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어떻게 폴란드 인민의 해방을 도왔는가?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지난해 2024년 12월 필자는 폴란드의 극우 반공주의와 이들의 역사왜곡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 운동으로 알려진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이 사실은 미제 CIA의 하수인이었고, 민주화 운동가로 칭송받는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가 집권 이후 발세로바츠 계획을 통해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막으며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노동자들의 연금을 민영화시켰다는 것을 폭로했다.
바웬사의 그단스크 조선소를 중심으로 한 연대노조운동은 서방 제국주의의 후원을 받는 레짐체인지(정권교체)의 일환이었다. 국가자본주의론을 외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 운동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지만 이는 이들이 반공주의로 제국주의 벗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편집자 주) |
이와 더불어 현재 폴란드 반공정권이 왜곡하는 소위 ‘소련의 폴란드 점령’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이 맥락에서 필자는 1943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창설된 폴란드 인민군에 대해 언급했다. 폴란드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을 알고 싶으면 아래의 링크 글을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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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련은 폴란드의 해방을 어떻게 도왔을까? 소련은 폴란드 해방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을까? 오늘은 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이후 폴란드는 불과 2주 만에 나치 독일에 의해 국토가 점령당했다. 그해 8월 나치 독일과 소련에 의해 성사된 몰로토프-리벤트로 1944년 6월프 조약(즉,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라 폴란드의 영토는 나치 독일과 소련이 분할했다. 사실 1939년 소련이 접수한 동부 폴란드의 경우 친소주의자들도 제법 있었으며, 루블린과 같은 동부 지역은 소련군을 환영했다.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폴란드군 일부 잔존 세력들이 나치 치하의 폴란드를 벗어나, 궁극적으로 영국으로 가서 망명정부를 세웠다. 이게 1939년에서 1940년에 있던 일이었다. 폴란드 망명정부를 세운 사람으로는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와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중장이 유명하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30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 당시 폴란드 망명정부는 소련 정부에 대해 양면적인 입장을 취했다. 비록 그들은 소련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고, 1944년 바르샤바 봉기도 이들의 해방을 막기 위해 전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과 협력하기도 했다. 개전 초기인 1941년 7월 12일 폴란드 망명정부는 소련과 공동행동협정, 7월 30일 폴란드-소비에트 협정(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 그리고 8월 14일 폴란드-소비에트 군사협정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의 완전무효화, 폴란드와 소련 사이의 국교회복 및 대독일전 수행을 위한 상호원조와 협력, 소련 영내에서의 폴란드 군부대의 편성”등의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1941년 10월 25일 소련에서 최소 4만 명 이상의 폴란드군이 창설됐다. 모스크바 전투 승전 직후인 1942년 2월에는 그 규모가 7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망명정부는 반소적인 태도를 전혀 버리지 않았다. 망명정부는 폴란드 내의 여러 반파시즘 조직에 소련에 대한 반감을 조장했으며,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 소련으로 편입된 지역의 폴란드 공산주의자 그룹은 그 지역에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와 사회제도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활동에 적극 참가했었다. 이것이 독소전쟁 개전 초기의 상황이었다.
1942년 1월 5일에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노동자당 창당대회가 열렸으며,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았다. 이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폴란드에 노동자 대중의 인민민주주의적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히틀러 파시스트 점령군으로부터의 민족해방과 독점자본 그리고 지주의 지배와 착취로부터의 근로인민의 사회적 해방”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고자 했다. 이들은 1942년 말 즉,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한참이던 시기 총 8,000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했다. 여기에는 소련군의 반격과 나치의 테러 그리고 노동자 정당에 대한 망명정부의 수동적인 태도가 한몫했다.
또한, 이들이 형성한 폴란드 내의 빨치산(파르티잔)들의 활동도 비교적 활발했다. 1943년 기준 폴란드 노동자당이 지휘하는 빨치산은 대략 60개 이상의 소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규모는 1,500명 정도였다. 이와 더불어 소련 정부의 동의와 물질적 원조를 받으며 재소련 폴란드인으로 구성된 폴란드군 제1사단이 편성됐다. 사실 이 군대는 앞서 언급한 1941년에 창설된 군대와는 전혀 다른 군대였다. 제1사단은 1943년 5월에 창설되었으며, 1943년 10월 초 소련군과 함께 스몰렌스크 해방작전에 참여했다. 이게 바로 폴란드 인민군(Polish People’s Army, Ludowe Wojsko Polskie)이다. 1944년 6월 영미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키자, 소련군은 이른바 바그라티온 작전을 실행했다. 이 작전에 폴란드 인민군도 참가했다.
이 시기 소련군과 폴란드 인민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나치 독일 치하의 폴란드 영토 및 동유럽 영토들을 해방했다. 그러나 그들의 진격은 바르샤바를 코앞에 놔두고 멈췄다. 이들이 폴란드 바르샤바를 해방한 것은 1945년 1월에 들어서인데, 이 부분에 대해 현재 폴란드의 극우 반공주의자들은 소련군이 폴란드의 민족주의자들 역량을 의도적으로 말살시키기 위해 독일의 학살극을 지켜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군사적인 측면에 있었다. 사실 소련군의 바르샤바 해방은 바그라티온 작전이 끝나갈 때즘 소련의 붉은 군대에게 새로운 목표로서 명령이 하달됐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명을 가지고 동부전선에서 소비에트를 침략했다. 1944년 6월 22일 소비에트 군대는 독일군 침략의 날과 같은 날 당시 소비에트 벨로루시에서 바크라티온 전투를 통해 40만에 달하는 히틀러 중부군을 괴멸시켰다. 10만이 넘는 유격대는 배후에서 파시즘 군대를 공격했다. 노르망디 신화가 아니라 바크라티온 전투를 전환점으로 폴란드를 비롯해 동서유럽이 파시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계기가 됐다.
사진 위는 벨라로스 폴로츠크를 행진 중인 소비에트군. 아래는 포로가 된 독일군들이 모스크바에서 포로행진을 하고 있는 장면.(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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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바르샤바 봉기는 소련군과 폴란드 인민군을 포함한 기타 바르샤바의 군사조직과도 사전에 아무런 협의도 없이 시작되었다. 즉, 소련군의 바르샤바 해방 목적을 막기 위해 실행되었다는 얘기다. 그래도 8월 1일 봉기가 시작되자 나치 독일 치하 폴란드 내의 공산주의 성향의 국내조직들도 봉기에 참여했다.
봉기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소련의 붉은 군대와 폴란드 인민군에게 전달되자, 이들은 봉기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했다. 또한, 공산주의 성향의 봉기단 본부와도 연락을 취했다. 이에 따라 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봉기군에게 무기와 물자도 공급했다. 1944년 9월 4일부터 10월 1일까지 총 2,243회에 걸쳐 소련군의 공수작전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박격포 156문과, 대전차포 505정, 자동소총과 2,667정, 수류탄 4,178개, 포탄 300만 발, 식량 113톤, 의약품 500kg이 투하됐다. 이와 관련한 얘기는 앞서 올린 링크에서도 언급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바르샤바 봉기는 나치 독일이 진압을 하면서 비극적인 학살로 종결됐다. 이 과정에서 나치는 폴란드 민간인 15~20만 명을 학살했다. 전쟁 끝날 당시 폴란드의 바르샤바는 도시의 80%가 파괴되었는데, 이는 나치 독일에 의한 것이었다. 앞서 소련이 지원한 폴란드 노동자당은 1944년 7월 기준 2만 명의 당원을 보유한 당으로 발전했다.
그 전에 나치 독일에 의해 5,000명이 학살당했음에도 꾸준히 자체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폴란드 노동자당은 다음 해인 1945년에는 23만 5,000명의 당원을 보유한 대중정당으로 발전했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은 현재 폴란드 반공주의 정권은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폴란드 인민군은 가장 먼저 창설된 제1사단을 중심으로 여러 부대들을 통합하여 제1군을 편성했다. 1944년 7월 20일 기준 병력은 10만 777명에 이르러, 4개의 보병사단, 1개의 기병여단, 1개의 전차여단, 2개의 중포병 부대, 1개의 대전차구축대, 1개 여단의 곡사포 부대, 1개 여단의 박격포 부대, 1개 여단의 공병대로 구성됐다. 폴란드 인민군 제1군은 대포 1,514문과 182대의 탱크 그리고 그 밖의 현대적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소련군의 지원하에 폴란드 인민군은 질적으로 병력과 장비가 증가하고 발전했다. 당연히 사령부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역사학자 시바타 마사요시의 말처럼 폴란드 인민군은 “노동자와 굳게 결합되고, 또 노동자에게 봉사하는 새로운 유형의 군대”였다.
폴란드 내의 빨치산들은 이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소련군으로부터 무기 및 탄약을 보급 받았고, 군사전문가의 파견 등과 같은 원조도 받았다. 이에 따라 폴란드 내의 빨치산 운동도 성장했다. 소련 내의 빨치산도 이들을 도와 전투에 참여했다.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소련군이 해방한 폴란드 지역에서는 반파시즘 세력 및 민중 그리고 그 외의 빨치산들이 결합하여 폴란드 인민군을 도왔고, 이들의 지원으로 폴란드 인민군의 규모가 증강됐다.
1944년 말 폴란드 인민군의 총병력은 29만 명을 돌파했다. 30만 명 규모의 대군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던 시점에는 병력이 40만 명을 돌파했다. 1943년에 창설된 폴란드 인민군의 규모가 질적으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는 수치다.
1945년 1월부터 2월까지 소련군은 이른바 비스와-오데르 작전을 게시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붉은군대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해방했다. 1945년 2월 공세가 소강상태에 이르렀을 때 붉은 군대의 선발 부대들은 독일 수도에서 80km 지점까지 도달했다. 당시 작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220만 명의 병력에, 4,500대의 탱크, 5,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했다. 붉은 군대는 하루에 25~30km 속도로 진격하면서 총 14만 7,000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붙잡았으며, 50개 이상의 독일군 사단을 파괴하거나 거의 파괴할 수 있었다.
비스와-오데르 작전은 2월 말에 마무리 되었다. 이 작전에 당연히 폴란드 인민군도 소련군과 함께 참여했다.
이후 소련군은 기세를 몰아 1945년 봄에 독일 국경을 돌파했고, 폴란드 인민군도 이에 동참했다. 1945년 봄 폴란드 인민군은 오데르 강 전선에만 78,0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이는 소련의 베를린 해방을 위해 사전에 배치된 병력이다. 베를린 공방전에서 동원된 폴란드 인민군의 병력은 15만 명을 넘겼다. 이 중 10,4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최소 2,800명 이상이 전사했다. 1945년 4월 30일 소련의 붉은 군대가 베를린의 제국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꽂고, 히틀러가 자살하자 나치 독일은 5월 8일에 항복했다. 이렇게 하여 폴란드 인민군은 반파시즘 해방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소련은 폴란드의 해방을 위해 수많은 피를 흘리며 진격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나 트레블링카 수용소 같은 사망률 90%가 넘는 나치의 반인륜적 절멸수용소를 해방했다.
심지어 서방 사회에서 유명한 문학이자 기록인 <안네의 일기(Het Achterhuis, The Diary of a Young Girl)>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따지고 보면 소련군 덕분이다. 왜냐하면, <안네의 일기>에 나온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Otto Frank)은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를 해방한 소련군에 의해 구조됐다. 소련군은 안네의 아버지를 나치로부터 해방시켜주었고, 건강도 회복시켜주었으며, 온 세상에 나치의 반인륜적 만행을 알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준 셈이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소련을 나치와 동일시하는 집단 서방은 역사를 왜곡하며 국민들을 반공 반러 바보로 만들고 있다.
정리하자면, 소련은 폴란드를 해방했다. 그리고 폴란드 인민군을 조직하여 이들이 해방군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나치가 1942년 반제회의 이후 벌린 홀로코스트로부터 폴란드를 구원했다. 또한, 폴란드 인민군은 소련군과 함께 해방전쟁을 수행했고, 베를린 공방전에 참여하여 나치를 패망시키는데 공로를 세웠다.
이와 같은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폴란드라는 반공 반쏘 반러주의 국가가 과연 정상적인 국가인지 필자는 심히 의심이 된다. 또한, 이런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한국인들은 서구가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는 루쏘포비아적 시각에서 그리고 폴란드 극우의 시각에서 “쏘련이나 나치는 똑같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학살했다.”는 역사적으로 말이 전혀 되지 않는 소리가 진실인냥 착각하고 있다.
왜곡된 역사 교육은 단순히 2015년 박근혜 때 시작된 국정교과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유럽에도 있다. 바로 소련을 극구 부정하며 소련이 세운 업적을 무시하는 집단서방의 정치적 반러 행위와 거기에 기반한 교과서적 서술들이야 말로 역사왜곡의 정점을 찍은 파렴치한 행위다.
작년 여름 폴란드를 방문했던 나는 이런 집단서방의 악의적인 역사왜곡에 맞서 싸워야 한다 생각한다. 따라서 소련은 폴란드를 점령한 주체가 아니라 해방시킨 주체였고, 나치의 파멸과 학살로부터 폴란드 인민을 구원해주고 자신들의 조국을 건설할 수 있게 도와준 은인이다. 필자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이것이 역사의 진실이라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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