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고전읽기《국가와 혁명》(레닌) 제3장 1871년 파리코뮌의 경험-마르크스의 분석
발제문 작성: 김남기
교재 출판사: 논장, 돌베개, 새날, 아고라
2020년 8월 17일(월) 19시 30분
장소: 노정협 사무실(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93-45 4층)
문의: 010-3398-0248
제3장 국가와 혁명: 1871년 파리코뮌의 경험-마르크스의 분석
1. 코뮌 참가자들의 시도는 어떤 점에서 영웅적인가
파리코뮌 몇 달 전인 1870년 마르크스는 파리 노동자들에게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는 절망적일 정도로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1871년 봉기가 일어났을 때, 마르크스는 불길한 조짐에도 불구하고 매우 열광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환영했다. 이는 1905년 러시아 혁명에서 “우리는 무기를 잡지 말았어야 했다”와 같은 발언을 한 플레하노프하고는 차이가 있었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이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 혁명운동이 매우 중요한 역사적 시도이자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에서 일정한 진보이며, 수백의 강령과 논의보다 더 중요한 실천적 일보라고 보았다.
파리코뮌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 1872년 독일어 신판 마지막 서문에서 『공산당선언』의 강령이 “오늘날에는 부분적으로 낡은”것이 되었다고 언급한다. 또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기도 한다.
“특히 코뮌은 노동자계급이 기존의 국가기구를 단순히 장악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운영할 수 없다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71년 파리코뮌의 기본적이고 중요한 교훈을 『공산당선언』에 대한 본질적 수정에 포함시켰을 정도로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했다. 문제는 바로 수정의 본래적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기존의 국가기구’를 분쇄하고 파괴해야지 단순히 그것을 장악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관료와 군사기구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에 대해 수행할 과제가 무엇인가 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중요한 교훈이 요약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교훈이 카우츠키류의 지배적 ‘해석’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왜곡되었다고 레닌은 말한다.
마르크스는 ‘현실적 인민혁명’에 관해 언급하면서, 프티부르주아적 특수성을 조금도 망각하지 않은 채 1871년 당시 유럽 대륙의 대다수 나라들의 실제적 계급 역관계를 아주 엄밀하게 고려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국가기구 파괴가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의 이익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그들을 결합시키며, 더 나아가 그들에게 ‘기생충’을 제거하고 그것을 새로운 어떤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공동 과제를 제기한다고 주장했다.
2. 파괴된 국가기구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마르크스는 지배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조직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인가, 이 조직이 가장 완전하고 가장 철저한 “민주주의 쟁취”와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대중운동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이라는 책에서 “제국의 정반대되는 대립물은 코뮌이었다. 코뮌은 계급지배의 군주제적 형태뿐만 아니라 계급 자체까지 폐지해야만 하는 공화국의 특정한 형태였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특정한 형태’는 “상비군을 진압하고 그것을 무장한 인민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파리코뮌의 경우 파리의 여러 구에서 보통선거권을 통해 선출된 시의원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은 책임을 지고 있엇으며 언제라도 소환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의 대다수는 물론 노동자들이거나 노동자계급의 공인된 대표자들이었다. 따라서 코뮌은 분쇄된 국가기구를 완전한 민주주의로, 즉 상비군의 폐지와 모든 공직자의 완전한 선거제 및 소환제로 대체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반항을 억압하는 것은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코뮌에서 특히 필요한 일이다. 즉 코뮌이 패배했던 원인은 이를 단호하게 실행하지 못했던 데에 있다.
인민 자체의 다수가 자기들의 억압자를 억압한다면 “특수한 억압권력”은 더 필요하지 않고,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는 사멸하기 시작할 것이다. 특권을 가진 소수(특권적 관료와 상비군 장교단)의 특별한 기구들 대신에 다수 자신이 직접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전체 인민이 국가권력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많은 부분을 담당하면 할수록 이 권력에 대한 필요도 더욱 줄어들 것이다.
모든 공직자가 예외 없이 선거로 선출되고 어느 때나 소환 될 수 있다는 것, 그들의 보수를 보통의 노동자 임금 수준으로 낮추는 것 이러한 조치는 노동자의 이익과 농민 대다수의 이익에 완전히 일치하며, 동시에 이러한 조치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교량 역할을 한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것을 실현함으로써 동시에 국가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일보를 내딛어야 한다.
3. 의회제 지양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코뮌은 의회적 단체가 아니라 행정과 입법을 동시에 맡아 일하는 단체일 수밖에 없었다. 보통선거권은 3년 또는 6년에 한 번씩 지배계급의 어떤 성원들이 의회에서 인민을 대표하고 인민을 대표하고 인민을 짓누를 것인가를 결정하는 대신에, 마치 개인적 선거권이 고용주가 자기 사업에 필요한 노동자나 감독, 부기 계원 등을 선발하는 데 쓰이듯이 코뮌으로 조직된 인민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했다.”
의회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 비판은 그 당시 사회배외주의와 기회주의로 말미암아 마르크스주의의 ‘잊힌 어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의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모조리 ‘무정부주의’라며 비방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혁명적 변증법은 그저 플레하노프나, 카우츠키 등이 만들어낸 딸랑이 같은 장난감이 전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혁명적 정세가 명백히 현존하지 않을 때 부르주아 의회제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무정부주의자들과 가차없이 관계를 끊을 줄 알았고, 이와 동시에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입장에서 의회제를 비판할 줄도 알았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라는 관점에서 국가문제를 다룬다면, 의회제를 국가기구들 가운데 하나로 본다면, 의회제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의회제 없이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지점을 고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회제 자체가 해결점은 아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코뮌이 부르주아사회의 부패하고 오염된 의회제를, 의견과 토의의 자유를 기만의 구덩이에 빠뜨리지 않은 기관으로 대체한다고 봤다. 왜냐하면 코민 의원들은 스스로 일하고 자신들의 법률을 스스로 이행하며 실행의 결과를 스스로 검사하고 자신들을 선출한 사람들에게 직접 책임을 저야 하기 때문이다. 코뮌에선 대의기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특별한 조직으로서의 의회제, 입법 활동과 행정 활동을 분리시키는 것으로서의 의회제, 대의원들에게 특권적 지위를 주는 것으로서의 의회제, 대의원들에게 특관적 지위를 주는 것으로서의 의회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대의기관이 남는 것은 대의기관이 없는 민주주의란 생각할 수 없듯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전체 국민경제를 우편 사업 조직과 같이 조직하되, 무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제와 지도하에 있는 기술자, 감독, 부기 계원 및 모든 공무원이 ‘노동자 임금’ 이상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당면 목표고, 이것이 국가이며, 이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국가의 경제적 기초라고 레닌은 말한다. 따라서 레닌에 따르면 이것이 국가이며, 이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국가의 경제적 기초이며, 이것은 의회제를 폐지하고 대표기관을 보존하며 노동계급을 부르주아지에 의한 이 기관들의 매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4. 국민통일조직
현대(레닌이 책을 쓰던 당시)의 사회민주당 기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의 논이를 얼마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는가는 변절자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의 전제조건과 사회민주당의 임무』라는 책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베른슈타인은 ‘기생적 혹인 국가권력의 폐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프루동의 연방주의와 혼동하고 있다. 즉 기회주의자들은 여기서 마르크스가 중앙집권제에 반대하여 연방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르주아국가에 존재하는 낡은 국가기구의 파괴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아예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여기서 레닌은 “기회주의자는 사회주의혁명에 관해서는 생각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라고 표현한다.
기회주의자는 혁명적으로 생각하고 혁명에 관해 고찰하는 것을 망각하여, 마르크스를 무정부주의의 창시자인 푸루동과 혼동하여 ‘연방주의’를 마르크스에게 떠넘겨버렸다. 마르크스 “현대 국가기구의 파괴”를 주장하는 점에선 프루동과 일치하지만, 연방주의의 문제에서 프루동 및 바쿠닌과 갈라진다. 그 연방주의는 원칙적으로 무정부주의의 프티부르주아적 견해에서 발생하는데, 마르크스는 중앙집권주의자다. 레닌에 따르면 “만일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이 국가권력을 자기수중에 장악하여 완전히 자유롭게 자신을 코뮌으로 조직하고 모든 코뮌의 행동을 통일하여 자본에 타격을 주고 자본가들의 반항을 분쇄하고 철도, 공장, 토지 등등의 사유재산을 전 국민, 전 사회에 넘겨준다면” 이것이 바로 중앙집권제다. 그것도 프롤레타리아트적 중앙집권제다.
베른슈타인은 자발적 중앙집권제, 코민들의 자발적인 국민적 통일, 부르주아지의 지배와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파괴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적 코뮌들의 자발적 융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조자 하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의도적으로 “국민의 통일은 조직되도록 되어 있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부르주아적 군사적 관료적 중앙집권제를 의식적으로 민주주의적 프롤레타리아적 중앙집권제로 대치시키기 위해서다.
5. 기생적 국가의 절멸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새로운 역사적 창조들은 그것과 다소간 비슷해 보이는 사회 생활의 낡은 형태, 그것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형태들의 한 조각으로 오인되는 것이 일반적 운명이다. 그래서 현대 국가권력을 파괴한 이 새로운 코뮌도 중세 코뮌의 부활로, 몽테스키외와 지롱드파가 꿈꾸었던 것과 샅은 소국가들의 동맹으로, 중앙집권화를 반대하는 낡은 투쟁의 과장된 형태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코뮌 헌법은 사회를 먹이로 삼으면서 사회의 자유로운 운동을 저해하는 ‘국가’라는 기생적 혹이 지금까지 빨아먹어온 모든 힘을 사회라는 신체에 되돌려주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되었어도 프랑스의 재탄생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코뮌 헌법은 농촌 생산자들을 지방 주요 도시들의 정신적 지도하에 놓이게 만들었을 것이고, 도시 노동자들이 농촌 생산자들의 이익의 자연스런 대변자가 되도록 보장했을 것이다. 코뮌은 존재 자체가 지방자치를 자명한 것으로 수반하였다. 그러나 지방 자치는 이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국가권력에 대한 평형추가 더는 아니었다.”
이는 ‘기생적 혹’이었던 ‘국가권력의 절멸’, 국가권력의 ‘제거’, 국가권력의 ‘파괴’, ‘이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국가권력’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코뮌의 경험을 평가하고 분석하면서 국가와 관련해 사용한 표현들이다. 이것은 레닌이 국가와 혁명을 집필할 당시로부터 반세기쯤 쓰인 것이지만, 왜곡되지 않은 마르크스주의를 광범한 대중의 의식에 전달하려면 다시 꺼내야 한다고 레닌은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와 정치투쟁의 전체 역사에서 출발하여 국가는 소멸되어야 하며 그 소멸의 과도적 형태(국가로부터 비국가로의 이행)는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일 것이라고 결론지었는데, 미래의 정치형태를 찾는 일에 착수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역사에 대한 정확한 관찰에 국한해 이를 분석함으로써 1851년의 경험에서 얻은 결론, 즉 상황이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파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적 혁명운동이 발발하였을 때 마르크스는 이 운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또 그것의 단기성과 확연한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이 어떠한 형태를 찾아냈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코뮌은 사회주의혁명에 의하여 ‘마침내 발견된’,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수행할 수 있는 형태이다. 코뮌은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분쇄하려는 사회주의혁명의 첫 시도이며 분쇄된 것을 대체할 수 있고 또 반드시 대체하여야할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후의 서술에서 러시아의 1905년 혁명과 1917년 혁명이 다른 환경과 다른 조건에서 코뮌의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며 마르크스의 천재적인 역사적 분석을 확증하는 것임을 보이게 될 것이다.”라며 레닌은 결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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