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 일극 지배체제의 쇠퇴가 인류의 진보가 아닌가? – “다극화된 제국주의”라는 인식은 다극화된 두뇌, 분열적 인식의 소산이다
* 이 글은 4월혁명 64주년 특집 <새로운 세계 질서 동풍이 서풍을 지배하고 있다>를 주제로 한 [사월혁명회보](2024.9/제138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여기서는 지면의 제한상 줄였던 글을 원문 그대로 싣습니다.
전국노동자정치협회 편집위원장 백철현
미제국주의 중심의 일극 패권질서에 맞서는 다극화를 둘러싼 논란은 단순하게 현학적인 논쟁이 아니다. 이 논쟁은 러-우전의 성격을 둘러싼 논란,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전쟁(이스라엘의 침략과 학살과 이에 대한 저항), 중국과 대만분쟁, 이곳 한반도에서 남북 간 대립, 아프리카에서 니제르, 말리 등 사헬지역 나라들의 프랑스 및 미제국주의와의 투쟁, 남미에서 미국과 반미국가들의 투쟁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며 이 인식에 따라 그 실천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한 사안들은 지역적인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 세계적 차원의 문제다. 특히 러우전은 유라시아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이 전쟁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 전체가 우크라이나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벌이는 전쟁이다. 조선을 비롯해 반미자주를 지향하는 국가들은 러시아의 편을 들고 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도 미제를 등에 업은 이스라엘 시오니스트 학살자들에 맞서 예멘, 레바논, 이란 등 저항의 축 국가들이 참여하는 중동전으로 확전되고 있으며 이 전쟁은 서방 제국주의와의 대결전의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반도에서 남북 간 대립 역시 미일한·나토 대 조중러 간의 대결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모든 세계적 차원의 전쟁과 분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미제 중심의 일극체제 대 중·러 중심의 다극체제 혹은 글로벌 노스 대 글로벌 사우스, 북반구 대 남반구의 대결,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다극화 현실, 다극화된 분열적 인식
<사월혁명회>에서 4월혁명 64주년 특집호로 기획한 “새로운 세계 질서 : 동풍이 서풍을 지배하고 있다”는 주제 역시 이러한 전 세계적 정세에 대해 다루고 있다. 위 기획에서 말하는 과연 “동풍이 서풍을 지배하”는 데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미제국주의를 포함해 서방제국주의의 패권질서가 약화, 후퇴하고 비서방 국가들이 부상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극화를 주도하고 있는 동풍의 성격, 그 동풍의 성격으로 인한 인류의 전망, 러우전의 성격, 중국과 러시아의 사회성격을 둘러싸고는 첨예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 논란은 국제적으로도 공산주의 진영을 분열시키고 있다.
과연 미제 중심의 일극 패권 체제에 맞서는 다극화는 진보적인가? 과연 다극화는 패권경쟁인가? 패권 대 반패권의 투쟁인가? 아니면 다극화는 신제국주의의 부상을 알리는 신호인가?
국제적으로 그리스공산당(KKE)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공산주의 세력은 전 세계 질서를 미국 중심의 기존 서방 제국주의 대 중국, 러시아 중심의 신흥 제국주의 간의 패권경쟁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러우전은 서방 제국주의 대 러시아 제국주의 간의 영토, 원료, 시장, 노동력을 둘러싼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장석준, 정성진 같은 신‘좌파’ 지식인들을 포함해 노동자연대, 노동자혁명당 같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가 이러한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특히 노사과연과 채만수 소장은 맑스레닌주의를 자처하면서도 최근 수년 동안 집요하게 중국과 러시아의 제국주의성을 폭로하기 위해 매진하고, 러우전은 시장, 원료를 둘러싼 제국주의 간 전쟁이며 심지어 현 다극화 되고 있는 세계 질서를 “제국주의 다극화 혹은 다극화된 제국주의”로까지 규정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다극화는 제국주의 세계질서의 다극화이며, 따라서 그것이 형성하는 자본주의 세계질서 혹은 그 ‘다극체제’는, 거듭 말하지만, 다극의 제국주의 체제이다. 현재의 조건에서 그 다극화의 양상은 물론 ‘미제 일극 지배체제’에서 ‘다극체제’로 변화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극체제’는 여전히 제국주의 체제, 제국주의 다극체제인 것이다 …
‘다극화’에 의한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다극체제, 다극의 제국주의는, 저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시장과 자원의 지배를 둘러싼, 즉 세계의 재분할을 위한 제국주의 열강 간의, 제국주의 블록 간의 갈등ㆍ대립이 격화된, 그리고 더욱 격화되는 세계이다. 제국주의 간 전쟁의 위협이 상존할 뿐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처럼 제국주의 간 전쟁[17]이 현실화하는 세계이다.
미제, 나아가 제국주의 일반의 분쇄ㆍ극복은, 결코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다극화’ㆍ‘다극체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노동자ㆍ인민의 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채만수, 제국주의의 다극화, 혹은 다극의 제국주의에 대하여,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정세와 노동], 이하 특별한 인용이 없으면 같은 글)
하편이 아직 공개되지 않아서 정확한 결론은 알 수 없지만 채만수 소장이 하고자 하는 핵심 주장과 결론은 위 인용문에 다 나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채만수 소장의 주장은 다극화는 미제 중심에서 중국 제국주의와 러시아 제국주의로의 패권 경쟁에 불과하기 때문에 제국주의 극복은 다극화가 아니라 “오로지 노동자ㆍ인민의 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먼저 채만수 소장은 자신들이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싸워 왔는데 중국과 러시아를 제국주의라고 규정했다는 이유만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동격으로 비난했다고 격분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인용문 단락을 보자.
“미제, 나아가 제국주의 일반”, 채만수 소장이 제국주의로 간주하는 중국 역시 오로지 노동자·인민의 혁명에 의해서 “분쇄·극복”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채만수 소장이 말하는 혁명은 가장 악명 높은 트로츠키주의 종파주의자들인 <노동자연대> 같은 ‘국제사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오직 국제혁명”이라는 양비론적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이 구호는 오늘날 소비에트 체제가 해체된 지금 사실상 “워싱턴도 베이징도 아닌 오직 국제혁명”이라는 구호로 변모되었는데 채만수 소장의 주장이 이와 하등 다를 게 있는가?
중국사회(여기서는 불필요한 논란을 배제하고 합리적인 논쟁을 위해 그냥 중국사회라 하자)가 해체되면 진보적 인류에게 축복이겠는가? 재앙이겠는가? 우리와는 무관한 문제이겠는가? 중국사회가 해체되면 국공유기업이 사유화 되고 수백, 수천만 실업자가 생겨날 것이다. 통합된 다민족 국가 내부에 극심한 혼란과 내란이 벌어져 민족분규가 일어나고 수십, 수백만의 사상자가 생겨날 것이다. 순망치한 혈맹관계인 조선은 한층 더 고립될 것이다. 중국을 적대하는 미제국주의는 환호하고 세계 패권은 강화, 연장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을 제국주의로 규정하는 채만수 소장에게 중국의 해체는 반혁명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자들이 소비에트 해체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게걸음’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채만수 소장이나 노사과연에게 중국은 제국주의, 심지어 “강도와 같은 제국주의”인데 중국의 격변상황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도리어 트로츠키가 그러했던 것처럼, 중국의 해체와 내란상황은 중국‘자본주의’를 해체하고 진정한 인민혁명을 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환호하지 않을까?
진보진영 내부에서 다극화를 염원하는 이들은 최소한 미제와 서방 제국주의 패권의 약화를 염원하고 이를 기회로 이 땅에서 전쟁을 획책하고 분단을 고착화 시키는 미군을 철수시키고자 한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공세와 반중 혐오 조장에 맞서 투쟁한다. 그리고 <다극화 포럼>이 보여주는 것처럼 서방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와 그 추종 언론들의 위선적 이중잣대와 왜곡을 폭로하고 대중들의 독립적 인식을 높이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극화를 열망하는 것이 “노동자ㆍ인민의 혁명”에 해가 되는 것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채만수 소장은 세계적으로나 이 땅에서 “노동자·인민의 혁명”을 어떤 수단과 경로로 구현하겠다는 것인가? 특유의 교조주의적 태도로 ‘순수한’ 계급혁명을 구현하려 하는가? 그러면 러시아혁명처럼 무장봉기를 하자고 배포 있게 주장이라도 해보라.
레닌은 “순수한 혁명을 고대하는 사람은 평생 혁명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교조주의자들이 순수 혁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 세계의 진보에 그다지 해는 끼치지 못할 것이기에 그런가보다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채만수 소장과 노사과연의 교조주의적 정치적 태도는 종파주의·기회주의적 태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고 있다.
노사과연과 채만수 소장이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그리스공산당은 중국은 독점자본주의, 제국주의로, 쿠바는 시장사회주의로, 조선은 족벌세습체제로 비난하며 적대시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공산당 7차대회에서 제출한 반파쇼 인민전선은 계급협조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리스공산당은 중국을 제국주의라고 규정하기에 대만 분쟁을 미제와 중제 양 제국주의 간 충돌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스공산당은 ‘제국주의 피라미드론’을 제출하여 독점은 곧 제국주의이기에 대다수 나라들이 제국주의가 되었고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말한 한 줌도 제국주의가 압도적 다수의 민족, 인민을 착취, 수탈, 억압, 침략하고 금융적으로 교살하고 노예화 하는 제국주의 시대는 가고 이제 국제질서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 “불평등한 상호의존, 경쟁, 협력의 관계”로 변모했다고 주장한다.
노사과연과 채만수 소장은 그리스공산당의 ‘제국주의 피라미드론’을 그대로 동조하여 한국도 제국주의가 되었고 독점을 가진 모든 나라가 제국주의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에서 침략성·지배성을 제거하는 노사과연의 경제주의적 제국주의론”1, 2를 참고하기 바란다.)
채만수 소장은 한국이 제국주의가 된 근거로 동남아에서 한국이 이 나라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고 미국에 자본수출을 하고 있는 사례를 들고 있다.
동남아에서 한국자본이 이 나라 노동자들에게 저임금, 장시간 노동, 산업재해, 무권리 상태를 강요하며 가혹하게 착취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당연히 국제주의적 관점으로 한국자본을 규탄하고 폭로해야 한다. 한국자본 포스코가 인도에 공장을 세우며 인도와 협정을 맺어 현지인들의 토지를 강제 수용하고 착취하는 것에 분노하고 투쟁해야 한다. 한국자본과 국가가 이주노동자를 수입하여 사업장 이동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으며 전(前)자본주의적으로 탄압하고, 노조결성을 막고 저임금, 무권리 상태로 착취하다 강제추방하는 작태에 대해 분노하며 이주노동자들과 국적을 넘어 계급적으로 단결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정치적 상부구조로서의 제국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제국주의는 독점을 경제적 본질로 하면서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과의 지배/종속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개념이다. 그 관계는 상호주의적이고 호혜적이고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억압하고 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 민족과 억압당하고 지배당하는 (신)식민지 국가의 관계로 성립된다.
채만수 소장은 카우츠키가 “‘제국주의의 정책(Politik)을 제국주의의 경제로부터 분리’[10]했던 것처럼― 제국주의의 ‘정치적 특성’을 그 경제적 기초로부터 분리하고 있다.”며 우리를 카우츠키주의자로 비난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카우츠키의 제국주의 미화를 비판하면서 “제국주의는 금융자본과 독점의 시대로서, 어디에서나 자유가 아닌 지배의 열망을 가져온다. 정치체제가 어떠하든간에 이들 경향의 결과는 어디에서나 반동이며 … 특히 민족적 억압과 병합의 열망, 즉 민족자주의 침해는 더욱 심화된다.(병합은 바로 민족자결의 침해에 다름아닌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민족적 억압과 병합. 민족자주의 침해” 방식은 다양해졌다고 하더라도 제국주의의 이러한 본질은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민족적 억압과 병합. 민족자주의 침해” 대신에 “불평등한 상호의존, 경쟁, 협력의 관계”로 현실을 왜곡하고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의 카우츠키주의자들이 아닌가? 도대체 미제를 비롯한 나토 제국주의, 일본 제국주의 같이 한 줌도 안 되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수십억 인류, 수백 개 나라를 억압, 수탈, 침략, 파괴하고 금융적으로 교살하기에 이들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 때문에 이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되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과연 한국자본이 동남아 국가들에서 그 나라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이 인도와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들에 대해서 “민족적 억압과 병합의 열망, 즉 민족자주의 침해”를 하는 제국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한국자본이 미국현지에 자본수출하고 그 나라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해서 제국주의 패권의 중심에 있는 미국에 대해 제국주의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한국이 해외에 파병을 하고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자금을 공급하는 것은 제국주의라서가 아니라 미제의 꼭두각시라고 그런 것이다.
그러나 투자와 제국주의 사이에는 등호(等號)가 없다. 앙골라는 포르투갈에 대한 광범위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에서 제국주의는 아니다.(카를로스 마르티네즈, 워싱턴도 베이징도 아니다?2 중국 제국주의론은 서방 강도 제국주의자들의 학살과 약탈 은폐 수단, 2021년 2월 21일)
국가보안법의 탄압을 온 몸으로 뚫고 투쟁하며 반미자주를 위해 투쟁해온 동지들이 통일촉진대회를 개최하는 자리에 우리민족끼리는 계급협조이고 심지어 범죄라는 선전물을 버젓이 배포하는 일도 서슴지 않던 노사과연은 민족·동족관계가 적대관계로 파탄이 나자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사회구성체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같은 민족이 아닌 서로 다른 민족이며 남북관계는 남북 간 노동자의 국제적 단결의 관점으로 접근하면 된다는 입장을 제출했다. 박근혜 퇴진 촛불투쟁에 대해 “재벌이 기획연출한 투쟁”이라며 이 투쟁에 기권한 노사과연과 채만수 소장이 이제는 다극화에 대해 제국주의 다극화, 다극의 제국주의라고 강변하는 것을 보노라면 앞의 명제, 즉 교조주의는 언제든지 종파주의, 기회주의와 연결된다는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노사과연과 채만수 소장은 명목적으로 “미제, 나아가 제국주의 일반의 분쇄·극복”을 말하지만, 그 제국주의에 러시아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중국을 포함시킴으로써 양비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첨예한 대결의 와중에 양비론은 결국 미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게 된다.
다극화된 인식과 그 인식 너머의 조러관계의 역사적 특수성
최근 수년 간, 특히 러우전 발발 이후 노사과연의 정치사는 미제를 규탄, 폭로하기 보다는 러우전의 성격이 제국주의 간 전쟁이라며 러시아의 침략성과 제국주의성을 입증하고 심지어 중국을 강도와 같은 제국주의라며 규탄, 폭로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미국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야수의 소굴”에서 중국을 적대하고 전쟁을 추구하는 미제를 폭로, 타도하려고 절치부심하는 동안에 노사과연은 미제의 야수와 같은 침략성에는 침묵하면서 러시아, 중국의 제국주의성을 폭로하는데 골몰하고 있는 미국의 자칭 맑스레닌주의 조직이라고 하는 폴리스투름(Politsturm)의 가당찮은 글을 집중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이 조직은 중국과 러시아가 미제와 서방 제국주의 진영의 경제제재를 뚫고 베네수엘라와 조선, 쿠바와의 경제교류, 철도건설 등 제국주의에 반하는 사례를 제국주의의 근거이고 종속의 사례로 드는데 노사과연은 이들의 황당한 글을 버젓이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 조직은 반제투쟁이 자국 부르주아의 편에 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노사과연의 한 이론가는 이를 따라, “반(反)제국주의자 간디는 토착자본의 대변자”였기에 “반(反)제국주의를 아무리 외치더라도 토착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운동이라면 그 한계는 이렇게 뚜렷하다. 진보를 자처하면서 반제국주의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 토착 자본가들의 반제국주의는 노동자 농민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가리는 방패막이로 기능하기 때문이다”(정호영)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와 이 땅을 강점한 한국에서 반미투쟁의 진보성과 혁명성을 부정하는 논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노사과연의 중러 제국주의론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반미투쟁에 기권하거나 혼란케 하고 이 땅에서 미국을 반미투쟁에 대한 집중을 회피하게 한다. 노사과연은 이란 내부에서 벌어진 투쟁에 대해 이란을 규탄하면서도 제국주의의 이란 내정 개입에는 침묵하고 있고 저항의 축 중심에 있는 이란이 가진 반미자주의 진보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채만수 소장은 러시아와 조선, 쿠바, 베네수엘라와의 관계가 제국주의적 관계가 될 수 있냐는 우리의 입장을 인용하며 그 관계를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다.
“러시아가 서방제국주의자들처럼 대북적대에 앞장선 적이 있는가”라거나, “러시아가 대북 침략책동을 하고 경제제재에 앞장선 적이 있는가”라거나, 혹은 “… 쿠바, 베네수엘라에 대한 …” 운운하며 묻고 있다.
그렇다면, 되묻고 싶다. ― 미제의 침략ㆍ전쟁 위협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지지ㆍ지원이 필요한 현 조건하에서 러시아가 당장 “대북적대”, “대북 침략책동”, “(대북) 경제제재” 등등에 “앞장”설 이유가 있겠는지?[9]
채만수 소장은 위 글에 다음과 같은 주를 달고 있다.
9. 사실, 신식민지 파쇼 지배하라는 우리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현재의 국제 정세에서, 혹은 현시대의 제국주의 열강 간의 대립, 구체적으로는 미-러 대립이나, 미-중 대립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쿠바 등이 러시아 및 중국과의 관계에서 취하고 있는 태도, 그리고 취할 수밖에 없는 태도, 그 특수한 관계와 태도는 지금 우리가 섣불리 다루기에는 분명 적절하지 않은 문제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그 특수성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일반화하면서 제멋대로 떠들어 대고 있다. 뭐라고 떠들어 대든, 그것은 저들의 몫이지만.
채만수 소장은 이처럼 러시아가 제국주의임에도 조선과 러시아가 동맹적 수준에서 선린우호 관계를 맺는 것이 “미제의 침략·전쟁 위협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지지·지원이 필요한 현 조건” 때문이라며 실용주의적으로 의미를 격하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러시아가 당장 ‘대북적대’, ‘대북 침략책동’, ‘(대북) 경제제재’ 등등에 ‘앞장’설 이유가 있겠”냐고 묻는다. 이 말을 해석하면 러시아가 제국주의지만 미국의 책동이라는 특수한 정치적 조건에서 한시적인 선린우호 관계를 맺었을 뿐이며, 이 특수한 조건이 사라지면 제국주의의 본성상 러시아가 언제든지 대북적대, 침략책동, 경제제재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조·러 친선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민족관계의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의 전환을 선언한 조선로동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9차 전원회의 결정을 보면 사회주의 전면발전 전략과 함께 국제관계의 원칙, 방침에 대해서도 선언하고 있는데 여기서 북은 중국, 쿠바 같은 사회주의 나라들과의 관계 발전을 우선적으로 내세우면서 사상과 제도를 초월하여 자주와 정의를 지향하는 반미자주 국가들과의 연대 강화한다는 입장을 확고하게 표명했다. 이는 미국을 위시로 한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가치동맹에 맞서는 반서방 남반구 연대로 하나로 연결돼 있는 것으로 다극질서를 중시하고 주도하겠다는 선언이다.
이 선언 이후에 조선은 올해 6월 푸틴의 방북 중 러시아와 역사적인 포괄적인 전략적 동맹자 협정을 체결했다. 조러 협정은 “무기한 효력을 가”지며 소련과 항일무장투쟁 시기부터 “역사적으로 형성된 조러 친선과 협조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새 시대 국가간 관계”를 지향함으로써 양국 인민들의 “부흥과 복리를 도모하”고, “평화와 지역 및 세계의 안전과 안정을 보장하는데 기여”하는 원대하고 전략적인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이 조러 협정은 채만수 소장의 협소한 눈으로는 결코 볼 수도 없고 통일되지 않고 분열된 다극화된 두뇌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인식할 수 없는 광대한 수준에서의 협약이다.
이 동맹적 협약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단일한 사회구성체가 아니다. 비록 소비에트가 해체되었지만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는 항일무장 투쟁 시기 조선의 선대 지도자와 “소련의 원조는 조선의 형제들에게 진 국제주의 부채를 일부 갚는 것에 불과하다”는 소비에트 지도자 스탈린 간 역사적으로 형성된 국제주의 친선을 바탕으로 소비에트 해체로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복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제자주의 기치 하에 양 나라의 자주권을 존중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비록 체제가 달라도 언제든지 선린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북의 표현에 의하면 “제국주의자들의 군사적 위협과 도발, 강권과 전횡을 짓부시기 위한 공동전선”으로 전략·전술적 과제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북은 이러한 인식 하에 러우전을 돈바스의 민족해방 투쟁, 반파쇼 투쟁으로 간주하고 전쟁 초기부터 일관되게 러시아를 지지해 왔다.
러시아가 과거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북 비핵화와 경제제재에 일부 참여한 전력이 있으나 북이 전략국가로 되고 러시아가 미국과 정면 맞서는 상황에서 양국은 이제 굳건한 혈맹의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처럼 오직 노동과 자본의 계급 대립만을 내세우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만을 강조하며 민족문제도 부정하고 (국내외적)통일전선도 부정하는 채만수 소장은 자주성의 철학적 원리와 그를 바탕으로 한 국제관계의 전략적 원칙, 입장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6.15선언 등 남북이 맺은 선언이 “각자의 사회운동법칙에 따라서 발전해 갈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는”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이고 “분단과 적대의 기초에 있는 계급적 분열과 적대를 은폐하고, 그 문제의식조차 기각하고 있”다고 폄하하고 체제가 다른 남북 간에는 연방제 통일이 불가능하고 심지어 남북은 사회구성체가 다르기에 같은 민족이 될 수 없다는 극단의 교조주의로는 조러 간의 “특수한 관계와 태도”를 아무리 강조하고 “특수성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일반화하면서 제멋대로 떠들어 대고 있다. 뭐라고 떠들어 대든”이라며 특수성의 담지자인 체해도 실제로는 극단적 교조주의자이자 마오가 비판한 것처럼 게으른 교조주의자로 전락할 뿐이다.
채만수 소장은 “지금 우리가 섣불리 다루기에는 분명 적절하지 않은 문제”라고 하지만, 위 글에서도, 앞으로도 “뭐라고 떠들어 대든” 그 특수성에 대해 영원히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비록 체제는 다를지라도 제국주의 패권에 맞서 각 나라의 주권을 존중하고 호혜적으로 교류한다면 언제든지 연대할 수 있다는 자주성의 원리에 기반을 둔 국제관계를 계급의 원리만을 내세워 부정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미의 진보성, 미제 패권을 약화시키는 다극화를 제국주의 다극화로 보기 때문이다.
다극화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투쟁의 산물이다
채만수 소장은 다극화가 “‘침략·살육·약탈, 강권과 전횡’의 세계로부터 ‘자주·평등·호혜 친선에 기초한 … 세계’로의 ‘이행’도 물론 결코 아니다.”라고 하는데 다극화된 세계 질서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서방 제국주의의 “침략·살육·약탈, 강권과 전횡”에 맞서 투쟁한 사회주의 나라들, 약소국가, 수십억 인류와 수백 개 나라들의 피와 땀, 열망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노사과연의 단순한 눈과 다극화된 두뇌, 분열된 인식으로는 절대 인식할 수 없겠지만 조선, 쿠바, 중국, 팔레스타인, 레바논, 예멘, 이란, 아프가니스탄,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니제르, 말리, 부르키나파소 같은 나라들, 민족들의 투쟁과 열망이 담겨 있다. 심지어 러우전에서 서방에 맞서는 러시아의 승리를 염원하면서도 동시에 소비에트 체제 복구를 열망하는 러시아 인민들의 투쟁과 열망이 담겨 있기도 하다.
우리가 발 딛고 숨 쉬는 이 땅 한국에서 미제의 지배를 극복하고 분단을 척결하고 통일을 열망하는 진보적인 인민대중의 투쟁과 열망도 담겨 있다. 미제의 쇠퇴로부터 미군을 이 땅에서 내쫓으려는 정치적 열망을 두고 러-중 제국주의의 편을 들어 다극화된 제국주의를 지향한다고 한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다극화된 두뇌, 분열된 인식이 아니겠는가?
미일한 전쟁동맹과 조중러 간의 대결이 고조되는 한반도와 동북아 현실에서 다극화된 제국주의론은 필시 양비론적이거나 그 양비론의 기회주의성으로 반미과제를 회피하고 이로써 제국주의의 이해에 봉사하는 이론이 될 수밖에 없다. 중러가 제국주의라는 인식에 따르면 북은 중러 신흥 제국주의와 결탁한 제국주의 연합에 불과하게 된다고 인식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인식과 실천의 부동성, 괴리에 의해 다극화 된 두뇌가 되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가치 기반 질서”라는 폭력적·패권적 질서를 강요하는 미제에 맞서 반미자주를 기치로 투쟁하고 미일한 동맹의 전쟁책동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인식과 실천의 통일이다. 노사과연의 인식대로라면 지금 다극화된 질서는 영제에서 미제로의 패권의 교체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당시 쇠퇴하는 영국제국주의보다 부상하는 미국제국주의가 진보적 인류에게 더 위협적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참상도 영미 제국주의 패권 교체기에 형성되었다.
노사과연의 인식대로라면 미일한 동맹이나 조중러 동맹이나 제국주의 연합 동맹에 불과하게 된다. 더욱이 노사과연은 기존 제국주의 보다 신흥 제국주의인 러시아와 중국의 부상에 맞서 반제투쟁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반미반제 투쟁에 비해 러시아, 중국에 맞서는 반제투쟁의 과제가 무엇이 있겠는가? 인식과 실천의 혼란, 괴리, 인식의 진보적 실천으로부터의 괴리가 다극화 된 두뇌, 다극화된 제국주의론을 낳은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다극화된 제국주의론은 심지어 “7월 28일에 치른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베네수엘라 연합사회당(PSUV)으로 대표되는 신흥 집권 부르주아 분파와 미제(美帝)를 등에 업은 전통적 부르주아 분파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그리고 특히 수많은 노동자ㆍ인민대중이 선거 결과를 투명하게 밝힐 것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서면서, 베네수엘라의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7월 28일에 치른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베네수엘라 연합사회당(PSUV)으로 대표되는 신흥 집권 부르주아 분파와 미제(美帝)를 등에 업은 전통적 부르주아 분파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그리고 특히 수많은 노동자ㆍ인민대중이 선거 결과를 투명하게 밝힐 것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서면서, 베네수엘라의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베네수엘라. 차베스주의의 ‘전락’과 그 교훈, 진상은, 2024년 10월 11일)라며 미제의 레짐 체인지를 노동자·인민대중의 투쟁이라며 지지하는 제국주의의 변호 논조로까지 나아갔다. 이는 리비아에서의 반카다피 내란을 민주주의 투쟁이라고 옹호하고 쿠바에서 반혁명 시위를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라고 옹호하는 트로츠키주의 노동자연대의 수준으로 자칭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타락하게 된 사례이다.
이에 대해 “미제의 사주를 받은 베네수엘라 반혁명 세력들의 준동을 노동자·인민대중 투쟁이라고 옹호하면서 무슨 혁명 운운하는가?”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채만수 소장은 사월혁명회 기고 글에서는 “붸네수엘라의 노동자·인민은 근 10년 전부터 출구가 보이지 않으면서 지속되고 있는 심각한 경제위기의 수렁 속에서 극심한 빈곤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번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를 두고 ‘부정선거’, ‘부정개표’라는 주장과 함께 전국적으로 수많은 노동자ㆍ인민이 가두로 몰려나와 투쟁을 벌인 것도, 부분적으로는 물론 미제의 앞잡이인 극우 야당세력의 조직과 사주에 의한 것이지만, 대체로는 저토록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극심한 경제위기, 그로 인한 노동자ㆍ인민의 삶의 파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부분적으로는 이 시위가 미제의 앞잡이들의 사주라고 하는 문장을 슬쩍 집어넣었다.
남미에서 차베스주의를 계승한 마두로 정부와 미제를 등에 업은 극우 파쇼 세력을 “신흥 집권 부르주아 분파와 미제(美帝)를 등에 업은 전통적 부르주아 분파 사이의 대립이”라고 표현하는 파탄적 인식은 다극화된 제국주의론의 필연적 결과이다. 이로써 여기에도 이 이론이 얼마나 중립과 양비론의 형식으로 미제의 이해에 복무하는지 알 수 있다.
미제가 사주한 반혁명 시위를 명시적으로 “노동자·인민의 투쟁”이라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분적으로는 물론 미제의 앞잡이인 극우 야당세력의 조직과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노동자ㆍ인민의 투쟁”이라고 하는 것 역시 도찐개찐의 다극화된 분열적 인식의 소산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도 리비아 내란이나 쿠바 내란이 미제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을 전면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독재정권에 맞서는 노동자 민중의 진보적인 요구, 열망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진 부정선거 규탄 투쟁에는 마두로 정부를 서구의 사민주의 권력과 같은 독점자본주의 정부라고 규정하고 타도해야 한다는 종파주의적인 베네수엘라 공산당과 그 지지자들이 부분적으로 들어가 있었지만 그 투쟁의 본질적 성격은 미제와 베네수엘라 내부 반혁명 세력들이 획책한 레짐 체인지(정권교체)의 일환이다.
채만수 소장은 베네수엘라 경제위기와 인민의 빈곤에 대해 마두로 정부를 규탄하지만, 이것이 자력갱생의 자주적 계획경제의 결여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고 베네수엘라 혁명이 중도반단 하지 말고 전진해야 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이 나라의 경제위기와 혼란, 아직도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빈곤의 주된 원인이 차베스 정부와 마두로 정부의 빈곤척결 투쟁을 약화시키고 제약하는 미제의 경제제재와 약탈, 반혁명 세력들의 끊임없는 책동이라는 점을 외면하고 있다. 이 정부를 “신흥 집권 부르주아 분파”로 인식하고 타도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채만수 소장은 “‘미 패권 추락 가속화’, 다른 말로는, ‘군사패권’·‘경제패권’·‘정치패권’에 걸친 ‘미 패권 몰락’(p. 50.)일 터인데, 그 몰락이 과연 그 자체로 그러한 세계질서, 그러한 세계를 열어젖히는 것일까?”라고 한다. 미국의 군사패권, 경제패권이 추락하고 몰락하는 역사적 격변을 더 가속화하기 위해 사력을 다 하기보다는 그것이 “그 자체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거냐며 이 거대한 투쟁에 기권하고 냉소하고 있다.
미제의 군사패권이 약화된다면 “그 자체로”도 한반도에 일촉즉발로 조성되는 전쟁위기가 누그러지게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실은 미국 패권의 약화는 치열한 투쟁의 산물이다. 미제의 패권이 진보적 인류의 투쟁 없이 “그 자체로” 진화론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지만 그것을 기회로 우리가 실천하는 과제로 삼아야 할 때 제국주의 다극화라며 냉소하고 부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누구의 이해에 봉사하게 될 것인가?
다극화는 국제관계ㆍ대외관계의 급격한 변화이다. 다극화를 “그 자체로” 내버려두지 말고 그 급격한 변화를 진보와 사회의 개조에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사월의 영령들이 염원했던 자주통일과 민주주의, 사회개조를 우리 시대에 실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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