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 이자훈! 비극의 현대사를 뚫고 온 저항의 거인들을 만나다!
역사는 사건으로 통칭된다. 역사의 사건 중 비극의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참을 수 없는 고통스런 경험의 총화다. 한국에서 이 비극의 역사는 반공주의로 무장한 백색테러 폭력 국가에 의한 간첩조작과 고문과 ‘빨갱이 사냥'(레드 헌트)이라는 명목 하에 자행된 야만적 살해로 수많은 진보적이고 양심적 인사들의 피와 눈물과 절규로 점철됐다.
지난 8월 8일 오후 3시에 우리는 여순항쟁유족회 사무실에서 살아 있는 두 역사를 만났다. 서승 선생과 이자훈 선생이다.
서승 선생은 1971년 4월 개헌으로 3선을 통해 영구집권을 획책하던 박정희 군사파쇼 권력이 대선 직전에 조작한 ‘재일교포학생침투간첩단사건’으로 동생 서준식 선생 등과 함께 불법 체포되어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다 분신자결을 시도했다. 서승 선생은 이 사건으로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을,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90년 2월 28일까지 19년 동안이나 강제 수감돼 있었다. 19년 동안 서승 선생은 고문과 각종 악랄한 탄압공작을 자행하는 사상전향제도에 맞서 투쟁했다.
이자훈 선생은 여순항쟁 피해자 유족으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귀국해 지금은 여순항쟁 서울유족회 회장으로 여순항쟁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위해 싸우고 있다.
서승 선생을 만나 화상 자국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본 순간 당시 보안사 대공분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밖에 기회는 없다. 또 다시 심문관이 들어오면 모든 게 그들의 시나리오대로 되고 말 것이다.’ 활활 타고 있는 난로가 눈에 들어왔다 … 자켓을 벗어 개어서 탁자에 놓았다. 기름통을 들어 올려 뚜껑을 열고 머리 위부터 기름을 들이부었다. 기름은 골고루 젖어들지 않고 조금 왼쪽으로 치우쳐 젖어들었다. 성냥이나 라이터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 있던 조서 한 장을 집어서 둘둘 가늘게 말아 난로 불을 붙였다. 불을 복무에 붙였지만 예상과 달리 불이 확 타오르지 않았다. 석유와 달리 경유는 불이 잘 안 붙는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경비병이 담배를 다 피우고 방에 들어온다면 더 무서운 고문이 시작될 것이다. 초초함 때문에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불을 왼손에 바꿔 쥐고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 끼워 불이 팔을 따라 타오르기를 기다렸다. 아래로 내린 종이의 불이 가늘게 타오르면서 손가락에서 팔꿈치까지 태우긴 했지만 여전히 불은 확 타오르지 않았다. 감질나게 느릿느릿 손가락에서 손으로 옮겨 붙기 시작했다. 팔을 감싼 얇은 스웨터가 타면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경비병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비명을 참았지만, 불꽃이 점점 거세지며 어깨와 얼굴로 퍼지자 더는 견디지 못해 ‘어, 어! 어억!’ 목구멍 사이로 비명이 터지면서 시멘트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죽으려고 했는데, 본능적으로 불을 끄려 하고 있었다.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지와 죽음에 대한 본능적 공포 사이에서 단발마적 갈등으로 바닥을 뒹굴었다.(서승, “옥중 19년”, 진실의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잔혹한 역사의 현장이다. 남산 안기부와 남영동 대공분실과 함께 서빙고 대공분실에서는 수많은 민주인사들과 노동자 인민들이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대공분실의 야수와 같은 고문 심문관 중에는 옛 남로당원 출신임을 자처하는 ‘어선생’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 자가 야수와 같은 고문심문관으로 변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한 마리 야수는 백색테러 국가폭력의 정점에 있던 박정희의 주구답게 그 삶도 박정희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서승 선생은 절대고독과 절대공포 앞에서 온 몸이 부서지는 극한의 고문을 당하면서도 “1960년의 ‘4.19 학생혁명’ 이후, 강물처럼 피를 흘리며 힘겹게 쌓아올라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학생운동이 타격을 입”게 되고, “이로써 민중의 군사독재 타도와 미래의 희망은 꺾이고”말 것이라는 절박감으로 “입이 찢어져도 ‘예, 그래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라며 분신자결을 시도했다. 야수들 앞에서 나약한 한 명의 인간이 가장 빛나는 인간정신으로 투혼을 발휘했던 것이다.
박정희 테러독재는 미군정의 주구였던 이승만 도당의 테러독재의 연장이었다. 4.3의 민중학살이 여순의 민중학살로, 이것이 또 이승만의 축출 이후 박정희 테러독재를 낳았다.
이자훈 : 큰 아버지가 메이지대를 나왔다. 당시에 메이지대가 사회주의 운동이 센 대학이었다. 귀국 후 큰 아버지는 몽양 여운형과 가까워 같이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하고, 인민위원회를 결성해 위원장도 했다. 그러다 여순 항쟁에 대한 정부 토벌 이후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부산으로 도피했다.
당시 여수 경찰서에 유근섭이라고 친일 경찰이 있었다. 이 사람이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잡으러 특파대를 보냈다. 1년 6개월여를 이 잡듯 뒤져서 큰아버지를 체포해 여수경찰서로 압송했다. 큰아버지가 체포되니 아버지도 여수 율촌면에 오셨다가 체포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니까 6월 25일 새벽에 지금 여수 엑스포 자리인 만성리에서 큰아버지를 총살하고 석유를 뿌려 시체를 태웠다. 아버지는 6월 30일 여수 앞바다 애기섬에서 총살당했다.
프레시안 : 혹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직접 보셨나.
이자훈 : 못 봤다.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날짜를 몰라서 제사도 못 지냈다. 기록이 없었다. 나는 건국대에서 한일회담 반대운동 등을 했지만 연좌제 때문에 1968년 일본으로 밀항해 오사카에서 살았다. 이후 1995년에 처음 귀국해 당시 형사로부터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증언을 들었다. 어떻게 돌아가셨냐고 물으니 6월 30일 저녁에 배에 싣고 가서 총살한 뒤 50kg 정도 돌을 매달아서 수장했다고 했다.”(최용락 기자, “국가폭력 단죄하지 않으면 문명 국가로 갈 수 없다”, [인터뷰] 이자훈 여순항쟁서울유족회 회장, 프레시안 2019.11.16.)
이자훈 선생이 8살이 되던 해인 1948년 10월 19일 여순항쟁이 일어났는데 이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항쟁에 가담한 군인 2천7백여 명과 여수 순천지역의 민간인 1만2천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자훈 선생은 당시 사건 이후에 아버지, 큰아버지와 사촌형들, 고모와 고모부 등 일가족 8명이 학살당하거나 투쟁하다 숨졌다. 특히 사촌형들 중 큰 형은 대전 형무소에서 둘째는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당하고 셋째는 지리산 빨치산 투쟁 와중에 모두 숨졌다.
제주 4.3당시의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쏘아 죽였던 삼진작전처럼, 여수를 포위한 5천여명의 국군은 ‘청야(淸野) 작전’으로 여수 시내 전역에 불을 질러 질식해 죽고 불타죽는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을 집단 처형했다. 당시 국군진압 책임자들은 백선엽, 백인엽, 김백일, 김종원 같은 야수들이었는데, 이들은 만주국 시절 항일 빨치산 토벌을 담당하며 생포한 빨치산 목을 치기도 했던 간도특설대원이거나 관동군 출신들이었다. 김종원은 일본군 출신으로 당시 여수 군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는 일본도로 사람들의 목을 치고 목을 치다 지치면 총으로 쏴죽이며 잔학한 학살을 주도했다.
백선엽은 지리산 빨치산도 토벌하며 학살만행을 자행한 야수 중 야수였다. 최근 역사적 단죄없이 천수를 다 누리고 사망한 백선엽이 한국전 영웅으로 추앙되며 국립묘지에 묻힌 것은 반역의 역사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반역의 역사에는 항상 미제국주의가 버티고 있었는데,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은 백선엽을 ‘영웅’이라고 찬사를 보냄으로써 자기들이 이 반공주의 야수를 길러낸 주인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시인했다. 미국육군방첩대(CIC) 한국현지사무소 책임자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은 표면상으로는 일개 대위 신분에 불과했지만 실제로는 한국군을 창설, 여순학살을 배후조종하고 박정희 쿠데타까지 승인하던 막후 실세였다. 하우스만이 경무대 이승만의 집무실 옆방에 거주하며 도청시설을 차려놓고 이승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통제했다고 한다.
일가 친척을 잃고 살아 남은 이자훈 선생은 빨갱이 연좌제로 탄압당하다가 1968년 20대 후반에 일본으로 밀항하여 1995년에야 한국 여권을 발급받고 귀국할 수 있었다. 이자훈 선생은 여순항쟁 진상규명 및 특별법 제정과 여수인민위원회의 등장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되살리기 위해 투쟁하고 계셨다. 이자훈 선생에게 여순항쟁은 인민위원회 같은 해방의 공간으로도 남아 있었다. 이자훈 선생은 이를 꼬뮌이라고 했다.
서승 선생은 이제 76세이고 이자훈 선생은 80세나 되셨다. 두 분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처참한 비극적 체험의 당사자들이시지만 여전히 한없는 굳건함으로 역사의 진보를 향해 분투하고 계셨다. 두 분이 체험한 과거사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역사다.
백색 테러 국가는 수많은 열사들이 뿌린 저항의 피와 노동자 민중의 저항으로 상당히 완화됐지만 여전히 과거사는 복권되지 못하고 있다. 4.3특별법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제주 4.3평화기념관에 있는 비석은 인민항쟁이라는 제 이름을 쓰지 못하고 백비로 남아 있다.
“4.3은 ‘내외 침공자에 대한 정의의 방어 항쟁’이다. 내(內)는 이승만, 외(外)는 미국이다”(한형진 기자, “90여 평생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 제주4.3 학살에 대한 복수”(제주의 소리, 2017.10.04.)라는 ‘화산도’의 저자 김석범 선생의 말씀처럼,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고 그 진실에 맞는 제 이름(정명)을 되찾아야 한다.
광주항쟁, 세월호 학살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분단은 지속되고 있고 분단을 빌미로 한 국가보안법이 서슬퍼렇게 살아 있다. 국정원에 의한 7, 80년대의 쁘락치 공작 간첩조작극이 자행되는가 하면 내란공작죄를 뒤집어쓰고 무고한 양심수가 석방되지 못하고 있다. 한미일 군사동맹 체제는 계속되고 있고 일본 제국주의는 미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전쟁하는 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서승 선생이 사무치게 경험했던 것처럼,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일본 내 차별 역시 계속되고 있다. 남북 분단과 정전체제는 계속되고 미제에 의해 평화협정은 가로막혀 있다. 북에 대한 고립말살책도 계속되고 있다. 사드배치와 주둔비 인상, 천문학적 미제 전쟁 무기 수입과 세균실험이 자행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요원하고 노동자들은 노동3권을 박탈당하고 만성적 실업에 시달리고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끔찍하게 죽임을 당하기조차 하고 있다.
현재 진행형인 반역의 역사를 청산하는 것은 비극의 현대사를 뚫고 전진해온 역사의 거인들의 삶을 통해 역사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저항의 거인들의 삶과 투쟁을 배우며 역사의 진보를 위해 투쟁해 나가야 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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