사, 주택 문제에 관한 훌륭한 기사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경제 발전에 관한 두 개의 작지만 매우 가치 있는 기사가 있다.

맑스는 자본에 관한 방대한 저작을 완성하기 전에 사망했다. 그러나 초안은 이미 마쳤다. 친구의 사망 이후 엥겔스는 자본 2권과 3권을 준비하고 출간하는 부담스러운 과업을 떠맡았다. 엥겔스는 1885년 2권을, 1894년 3권을 출간했다.(엥겔스는 자본론 4권을 준비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 두 권은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 아들러(Adler)는 자본 2권과 제3권을 출간함으로써 엥겔스는 천재였던 그의 친구를 기리는 장엄한 기념비를 세웠는데, 의도치 않았지만 그 기념비에 지워지지 않게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실제로 자본의 이 두 권은 맑스와 엥겔스 두 사람의 저작이다. 고대전설에는 다양한 우정의 감동적인 사례들이 있다. 유럽 프롤레타리아는 그 과학이 인간의 우정에 관한 고대인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능가하는 두 명의 학자이자 투사가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엥겔스는 항상 – 그리고 전체적으로, 아주 정직하게 – 맑스를 자신 보다 높게 평가했다. 그는 옛 친구에게 “맑스 생전에 나는 제2 바이올린 연주자였다”고 썼다. 살아생전 맑스에 대한 그의 애정과 죽은 뒤의 경외심은 끝이 없었다. 이 준엄한 투사이자 진지한 사상가는 강렬한 인간애를 지니고 있었다.

1848-49년의 활동 이후, 망명생활을 하던 맑스와 엥겔스는 과학적 연구에만 활동을 국한하지 않았다. 1864년 맑스는 국제노동자협회를 설립하여 10년 동안 이 단체를 이끌었다. 엥겔스도 그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맑스의 사상에 따라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국제협회의 업무는 노동자 계급 운동의 전개에 있어서 엄청난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70년대 국제협회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맑스와 엥겔스의 역할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그들의 중요성은 운동 자체가 끊임없이 성장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커졌다.

맑스 사망 후에도 엥겔스는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고문이자 지도자로서 활동을 홀로 계속했다. 정부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빠르고 꾸준하게 성장한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처음 단계를 심사숙고해야만 하는 스페인, 루마니아, 러시아 같은 후진국 대표들은 모두 엥겔스에게 조언을 듣고 방향제시를 요청했다. 그들은 모두 노년의 엥겔스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에 의지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둘 다 러시아어를 알고 러시아 서적을 읽으며 이 나라에 대해 날카롭게 관심을 가졌다. 공감을 가지고 러시아 혁명을 지켜보았고 러시아 혁명가들과 연락을 유지했다. 두 사람 모두 민주주의자가 되고 나서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정치적 전제주의에 대한 증오로 생긴 민주적 감정은 그들에게서 강하게 발현됐다.

정치 독재와 경제적 억압 사이의 연관성에 관한 이론적인 이해, 그리고 그들의 풍부한 삶의 경험이 결합돼 생긴 정치적 감정은 맑스와 엥겔스를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강력한 짜르 정부에 대항한 소수의 러시아 혁명가들의 영웅적인 투쟁이 혁명가들의 마음에 가장 동정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허구적인 경제적 이익을 위해,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가장 즉각적이고 중대한 과제였던 정치적 자유의 획득을 외면하려는 경향에 대해 그들은 자연히 의심을 품었고 사회혁명의 대의를 직접 배신하는 것으로까지 간주하였다.

“노동자들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자신의 행동이어야 한다”고 맑스와 엥겔스는 끊임없이 가르쳤다. 그러나 경제적 해방을 위해 싸우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특정한 정치적 권리를 획득해야 한다. 더구나 맑스와 엥겔스는 러시아의 정치혁명이 서유럽 노동계급 운동에도 엄청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일반적으로 전제적인 러시아는 항상 유럽 반동의 보루였다. 1870년 전쟁의 결과 러시아가 누린 대단히 유리한 국제적 지위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오랫동안 알력을 조장했다. 물론 이는 반동 세력으로서 전제적인 러시아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킬 뿐이었다.

폴란드, 핀란드, 독일, 아르메니아나 다른 소국들을 억압하거나 프랑스와 독일을 끊임없이 싸움터로 전쟁터로 내몰 필요가 없는 러시아, 즉 자유로운 러시아만이 현대 유럽을 가능케 할 것이며, 전쟁의 부담을 없애고, 한시름 놓게 할 것이며, 유럽의 모든 반동적 요소를 약화시키고, 유럽의 노동자 세력도 강화시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엥겔스는 서구에서도 노동자 계급 운동의 진전을 위해 러시아에 정치적 자유가 확립되기를 열렬히 바랐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가들은 그들의 가장 훌륭한 벗을 잃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투사이자 스승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영원히 추모하자!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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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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