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고 앉아 있네” 국가보안법 체제 하에서 역사의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오늘은 겨울비가 내리는데도 지난 번에 이어 민중민중당 인권위원회 분들과 기독교대책위원회에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국가보안법 간첩조작으로 9년 6월의 중형을 살고 있는 석권호의 삶과 투쟁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석달윤 선생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석달윤 선생은 1980년 8월 21일 전두환 신군부의 중앙정보부가 47일 간의 모진 고문으로 조작한 이른바 진도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이후 18년 형을 살았다. 아들 석권호는 아버지를 구명하기 위해 민가협 활동을 하면서 민주주의에 눈을 떳고 노동운동을 하면서 분단이라는 민족모순까지 인식하게 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위원장 송기인)는 2007년 이 사건이 “1980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단지 남파간첩이 북한에서 들었다는 진술을 근거로 월북한 박모 씨의 친족에 대한 내사를 벌여 장기간 불법구금 및 강압적 상태에서 자백을 받아 간첩으로 조작하고, 사형 등 중형으로 처벌한 비인도적이고 반인권적인 사건이라고 결정했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이후 석달윤 선생은 2009년 1월 22일 재심에서 모든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 받았다.
석달윤 선생은 무죄 선고 이후 “1980년 한여름에서 오늘까지 29년의 긴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모진 세월 속에 웃음을 잊고 한숨 속에서 살아왔다”면서 “(고문을 한 중정 수사관들을) 이제는 용서하고 싶다. 독재정권 속에서 살기 위한 방편이었을 걸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의 화해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석달윤 선생의 재판을 담당했던 국회의원 여상규(당시 자유한국당)는 2018년 1월 27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제작진이 ‘석달윤 씨를 혹시 기억하느냐’는 전화 질문에 “재판을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매주 한 열건 정도씩 하니 1년 이상 된 거는 기억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어 ‘1심 판결로 한 분의 삶이 망가졌다.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웃기고 앉아있네, 이 양반이 정말”이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과연 이래도 역사의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가?
더욱이 간첩조작 사건은 아버지 석달윤에 이어 아들 석권호까지 국가보안법 간첩단 사건으로 9년 6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사태를 알았다면 석달윤 선생이 고문 중정 수사관이나 재판관들을 용서한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
청산하지 않는 역사는 반역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 친일파들은 친미 반공주의자들이 되어 다시 일제 시대 독립군 때려잡는 치안유지법의 후신인 국가보안법으로 민주주의를 때려잡고 양심수를 양산하고 있다.
수백, 수천명의 당사자들과 가족들의 삶을 송두리채 망가뜨린 자들이 과거에 대한 엄중한 책임과 처벌은커녕 한 마디 사과도 없이 다시 권력자들이 된 반역의 역사는 진실로 청산되어야 한다.
지난 12월 13일에는 민가협 40주년 기념 특별 헌정 기념 어머니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이 있었다.
민가협 어머니들은 대개 자식들이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당하고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구속자들을 구명하기 위해 싸웠다.
이날 행사에도 국가보안법 폐지 구호가 내걸리고 국가보안법 피해자인 석권호의 부인이 시아버지의 고통과 남편의 고통을 이야기했다.
이날 행사에는 대통령과 총리가 영상 인사를 하고 고용노동부장관까지 참석해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과거사의 일이 아니다. 민가협이 싸웠던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는 바로 현재의 일이다.
석권호와 이정훈의 부인과 자식들이 바로 오늘날 민가협이다. 이들이 오늘 다시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을 외치며 절규하고 있다. 어찌 이들의 외침을 외면하고 국가보안법을 버젓이 유지한채 민가협과 어머니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가?
국가보안법과 양심수를 버젓이 남겨 놓고 민가협을 말하지 마라.
역사의 진실과 화해를 말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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