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3)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제국주의의 벗”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 <노동자연대>의 경우

2019년 3월 14일

첫 번째, 두 번째 글에 대해 여러 반응이 있었지만 이번에 다룰 비판의 새로운 특성은 개인이 아닌 두 ‘급진’ 정치세력들의 평가라는 점과 그 반응이 제법 격렬하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한국의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노동자연대>이고 두 번째는 ‘좌익공산주의’ 경향인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이다.

이들이 한국사회에서 일정한 정치적 세력을 형성(특히 <노동자연대>)하고 있고 경향적으로 비교적 넓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비판에 대해서는 성실하고 책임 있는 답변이 필요하다. 이미 연재를 시작하며 예고했듯,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좌익 공산주의자’ 등 반쏘반공주의자들과의 이데올로기 투쟁은 필수적이며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들 정치세력들의 본질적인 정치적 특성은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그리고 현실에 남아 있는 조선과 쿠바 같은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극렬한 적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의 극렬 반쏘반공주의는 매번 제국주의의 정치적 이해에 결과적으로 동조하는 것으로 끝난다.

앞으로 체계적인 비판이 있겠지만 이번에는 <노동자연대>의 비판에 한정해서 반비판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격한 비판에 대해서도 반비판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이들의 반쏘반북이 어떻게 현실의 반공주의 그 자체이고 서방 제국주의를 이롭게 하는지 규명할 것이다.(이 글의 성격상 인용문이 많은 것에 대해 독자들께 양해를 구한다.)

어떠한 정치적 태도를 취했는가가 문제의 본질이다

<노동자연대>는 과거 국제사회주의자들(IS) 시절 동유럽과 쏘련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권의 해체에 대해 쌍수를 들고 환영한 정치집단이었다. 이들은 조선과 쿠바 역시 타도해야 하는 반동 국가로 간주하고 있다.

<노동자연대>에서는 “CIA는 트로츠키주의자들, 신좌파들 등 반쏘 반공주의자들의 쏘련이나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적극 활용했다. 이들은 반쏘비에트, 반스탈린을 내세우면서도 여전히 ‘급진적’이거나 ‘진보적’ 수사를 사용하거나 그 신념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CIA로서는 이들을 매수하는 것이 가장 용이했고 또 반공주의적 사상의 파급력도 컸기 때문이다”라는 필자의 첫 번째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1879~1940)가 서방 제국주의의 벗(또는 첩자)이라는 주장은 스탈린의 반(反)트로츠키 캠페인에서 늘 등장한, 역사가 오래된 비방·중상이다.

백철현도 이런 스탈린주의 고유의 비방 전통에 따라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세력들은 모두 한통속이고 결국 서방 제국주의를 이롭게 한다고 본다.”(김영익,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제국주의의 벗’이라고?”, 노동자연대, 277호, 2019-02-27)

트로츠키가 서방 제국주의의 첩자라는 주장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는 주장이다. 그런데 필자는 현재로서는 그러한 논란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트로츠키가 표방하는 정치적 내용의 본질과 그 본질이 어떻게 제국주의의 정치적 이해에 복무하게 되었는지가 관심일 뿐이다. 필자는 제국주의 첩보기관들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나 신좌파들의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적극 활용”하여 이들 일부를 매수하여 제국주의 반공 프로파간다에 활용한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그러한 사례들은 충분한 사례를 들어 검토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반쏘 반공주의적 태도가 제국주의의 이해와 일치하는 정치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주장이 “늘 등장”하고, “역사가 오래”되었다면 필시 그 근거들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 주장들이 “비방·중상”인지, 진실인지는 앞으로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반자본주의를 내걸고 투쟁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반제국주의 투쟁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제국주의의 벗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가?’

<노동자연대>는 실제로 그렇게 항변한다.

“트로츠키 자신은 물론이고 그 지지자들도 오랫동안 반제국주의 입장을 견지해 왔다. 2000년대 들어서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반대해 일어난 대중적 반전 운동이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적지 않은 나라에서 중심적 구실을 했던 것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다…. 정대연 씨 등과 우리가 이라크전쟁 반대 운동을 한창 하고 있었을 때, 백철현 씨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노동자연대, 같은 기사)

우리가 이라크전쟁 반대 투쟁을 한창 하고 있었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라고 <노동자연대>는 묻는다. 이에 대해 필자는 “무엇인가 하고 있었겠지!, 그럼 놀고 있었겠나?”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연대> 식 우문(愚問)에 걸맞은 우답(愚答)이다. 따라서 실제 저 질문이 우문이 되지 않으려면 당신은 현실에서 제국주의에 대해 어떠한 정치적 태도를 취했고 제국주의나 부르주아의 반공 프로파간다에 맞서 어떻게 싸워 왔는가? 이런 질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볼 때 그 정치적 태도는 과연 올바른가? 실천을 통해 진리를 입증 받았는지 살펴보는 것이어야 한다.

필자는 <노동자연대>를 비롯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반세계화 투쟁이나 이라크 전쟁 반대 투쟁에 적극 참여한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트로츠키주의자들과의 정치적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투쟁에 있어서의 통일전선을 적극 지지한다. 필자는 트로츠키주의자들 개개인들이 가진 반자본주의나 반제국주의를 비롯한 진보적 신념의 치열함이나 성실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가하는 비판은 이들이 가진 주관적 신념과 이들이 실제로 전개하는 한 편에서의 반자본주의나 반제국주의 투쟁 그 자체가 아니다. 이들의 주관적 신념이나 의도, 일부 진보적 투쟁들이 이들이 가진 보다 본질적인 정치적 특성으로 인해 결국은, 종국적으로는 제국주의 이해에 복무하게 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노동자연대>의 반공주의 소(小)역사

필자는 노동자연대가 쏘련 및 현실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간주하고 타도해야 하는 체제라고 주장할 때 이들과 확연히 다른 정치적 입장을 취했다.

<노동자연대>가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 해체를 환영하고 현실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규정하고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태도를 비난하며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했다. 물론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는 진공 속에서 이뤄진 체제가 아니라 제국주의 포위 속에서 전인미답의 사회주의 건설을 했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또한 많은 오류를 범했으며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는 진보적 인류가 피땀으로 일군 최상의 진보적인 체제였고, 지금도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유럽 및 쏘련 사회주의의 해체는 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압력에 굴복한 결과였으며 내적으로는 사회주의 원칙을 포기하고 수정주의에 경도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노동자연대>(구 다함께)가 “소련이 세운 북한 체제 역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련 역시 노동자자주관리 운동을 부정했고, 인민위원회는 자치적 성격을 잃은 채 소련 정책의 전달벨트로 전락했다. 소련의 지령에 따라 진행된 ‘인민민주주의 혁명’ 결과 북한에서는 국가가 자본축적을 관장하는 체제가 성립됐다.”(한규한, 「한국전쟁 60주년 ①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레프트 21 33호〉)고 역사를 난폭하게 왜곡하고 “역사가 오래된 비방·중상”을 일삼을 때, 필자(혹은 필자가 속한 단체)는 이렇게 그것을 비판했다.

“국가자본주의자들은 쏘련이 인민위원회의 자주적인 활동을 보장한 것은 이북에 쏘련을 이식한 스탈린주의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북에서의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조치들을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것도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종파주의적인 모략이지만 남에서의 격렬한 대중봉기에 비해 북에서 이러한 조치가 인민들의 열광적인 지지 아래 추진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설사 이식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식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해방된 조선 인민들의 요구와 완전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한국전쟁 60주년, 다함께 국가자본주의의 역사왜곡과 파산, 노동자정치신문 64호, 2010-06-30)

<노동자연대>는 북의 권력이 들어서기까지 만주와 백두산 일대에서 전개한 고난에 찬 항일투쟁의 역사와 그들이 중심이 되어 해방 이후 인민권력을 만들어갔던 역사를 모조리 지워버렸다. 해방 이후 민중의 자주적 열망, 주체적 투쟁도 전면 부정하고 오직 “소련 정책의 전달벨트”로 수동적으로 전락했다고 역사를 전면 왜곡한다. 상투적인 반공주의 역사관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노동자연대는 “핵과 미사일은 결코 제국주의에 맞서거나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북한 지배자들의 행태는 북한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또 다른 착취·억압 체제임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다,”(김영익, “북한 지배자들의 호전적 대응이 보여 주는 것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본질과 모순”, 레프트21, 102호, 2013-04-13)라며 북을 맹비난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북한의 로켓발사를 지지하지 않는다. 인공위성 발사체와 미사일 발사체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거의 없다.”(성명, “북한 로켓 발사를 핑계로 한 사드 배치는 한반도를 더 위험하게 만들 것이다.”, 노동자연대, 2016년 2월 7일)

이에 대해서 우리는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현실에서 양비론과 중립론은 북을 압살하려고 하는 미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할 수밖에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해 왔다. 남북, 조미관계의 전환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노동자연대>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노동자연대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자위권의 일환으로 만든 ‘핵과 미사일’을 근거로 ‘북한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또 다른 착취·억압 체제임’을 발견해내는 신묘한 탐구정신을 선보여 왔다. 노동자연대는 ‘국제적 연대’라는 정신적 승리법으로 제국주의 핵전략 자산에 대응할 수 있다며 북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국제주의’ 신세계를 펼쳐왔다.”(“남북, 조미 관계의 급변속에 드러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좌익’적 빈말과 우익적 일탈.”, 노동자정치신문, 2018년 7월 1일)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종북몰이 마녀사냥이 극렬하게 펼쳐지고 있을 때 <다함께>(현 <노동자연대>)가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 돌아보자!

“5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회의석상의 폭력 난동 사태는 아연실색과 비애만을 안겨 준다. 당권파의 분파주의와 종파주의가 도를 넘은 소치다. 물론 모든 분파주의자와 종파주의자가 같은 진보 운동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진 않는다. 12일의 행위는 막장 양아치나 할 짓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행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짓이다.”

“진보진영 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개무시는 스탈린주의의 특징이다.”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자행된 선거 부정도 목적은 언제나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스탈린주의의 실용주의적 도덕관과 관계있다.”([성명서]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파행을 보며”, 다함께, 2012.05.14.)

당시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를 빌미로 언론에서는 한층 더 극렬하게 종북몰이 악선전을 자행하고 있었고, 권력은 통합진보당에 대한 당파괴 공작에 착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노동자연대>는 ‘폭력’ 사태라는 현상만 보고 “막장 양아치”, “개무시” 등 막장의 언어를 동원하여 맹렬 비난하고 있다. 심지어 <다함께>는 이를 통해 “스탈린주의의 특징”이니 “스탈린주의의 실용주의적 도덕관”까지 운운하며 특유의 종파주의적 태도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반면 이 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애초 이 논란은 통합진보당 내부의 ‘선거부정’ 여부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선거부정’이라는 애초의 논란은 이제 설 자리도 없다. 따라서 이 거대한 반동적 흐름을 보면서 우리는 이 사건이 애초의 쟁점을 훨씬 뛰어 넘어 정권과 공안기구, 부르주아 언론이 치밀하게 기조를 맞춰 만들어내는 정치공작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변질됐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매카시즘 공작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선거부정’ 옹호세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뿐만 아니라 ‘경기동부’ 지지 세력이 되고 ‘간첩비호 세력’으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자기검열이 필요하고 정치적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거대한 시류(時流), 아니 반동적인 역류(逆流)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우리 사회의 야만적 퇴보에 맞서 싸우는 진보세력의 긴급한 임무다. 강령이나 정치적 목표의 차이를 넘어서 ‘진보세력’이라고 자처한다면 국가보안법이라는 공안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개인들, 특정 세력들을 이 측면에서는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임무가 되어야 한다. ‘진보진영’ 앞에 공통으로 제기되는 이 급박한 정세적 과제를 종파주의적으로 부정하는 ‘진보세력’은 더 이상 진보세력이라고 할 수 없다.”(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또 다른 시각, 노동자정치신문 85호(2012년 5월호-증보판)

이 사태 이후에 <다함께>는 통합진보당에서 분리하여 나왔다. 주지하듯, 이러한 통합진보당에 대한 종북몰이 공세는 박근혜 파쇼 권력의 프락치를 동원한 알오(RO) 조작사건과 내란죄 기소와 통합진보당 해체로까지 나아갔다. 과연 누가 그 당시에 올바른 정치적 태도를 취했는가?

지난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벌어졌던 ‘화학무기 테러사건’에 대해 취했던 <노동자연대>의 황당한 태도에 대해서도 한 마디 안할 수 없다. 필자를 비판하고 있는 김영익 씨의 글이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권력을 물려받은 2010-11년 김정남은 주로 일본 언론과 접촉해 3대 세습을 공개 비판하고 북한의 개혁·개방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에선가 그는 동생의 권력승계를 못마땅해 했고 이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 이때 김정은한테는 이복형 김정남이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좀먹는 골칫거리였을 것이다.”(김영익, “김정남 피살로 드러난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성”, <노동자연대>, 197호, 2017-02-17)

“‘비운의 북한 황태자’ 김정남이 이복동생의 치명적 경계심으로 마침내 비명에 갔다.”(최일붕, “스탈린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자연대> 198호, 2017-02-24)

<조선일보인>가? <노동자연대>인가? 당시 조선일보 기사를 찾아보라.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조선일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같은 수준의 저열한 인식이다. 다만 여기에서도 ‘스탈린주의’ 운운하는 극렬한 종파주의가 조선일보와 변별력을 가지게 할 뿐이다.

그런데 국내외적 언론이 야단법석을 떨었던 이 어설픈 ‘테러사건’은 어떻게 종료되었는가? ‘김정남’ 살해혐의를 받아온 인도네시아 국적 여성은 지난 3월 11일 말레이시아 검찰의 살인 혐의 기소 취하로 전격 석방됐다. 샤알람 고등법원의 별도 무죄 선고도 없이 석방됐다. 베트남 여성도 조만간 석방될 예정이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태산이 떠나갈 듯 요동쳤으나 뛰어나온 것은 쥐 한 마리뿐이라는 뜻으로, 예고는 거창하게 했으나 결과가 보잘것없음을 이르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대중들의 뇌리 속에 남은 것이 있다. 이 사건을 통해 한층 더 강화되었을 것이 분명한 반북감정이다. <노동자연대>는 이처럼 부르주아와 제국주의자들의 반공 프로파간다에 동조했다. 쏘련 및 현실 사회주의가 ‘국가자본주의’라는 이론적 틀로 꿰어 맞추다보니 저런 황당한 ‘정치분석’이 나왔던 것이다.

이래도 과연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제국주의의 벗’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필자는 주관적으로 성실하고 열성적인 분들이 트로츠키주의 특유의 반쏘반공주의 정치적 태도로 말미암아 맹목과 편견, 극단적 종파주의에 사로잡히고 종국에는 제국주의 진영의 반공주의 프로파간다에 동조하는 희비극을 청산하기를 진심으로 열망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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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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