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4) 대극은 어떻게 상통하는가? – ‘극좌’ 국제코뮤니스트전망과 극우의 만남
필자는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2)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모두 진실인가?”(2019.02.22.)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조선일보, 조갑제, 극우 목사 김홍도, 심지어는 한국의 오세철 교수 같은 자칭 ‘좌익 공산주의자’들도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김정일”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1억 명이나 되는 인민들을 학살했다고 고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의 출처는 프랑스 극우진영이 발행한 “공산주의 흑서(Black Book of Communism)”였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나찌가 학살한 2,500만의 4배나 되는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오세철 교수가 속해 있는 <국제코뮤니스트전망>에서 다음과 같은 극렬한 성명을 냈다.
한국당의 5.18 망언과 스탈린주의자의 반공주의 망언이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맑스와 레닌은 단 한 번도 주관적 ㅇㅇ주의자를 자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운동이 유일신을 강요하는 종교로 변질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
스탈린주의자들의 황당무계한 음모론과 맑스레닌주의 참칭 만행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만큼 논쟁의 가치도 없습니다만, 여전히 이들을 용인하거나 함께 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반혁명 세력의 망언에 대한 경고”, 2월 24일)
필자는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있는 단체에서 보이는 이러한 극단적 반응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경악스럽게도 ‘진보적’인 오세철 교수가 프랑스 극우 집단들의 흑색선전을 인용하여 수행한 반공주의 악선전을 있는 그대로 비판한 것이 어떻게 한국당의 5.18망언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 되는가?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은 그에 대한 최소한의 논리적 근거라도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주지하듯, 자유한국당 인사들의 5.18망언은 대표적인 극우파쇼 인사 지만원의 “5·18은 북한군 600명 소행”이라는 흑색선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 터무니없는 역사왜곡과 망언의 기초가 한국사회의 극렬한 반공반북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학살자 전두환의 후예인 자유한국당과 똑같은 프랑스 극우집단들의 흑색선전을 아무런 비판적 검토도 없이 그대로 인용하여 반공주의를 유포해온 오세철 교수와 그것을 옹호해온 정치집단들이 도대체 누구를 향하여 “망언” 운운하는가?
상식적인 수준의 반론이나 반비판이라면 “오세철 교수는 그러한 주장을 한 적이 없다”라든가, “오세철 교수의 주장을 왜곡했다”라는 것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이 ‘진보성’을 떠나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집단이라면 “황당무계한 음모론”이라고 필자를 비난하기에 앞서 그 근거를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만큼 논쟁의 가치도 없습니다”라고 자기변론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대신에 “여전히 이들을 용인하거나 함께 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변죽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는 “공공연한 스탈린주의자를 집행부에 선임한 이유를 밝히고, 본인들도 스탈린주의자인지, 스탈린주의를 용인하는지 밝혀야 할 것입니다”라며 다른 단체에 대해 중세식 ‘마녀사냥’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노동자 교육을 담당하는 여러 단위도 그들이 반동적, 반혁명적 가짜 사회주의, 가짜 노동해방 사상을 맑스 레닌주의를 참칭해 퍼트리는 현실을 피교육생들에게 객관적으로 알릴 조건을 만들지 않는다면, 스탈린주의자들의 지적 능력을 이용하는 것을 재고해야 합니다”라며 파쇼적 요구를 하고 있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이라는 거창한 간판에 걸맞게 역사적, 논리적, 사상적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할 텐데, 그 대신에 저열한 비방과 악선전으로 일관하고 있다. 레닌이 일찍이 ‘좌익공산주의자’들을 “좌익 소아병”이라고 비난한 것이 타당함을 이번에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오세철 교수는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았노라고 입증해야 할 권리가 있는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이 그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니 부득불 필자라도 전거(典據)를 들어 그것을 입증하도록 하겠다. 오세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연재3)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어떻게 세계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반혁명인 스탈린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는가를 분석하는 데 있다. 이를 나는 「붉은 파시즘」으로 부르기로 한다. <연재4>는 마오주의를, <연재5>는 제3세계 민중주의를, <연재5>는 김일성주의를 다루고자 한다.(오세철, [연재 3] “소련에서의 계급의식과 붉은 파시즘”,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 ‘혁명’, 2011년 12월 창간준비 4호)
“적색 파시즘”론은 앞서 필자가 주장했듯, 파시즘에 맞서 싸우고 승리한 쏘련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을 “전체주의”로 규정하여 제국주의 진영이 자행한 전쟁과 살육, 그 야만의 배후에 자본주의 독점자본이 있다는 것을 은폐하고 그것을 공산주의 진영에 전가하려는 의도로 고안한 개념이다. 그런데 오세철 교수는 제국주의 진영의 “적색 파시즘”론을 그대로 수용하여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고 있는 것이다. 오세철 교수의 <연재> 계획을 볼 때, 그 비방은 쏘련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과 그 혁명 지도자들,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의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해방 투쟁 전반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세철 교수는 ‘붉은 파시즘’론을 입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혁명과 혁명 후 사회 건설의 주체로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 대상화, 그리고 그들의 소외를 조금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기로 하자. 이는 적색 테러와 관련된 문제이다. 백색 테러를 죄악시하면서 적색 테러는 정당화되는가? 그것은 부르주아지나 반혁명 세력에 한정된 것인가, 노동계급에게도 해당되는 것인가? 이 문제 역시 볼셰비즘과 레닌주의와 분리될 수 있는가? 왜 스탈린주의만 문제되는가? 소련 붕괴 이후 비공개 문서고가 열리면서 수많은 문건들이 연구 자료가 되고 그것에 근거한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그 중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책이 『공산주의 흑서: 범죄, 테러, 억압』(1999년)이다.(같은 글)
오세철 교수는 이 글의 12)에서 “Stephane Courtois, Nicolas Werth et al., (translated by J. Murphy and M. Kramer)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 Terr, Repression, Harvard Univ, Press, 1999, 858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은 소련, 유럽, 아시아, 제3세계에서의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들”에서의 범죄, 테러, 억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며 출처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서론에서 이 책은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사망 인원을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소련(2천만), 중국(6천5백만), 베트남(100만), 북한(200만), 동유럽(110만), 라틴아메리카(150만), 아프리카(170만), 아프가니스탄(150만) 등이다.(같은 글)
오세철 교수는 주 13)에서 “윗 책, 9-10쪽”이라고 출처를 밝히고 있다. 오세철 교수가 인용한 근거에 따르면, 쏘련, 중국, 베트남, 북한, 동유럽,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에서만 총 93,800,000이 사망했다. 물론 “사망”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이 사용됐지만, 이 책이 공산주의 진영에서의 “범죄, 테러, 억압”의 결과 벌어진 사망자수이니 만큼 1억에 가까운 죽음이 발생하고 그밖에 예로든 죽음까지 더하면 1억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범죄, 테러, 억압”으로 사망하게 됐다는 것이다.
참으로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공산주의 진영의 ‘잔혹성’에 치를 떨 수밖에 없을 정도다. 그런데 진보적인 정치적 입장을 떠나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 엄청난 사망자 수가 과연 맞는 주장인지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시 쏘련과 중국의 인구 구성을 볼 때도 사망자 수에 대한 우익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다.
또한 베트남에서 100만 명과 ‘북한’에서 200만 인민을 언제, 어떻게, 어떠한 이유로 학살했다는 것인가? “북한” 200만 학살설은 반대로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도당에 의해 100만의 민중이 무참하게 학살당한 참극을 은폐하고 반공주의적으로 그 학살극을 전가하려는 저의에 불과한 것이다.
오래된 반공주의 전설, “공산주의 흑서”에서 말하는 킬링 필드의 진실
오세철 교수가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흑서에서 인용하고 있고, 킬링 필드(The Killing Fields) 같은 영화로 만들어져 오랫동안 반공주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폴 포트 정권하의 캄보디아 200만명” 학살의 진실은 무엇인가?
영화 <킬링필드>엔 꿍꿍이가 있다. … “영화가 지닌 창작성을 인정하더라도 ‘실화’로 강조한 다음에는 역사를 왜곡할 수 없다. 특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은 ‘선전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크고, 그렇게 되면 영화는 이미 음모가 되고 만다 … ‘킬링필드’든 무엇이든 학살을 이야기할라치면 적어도 아래와 같은 세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학살자가 누구였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는가” “왜 학살을 했는가” 캄보디아에서도 아메리카에서도 또 한국에서도 ‘킬링필드’ 전설에 따르면 대답은 간단하다.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주.” “200만명.” “공산주의 체제 건설한답시고.” 이렇듯 아무도 의심하는 이 없이 모든 책임을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운 채 역사가 돼온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놓고 1997년부터 국제사회는 학살범을 처단하겠다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아메리카 정부가 쥐고 흔드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 사이에 승강이만 벌였지 정작 재판도 한번 열어보지 못한 채 5년 가까운 세월만 흘려보냈다 …
진 라코처가 쓴 <이어 제로>(Year Zero, cited Pol Pot official)가 있다. 크메르 루주가 200만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한 이 책은 아메리카에게 ‘성경’ 같은 책이었다. 그런데 이 작자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스스로 그 수를 조작한 것이라 해명하는 촌극을 벌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그 책은 크메르 루주가 200만명을 죽였다는 전설, 그 공식적인 자료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100만명이든 200만명이든 학살 희생자 수를 따지려면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폭격해서 죽인 60만~80만명에 이르는 양민들을 흔히 알고 있는 킬링필드 전설에서 분리시켜야만 온전한 역사가 된다.(정문태 기자, 킬링필드,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한겨레, 2002년 11월 21일)
이 글에서 폭로하고 있는 것처럼, 크메르 루즈 집권기에 벌어진 10만 처형은 “아메리카 괴뢰정부 론 놀에 봉사한 이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역사의 비극이다. 이들 상당수는 미국의 괴뢰 정부 당시 폭압과 민중학살에 가담했던 자들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 미국의 봉쇄로 인해 기아와 질병 사망자가 70만~80만 명을 웃돈다. 그리고 나머지 사망자들은 히로시마 핵폭탄 25배를 웃도는 폭탄을 투하해 캄보디아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린 미제가 자행한 대량 학살이다. 그런데도 미제를 포함한 제국주의 진영은 언제나 그렇듯 역사적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공산주의의 대량학살이라는 새빨간 거짓말로 반공주의 혐오감을 조장했다. 이러한 반공주의 선전은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과 ‘진보진영’을 구성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벗들’에게도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국제적 반공주의 메커니즘과 그에 대한 ‘급진’ 인사의 동조
이로써 오세철 교수가 프랑스 극우들의 출판물을 전거로 공산주의 진영에서 1억 명이나 되는 인민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는 필자의 주장이 “망언”도 아니고 정확한 출처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제 “조선일보, 조갑제, 극우 목사 김홍도” 등 극우파쇼들이 오세철 교수와 같은 주장을 했는지 밝힐 차례다.
스탈린이 1928년부터 추진한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10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굶어 죽거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죽었다. 거대한 사회경제적 실험의 장(場)에서 희생된 것이다 … 인류가 자신에게 ‘실험’한 결과는 참혹했다. 프랑스국립학술연구센터(CNRS)의 스테판 쿠르투아 등이 1997년 펴낸 《공산주의흑서(共産主義黑書·Le livre noir de communisme)》에 의하면, 볼셰비키 혁명 이후 공산주의의 폭력이나 정책 실패로 인한 기아 등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1억명에 달한다고 한다. 구(舊)소련 2000만명, 마오쩌둥(毛澤東) 치하의 중국 6500만명, 베트남 100만명, 폴 포트 정권하의 캄보디아 200만명, 동구(東歐) 공산정권하에서 100만명, 아프리카에서 1500만명, 그리고 북한에서 200만명…. 북한에서의 희생자 200만명 속에는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아사(餓死)한 300만명은 포함되지 않았다.(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좌파의 본모습, 시간이 보여준다 〈1〉 러시아 혁명 100주년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로 인한 희생자는 1억명(《공산주의 흑서(黑書)》, 2017.12.04.)
리굴로 씨는 프랑스 지식인들이 함께 쓴 ‘공산주의 흑서(黑書)’ 중 북한 부분을 쓴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고발》을 소련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群島)》에 비교하면서 나에게 이렇게 충고하였다.
“반공(反共) 인권운동은 반드시 문학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고발》이 그런 힘을 갖고 있습니다.”(趙甲濟의 시각 세계가 주목하는 ‘북한의 솔제니친’ 반디의 《고발》, 월간 조선 2016년 4월 433호)
김홍도 목사는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은 붉은 용 사상이고 마귀의 사상이며, 그것을 따르는 자들은 거짓말쟁이요 살인자들”이라며 “좌파들은 6.25가 북침이라고 거짓말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가짜 교회를 만들어 외화벌이를 위해 장식한다. 모택동은 6400만명, 스탈린은 4500만명, 히틀러는 유대인만 600만명을 죽였다”고 했다.(송경호 기자, 김홍도 목사 “성경에도 좌파 있다”, 크리스천투데이, 2008.05.29.)
실제 2005년 미국 대통령이었던 부시는 탈북자 출신 조선일보 기자인 강철환이 쓴 반공주의 서적인 “‘평양의 어항’(Aquariums of Pyongyang) ‘북한 강제수용소에서 보낸 10년’”이라는 책을 읽고 그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또한 강철환의 책을 피에르 리굴로가 접하고 한국을 방문하여 반북활동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처럼 솔제니친, 강철환 같은 반쏘, 반북 망명자이나 극우 역사가들의 황당한 주장을 극우들이 출판하고 제국주의 진영에서 ‘인권과 인도주의’를 명분으로 반공주의 선전 소재로 활용하여 정권교체(레짐 체인지)를 시도하는 국제적 반공주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CIA와 국정원도 깊게 연관이 되어 있다.
보라! 충격적이지 않은가? 무엇이 충격적인가?
1억명 사망이라는 반공주의 프로파간다도 놀랍지만, ‘진보’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고, 심지어 ‘코뮤니스트’라고 자칭하는 인물과 그 단체가 제국주의와 극우들의 주장과 똑같은 주장을 하며 반공주의 프로파간다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랍지 않은가?
‘극좌’와 극우는 대극이지만, 그 대극은 반공주의로 상통하여 하나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맑스는 “가장 심오하면서도 열성적으로 인류의 운동을 지배하는 제원칙을 연구하는 사색가는, 양극단의 접근이라는 법칙을 자연의 신비 중의 하나로서 버릇처럼 찬양하곤 한다. 그가 보기에 ‘양극단은 서로 만난다’라는 평범한 속담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 중요하고도 유력한 진리이다”(“중국에서의 혁명과 유렵에서의 혁명”)라고 주장했는데, 맑스가 인용한 속담처럼, 정치의 영역에서도 ‘극좌’ 코뮤니스트와 ‘극우’ 뉴라이트 양극단이 서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이 적대하는 대상은 다른가?
필자가 이미 한 차례 비판한 바가 있는, <노동자연대> 김영익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의 스탈린주의 비판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스탈린주의 비판은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비판의 방향도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자본주의 이윤 체제를, 후자는 진정한 노동자 권력의 수립을 대안으로 삼는다. 전자는 오른쪽으로부터, 후자는 왼쪽으로부터 비판한다.(김영익,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제국주의의 벗”이라고?, 노동자연대 277호, 2019-02-27)
트로츠키주의와 ‘좌익 공산주의’ 진영은 서로 상대방을 극렬 비난하는 사이다. 그럼에도 반쏘 반공 혐오에서는 일치한다. 그런데 저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스탈린주의 비판”과 자신들의 ‘스탈린주의’ 비판은 그 내용이나 방향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묻겠다.
2차 대전 전후의 미제국주의를 비롯한 제국주의 진영의 냉전이 반쏘비에트로서의 반공이 아니면 대체 무슨 반공인가?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반공주의 보루로 역할을 해온 한국에서의 반공은 과연 쏘련과 중국과 조선에 대한 반대로서의 반공이 아니었던가? 한미일 군사동맹의 반공은 도대체 누구를 적대시하고 격퇴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조중동,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한 반공주의자들이 항상 적대시하고 비방하는 체제는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조선’ 아니었는가? 국가보안법상 ‘이적’(적을 이롭게 한다)이라며 적대시 하는 대상 역시 ‘조선’이 아니었는가?
결국 제국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이 적대하고 있는 현실적인 대상들, 즉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쏘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현존하고 있는 조선과 쿠바의 사회주의와 현실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공히 반대하고 심지어 타도해야 한다는 대상 역시 하나로 일치한다.
제국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의 맑스주의 같은 진보적 사상에 대한 적대감도 사실은 현실에 존재하는 진보적 투쟁이나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영향을 미친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현실과 괴리된 아카데믹한 담론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체제에서도 대개 관용을 베푼다.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맑스주의자임을 천명하고 있고 자신들의 주장이 혁명적 목적 하에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주관적인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적대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귀결되며, 누구의 이해와 일치하며, 결국 누구에게 복무하느냐인 것이다.
저들 자칭 ‘급진주의자들’은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고수하고, 인류의 진보적 역사를 옹호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현실을 진보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사상과 투쟁 일체에 대해 ‘스탈린주의’라며 경멸조로 부른다. 저들은 실제 쏘련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중국혁명, 쿠바와 조선, 베트남을 비롯해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의 민족해방 투쟁 등 진보적 인류의 모든 투쟁의 역사를 ‘스탈린주의’라고 규정하여 극렬한 적개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 <노동자 연대> 기자 김인식의 필자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는 따로 비판하겠지만 그 적개심의 근본원리도 이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공히 ‘제국주의의 벗들’로서 진보적으로 가장한 제국주의의 동조자들인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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