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과학적, 총체적 인식을 포기해야 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21세기 지배계급·제국주의의 세련된 변호론으로
신좌파 다원주의 노선 무엇이 문제인가?6
1. 포스트모더니즘: 이념적 탈주, 후퇴, 해체
1980년대에 사회성격논쟁, 사회구성체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 모순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뜨거운 논란들이 일어났다. 이때에는 각자 가는 길, 순서, 방법은 달라도 다 이 사회, 이 체제 내에서는 더 이상 진보적이고 변화된 세상이 올 수 없다는 공통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주의 담론 보다는 시대와 역사를 끌어안고 집단주의를 내걸고 어깨 걸고 나갔다.
그러나 1990년대를 전후로 밀어닥친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와 사회, 집단주의 보다는 개인과 인권 등 담론들을 우선적으로 내걸었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는 대신에 개인주의 담론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실 역사와 사회를 전면적으로 인식하고 변화시키는 투쟁과, 집단주의 속에 개인과 인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가 집단주의 정신의 정수이다. 개인도 역사 속의 개인이고 사회 속의 개인이고 집단 속의 개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인간이고 그러기에 정치적 인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성과 역사성을 상실한 인간은 고립적 인간이고 개별적 인간으로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본질적, 본연의 모습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포스트 담론들은 이를 대립시켰다. 집단 대신 개인을, 사회 대신 개별을 대치시켰다. 그러나 사회로부터 고립된 개인, 개별화된 개인은 철저하게 소외된 개인이다. 소외된 개인들, 개인들의 운동은 개인들의 인권, 존엄, 생명을 보호할 수조차 없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구호는 탈주, 해체였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후기 모더니즘의 시대라는 의미다. 모더니즘 시대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지금은 후기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기가 왔다는 것인가?
서구에서 일찍이 1960년대, 1970년대 개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주의 사상이다. ‘68혁명’이라 불리는 1968년 5월과 6월에 걸쳐 진행된 프랑스에서의 대대적인 투쟁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구호로 잘 상징되고 있다. 이 구호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기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68혁명’의 영향을 받고 1970년대 미국 페미니즘에서 부상했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는 젠더, 인종, 인권, 장애 등의 문제를 전면에 내걸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 정치’는 “정치 권력을 장악해 평등 자유를 선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보다는 비정치적으로 간주되곤 했던 일상적 차원의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새롭게 폭로하고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최원 철학자, 글로벌이슈 | 프랑스 68혁명 50년 |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 ‘표면적 실패’ 뒤에도 혁명은 계속되었다”, 신동아 2018년 6월호) 되었다.
레닌은 일찍이 《국가와 혁명》에서 “혁명의 근본 문제는 국가권력의 문제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국가권력은 군대, 경찰, 관료기구 등 억압기구를 가지고 있고 이 기구를 가지고 기존 착취와 억압, 수탈의 질서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 억압기구로 이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이 국가권력은 또 법을 이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도구로 제정하여 법에 의한 지배라는 명목으로 민중을 억압하기도 한다. 노동자 민중이 투쟁에 나서기만 하면, “법을 준수해야 한다”, “불법이다”라며 으름장 놓는 국가권력의 모습을 볼 때 ‘법치주의’는 노동자 민중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탄압의 수단에 불과하고 그 억압질서를 옹호하는 이념인 것이다. 이 사회의 국가권력은 중립적이고 공평한 중재자임을 자처하면서도 항상 자본가들, 부자들, 기득권 분자들의 이해를 일방적으로 대변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이는 레닌 시대뿐만 아니라 의회주의가 발전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진실이다.
미국이 언제나 배후에 있었지만, 1973년 칠레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의 전복 사례를 보더라도, 실패했지만 베네수엘라에서 극우파들의 마두로 정부 전복 시도와 마약근거지 소탕을 근거로 베네수엘라 정권을 붕괴시키고 석유를 차지하고자 하는 트럼프 정권의 침략 위협, 페루에서 진보적인 카스티요 정부의 전복과 체포, 군대와 경찰의 저항하는 민중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에서 보듯 국가권력의 문제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혁명의 근본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는 이와는 달리 “정치 권력을 장악해 평등 자유를 선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보다는 비정치적으로 간주되곤 했던 일상적 차원의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새롭게 폭로하고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 구조주의라고도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운동은 모더니즘 시대의 흘러간 옛 방식이라고 인식한다. 이는 문화현상으로 나타났지만, 단순하게 문화현상도 아니고 세계관, 인식, 기조, 기치의 전면적인 변화이다. 이는 단순하게 후기 개념이 아니라 모더니즘적 사고, 인식을 넘어서는 탈(脫)의 개념이다. 이는 일종의 ‘탈(脫)근대주의’라 말할 수 있다. 이 사상체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 중반부터 모더니즘의 폐단을 해결하고자 시작된 운동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해체주의와 상대주의, 다원주의로 정리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회의주의와 주관주의, 상대주의를 강조하기도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성과 합리주의도 부정한다. 개성, 자율성, 다양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2. 진리는 인식할 없는가?
누구나 한번쯤은 포스트 모더니즘, 다원주의에 대해 들어보거나 말해 봤지만 도대체 이게 무엇인지 아직도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해서 진리는 우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허물을 통해 그 진리를 편편(片片)이 볼 수 있을 뿐이다.”
<장미의 이름> 프롤로그에 나오는 말이다. 신약성서 고린도전서를 인용해 쓴 구절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분명한 것인가 모호한 것인가. <장미의 이름>을 통해 에코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강조하는 이성의 한계를 주목하고 사유의 복수성을 옹호한다.
에코에게 진리란 여럿이며, 그러기에 애매하고 불확실한 것이다. 이렇듯 <장미의 이름>은 에코의 다원주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김호기의 세상을 뒤흔든 사상 70년] (22)진리는 하나가 아니다..소설로 포스트모더니즘 대중화에 기여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6. 08. 16.)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마지막 부분에서 불타버린 수도원을 앞에 두고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이라는 독백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사고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기존 사고, 전망으로 남아 있던 체제가 송두리째 불타면서 남아 있는 회의주의가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이다.
그런데 과연 “진리는 우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우리는 이 세상의 허물을 통해 그 진리를 편편(片片)이 볼 수 있을 뿐”인가?
객관적 진리는 과연 인식할 수 없는가? 이 세상의 허물, 모순을 통해 진리는 통일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인가? 과연 진리는 보편적이지 않고 개별적이고 나눠져 있는가?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는 미래의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의 상실이고, 이성과 합리적, 과학적 사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다.
과연 “진리란 여럿이며, 그러기에 애매하고 불확실한 것”인가? 진리와 사유의 복수성은 사실 통일된 진리란 없다는 의미이다. 진리를 통일적으로 추구하는 방법과 길이 잘못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원주의 사상은 하나의 객관적 진리, 통일된 인식을 부정한다. 다원주의는 사회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부정한다. 생태, 여성, 노동, 장애, 인권 등 다양한 모순들을 나열하고 개별적으로 나눠져서 모순을 해결하려 한다. 노동이 이 사회의 주된 모순이고 그 모순을 해결할 중심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중심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개별화된 모순들은 따로 나눠져서 분단이나 해방 등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을 동의하지 않는다.
설사 인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애매하고 불확실한 것이기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 사회는 복잡하고 통일되어 있지 않고 진리는 다양하고 다원적인데 이를 하나로 인식하여 이 사회를 전복하고자 하는 노력, 실천은 무용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리가 다양하다면 이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이고 진리가 될 수 없다. 결국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곧 사회에 대한 과학적, 역사적, 통일적 인식의 포기에 다름 아니다. 이에 따라 모순의 집단적 해결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노력, 투쟁을 부정하고 기존 체제 내에서 개인들의 인권, 자아를 인정받고 보호받는 것으로 대신하게 된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됐는가? 우리에게는 예외적으로 1980년대 혁명의 시대, 불의 시대를 거쳐 1990년대부터 이런 사조들이 등장했는데, 유럽이나 일본, 미국 등 세계 각국에서 이런 사조들은 이미 1960년대에 시작된 것이었다.
일찍이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전 세계는 혁명운동이 고양된 시기고 레닌과 볼셰비키가 민족 자결권을 주장하면서 민족해방 운동도 고양됐다. 1920년대 말에는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1929년에 미증유의 대공황이 시작됐다. 공장이 멈추고 기업과 은행이 문을 닫고 파산상태가 속출하고 산더미 같이 쌓은 물건은 팔리지 않고 실업자들은 거리에 넘쳐나게 되었다. 반면 내전과 제국주의의 전복 공세를 이겨내고 스탈린 시대에 시작된 산업화와 농촌 집산화, 사회주의 생산력의 발전으로 소련은 엄청난 발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소련에서 실업은 일소되고 노동자들은 복지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자본주의를 휩쓸었던 공황은 사라졌다. 1929년 자본주의 세계를 뒤덮었던 대공황의 파고는 소비에트 문턱 앞에서 힘없이 물러갔다. 미국의 저명한 맑스주의자인 레오 휴버먼은 원제목은 ‘Man’s Worldly Goods – The Story of the Wealth of Nations'(인간의 세속의 부-국부 이야기)*에서 소련의 위업에 찬사를 보냈다.
* 국내에서는 《경제사관의 발전구조》이후 《자본주의 역사바로 알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로 번역된 책에서 번역자 장상환은 ‘옮긴이의 말’ 뒷부분에서 “원본의 총 22장 가운데 집필 당시인 1930년대 소련과 관련된 21장은 오늘날에 비추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번역에서 제외했다”며 이 부분을 빼고 번역했다.
이후 독일 파시즘의 공격으로 소련은 2700만의 희생으로 파시즘을 물리치고 새로운 사회주의 문명을 건설했다. 이 소비에트 시절의 성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서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 활동가들이 소련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앞다퉈 방문하기도 했다.
이미 18세기에 산업혁명을 통해 방대한 식민지를 거느리고 기계제대공업으로 문명발전을 영국의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웹 부부(시드니 웹과 비어트리스 웹)는 소비에트를 연구, 직접 경험하고 “소비에트 공산주의: 새로운 문명”이라는 방대한 연구서를 쓰기도 했다.
특히 파시즘과의 전쟁 승리는 엄청난 시련 속에서 소련의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높이고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해방 운동을 크게 진작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 사망 이후 1956년에 후르시초프가 권력을 잡은 이후 이른바 개인숭배와 독재권력을 이유로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졌다. 쏘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후르시초프의 이른바 ‘비밀연설’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치명타를 안기고 중소 간 분쟁을 야기하기도 했는데, 이 연설문은 서방 언론에서 먼저 공개되었다. 후르시초프는 스탈린의 개인숭배 비판, 중공업 우선주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조선에 대해서도 이를 강요하여 이른바 ‘종파주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후르시초프는 사회주의 분업이라는 미명 하에 단일경제권(코메콘) 가입을 강요하여 조선의 자립적인 공업화를 가로막고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원조를 반으로 삭감하여 경제적 타격을 가하는 대국주의적 압력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소련을 사회주의 모국으로 간주하며 서방에서 노동자 민중이 투쟁했는데 이제 소련은 악의 제국이 되었고, 공산주의 운동은 명분이 약화되고 분열했다. 동유럽에서는 서방 제국주의가 조종하는 레짐체인지(정권교체)가 벌어졌는데, 헝가리, 체코사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자본주의 모순은 점점 더 깊어지는데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운동은 더 이상 진보운동 세력이나 대중들한테까지도 대안이 아니게 되었다. 서방 제국주의는 문화냉전을 통해 반소비에트 선전을 강화했다.
1960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중심으로 유럽 많은 국가들에서 노동자 민중, 학생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급진적 투쟁을 전개했다. 일본에서는 미일안보동맹을 반대하는 격렬한 대중투쟁과 학생투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때에는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 사상적, 정치적 동요가 심각하게 일어나는 시기였다. 이로써 공산당의 권위도 심각하게 손상되고 대중투쟁에 대한 개입력도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이로써 68년 혁명 당시에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가 나타났다. 더 이상 “소비에트에게 권력을!”이라는 1917년 4월 테제 당시의 구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련은 스탈린 독재, 개인숭배, 철권통치로 얼룩진 어두운 세상으로 더 이상 진보적 인류의 대안이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빛과 희망을 던져 줬던 러시아 혁명은 이상은 좋았지만 결국 스탈린 독재 체제를 만들었기에 혁명은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헤겔이 말했던 “이성의 간지”도, 맑스주의도 맑스레닌주의도 결국 스탈린주의, 스탈린 독재 체제를 낳은 비이성과 광기, 폭력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 봤기 때문이다. 이로써 자본주의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모델이나 전망이 사라졌다. 체제 대안은 어디에도 없다. 불확실성만 남아 있다.
남은 것은 무정부주의다. 무정부주의는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구체적인 현실 대안을 추구하지 못한다. 무정부주의는 패배주의의 산물이라 정치적 전망의 상실이다. 모든 권력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조차도 독재권력이라고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현실 사회주의를 적대시 하고 부정한다.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하는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결국 자본주의 내서의 운동으로 갇히는 것은 당연하다. 불모의 운동이 무정부주의이다. 그럼에도 이 불모의 무정부주의 운동이 대세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68세대의 운동이 유럽을 휩쓸었다. 68년 혁명의 기치, 요구들은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새로운 사조로 자리 잡았다. 일본에도 격렬한 전후 세대 투쟁에 영향을 미쳤다. 68년 혁명은 지적으로는 전 세계를 휩쓸었다.
3. 포스트모던 여성해방론에서 마침내 페미니즘으로
유럽에서는 1968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프랑스의 ‘5월 사태’와 체코의 ‘프라하의 봄’과 그 이후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저항들을 초래한 사회정치적 격동은 영국, 프랑스 할 것 없이 유럽 사회 전체를 통하여 해방운동양상과 인식구조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 가장 큰 결과가 바로 해방운동의 이론적 근거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해 왔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라는 현상이었으며 서유럽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유물론의 개념 전반에 대해 체계적인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새로운 비판 이론을 추구하는 자세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단일 전망으로써는 적절히 포착하고 파악하기가 어렵게 변화한 현대 사회의 복잡한 현실이 촉구한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한 방식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계급과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틀과는 다른 새로운 대안적 인식틀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해방운동들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상정하는 특권적 사회변혁 주체들(노동자계급) 대신 특수한 형태의 억압과 갈등을 둘러싸고 특정 이슈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새로운 사회 주체들, 나아가 새로운 정치 세력들을 부상시켰다. 이 세력들 중에서 주로 여성 작가들과 출판인들, 대학원생들, 대학 시간강사들과 교수들과 같은 학계와 문단의 여성 지식인들과 여성 노동자들이 조직적인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하였다.(태혜숙 효성여대 교수, 영문학, 포스트 모던 여성해방론의 현황과 과제)
유물론을 부정한다면 남는 것은 관념론밖에 없다. 이들은 맑스주의가 “현대 사회의 복잡한 현실”을 해명하지 못하면서 “다른 새로운 대안적 인식틀”을 모색하게 되고 노동자 계급은 “특권적 사회변혁 주체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노동자 중심성도 부정하게 되고 계급과 계급의식, 계급모순도 중심적 모순으로 부정하게 된 것이다.
“현대 사회의 복잡한 현실” 배후의 본질과 근본작동 원리는 《자본론》에서 보듯, 맑스주의가 가장 잘 인식하고 있다. 맑스주의는 불평등, 전쟁, 실업, 빈곤, 경쟁, 인간 소외, 노동소외, 개인주의, 이기주의, 범죄, 도덕적 타락, 환경재앙, 도시ㆍ농촌문제 등 자본주의의 총체적 해악과 폐해를 속속 인식하고 있으며 그 종식 대안도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 중심성은 노동자가 사회의 압도적 다수이며, 생산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으며 노동자는 착취 받는 존재이므로 착취 사회 자체를 철폐할 때만이 자신도 해방되고 이것이 사회 전체의 해방과 일치하기 때문에 진보적인 중심 계급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특권이나 윤리적 판단과는 상관없는 과학적 사실이기도 하다.
이를 반대하는 지식인 중심의 운동은 기본적으로 중간계급(소부르주아)의 운동이다.
이 기치는 여성운동, 선거권 쟁취 투쟁, 인종주의 반대, 전쟁 반대 투쟁으로 진보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새로운 대안적 인식”은 집단성, 집단주의, 계급 대신에 주로 개별화된, 부문화된 다양한 영역의 주체들을 내세웠다.
현대의 여성해방론은 억압과 해방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통찰에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전통적인 이론의 보편주의와 총체성을 거부하고 탈중심화된 개체성과 기준들 자체가 복수적인(plural) 사유체계들, 이론들, 현존하는 패러다임들, 생활양식, 사회와 문화에 따라 상대적인 것일 대 여러 대안적인 패러다임들의 서로 경쟁하는 진리 주장을 일괄해서 평가하고 판단하게 하는 어떤 실질적인 광범위한 하나의 틀이란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포스트 모더니즘은 전통적인 이론이 추구한 ‘큰 이야기’(grand narrative)가 배제해온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이다.(같은 글)
그러나 이 “대안적 인식”은 체제의 대안을 부정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을 모색하지 못하고 체제 내에 수렴, 포섭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큰 이야기”, 즉 거대담론을 부정함으로써 역사적, 사회 구조적 모순과 개인들의 삶과 요구들, “작은 이야기들”을 대립시킬 수 있다.
누구도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다”는 명제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와 동떨어져 있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그 사회에 속한 다른 사람들하고도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큰 이야기”는 인간의 개별적인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회적, 역사적 조건들과 인간의 개별적인 조건들을 하나로 통일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맑스주의 철학은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고 진리를 추구한다. 개별적 사안들, 개인들과 사회를 통일적으로 인식하려 한다. 이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실천으로 변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여성해방론은 사회와 개인을 철저하게 분리시키고 있다. “탈중심화된 개체성과 기준들”을 따른다. 중심, 즉 총체적 인식을 부정하고 사회 전체, 역사와 개인을 대립시킨다. 이 기준들은 통일적인 인식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개별적이다. 이 “복수적인(plural) 사유체계들, 이론들”은 이 사회를 과학적, 역사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이 인식과 이론들은 “여러 대안적인 패러다임들의 서로 경쟁하는 진리 주장을 일괄해서 평가하고 판단하게 하는 어떤 실질적인 광범위한 하나의 틀”을 부정하기 때문에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통일적, 총체적 인식을 할 수 없다. 역사를 통일적인 인식으로 분석하고 평가할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은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개별적이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인류의 지적 성과를 부정하고 “인식할 수 없다”라는 명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식은 다양한 사회현상을 총체적으로 해석하고 근본모순을 파악함으로써 다양한 개인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통일전선으로 묶어세우고, 당적으로 통일시켜 이 사회를 변혁시켜 나가는 혁명적 방향을 제시할 수 없다.
포스트 모던 여성해방론은 이성애중심 사회구조의 일면성과 획일성을 어느 여성해방론 흐름에서보다도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렇지만 포스트모던 여성해방론에서는 그 사항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론적 근거를 갖고 체계화하고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nal is political)라는 포스트모던 여성해방론의 핵심 주장과 이어진다. 이 주장은 바로 일상 삶의 정치(politics of everyday life)와 국지적 정치(politics of local)와 같은 포스트모던 정치의 입장을 근거로 함으로써 정치적으로도 책임지는 태도를 취하려고 하며 나아가 정치의 의미도 바꾼다. 이런 정치적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처럼 자본주의 사회 전체의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질적 변화와 같은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기 보다는 일상 삶의 주변에 널려 있는 일면 사소해 보이는 문제부터 구체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것이다.(같은 글)
“포스트 모던 여성해방론은 이성애중심 사회구조의 일면성과 획일성”을 비판한다. 물론 원시공산제 이래로 모성사회가 붕괴되고 남성지배 사회가 생겨났다. 그러나 여성해방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엥겔스도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모성사회의 붕괴를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규정하고 이것의 근본원인은 사적소유에 바탕을 둔 계급차별로부터 비롯된 문제라고 분석했다. 남성의 지배는 성별 차이로 인해 지배에 근본원인이 있기 보다는 생산수단의 소유권 여부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것이 오늘날 유행하는 ‘젠더론’과 다르게 남녀 간의 성별대립의 문제로부터 출발했다기 보다는 사적소유의 결과물로 설명하고 있다. “남성의 지배와 일부일처제는 다름 아닌 재산의 보존과 그 상속을 위해 이룩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상속할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는 “남성 지배의 확립을 위한 아무런 동기도 없”고, “그렇게 할 수단도 없다”라고 하고 있다. “즉 남성 지배를 보호하는 부르주아 법은 오직 유산자들과 프롤레타리아 통제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에 대한 지위에는 아무런 효력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더욱이 대공업의 발전으로 인해 여성이 생산에 종사하게 되거나 종종 가정의 부양자가 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가정에서의 남편의 지배는 그 마지막 잔재마저 존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엥겔스는 이때에도 “일부일처제 이래 그칠줄 모르는 아내에 대한 학대는 예외”라고 하고 있다.
그리하여 기본적으로 남과 여의 성별적대를 중심에 두는 “포스트 모던 여성해방론”(최근에는 여성해방론이라는 표현도 사라지고 페미니즘이라고 부르고 있다.)과 다르게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남성의 단결을 통해 사적소유와 여성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맑스주의가 “자본주의 사회 전체의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질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상 삶의 주변에 널려 있는 일면 사소해 보이는 문제부터 구체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노력, 투쟁을 부정하는가? 이는 변혁과 개량의 문제다. 맑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변혁을 추구하지만 개량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맑스주의는 근본변혁을 추구하면서도 당면 투쟁, 당면 요구에 끊임없이 개입하면서 개량을 추구한다. 개량과 개량주의는 다른 것이다. 맑스주의는 임금인상과 복지, 노동시간 단축, 노동조건, 노동3권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요구, 여성의 요구에 전면적으로 개입하라고 가르친다. 맑스주의는 부당한 권력과 자본의 지배에 맞서 억압받고 착취 받고 수탈당하는 피억압자들과 민족적 권리를 위해 부단하게 싸우라고 요구한다. 눈앞에 보이는 모순들, 부조리, 불평등에 맞서 투쟁하지 않고, 이 투쟁을 통해 노동자 민중이 각성되지 않고 이 사회의 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그러나 반대로 이 눈앞의 투쟁들이 이 사회를 근본변혁하는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모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발본색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노동의 문제, 여성의 문제, 제 민족의 권리, 인권의 문제, 전쟁 등은 이 자본주의, 제국주의 체제 하에서, 바로 이 체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거대담론은 개인의 삶과 인권, 권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적 해결을 모색한다.
반면 ‘거대담론’을 부정하며 개인의 인권을 내세우고 차별과 배제를 극복하는 운동들은 오히려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외면하면서 개인적인 문제 해결도 벽에 부딪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 전체의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질적 변화”를 부정하는 운동은 본질적으로 체제내적 운동이다. 이럴 때 ‘개인적인 것“은 절대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는 근본적으로 비정치적 견해이다. 특히 제국주의 프로파간다는 정치적 전망을 가지지 못한 무정부주의 운동의 한계를 간파하고 이 운동을 체제내화 하려고 시도했다. 객관적 진리의 부정, 체제 전망의 부정, 회의와 동요, 불확실성은 지배계급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많이 남겨 놓았다.
특히 제국주의는 인권담론, 젠더 등 여성의 권리를 내세워서 ‘제3세계’ 침략을 정당화 했다. 다른 나라의 자주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인권담론과 젠더 문제 등을 내세워 이러한 권리보장을 이유로 내정간섭을 일삼았다. 제국주의가 이러한 명분으로 개입한 나라에서 개인의 인권과 여성의 권리가 보장될리 만무하다.
아프가니스탄을 보라. 여성과 아동들이 무인비행기로 학살당하고 미군에 의해 폭력을 당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쫓겨나면서 미제국주의와 서방 언론, 심지어 이를 일방 추종하는 한국 언론들은 탈레반에 의한 여성권리의 악화를 개탄하면서 미제국주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이 인권과 여성의 권리를 위한 조치였다고 정당화했다.
4.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도피
한국에서는 서구의 지적 흐름, 사상적 흐름과는 다른 특수한 상황들이 전개됐다. 서구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50년대 중반부터 밀어닥친 수정주의 열풍과 60년대의 반쏘 반맑스레닌주의적 흐름들이 70년대부터 포스트 모더니즘 경향을 낳았다. 반면, 한국은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에 자주적인 인민들의 정치적 진출이 있었지만 미군정과 그 주구 이승만 정권에 의해 대량학살 당하고 한국전쟁 이후에 이승만의 백색테러 체제, 4.19항쟁으로 이승만의 축출 이후에 미국의 개입으로 들어선 박정희 군사파쇼 체제 하에서 반북, 반쏘, 반중의 반공주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급진적인 운동은 사실상 대중적인 명맥이 끊겼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광주항쟁을 기점으로 다시 혁명적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반독재 반미 운동은 다시 혁명운동을 일으키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소비에트 붕괴와 이북의 고난의 행군 등으로 운동전망을 상실하고 급격하게 운동이 무너졌다. 이 운동이 무너지면서 맑스주의 위기, 노동운동 위기, 통일운동 위기가 시작되었다. 게다가 1987년 전두환이 내려오고 80년대 보다 노태우 시대, ‘군정종식’을 내건 김영삼 정권이 시작되면서 ‘문민통치’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때부터 파시즘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이제 시대변화에 따라 기존의 전투적 노동운동, 통일운동도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위기 논란이 일어났다. 김영삼 정권은 한총련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세력을 위축시키고 통일운동 세력들을 고립시켰다.
사회주의권의 해체와 맑스주의의 외면, 형식적일지라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신장’ 등 정치적 변화와 함께 과학적, 역사적 시대인식이 외면당하면서 이념과 과학, 총체적 인식을 부정하는 개인주의 정치, 다원주의 정치가 점점 더 세력을 넓혀가게 되었다, 급진적 운동에 몸을 담았던 지식인들, 언론들에서는 개인주의 담론을 퍼트리는 전도사들이 되었다.
청산주의는 역설적으로 다원주의 옹립의 계기가 되었고 새로운 시대정신인 다원주의는 청산주의를 더 강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80년대가 부활한 혁명의 시대라면 1990년대는 청산주의 시대와 다원주의 시대의 개막, 2000년대와 현재 2020년에는 다원주의 사상이 창궐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과연 다원주의는 개인의 진정한 인권과 개성 보장을 보장할 수 있는가?
일상의 폭력이나 차별에 맞서는 ‘인권’은 유럽이나, 선진국이나, 문명국과 같은 한정된 특수성의 세계의 테두리 안에서 개인에 대한 방호적이고 치유적인 일정한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이 ‘문명과 야만’이라는 구조적 폭력 위에 안주하면서 ‘인권’의 수호자인 양 고상한 양 설교를 한다면 오만한 위선일 뿐만 아니라, ‘인도에 대한(반하는) 범죄(Crime against Humanity)’의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 언뜻 반패권적이고, 반권력적으로 보이는 평화, 민주, 인권이라는 가치들도 서구에서 태어나 서구의 안경을 쓰고 세계를 노려보고 있으니, 결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직시하며 인권의 근본문제를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서승, 《동아시아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한다 평화로 가는 한국, 제국으로 가는 일본》, 경향신문, 초판 1쇄 2019년 12월 23일, 초판 2쇄 2020년 4월 1일)
이처럼 개인의 인권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운동이 “개인에 대한 방호적이고 치유적인 일정한 구실을 해왔다”라는 것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 권력과 자본, 분단 체제가 강요하는 폭력과 종북몰이와 같은 폭력적 이데올로기와 구조적 폭력에 “안주”하는 것은 “오만한 위선일 뿐만 아니라”, “인도에 대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의 공범자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보편적 인권’을 내세우면서 “북한 인권” 운운하는 흐름이 바로 그렇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며 사상의 자유가 원천봉쇄 되어 있고 인권이 유린되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변동과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소득 향상에 따른 소비계층의 확대와 소비양식의 세계화는 여가활동·영상·레저 등을 새로운 대량 소비품목으로 등장시켰다.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이전까지 소비 취향이 다양해지고 내적 스타일 분화가 증가한 셈이었다. 이러한 현상을 망라하는 개념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널리 통용됐다.(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소설로 포스트모더니즘에 기여”, 경향신문, 2026.08.17.)
노동자 계급에게 가장 절실한 최고의 인권인 생존권과 노동권은 법률적 억압으로 노동자들을 옥죄고 있다.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라는 언론 기사는 무권리 상태에서 지옥과 같은 노동을 하다가 중재재해로 죽어 나가는 노동자들의 참담하고도 서글픈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장애인들 이동권 요구에 대한 국가권력의 폭압적 탄압, 이주노동자 봉건적 거주이전 자본제적 초과착취 인권유린, 소외, 자살, 가족자살, 병고, 무위고, 고독고의 노인 소외와 빈곤, 살벌한 경쟁이 만연하는 속에서 평화, 민주, 인권, 여성의 담론은 홍수처럼 넘쳐나고 있으나 정작 개인의 권리와 인권도 무너져 있다. 노동자들의 권리가 신장되고 처지가 나아진 것이 있다면 자본에 대한 투쟁을 회피하고 집단주의를 약화시키고 계급을 해체시키는 포스트 모던 담론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 덕분이었다.
개인주의 담론은 청년층을 사로잡고 있다. 한쪽에서는 극우 담론에 매몰된 청년들(주로 남성 청년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실업과 빈곤, 착취의 증대를 여성의 탓으로 돌리고 여성을 적으로 간주하고 싸우고 있다. 그러나 이 반대편에 있는 각종 여성주의 담론들은 분열주의에 매몰된 채 청년들에게 단결과 혁명의 사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의 인권의 담론이 무성한 속에서 혁명적 사상을 상실한 틈을 비집고 “분열하여 통치한다”는 지배계급의 담론이 유포, 조장, 만연되고 있다.
1970년대, 80년대 전통적 분열 이념은 지역분열이었다. 박정희는 지역적 분열을 조장하여 경상도를 반공주의에 기초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전라도를 고립시켰다. 이 지배계급의 분열이념은 오늘날 훨씬 더 다양해지고 있다. 이 분열이념은 노동자들 내부를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주노동자와 국내노동자로 나눌 뿐만 아니라 세대, 남녀로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정규직의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향상이 비정규직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만드는 계기라면서 정규직 임금양보론이 노동운동 내부까지 횡행하고 있다. 연금제도를 개악하면서 청년들에게 더 부담을 지우면서 청년(노동자)와 중장년(노동자)를 대립시키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란 “종교, 민족, 인종, 성(性), 계급, 생물다양성 등의 정파(政派)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 세력을 구성하고, 해당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이익과 관점을 집중적으로 대변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정체성 정치를 하는 집단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이 대변하는 집단이 주류집단과 융합이 불가능한 독립된 소수이자 사회적 약자로서 구조적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나무위키, 정체성 정치)
따라서 구조적 차별, 억압을 없애기 위해서는 차별받는 해당 정체성에 의거한 정치적인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권 확산 주장’과 ‘정치적 의견 대변’이 혼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치적 의견을 대변하는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을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정체성 정치와 그게 아닌 정치를 나누는 첩경은 ‘네가 속해 있는 집단이 무엇인가?’를 정치철학의 핵심으로 하는 정치를 말한다.”(나무위키)
정체성 정치는 “내가 속해 있는 집단”과 “네가 속해 있는 집단”을 대립시키고, “내가 속해 있는 집단” 내부를 또다시 갈래로 나누면서 성별 대립을 기초로 수많은 성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면서 피지배계급과 피억압 민족 내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고 있다. 이에 반해 교차성 이론이 등장하여 차별과 억압이 복합되어 있고 중첩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복합적 차별과 억압을 관통하는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이들은 결국 맑스주의의 사적유물론 같은 과학적 이론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그 복합성과 중첩성을 결코 해명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맑스주의는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나누고, 이것의 국제적 확장으로 독점적 지배력을 바탕으로 정치, 군사적 패권을 가진 제국주의가 피억압 민족을 억압, 착취, 지배하는 근본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 억압과 수탈구조가 사회적 인간들인 개인들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흑인여성의 계급 불평등, 아프리카 여성의 식민지배에 의한 억압, 한국 여성 이주노동자에 대한 중첩의 차별과 폭력 등은 자본의 계급지배와 제국주의와 분리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더욱이 교차성 페미니즘 역시 가장 이 중첩된 억압과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피지배계급, 피억압 민족의 단결로 자본주의, 제국주의 체제를 철폐하는 혁명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거대담론의 시대는 갔다.”며 미시담론 속에서 개인의 인권과 차별, 억압을 분석하는 시대에 윤석열이 일으킨 내란과 외환은 여전히 이 시대는 국가보안법과 종북몰이가 판치며 체포, 수거처럼 학살을 기도하는 파쇼지배 체제이며, 그 배후에는 군사작전권을 가진 미국이 제국주의 패권을 가지고 한국정치에 개입하는 제국주의 시대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시켰다. 노조적대가 판치고 비정규직이 점점 더 늘어나며 노동악법이 불평등과 빈곤과 차별을 영속화 시대라는 것을 확인시켰다.
개인의 차별과 인권역시 반공 종북몰이를 내세워 인간 혐오와 약자 혐오를 조장하는 극우들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투쟁하지 않으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남과 북의 민족적대와 대립과 전쟁위기는 분단모순과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을 분쇄하지 않는다면 해결되지 못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강도 미제국주의의 수괴 트럼프의 가중되는 통상협박과 주둔비와 방위비 폭등 요구, 첨단 무기 수입 강요 역시 계속된다는 점을 확인했다. “제국주의”에 대한 과학적 인식 없이 개별적, 분산적 인식으로 한미군사 동맹과 한미일 전쟁동맹, 중국에 대한 혐오(짱깨주의)와 러시아에 대한 적대(루소포비아), 일본의 전쟁국가로의 부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
역사와 사회에 대한 통일적 인식을 포기하고 사회의 근본변화와 진보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 담론, 다원적 인식들, 흐름들은 피억압자를 역사발전의 주체와 중심이 아니라 도도한 역사와 격동하는 사회의 풍랑 속에 던져 넣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담론들은 저항담론으로 시작되었지만 혁명성을 상실하고 정치적 전망을 상실한 가운데, 이를 적극 포섭한 자본주의자, 제국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 개인주의, 자유주의 담론으로 변모하며 분열과 회의, 청산주의를 조장하며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이해에 봉사하게 되었다.
가령 성소수자 운동은 제국주의의 ‘보수주의’ 진영에 의해서는 탄압의 대상인 반면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이를 지원하여 레짐 체인지(정권교체)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백악관은 해외 원조의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과도하게 배정된 다양성 예산을 줄이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습니다.
< 캐롤라인 레빗 / 백악관 대변인 (현지시간 28일) > “이는 불법적인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프로그램과 연방 관료조직과 기관 전반에 걸쳐 트랜스젠더주의와 ‘워크(woke)’ 이념을 위한 자금 지원도 중단된다는 의미입니다.”(美 국제원조 사업에 칼 뺀 트럼프…머스크 “범죄조직처럼 행동”, 연합뉴스, 2025-02-03)
보고서에 따르면, 국제공화당연구소가 2019년과 2020년에 방글라데시에서 운영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1,868명 중에 24%가 트랜스젠더였다. 더 그레이존은 국제개발처가 쿠바의 래퍼, 예술가, “탈 사회화되고 소외된 청년”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쿠바 정부를 약화한 사례를 확인한 국제공화당연구소가 공화당의 가치와 상충함에도 불구하고 해외 성소수자를 지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마이크 벤츠 전 국무부 관리는 퓰리처를 수상한 언론인 글렌 그린월드가 진행하는 방송에 출연하여 국무부 산하 민주주의를위한국가기금(NED)이 외국 선거를 방해하고, 사회 동요를 유발하며, 반정부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워크(woke) 운동’을 “전술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미국의 국제개발처(USAID)는 왜 해외 성소수자를 지원하는가?, 컨스피러시뉴스, 2025년 2월 12일)
USAID 예산을 분야별로 살펴보면 ‘거버넌스’에 대한 지원이 168억 달러(약 24조4000억원)로 가장 크다. 민주주의 확대와 시민사회 지원, 제도적 변화를 위해 편성된 예산이다.(문일요 기자, USAID 폐지 수순에 국제기구·NGO 대혼란… 한국, ODA 새로운 자금처 역할해야, 더버터, 2025.04.03.)

미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와 제국주의로서의 침략적 본질의 동일함을 보여주는 커툰
이처럼 미국국제개발처 자금의 가장 큰 부분이 인권단체,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인데, 이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제도적 변화, 즉 지원하는 국가를 레짐체인지(정권교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민주주의를위한국가기금(NED)은 CIA 산하 기구로 색깔혁명을 통해 정권교체를 기도하는데 쓰이고 있다. 여성과 성소수자를 탄압하는 이란, 러시아, 중국, 조선 등은 전체주의 국가로 규정하고는 색깔혁명에 있어서 인권과 민주주의 담론들이 미제국주의의 프로파간다로 활용되고 있다.
모더니즘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로, 거대담론의 시대에서 미시담론의 시대로, 거대서사의 시대에서 미시서사로, 근대에서 근대 이후로, 식민주의에서 탈식민주의로, 일원주의에서 다원주의로, 이성과 합리성에서 개인의 개성, 다양성, 비합리성으로, 절대적·보편적 진리에서 상대적 진리와 주관주의로, 낙관주의 대신 회의주의로,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으로 이런 논의는 모두 다음으로 귀결된다.
과학적·총체적 인식에서 불가지론으로!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계급에서 다중으로!
민족에서 탈민족으로!
혁명(주의)에서 개량(주의)으로!
[보론] 미제국주의 프로파간다와 제국주의의 ‘진보적’ 벗들
《문화냉전 미국의 공보선전과 주한미공보원 영화》(김려실 지음, 현실문화, 2019년)은 미국이 매스 미디어를 통해 얼마나 장기적으로, 세련되고 치밀하게 제국주의 프로파간다를 한국에 심어 왔는지를 세밀하게 추적한 역작이다.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주둔한 미군이 가장 먼저 처리한 일 중 하나는 미디어 장악이었다…
1947년 3월 모스크바 주재 대리 대사였던 조지 F.캐넌(George F. kennan)의 제안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이 추진되었고 9월에 소련이 코민포름을 창설함으로냉전은 공식화되었다. 같은 해 남조선에 단독 과도 정부를 수립한 미군정은 점령 통치 종식을 앞두고 조선인과 우호적 관계를 구축하고 친미 세력을 육성할 대민 선전 전담기구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설립된 것이 바로 주한미공보국(OCI)였다.
그러나 미국은 노골적인 반공 친미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세련된 논리와 교활한 방식으로 이를 전파했다.
스미트-문트 법으로 해외 공보선전의 법률적, 재정적 조건을 갖춘 미국무부는 지역에 따라 정치ㆍ사회ㆍ문화를 고려하여 세심하게 조율된 공보선전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노골적인 반소ㆍ반공 선전보다는 전후 황폐화된 유럽의 재건을 돕는 조력자로서 미국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지지세력을 육성했다. 이에 비해 식민지와 미군정을 거치며 외세에 의해 분단국가가 된 한국에서는 내정간섭이라는 인상을 피하면서 한국의 근대화가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확대할 때 달성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문화연구소(USIS)는 반공 선전보다는 한국인이 미국과 민주주의에 우호적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았다. 극장 외에 이렇다 할 근대적 문화시설이 없었던 한국에서 미국문화연구소에 대한 한국인의 호응은 뜨거웠다…
1950년 초에 USIS 영화는 1. 청년 및 학생, 2. 농민, 3. 노동자 4. 공무원 및 군인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이미 1948년의 제주 4.3사건과 여순10.9사건으로 국무부가 감지하는 수준보다 한국 현지에서의 위기의식은 팽배해져 있었고 한국 USIS는 두 사건의 여파를 잠재우기 위한 선무공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런 맥락에서 제작한 반공영화가 바로 <전우(Brothers in Arms)>(USIS50)였다…
<전우>의 배경인 여순사건은 국방경비대(1948년 9월 5일에 육군으로 조직됨)와 경찰의 갈등이 원인 중 하나였다…군인과 경찰은 혈육과 같은 존재라는 메시지를 담기 위해 주인공은 인민군에 저항하다가 월남한 농민 출신 형제들로 설정되었다…국무부의 대외적 원칙에 어긋나기는 했지만 USIS는 공보선전상의 필요에 따라 반공영화를 제작했다.
해방 이후 진보세력에 대한 말살에도 불구하고 해방의 염원은 끝나지 않고 민중의 가슴 속에 살아있었다. “학살 진상규명”과 “자주통일”을 내걸고 투쟁했던 1960년 4월혁명에 대해 미국은 반미의식의 성장에 대해 비상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사월혁명을 전면 부정한 것이 아니라 미국식 민주주의 투쟁으로 성격을 바꿔놓으려고 공작을 했다.
먼저 <한국 리뷰 15호>는 공식적 논평으로서 “4월 학생 봉기”를 “이상주의자들의 혁명”으로 명명한다. 영화는 부패한 독재정부에 맞선 한국 학생들의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임시 내각의 개혁 조치를 통해 한국사회가 질서를 재확립하고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기승전결식 스토리로 전개된다….
같은 제목의 미편집 영상은 <리버티뉴스>를 위한 푸티지(footage)였던 것 같다…<한국 리뷰 15>가 4월 혁명 이후 질서 회복에 초점을 둔 것에 비해 이 영상은 먼저 4월혁명의 원인으로 3.15부정선거와 마산시위를 담았다…
4.19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파악하고 있었던 미국은 이 사건을 성공한 민주주의 혁명으로 자리매김시키는 한편, 어디로 분출할지 모르는 민중의 폭력적 저항을 제한할 방도에 대해 고민했다. 미국은 한국사회의 안정을 위해 경제적 불평등, 독재정부, 부정부패 척결에 대한 열망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에서 벗어남이 없도록 그것을 조정하고자 했다. 팔리보고서에서 드러났듯 4.19 이후 미국이 가장 경계한 사태는 민중혁명에 의한 정권 교체의 경험을 통해 고조된 한국인의 민족주의가 또 다른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USIS가 반미시위의 표적이 된 것은 경찰이 보호하는 미국대사관보다 접근이 용이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USIS가 문화공보를 표면에 내세워 정보수집 활동을 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미데모가 없었던 한국에서 반미 기운이 감지된 것도 베트남전이 본격화되면서부터였다. 1964년 3월 24일 한일협정에 반대하여 시작된 대학생 시위는 해를 넘겨 전국적 시민운동으로 확산되었고 이 협정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위에 반미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위 군중은 한일협정을 제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Taft-Katsura Agreement)’에 비유하며 미국을 규탄했다…
USIS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감은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회원 방화사건(이른바 ‘부미방’)으로 국제적 이슈가 되었다. 고신대 학생들은 “미국 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 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 시민들에게 민족적 자각을 호소한다”는 유인물을 살포하고 USIS 도서관에 불을 질렀다…부미방 이래 한국 USIS는 40여 차례 피습당했고 그중 광주 USIS를 목표로 한 공격이 31차례였다.
미국은 ‘진보지식인’들을 프로파간다에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기존의 영화 상영과 도서 대출 사업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USIS는 1965년 7월부터 고학력 식자층을 대상으로 한 계간 교양잡지 『논단』을 발간했다.『논단』이 번역이나 기고를 의뢰한 인물들은『사상계』『세대』『신동아』 등 당대 지식인 잡지의 기고자이자 편집자였던 교수, 언론인, 전문가들이었다.
《사상계》 등의 진보 지식인들이 《논단》에 직접 기고한 것을 넘어서 《사상계》자체가 미공보원(USIS)의 자금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원제(Who Paid the Piper?: The CIA and the Cultural Cold War)에 압축돼 있듯이, 그 실체가 가려져 있었던 이 문화냉전의 요체는 ‘누가 그 (막대한) 비용을 댔는가?’라는 것이다. 물론 CIA다. 무엇을 위해? 서방 지식인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병균이 퍼지지 않도록 예방접종”을 하고, “미국의 외교적 이권을 선취하는 길을 닦기” 위해서였다. 미국 뜻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팍스아메리카나, ‘미국의 세기’를 열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CIA는 세계문화자유회의(CCF, 나중에 국제문화자유협회로 개칭) 등 민간 위장단체들을 만들어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35개국에 그 지부를 두었다. “사실상 CIA의 가장 야심찬 전위부대 중의 하나”요 “공산주의 사상의 확산을 막는 교두보”라고 했던 세계문화자유회의는 한국에도 그 지부가 있었다. 이 컨소시엄 구성을 주도한 이가 CIA의 아버지라고도 불린 최장수 5대 국장 앨런 덜레스(1893~69)다.
컨소시엄은 대변지 <인카운터> 등 20종이 넘는 선전매체(잡지)들을 발행했으며, 통신사까지 소유하고 수많은 학술행사, 전시회, 콘서트, 대형 국제회의 등을 열었다. 한국에서도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가 이 컨소시엄과 무관하지 않으며, 1953년에 창간된 잡지 <사상계>가 미 공보원(USIS)의 자금 지원을 받아 탄생했다는 망명객 정경모의 증언도 있었지만 일본의 <자유>, 이탈리아의 <템포프레젠테> 같은 반공주의 잡지들이 CIA 자금 지원으로 창간됐다.
조지 오웰, 버트런드 러셀, 장 콕토, 한나 아렌트, 솔 벨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쇼스타코비치, 레너드 번스타인, 대니얼 벨, 아서 슐레진저 2세…. 서방 지식계를 이끈 유명인사들도 대거 등장한다. “모르고 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전후 유럽의 작가, 시인, 미술가, 역사가, 과학자, 평론가 중 이 은밀한 사업과 연관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중은 CIA의 반공 심리전 각본에 따라 알게 모르게 동원·포섭된 이들의 작품과 의견, 태도,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받아 “사실은 누군가가 바라는 대로 움직인다 해도 스스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고 믿게 되는” 상태에 빠졌다. 이 ‘세뇌’ 작전에 가담한 유명인들은 돈을 받아 교양계층의 안락한 기득권을 유지하며 CIA에 포박당했다(한승동 선임기자, ‘문화냉전’ 이끈 CIA는 왜 괴물이 됐나, 한겨레, 2016-10-27)

이처럼 제국주의의 프로파간다 대상에는 나중에 미국 정보기관의 밀정 노릇을 하고 동료들을 정보기관에 넘기던 조지 오웰 같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비롯해 서방의 저명한 지식인들 상당수가 포함됐다.
미국의 프로파간다는 해를 갈수록 점점 더 세력되지고 교활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단체를 포섭하여 진보적 담론의 이름으로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는 경우가 점점 더 빈번해지고 있다.
미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한국에서 정치인, 경제인, 학자, 언론인, 문화인, 사회단체인 등은 미국 CIA에 직접 포섭되거나 미국의 이데올로기 전파자 역할을 수행하는 미국 간첩들로 넘쳐난다.
최근 유행하는 각종 인권담론, 개인담론, 성적담론 등 ‘신좌파’ 이름으로 쏟아지는 이데올로기도 미제의 진화된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와 깊게 연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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