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는 어떻게 현대 좌파를 창조했으며 우파는 왜 여전히 그것을 맑스주의 계획이라고 생각하는가?
라이안 퍼킨스(Ryan Perkins)
Jul 30, 2025년 7월 30일
출처
https://ryanperkins.substack.com/p/the-ghost-in-the-machine
1. 서구의 전후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급증 (1945–1955)
비록 역사에서 대체로 지워졌지만, 2차 세계대전 직후 서구 세계 전역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정당들은 인기가 급증했다. 전쟁의 파괴, 구 체제의 붕괴, 그리고 대공황과 같은 자본주의의 전전 실패에 대한 기억은 모두 전례 없는 정치적 재편성에 기여했다.
프랑스부터 이탈리아, 영국부터 그리스까지, 한때 정치 스펙트럼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노동자, 지식인, 그리고 전쟁에 지친 대중의 대규모 운동을 배경으로 주류 정치로 급부상했다.
서유럽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정당들은 재건, 사회 정의, 평화의 수호자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기존 엘리트들은 파시스트와의 협력이나 무능으로 인해 전후 광범위하게 신뢰를 잃었다. 대조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종종 반파시스트 저항 운동을 이끌었고 대중의 신뢰가 깊어진 상태로 등장했다.
나치 독일을 격파하는 데 있어 붉은 군대의 역할은 공산주의의 위신을 더했고, 소련은 산업 발전과 반파시스트 강국의 대안 모델로서 서구의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인기로 두 번째 적색 공포(매카시즘)가 발생했다. 국내 또는 외국의 공산주의자들이 미국 사회와 연방 정부를 잠식하거나 전복하고 있다는 인식은 트루먼 독트린과 매카시 재판으로 귀결된 일련의 가혹한 국내 행적 숙청으로 이어지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이제 대중의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1945년 이후 10년은 혁명적 사회주의가 서구의 가능한 미래처럼 보였던 드문 순간으로 남아 있다.
2. 마셜 플랜 (그리고 숨겨진 부속물)
사회주의 좌파에 대한 대중의 존경은 냉전 긴장이 고조되면서 곧 충돌하게 되었고,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공산주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한 지속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마셜 플랜(1947)은 사회민주주의 모델로 유럽을 재건함으로써 공산당의 선거 인기에 대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마셜 플랜은 훨씬 더 나아갔다.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의 매력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정보 기관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자신들이 만든 비밀 혁명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들은 반공주의적 사회, 문화, 지적 생태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계급 정치를 회피하고 혁명 대신 사회 변환에 대한 급진적 개인주의적 해석을 지지하는 대안적인 ‘반체제 좌파’를 형성하려 했다.
1950년대 초까지 냉전은 군대와 경제뿐만 아니라 사상, 미학, 지적 정당성의 국제적 경쟁으로 격화되었다. 소련은 역사, 계급, 진보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노골적인 친자본주의 선전이 아닌, 비트 시, 현대 미술, 그리고 난해한 좌익 잡지로 자신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시작했다.
마셜 플랜 사무소 – 경제협력처(ECA)와 이후 상호안보처(MSA)와 같은 – 는 중요한 군사적 엄폐물을 제공했다. 문화자유회의(CCF), 출판물 및 행사는 유럽부흥계획(ERP, European Recovery Program, 마셜플랜)는 해외 사무소를 통해 용이하게 진행될 수 있었으며, 이는 미국중앙정보국(CIA)의 직접적인 관여를 숨겼다. 자금은 때때로 유럽부흥계획 계정이나 관련 재단을 통해 세탁되었다.
3. 기계 속의 유령* 창조
이러한 아이디어의 조용한 전쟁을 조종한 것은 CIA였다. 사립 재단, 문학 평론, 엘리트 학술 회의의 허울 뒤에서, 이 기관은 문화자유회의를 통해 방대한 반공주의 좌파 지식인 생태계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후 포드 재단과 조지 소로스의 오픈 소사이어티(열린 사회) 재단과 같은 단체들은 이 임무의 요소들을 계승하게 된다.
* 기계 속의 유령(the Ghost in the Machine)은 반공주의 소설을 쓴 아서 쾨슬러의 1967년에 쓴 철학적 심리학 서적이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하는 기계는 인간의 뇌가 지닌 파괴적 본성을 은유하는 표현이다.(역주)
자유 민주주의를 촉진하고 스탈린주의를 봉쇄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된 것이 완전히 다른 괴물을 탄생시켰다. 급진적 예술가, 트로츠키주의자, 포스트맑스주의자, 그리고 환멸을 느낀 학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CIA는 궁극적으로 자유주의 자체를 공격하게 될 비판 문화를 배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 이 환경의 이데올로기적 후손들은 종종 “워크(Woke)”* 좌파라고 불린다. 특히 미국의 많은 보수주의자들에게 그들은 수십 년에 걸친 맑스주의적 전복의 절정으로 비춰진다.
* 워크는 깨우다, 각성시키다(wake)의 과거형으로 미국의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서 정치적으로 각성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사사건건 말과 의식을 교정하려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PC)’으로 비난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역주)
역설적으로, 이 운동의 기원은 모스크바가 아닌 워싱턴, 랭리, 그리고 뉴욕의 회의장에 있다.
4. 반공 문화전선 만들기
1950년, CIA는 문화자유회의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이는 서구 전역에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며 반공주의적인 문화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한 방대한 계획이었다.
마이클 조셀슨과 당시 CIA 정보대응국장이자 모더니스트 시를 좋아했던 제임스 지저스 앵글턴(James Jesus Angleton)과 같은 요원들 주도로 문화자유회의는 문화적 초강대 국제기구가 되었다.
이 단체는 회의를 조직하고, 작가와 예술가에게 자금을 지원하며, 잡지 Encounter(영국)*, Der Monat(독일)**, Preuves(프랑스)***를 포함한 20개 이상의 저명한 잡지에 보조금을 지급했다. 책 번역, 미술 전시회, 학술 행동에 자금을 지원했다.
* 1953년 시인 스티븐 스팬더(Stephen Spender)와 저널리스트 어빙 크리스톨(Irving Kristol)이 영국 런던에서 창간된 문예잡지로 CIA가 자금을 지원했다.
** 미국 저널리스티인 맬빈 J. 래스키(Melvin J. Lasky)가 첫 편집자였고 이후 독일인이 편집자가 되었다. 1943년 독일에서 처음 발간된 잡지로 정치ㆍ문화 에세이 언어 저널이었다. 이 잡지는 독일 점령 미군정(OMGUS)의 지원으로 공산주의와 파시즘 둘 다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발행되며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였다.
*** 1951년 문화자유회의가 창간한 최초의 간행물로 프랑스어 월간 정치·문화 잡지로 파리에 본사를 두었다. CIA의 자금 지원을 받고 창간되었다.(역주)
1999년 그의 중요한 저서 ‘Who Paid the Piper?'(누가 자금을 대었는가?)에서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Frances Stonor Saunders)가 말했듯이, 1950년대 후반까지 이 단체는 “서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 생활의 후원자”가 되었다.
임무는 다음과 같이 간단했다. 계급 의식과 계급 투쟁을 거부하는 좌파, 자본주의의 물질적 구조를 의문시하지 않지만 지적 급진주의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좌파를 지원하여 감정과 사고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를 단일한 블록으로 보는 미국 우파와 달리, CIA는 다양한 빨간색(좌파)의 차이를 구분했다. 환멸을 느낀 공산주의자들, 트로츠키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자들, 그리고 전직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주의 계급 분석에 유용한 균형추로 여겨졌다.
크렘린 홀에서 보드카가 아닌, 파리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부르주아적이고 존경받는 좌파들이 바로 대상이다.
5. 트로츠키주의자들, 추상 예술가들, 무조성* 음악가들, 그리고 이상한 신좌파
* 무조음악(Atonal Music)은 유럽음악의 전통적인 조성(tonal) 규칙을 따르지 않고, 12개의 반음을 균등하게 사용하여 으뜸음 중심의 조성 체계에서 벗어난 음무이다.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무조성주의와 12음 기법을 창안했다.(역주)
중개자를 통해 CIA가 지원한 많은 사상가들은 이전에 맑스주의나 트로츠키주의와 연관되어 있었다. 인카운터(Encounter)의 공동 편집장이자 후일 신보수주의의 창립 인물이 된 어빙 크리스톨은 한때 젊은 트로츠키주의자였다. ‘Darkness at Noon'(한낮의 어둠)*의 저자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는 전 코민테른 회원에서 반소련 논객으로 변신한 인물이다. 그들과 그와 같은 많은 이들은 임금뿐만 아니라 명성과 강단으로 보상을 받으면서 이념이라는 냉전 전장에서 이데올로기 용병이 되었다.
* 《정오의 어둠 》(독일어: Sonnenfinsternis , lit. ‘ 일식 ‘ )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의 소설가 아르투르 쾨슬러가 1940년에 처음 출판한 소설이다. 국내에서는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한낮의 어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국내 후마니타스 출판사는 이 책을 “혁명 이후 권력의 문제를 그린 아서 쾨슬러의 대표작”으로 “흔히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와 더불어 공산주의 정치체제에 대한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거론되는 아서 쾨슬러의 대표작”으로 소개하고 있다. 후미니타스는 “혁명 정부의 2인자였던 루바쇼프는 어느 날 반역과 최고 지도자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되어 집요한 심문을 받는데, 심문은 옛 동지였던 이바노프, 혁명이 낳은 새로운 세대이자 냉정하고 이성적인 전형 글레트킨, 그리고 자기 자신과, 혁명·대중·도덕·양심·권력·정치 등에 대해 벌이는 치열한 논쟁이다. 글레트킨은 루바쇼프에게, 결백하더라도 유죄를 인정함으로써 대중들이 당에 대한 반대파를 경멸할 수 있게 하는 것, 옳은 것은 보기 좋게 도금하고, 틀린 것을 검게 칠하라고, 자신을 희생해서 혁명을 지켜 내는 것이 당이 루바쇼프에게 요청하는 마지막 봉사라고 말한다. 루바쇼프는 고민한다. 침묵 속에서 죽을 것인가, 마지막까지 당에 봉사할 것인가.”라고 하여 이 책이 스탈린 시대 트로츠키를 포함한 반대파들의 숙청을 통해 소련을 전체주의 독재체제로 비판하는 책임을 알 수 있게 한다.(역주)
하지만 자금 지원 대상은 사상 영역만이 아니었다. 미학도 그 대상이었다. 냉전의 가장 초현실적인 장 중 하나에서 CIA는 당시 급진적이고 비순응주의적이며 개인주의 일색으로 여겨졌던 예술 운동인 추상 표현주의*를 비밀리에 옹호했다. 현재 미국 예술가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빌렘 드 쿠닝은 모두 검열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얽매이지 않은 아방가르드 창의성의 증거로서 국제적으로 선전되었다.
*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반대하는 미술 사조로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등장한 추상 미술 운동이다. 작가의 주관적 감정과 내면을 격정적으로 표현한다. 노골적으로 반공주의를 내걸지는 않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미국 문화의 자유와 개인주의를 부각시킴으로써 냉전 이데올로기에 봉사하였다.(역주)
음악도 무기화되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와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의 무조성과 12음 음악은 자유와 복잡성의 불협화음적인 은유로서 유럽 전역에 홍보되었다.
소련이 차이코프스키와 교향곡적 사회주의 찬가를 선호했다면, CIA는 불협화음과 자발성*을 제시했다.
* 음악에서 불협화음은 불안정하고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음의 조합을 의미하며, 자발성은 작곡이나 연주 과정에서 연주자나 작곡가의 즉흥적이고 우연적 요소가 개입하는 것을 말한다. 불협화음은 그 자체로 불안정성을 유발하며 청자에게 긴장감과 역동성을 제공한다.(역주)
비록 예술가들과 작곡가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경력이 랭글리(Langley)*의 후원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이러한 제도적 지원은 문화적 권위와 그 뒤를 이은 지적 지형을 낳았다.
* 버지니아주의 도시로 미국 중앙정보국(CIA) 본부가 있다. CIA를 ‘랭글리'()라고 은유적으로 부르기도 한다.
6.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문화 비판의 확장
CIA가 “존경받을 만한” 반공주의 좌파에 자금을 지원하면서,미국 학계에서는 또 다른 지적 흐름— 같은 방향을 가지지만 전면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은—이 확산되고 있었다.
사회연구소로 공식 알려진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1930년대에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재정립되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그리고 후에 위르겐 하버마스와 같은 사상가들은 계급 정치를 거부하고 맑주의를 문화, 심리학, 이데올로기의 렌즈를 통해 재해석하려고 시도했다.
스탈린의 소련 모델에 불만을 가지고 자본주의 민주주의에 회의적인 그들은 —계급이 아닌— 문화가 새로운 전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대중 매체, 소비주의, 기술관료적 합리성을 사회 통제의 도구로 공격했다. 그들의 작업은 후일 비판 이론, 정체성 정치, 그리고 현대 “사회 정의” 담론의 수렁에 이르는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
CIA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직접 자금을 지원하지는 않았지만—실제로 관계는 때때로 적대적이었다—그들의 문화적 인프라는 그들의 사상이 번성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학문의 자유, 인문학 학부, 반공주의 지식인에 대한 정보국의 투자는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비록 계급이 아닌 문화적 렌즈를 통해서지만—예의 바른 대화로 재진입할 길을 개척했다.
1960년대 후반까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1차원적 인간’과 같은 저작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회 모두를 억압 체제로 규탄하면서 신좌파의 지도적 사상가가 되었다. 그의 가장 지속력 있는 사상인—”억압적 관용”—은 반동적 사상이 번성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역설은 캠퍼스 급진주의와 후일 진보적 정통의 중심 교리가 되었다.
7. 냉전 전사에서 캠퍼스 혁명가로 – 이데올로기적 틀의 균열
1970년대에 이르러, 이 반공주의 지적 생태계는 균열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시민권 투쟁, 경제 위기는 새로운 세대로 하여금 소련식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미국의 자유주의까지 의문시하게 만들었다. 마르쿠제와 파농을 읽은 캠퍼스 급진주의자들은 스탈린이 아닌 국방부(펜타곤), 월스트리트, 그리고 대학 이사회를 표적으로 삼기 시작했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냉전 자유주의가 구축한 기관 내부에서, 그리고 종종 그 기관의 자금으로 그러한 행동을 했다. 많은 이들은 1950-60년대 대학 확장 붐 덕분에 학술 직위를 가졌는데, 이들은 국가 안보 국가와 포드 재단과 같은 자선 단체의 지원을 받았다.
포드 재단은 냉전 초기 CIA와 협력했던 이후, 1980년대까지 인종 관계, 여성 연구,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국제 개발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러한 보조금은 의도치 않게 서구 패권, 가부장제,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후에 그 적들에게 “워크(woke) 이데올로기”—정체성 정치, 교차성, 체계적 비판—로 알려지게 될 지적 기둥들을 지원했다.
8. 유리 베즈메노프 등장
유리 베즈메노프는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정보원이자 자칭 선전 전문가로, 1970년대에 서방으로 망명했다. 캐나다에 정착한 후 CIA 및 서방 정보계의 다른 지부들과 협력하면서, 그는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전복’ 또는 ‘능동적 조치’*라는 장기 전략이 미국 및 기타 서방 민주주의를 내부에서 약화시키고 있다고 경고하는 강연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 타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유도하고 자본주의 국가들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자본주의 폭로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 서방에 전파할 뿐만 아니라 비밀공작과 사회주의 국가와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하기도 한다는 전략을 말한다.(역주)
베즈메노프는 아마도 말단 KGB 요원이자 기회주의자였을 것이지만, 소련의 대외 및 간첩 정책에 대한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베즈메노프는 소련이 특히 학계, 미디어, 문화 기관을 통해 국내 주민의 현실 인식을 변화시키는 느리고 체계적인 과정으로 이데올로기적 전복이라는 장기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복의 네 가지 주요 단계를 다음과 같이 확인했다.
1. 도덕 해이 – 가치와 국가 정체성 훼손 (15-20년 소요).
2. 불안정화 – 경제, 외교 관계, 방어 체계를 표적 (2-5년).
3. 위기 – 폭력적인 권력 또는 구조 변화.
4. 정상화 – 새로운 정권이 질서 회복의 명목 아래 통제를 공고히 함.
그는 소련 정보 작업의 대부분이 전통적인 의미의 간첩 행위가 아니라 여론과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치는 작업이었다고 주장했다.
베즈메노프의 환상은 부상하는 ‘반체제 좌파’에게 극도의 공포를 느끼는 보수주의자들에게 그들이 공포를 느끼는 괴물은 공산주의 음모에 영감을 준 크렘린이라고 설득시켰다.
그의 주장은 새로 선출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미국의 아침’ 프로그램의 시대정신과 시스템이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렀다는 광범위하고 교묘한 기득권층의 편집증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 치밀하게 구성된 판타지는 냉전 긴장을 고조시키려는 초기 신보수주의 운동의 주장을 강화하고, 안보 국가의 가장 편집증적인 집단의 지지를 확보했으며, 그에게 미국 정보계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의 지속적인 유산은 포퓰리스트 우파 이데올로기 설계자들 사이에 오래 지속되는 맑스주의 음모론의 존재를 확고히 한 것이었다.
9. 열린사회 재단, 문화 비판의 세계화, 그리고 객관적 현실의 붕괴
정보 국가가 용인하고 후원한 반체제 정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결코 계급적 렌즈를 통해서가 문화적 렌즈를 통해 보여지도록 장려했다. 이것은 결국 사회의 급진적 변혁이 계급 의식이나 생산력에 대한 물질적 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급진적—그리고 궁극적으로 주관적인—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구조를 의문시하는 것이 금지되면서, 그 비전은 상징적 제스처, 미학적 선택을 강조하고 현실의 주관적 해석을 옹호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조지 소로스와 그의 열린사회 재단이라는 새로운 주자가 등장했다. 동유럽의 후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소로스는 교육, 시민 사회, 미디어 구상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학과, 사회 정의 구상, 트랜스 권리 운동에 자금을 지원했다. CIA와 달리 소로스는 그의 임무와 국제적인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문화자유회의(CCF)에서 포드를 거쳐 소로스에 이르는 길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제도적 환경으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은 이전의 네트워크와 가정 위에 구축되었다. 각각은 그들 버전의 ‘사상의 자유’가 공산주의에 대한 최선의 방어막이므로 서구 권력 구조를 보존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하며 자기들의 수단을 정당화했다.
그 결과 사회적 비판, 상대주의, 주관성, 그리고 도덕적 긴급성에 깊이 빠진 교수, 기자, 예술가, 활동가의 글로벌 엘리트 계층이 형성되었다.
비록 여전히 문화자유회의(CCF)와 그것이 영감을 준 급진 좌파의 문화적 유산에 깊이 젖어 있지만, 조지 소로스의 열린사회재단의 비정부기구(NGO) 및 미디어 조직 네트워크는 현실을 국제 자본의 필요성에 순응하고 묵인하는 것으로 재구성하는 도구가 되었다.
집단 정체성의 지속적인 분열과 주관성의 지속적 악화는 고립되고 권력을 잃은 개인들의 원자화된 사회를 만들어 연대를 방해한다.
미학적 변화를 혁명으로 내세우고 개별 인간 경험의 주관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것은 허무주의로 전락했다. 현대 좌파 사상은 지배 엘리트의 필요에 따라 주무를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점토가 되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약속된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그들의 지배 엘리트로부터—그리고 각자—소외되었으며, 이제 거의 정당성을 내세우지 않고 통치하는 기술관료들을 점점 더 경멸하는 사회를 위한 사회통제 메커니즘이 되었다.
10. 맑스주의 음모의 영원한 신화
지적 소매상, 사기꾼, 기회주의자, 스파이, 괴짜, 그리고 유급 선전가들의 공헌으로 인해,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현대 좌파’가 사회를 전복하려는 거대한 맑스주의 음모의 일부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문화적 맑스주의’는 좌파 학계와 운동을 위한 포괄적인 비하 어휘가 되었다.
비록 CIA가 비판적 인종 이론, 트랜스 권리 운동 또는 현대 좌파의 다른 극단적 현상을 직접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인공적인 반공주의 지적 생태계 창조에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현대 문화적 좌파를 탄생시킨 비판—철학적, 예술적, 제도적—의 인프라에 자금을 지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유산은 이제 분열되고 국제 자본의 필요에 맞게 변형되어,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벽으로서뿐만 아니라, 황폐한 디스토피아를 향해 비틀거리는 무미건조한 기술관료와 약탈적 헤지펀드 경영자들의 군대를 막기 위한 집단 행동에 대한 방어벽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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