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전쟁] 벽돌같은 책을 읽고 이런저런 상념을 기록하다 스탈린을 강력하게 옹호함
이범주
1. 스탈린…우리나라에서는 보수 뿐 아니라 나름 진보를 자임하는 인사들까지 나찌 히틀러 같은 전체주의 국가 독재자로 간단하게 간주하는 악의 화신. 그에게 안 좋은 이미지가 덧씌워진 주된 이유로는 아마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에서 있었던 정치적 반대파들에 대한 대규모의 숙청,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의도적으로 행해진 걸로 간주되는) 홀로도모르(대규모 아사), 자국 국민들에 대한 전체주의적 통제 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걸로 보인다. 그런데….그건 사실일까.
2. 사람들은 스탈린이, 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이들을 수없이 숙청했다고 (Great terror) 생각하지만 실은 다음이 진실일 것이다.
– 그의 이른바 초기 숙청엔 기존 관료적이고 무능한 당원들을 잘라내 당을 쇄신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이는 성공적이었고 불가피하기도 했다.
– 2차 대전 전에 광범한 2차 숙청이 있었지만 그 주된 목적은 독일, 일본 등 소련을 둘러싼 적대 국가들과 나라를 뒤집을 목적으로 내통한 내부의 적들을 캐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는 숙청 대상자들이 공개재판에서 자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히틀러 나치 독일과의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반혁명 모의에 가담했던 고위 당간부, 장교들이 숙청되지 않았더라면 소련이 나치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숙청된 인사들이 무수히 많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서 그 수는 동시대에 미국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들 수를 넘지 않았다. 또한 숙청당했다가 다시 직무에 복귀한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스탈린이 대숙청으로 수천만 죄 없는 인민들을 살해했다는 서사는 대표적인 반소련, 반스탈린 구라다.
3. 혁명 후 농업 집단화 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에서 발생된 대규모 아사(餓死)의 비극도 그의 의도된 정책 탓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지역 농업 집단화 정책에 반대하는 부농들은 집단화를 지도, 관철하려는 해당 지역 공산당 당원들을 테러하고 살해했으며 그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역축(役畜)들을 (공동소유로 내놓을 대신) 잡아 먹어서 농촌에서의 급격한 생산력 저하를 초래했다. 역축의 급격한 감소로 인한 생산력 저하와 열악한 기후조건이 원인이 되어 홀로도모르가 발생한 게 진실이다. 당시 소련 정부는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서의 대규모 기아사태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를 아사에서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를 근거로 스탈린의 비난하는 건 (서구 혹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행하는 부당한) 반소, 반스탈린 이념 공작이다.
4. 스탈린에게 덧씌워진 잔혹한 독재자 이미지는, 그가 1917년 혁명 후 러시아를 주위 자본주의 제국주의자들과 내부 적들로부터의 반혁명 기도(企圖)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끝나자마자 소련을 질식시킬 목적으로 서방에서 먼저 벌인 ‘철의 장막발언에 이는 냉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긴 것이기도 하다. 내부를 단단하게 해야 외부의 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실낱같은 틈을 파고들어 내부 동조자들을 만들고 그에 이은 부단한 공작으로 결국은 적국들을 무너뜨리곤 했다. 혁명을 보위하고자 하는 측에서 스탈린을 보면 그는 ‘혁명의 견결한 보위자’이지만 제국주의자들 입장에서 보면 ‘잔혹한 독재자’ ‘반민주주의자’인 것이다.
5. 평화주의자 스탈린
스탈린은 진정으로 평화를 원했다. 소련이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은, 전쟁에 필요한 준비기간을 확보하려고 그랬다는 것이 지배적 의견이지만, 이 책에 의하면 진정이었다. 그는 또 영국, 미국과 맺은 ‘대연합’이 구현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비록 체제는 다르지만 사회주의 국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이 공존, 공영할 수 있다고 그는 믿었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체 내 원칙에 충실하게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칠과 트루먼은 그렇게 생각했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독일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해 영국, 미국과 맺은 ‘대연합’이, 2차 대전이 종결된 이후에도 의미있게 작용해서, 전후 세계를 평화와 공존의 원리에 의해 운영해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이 기대를 배신한 것은 미국과 영국이었다. 처칠과 트루먼은 1947년, 소련이 사회주의 체제를 확장해 나가려 한다면서 이를 막기 위해 소련을 봉쇄하는 철의 장막을 세우고 냉전으로 대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로 인해 나찌에 대항해 무장투쟁하던 그리스 좌익이 괴멸되었고 한국에서는 제주도에서의 4.3민중항쟁이 잔혹하게 진압되었으며 반도 남쪽에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전쟁의 불씨를 키운 당사자는 미국과 영국이었다.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중들 뇌리에 세계지배 야욕 가진 공포적 존재로 각인된 것은 소련이었다. 그리고 소련에게 붙여진 그런 이미지 기저에는 스탈린이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진실로 평화를 희구한 정치인이었다.
6. 2차 대전 후 사회주의권으로 편입되었지만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은 독일 편에서 소련과 싸웠던 추축국의 일원이었고 발트3국, 폴란드, 우크라이나에는 소련에 적대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강성했으며 유고슬라비아는 냉전 상황에서 사회주의권의 단결을 중시하는 소련의 의도에 반하여 개별적으로 凡사회주의권에서의 이탈을 모색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內破의 에너지가 도처에 잠복해 있는) 이런 조건에서 자국 혁명을 보위하고 사회주의권을 통솔했으며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탈을 막아내야만 했다. 스탈린은 결코 쉽지 않은 이 일을 해냈고 그에게 붙여진 ‘잔혹한 독재자’ 이미지는 이 성과에 대한 사실상의 상찬이다. (그리고 당시 잠복해 있던 그 내파 에너지는 결국은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않아 소련의 붕괴를 불렀고 그 영향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에도 작용한다. 2차 대전 후 동구 사회주의圈은 견고하게 단결되어 있지 않았고 소련의 내부도 상당히 물렁물렁했다.)
7. 그를 긍정적으로 봐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 그는 혁명 후 후진 농업국이던 러시아를 단숨에 생산력 최고 수준의 공업국가로 전변시켰다. 만약 그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만 막강 군력(軍力)의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은 결코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스탈린은 3천만 가까운 소련인민 인명손실을 감수하면서 초인적인 인내와 탁월한 능력으로 나찌독일을 패퇴시켰다.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나찌 독일에 대해 승리한 공(功)의 대부분은 소련에게 돌려져야 한다. 미국 영국 등의 서방은 소련 인민들이 전쟁 대부분 기간 동안 3천만 목숨을 갈아 넣으면서 고통스럽게 거둔 승리의 막판에 숟가락 얹는 정도의 기여를 했을 뿐이다. 소련 인민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인류는 오랫동안 파시즘 압제로 고통받아야 했을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스탈린의 개인적 위대함, 소련 인민들 전체의 위대함은 아무리 상찬받아도 부족하다. (그런데도 미국 등의 서방국들은 자신을 그 승리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파렴치한 일이다.)
8. 스탈린은 생존시 자국 인민들에게 최대한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지도자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지도자, 그 나라 국민들도 그를 존경했다. 하지만 전후 미국, 영국이 스탈린을 배신하고 냉전으로 선회하면서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졸지에 전체주의 국가의 잔혹한 독재자로 되었다. 그에 이어 권력 잡은 흐루쇼프가 그를 격하하면서 소련 국내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견지한 원칙과 사상이 폐기되거나 흐려지면서 그와 더불어 위대했던 소련도 점차 몰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1991년에 붕괴했다.
9. 대한민국에서는, 자신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민주주의자임을 은연히 뽐내면서, 스탈린을 히틀러와 다를 바 없는 전체주의 체제의 독재자로 단정하며 비난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체제 국가가 전체자본의 재생산 위기를 돌파할 목적으로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안정시키고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하게 채용하는 계급독재 수단이다. 이를 일러 전체주의라 한다. 반면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반혁명의 폭력으로부터 혁명을 보위하고 극소수 자본가에 대한 대다수 노동계급 독재를 관철시키기 위해 계급독재를 시행한다. 이 체제는 자본주의 국가의 전체주의와는 본질과 성격을 달리한다. 이 나라 교양인들은 이 양자를 동일시하니 스탈린과 히틀러가 같게 보이는 것이다.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에는 태평양 만큼이나 넓고 깊은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스탈린은 교양인들 가벼운 혀 끝에 놓여 운위되기에는 너무도 무겁고 위대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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