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단축투쟁: 자본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둘러싼 계급투쟁

줄잡아 그의 재산이 5조원을 넘는단다

그 돈은 일년에 천만원 받는 노동자

50만년 치에 해당한다

한 인간이 한 세대에

50만년이라는 인간의 시간을 착취했다

50만년!

불과 1만년 전에 인간은 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5만년 전에 크로마뇽인은 돌과 동물의 뼈로 은신처를 짓기 시작했다

10만년 전에 네안데르탈인은 죽은 사람을 묻을 줄도 몰랐다

150만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가 유럽과 아시아에 첫발을 디뎠다

500만년 전에 침팬지와 구분이 어려운 인류의 시조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했다

현대 인간은 4만년 전에 겨우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4만년!

우리들의 투쟁이 돈이 아니라 돈으로 왜곡된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을 인생의 세월을 되찾는다는 것을

틀림없이 확인해야 한다

자신의 인생과도 싸워야 한다

백무산 시집 『인간의 시간』 자본론 (1996)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했는데 그 중 노동시간 연장과 노동시간 단축을 둘러싼 인류의 투쟁은 맑스가 “다소 은폐된 내전”이라고 할 정도로 치열하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자본은 이윤을 위해 노동시간을 최대한 연장하기를 바라고 노동자들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동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기를 바랐습니다. 이 양자의 투쟁은 화해하거나 절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은 곧 자본가들의 이윤의 축소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노동시간 연장은 곧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의 후퇴이고, 육체적 및 정신적 능력의 후퇴입니다. 이 화해할 수 없는 이해관계의 충돌은 결국 힘과 힘이 부딪치는 투쟁의 결과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맑스는 이를 두고 “쌍방이 모두 동등하게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되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섰을 때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해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자본론》, 1권 제10장 노동일, 비봉출판사, 김수행 역)라고 했습니다.

노동자시인 백무산은 “우리들의 투쟁이 돈이 아니라 돈으로 왜곡된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을 인생의 세월을 되찾는다는 것을 틀림없이 확인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백무산 시인이 “일년에 천만원 받는 노동자 50만년 치에 해당”하는 “5조원을 소유한” 어느 자본가의 재산은 자본입니다. 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해 쌓아올린 자본가의 거대한 부는 자본입니다.

맑스는 “자본주의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한다.”고 했는데, 이는 노동자들이 과거에 집단적인 노동으로 쌓아올린 사회적 축적물들이 자본으로 되어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거대한 성채를 쌓았다는 의미입니다. 노동자들 자신의 노동이 자신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권력이 된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과거 노예제 하의 노예나 봉건제 하의 농노는 아니었지만 임금노예였습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구매하여 노동력의 가치 이상으로 착취하는 시간 동안은 노동자는 자본의 노예입니다.

백무산 시인은 “한 인간이 한 세대에 50만년이라는 인간의 시간을 착취했다.”고 썼는데, 자본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고정적으로 나누어진 각자의 시간이 아닙니다. 자본의 시간은 점점 더 자본가들에게 부와 지배력을 집중시키는 시간이고 노동자에게는 점점 더 빈곤이 일상이 되고 자본에 대한 종속이 심해지는 양극화의 시간입니다.

장시간 노동과 야간노동은 인류 전역사가 아닌 자본주의의 산물

노동자들은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인간의 시간을 인생의 세월을 되찾”아 와야 했습니다. 앞서 노동시간 단축투쟁은 인류의 계급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했지만 사실 이는 정확한 얘기가 아닙니다. 노동시간의 끝없는 연장은 인류 역사 전체에 걸쳐 진행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산물입니다.

이토록 장구한 노동의 역사 속에서 ‘노동시간’은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경제문제나 사회문제로 되지 않았다. 노동시간이 문제로 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 겨우 최근 2세기에 지나지 않다.

원시 공동체 시대=원시 공산사회에 있어서 노동은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성인이 공동으로 수행하는 의무였으며, 자기자신은 노동하지 않고 타인의 노동 성과를 착복함으로써 생활하는 그러한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성원은 누구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노동을 강제당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노예사회가 되면, 노예는 오로지 노동에 종사하고, 노예주는 반대로 소비생활만을 누리는 관계로, 뚜렷한 계급대립이 발생함으로써 노예의 노동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노예는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고 ‘말하는 가축’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의 노동이 아무리 혹독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가 사회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예는 가축이 아니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 절망적인 격렬한 분규를 일으켜서 노예제도에 반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항에는 ‘노예신분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근본문제가 깔려 있었던 것이지 ‘노동시간’이라는 부분적인 문제가 처음부터 문제로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 후 봉건사회에서는 농노와 영주와의 항쟁이 계속 발생하였지만, 그것은 영주의 토지에서 노동하는 노동일수를 둘러싼 싸움이었던 것이며, 1일의 노동시간이 싸움의 대상으로 되지는 않았다…농민의 노동은 농민생활의 기반인 농촌공동체에 의하여 규제되고, 노동시간도 각자의 공동체의 사정에 따라 관습적으로 행해진다…이때, 발전해 가고 있던 도시에서는 길드 수공업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객주가 직인과 도제를 착취하고 있었지만, 그 노동조건은 종교상의 휴일과 노동시간 제한에 의하여 규정되었다. 해가 진후의 노동은 화재의 위험 때문에 많은 도시에서는 야간노동이 금지되고 있었다. 보이친스키(Woytinsky)도 “중세 초기에도 평균하여 주48시간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이르러 상품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직인의 노동시간은 연장되기 시작하여 일고직인들은 요맨(Yeoman)길드를 만들어서 임금과 노동시간의 문제를 둘러싸고 객주와 항쟁하게 되었다. 이것이 근대적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노동조합의 선구 ㅡ그 한 형태ㅡ를 이루었던 것이다.(《세계노동운동약사》,  우츠미 요시오(內海義夫) 지음, 화다출판사, 백원담 옮김)

인류의 투쟁이 뒷받침했지만, 과거 고대 노예제와 중세 봉건제에 비해 인류역사는 엄청나게 진보했습니다. 그러나 장시간 노동의 경우에 인류는 그다지 진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으로 노동시간이 단축했지만 자본은 끊임없이 신기계를 도입하여 노동자들을 축출하고 노동강도를 강화하는 것으로 노동시간 연장을 꾀했습니다. 자본주의 들어 16시간, 17시간 노동, 32시간 연속노동이 행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는 노동자들을 각종 직업병과 과로사와 노동자들의 신체기형과 조기 사망을 낳았습니다.

특히 야간노동은 고대 노예제와 중세 봉건제에서도 없었던 노동자착취방식입니다. 자본의 이윤에 대한 무제한의 욕구, 중단 없는 생산 체제가 야간노동을 일반화 했습니다. 특히 농촌에서 비교적 쾌적한 조건에서 건강한 노동을 하는 것에 비해 노동자들은 먼지, 화학물질에 노출되고 비좁은 공간에서 극한의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산업혁명의 기술적 진보, 노동자들에게는 재앙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가 대두되었는데 이는 노동자의 착취를 한층 극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시간도 이때부터 대폭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다음의 서술은 《세계노동운동약사》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10시간 또는 기껏해야 12시간이었던 노동시간이, 기계의 보급에 따라서 14시간 내지 16시간으로 늘어나고, 더욱이 20시간이나 30시간의 연속노동이 비일비재하게 되었습니다.

여성이건 아이이건 밤낮 가리지 않고 노동시간은 연장됐습니다. 실로 “눈이 무너지듯이 강력하고 제한 없는 돌진”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엥겔스는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1833년 의회가 임명한 조사기관인 공장위원회의 보고를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공장주는 간혹 5세 혹은 6세부터, 사실상 종종 7세부터, 대개는 8세 내지 9세들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노동시간은 보통 하루에 14시간 내지 16시간(식사를 위한 휴식시간을 제외하고)에 달했다. 감독이 아이들을 데리고 학대하는 것을 공장주는 허락할 뿐만 아니라 종종 자신도 열심히 폭력을 쓰고 있었다. 그뿐인가. 어느 스코틀랜드의 공장주는 도망간 16세의 노동자의 뒤를 말로 쫓아가서 네발로 뛰는 말과 같이 소리를 지르며 거기서부터 집에까지 뛰어달려가도록 하게 하고, 그 소년을 계속 긴 가죽채찍으로 때렸다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악랄한 행위를 저지른 자들이 바로 영국 신사, 바로 영국 부르주아와 그 하수인들이었습니다. 봉건시대의 아동에 대한 비교적 온정적 태도는 부르주아의 이윤추구 욕망 앞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문명은 ‘문명’이 아니라 야만입니다. 영국 부르주아들이 인도나 중국 같은 식민지에서 자행한 폭력과 악행은 이보다 더 극악할 것입니다. 장시간 노동의 폐해는 특히 아동들에게 더 극심하게 나타났습니다.

지나치게 긴 시간 동안 서 있음으로 인해서 척추가 굽어지는 것”, 그보다 한층 더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은 “다리의 기형”과 “편평족”이지만 이런 정도에 달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척추ㆍ허리ㆍ다리의 통증, 부어오르는 관절, 정맥응결을 일으키는 넓적다리와 종아리의 커다랗고 딱딱한 종양이 보여진다. 이러한 증세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넓게 퍼져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유해한 현상은, 기형이 너무도 널리 퍼져있을 뿐만 아니라 허약하고 병적인 체질도 넓게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일찍 사망하게 되거나 또는 건강이 몹시 손상된 채로 일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약한 체질로 인하여 자손들이 허약해질 것을 걱정하여 살아가게 된다. 생물학적으로 보아도 그것은 근거가 충분히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엥겔스, 같은 책)

여성에게도 장시간 노동은 심각한 피해를 끼쳤습니다.

“또 임신부라 하더라도 출산직전까지 공장에서 일할” 뿐만 아니라, 분만화고 나서 “어떤 사람은 1주일 후에, 어떤 경우에는 3일 내지 4일 후에는 곧바로 공장으로 되돌아와서 일하며, 평상시 시간대로 일하는 것이다.” 공장의 고온 때문에 발육이 빨라진 소녀는 조숙해지고, 11세에 벌써 임신을 하는 일도 벌어지며 이러한 “과도한 조숙은 조로와, 조기부터 무력해지는 현상을 가져온다.” 또 반대로 성적발육이 억제되는 경우도 많아서 “유방의 형성이 늦는다던지, 혹은 전혀 생기지도 않는다든지 한다. 월경이 17세, 18세가 되어서야 겨우 시작되는 경우가 많고, 또는 전혀 월경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여러 번 있다. 심한 고통과 질환을 수반하는 불규칙한 월경, 특히 빈혈은 실제로 빈번히 일어난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의사의 보고들이 일치한다.”

또 성인남자에 있어서도 장시간 노동은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어떤 징병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장노동자는 병역에는 거의 적합하지 않다. 그들은 여위고 매우 약하게 보인다. 면업 중심지인 멘체스터에서는 5피트 8인치인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반하여 농촌지역에서는 보통 신병이 5피트 8인치였다.” 또 어느 공장주는 40세의 노동자를 ‘노인’이라고 부르고, 어느 공장의는 “공장노동자들 사이에서는 40세는 노령이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멘체스터에서는 노동자들의 이러한 조로는 매우 평범한 사실이며, 40세 된 사람은 거의 누구나 10세 내지 15세 가량 나이가 더 들어 보인다.”고 할 정도이다…

기계를 사용하게 되면서부터는, 노동자가 중대재해로 사망한다든지, 불구가 된다든지 하는 사고가 빈발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오는 과도의 피로가 주요한 원인으로 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상의 장해에 못지않게 끔찍한 것은, 정신적·도덕적으로 노동자에게 미치는 장시간 노동의 영향이었다. 5-6세, 늦어도 8=9세부터 공장에서 일하는 아동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는 물론 없었다. 국왕의 이름도, 예수라는 사람도 모르고 런던이라는 도시조차 들어본 적이 없으며, 17세가 되어도 2곱하기 2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오히려 “강도인 딕·더핀, 절도로 감옥살이를 한 잭·세퍼드의 생애와 성격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이들, 어렸을 적부터 겨우 더러운 옷을 걸치고, 다리는 무릎 위까지 노출시킨 채, 머리와 얼굴은 흙투성이채로 하고 다니며, 몸단장이라든가 수치심이라든가 하는 모든 감정을 경멸하게 되고, 땅바닥에 엎드려서 식사를 하며, 작업이 끝나면 남자들과 함께 술집으로 가는 처녀들, “모든 연령의 남녀, 아이들조차, 그리고 때로는 아이를 ㅠ팔에 안은 어머니들조차도 술집에서, 부르조아지의 지배하에 가장 심하게 타락한 희생자들, 즉 강도, 사기꾼, 매춘부들과 동석하여, 또 많은 어머니가 팔에 안고 있는 젖먹이 아이에게까지 브랜디를 마시게 할” 정도로 심한 음주벽, 그리고 또 “어떤 공장주가 자기 공장에서 야간작업을 실시했던 2년 동안, 평소의 2배가 되는 사생아가 태어나고, 또 전체적으로 지나친 풍기문란 때문에 야업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러한 성적 방종(放縱)과 같은 비극적인 증언을 당시의 문헌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육체적 퇴화, 지적 퇴폐, 도덕성의 저하는 모두 당시의 노동자계급이 처해있는 사회적 조건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바람같이 일어난 산업혁명의 진전, 기계에 밀려난 실업자의 범람, 언제 직장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지위의 불안정, 녹초가 될 때까지 일하는 장시간노동, 여자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공장으로 몰아넣는 저임금,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로 인한 노동의 강화, 먼지와 소음으로 뒤엉킨 난잡한 작업환경, 이 모두가 인간의 품위를 경멸하는 절호의 조건이었다. 이로부터 나오는 당연한 귀결은 강렬한 향락욕, 장래에의 희망을 갖지 않는 찰나주의, 그리고 사회질서에의 반항이었다.(엥겔스)

이 모두가 문명이라는 자본주의 착취체제가 가져온 참상이었습니다. 맑스는 자본주의적 축적이 가져온 참상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한 쪽 끝의 부(富)의 축적은 동시에 반대 편 끝[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노동자계급의 측]의 빈궁·노동의 고통·노예상태·무지·야만화·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맑스,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자본론》 Ⅰ하,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08년, 881쪽)

 오늘날 자본가들에 의한 “불평등” 대신 중립적인 “양극화”라는 표현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이처럼 노동자계급의 빈궁이나 노예상태는 바로 다른 쪽 끝의 자본가들의 무한한 자본축적과 부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맑스는 자본축적이 부의 불평등과 빈곤만을 낳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고통”과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노예상태”는 물론이고 심지어 “무지·야만화·도덕적 타락”까지 양산한다고 했습니다. 엥겔스가 생생하게 묘사한 “노동자계급이 처해있는 사회적 조건”에서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타락”이나 심지어 “범죄”까지도 윤리감정의 문제를 넘어 자본주의의 야만화가 초래한 결과인 것입니다.

인간의 시간을 위한 피어린 투쟁

인간은 마소(馬牛)가 아니기에 이러한 자본주의의 야만적 착취체제에 맞서 노동자들이 저항하고 투쟁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영국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서 1792년에는 “영국사상 최초의 노동자계급의 정치단체”인 런던통신협회가 만들어지고 전국적으로 80개에 달하는 협회가 급속도로 조직되게 됩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1793년 5월 온건 지롱드당의 몰락과 쟈코뱅당의 권력 장악으로 이어지자 영국의 지배자들은 이 혁명의 파고가 영국으로 들이닥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통신협회를 탄압하고 급진주의자들을 체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800년에는 결사금지법을 만들어 모든 형태의 노동자단체를 금지시켜 버리고 이를 탄압할 경찰대와 무장병력을 만들어 투쟁을 박살낼 만만의 준비를 갖췄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사금지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805년 직물공들은 단체를 조직하여 최저임금법의 공포를 의회에 청원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1808년에는 법안이 의회에서 부결되었지만, 량카셔의 면직공과 모직공은 파업에 들어가 일시적으로나마 임금인상을 쟁취하였습니다. 그러나 1810년 광부들의 총파업, 1812년 직물공의 총파업 등은 군대와 법적 탄압으로 짓밟히고 조합은 파괴되었습니다. 기계파괴 운동(러다이트) 운동은 이러한 폭압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결국 1824년에는 마침내 단결금지법이 폐지되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1815-32년의 의회 개혁운동, 1821-34년의 오웬주의의 보급이 있었고 1829년 노동운동의 고양은 근대적인 전국적 노동조합으로서는 사실상 최초의 것이라 불리는 ‘전영국방적공총동맹’을 탄생시키고 이어서 탄광노동자들의 파업과 농업노동자의 파업도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투쟁 이전 노동시간 단축 투쟁이 대두된 상황을 살펴보면 제본공은 12.5시간의 노동이었지만, 1780년 조합을 결성하여 1시간의 단축을 요구하여 1786년에는 왕립도서관의 제본공의 노동시간을 11.5시간으로 하고 1794년에는 10.5시간, 또 1807년의 파업 이후 1810년에는 0.5시간의 단축을 쟁취하여 10시간 노동이 실시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외적인 사례였고 일반적으로는 노동시간이 연장되었습니다.

위대한 공상적 사회주의자이자 영국 노동운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로버트 오웬은 1817년에 최초로 8시간노동제를 주장하여 1818년에는 멘체스터의 면방직공이 9시간(식사시간을 포함하여 구속 10.5시간) 노동제를 의회에 청원하기도 했습니다. 1830년에는 대중적으로 “10시간 운동”이 대중적으로 나타났습니다.

1829년 노동운동의 고양과 함께 모직물 공업 중심지인 요오크셔에서는 10시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다음 해에 의회는 18세미만 연소자의 노동시간을 11.5시간(식사시간을 포함하여 구속 13시간)으로 제한하는 법률이 제출되기도 했습니다. 1832년에 10시간법 요구는 요오크셔와 량카셔 대중적인 요구로 되어 노동자들이 열성적으로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1833년 의회에서는 10시간법 적용 범위를 면업에서 양모, 아마, 견공업까지 확장하고 13세 미만 아동의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하며 공장감독관 제도를 설치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제한적이지만 세계에서 최초로 성립한 실질적인 노동시간 입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강도를 강화하여 단축효과를 무력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이후 1834년 이후 차티스트 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나는 전후로 1833-1834년까지 북부 섬유공업지대에서 8시간 노동을 목표로 하는 국민개조협회가 결성되고 방적공조합의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파업계획, 전국노동조합대연합이 결성되고 올담에서 부인방적공을 중심으로 하는 시위가 경찰과 격돌하는 사태로까지 고조되었습니다. 마침내 1844년의 공장법은 18세 이상인 여성의 노동시간을 12시간으로 제한하고 여성에게 야업을 금지한다는 법안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1844년 노동법은 아동과 미성년자의 릴레이제도를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비로소 성인 남성노동자의 노동시간이 12시간으로 되는 표준노동일이 법제화 되게 됐습니다.

1846-47년에는 10시간운동이 정점에 달해 1847년에는 신공장법으로 10시간 노동이 법제화 되었습니다.

1847년 6월 8일의 신공장법은 1847년 7월 1일부터 ‘소년’(13세부터 18세까지)과 여성노동자 전체의 노동일을 우선 11시간으로 단축할 것과, 1848년 5월 1일부터는 그것을 최종적으로 10시간으로 제한할 것을 규정했다.(맑스, 《자본론》 1권, 제10장 노동일, 비봉출판사, 김수행 역)

그러나 자본은 이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습니다.

자본은 이 법률이 1848년 5월 1일부터 완전히 시행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예비전을 시도했다… 공장주들은 10%의 일반적 임금인하에 의해 이러한 사태의 자연적인 영향을 강화하려고 했다…그러므로 사정이 허락한 모든 곳에서 임금은 적어도 25% 인하되었다. 이처럼 유리하게 조성된 기회를 이용해 1847년의 법률을 폐지하기 위한 공장노동자들에 대한 선동이 개시되었다.(맑스)

결국 이후 1853년에야 10시간 노동이 일반화 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물론 이때에도 자본가들은 신기계를 도입하여 이를 무력화하는 시도를 자행하기도 하여 일부 산업 외에서는 1860년대에도 성인 노동자가 18시간 이상으로 실시되기도 하였습니다. 1858-1860년에는 제빵인들도 야간 및 일요노동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1865년 이후 농업노동자들도 노조를 만들어 투쟁한 결과 1860-63년 동안에 10시간 법이 대중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런던의 건축노동자들은 1853년에 9시간 노동제 운동을 개시하고 1876년 랭카셔의 공업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습니다.

영국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프랑스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쳐 1850년에는 프랑에서도 12시간법이 제정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투쟁은 미국 노동자들의 10시간 운동을 고무시켜 1866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노동자대회(제1차 인터내셔널)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노동일의 제한을, 그것이 없이는 해방을 추구하는 다른 모든 노력이 좌절되지 않을 수 없는 예비조건이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8시간노동을 노동일의 법적한도로서 제안한다.

이때부터 노동시간 단축투쟁은 국제 노동운동의 요구가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국제 노동절은 1886년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날을 기념하여 140주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60년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영국에서 10시간 노동법이 완전히 실시되게 된 것도 1848년 5월 1일입니다.

미국 노동자들은 1820년에는 9-10세의 아이들도 13시간, 섬유산업에서는 여성과 아이들이 오전 4시반부터 13시간 반(식사시간을 포함해 구속 15시간)이라는 장시간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노동자들은 1820년부터 ‘10시간운동’을 개시하였습니다. 1825년 뉴욕을 선두로 대서양연안의 도시에서 건축노동자와 선박노동자들이 10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파업을 전개한 이래 다른 산업의 노동자들도 여러 차례 파업을 전개했습니다. 1827년에는 필라델피아의 노동자들이 10시간노동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돌입하기도 했습니다. 1828년에는 필라델피아 노동자들의 투쟁이 정치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세계최초의 노동자정당”을 조직하였습니다. 그 강령에는 “자유평등한 공립학교 교육”과 “아동노동의 제한”과 “전반적인 10시간 노동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831년 보스턴에서 노조가 만들어졌을 때에도 하루 10시간 노동 요구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미국 노동자들의 수많은 투쟁으로 전국의 평균 노동시간은 1825년의 13시간에서 1840년에는 11.4시간으로 단축되었고 볼티모어에서는 1835-40년에 걸친 끈질긴 투쟁으로 10시간 노동일이 쟁취되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1840-1860년대에는 10시간노동의 투쟁은 노동자투쟁의 중심 요구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9시간 노동과 8시간 노동으로 노동자들의 요구가 높아져 갔습니다. 특히 섬유공업에서는 다수의 여성 노동자들이 10시간 노동을 제기하여 투쟁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들은 전투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들의 대부분은 자유와 존엄을 지켜주는 대우에 익숙해진 뉴잉글랜드의 농민의 딸들이었다….노동자들은 10시간노동을 획득하기 위하여 협회를 만들고, 자신들의 운동을 지탱시키기 위해 자금을 모아서 신문과 전단을 발행하고, 서약카드를 배부하여 10시간 이상 일하지 않겠다는 서명지를 모았으며, 가두와 공장과 야외 집회에 웅변가를 보내어 10시간 노동법규를 위한 연설을 행하고, 10시간노동법에 대한 반대를 깨부수기 위하여 정치활동 캠페인을 벌였다.(칼톤, 조직된 노동의 역사와 문제들)

한편 1848년 영국에서의 10시간법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10시간 운동을 자극시켰던 것과 같이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자들이 8시간 운동이 승리했다는 승전보가 다시 운동을 고무시켰습니다.

1856년 4월 초,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석공들의 집회가 개최되어 8시간 노동의 요구가 제기되었습니다. 이들의 요구는 다른 업종에도 확산되어 각 업종연합 집회에서 “8시간연맹”이 결성되어 1859년 4월 21일 이후 참가조합의 조합원은 누구나 하루에 8시긴 이상은 일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공표하였습니다. 이후 멜버른 직인들 사이에서는 8시간노동이 일반적으로 시행되어 이 날은 “8시간노동의 날”로 불려 지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시드니, 부리스베인, 아드레이드, 뉴질랜드 등에서도 번져나가 이 지역에서도 8시간 노동이 확립되게 되었습니다. 이후 1866년부터 실시된 공장·상점법은 1874년의 공장법을 개정·확대하여 모든 여성과 아이들에게 8시간 노동을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성인 녿동자들에게까지 이 법이 적용되게 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였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성공에 자극받아 미국에서도 1863년경부터 8시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 8시간운동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게 됐습니다.

1866년 8월 전국노동협회는 볼티모어에 모인 “50개의 지방조합과 13개의 시조합회의, 2개의 전국조합과 5개의 8시간연맹으로부터 나온 77인의 대표자”에 의해 다음과 같은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나라의 노동을 자본주의적 노예제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현재에 있어서의 첫 번째로 필요한 일은, 미합중국의 모든 주에서 8시간 표준노동일로 규정하는 법률의 발표이다.

이는 제1인터내셔널이 국제노동운동의 강령으로 처음 8시간 노동제 요구를 내걸었던 해와 같은 해이기도 합니다. 1872년에는 각지에 8시간 연맹이 결성되고 카네디카트주와 뉴욕주에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대규모 파업이 빈번하게 전개되었습니다. 1877년에 결성된 사회주의노동당의 강령에는 1) 생산의 발전에 비례하는 노동시간의 단축 2) 모든 공업노동자에게 8시간 노동제를 법으로 정하고 농업노동자에게도 이에 상응하는 조건을 설정할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1880년에 들어서면서 노동시간 단축투쟁이 더욱 고양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1890년이 되어서야 하루 10시간 노동일이 표준화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메이데이의 직접적 기원이 되는 1866년 5월 1일 총파업이 전개되었습니다. 1869년 조직된 노동기사단은 1885년에는 10만 노동자를 지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886년에는 1년 사이에 70만의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1866년 5월 1일을 기점으로 총파업이 전개되어 20만이 파업에 참가하고 그 가운데 5만은 8시간 노동일을 쟁취하기도 했습니다. 이 투쟁으로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8시간 노동일에 적용된 노동자가 20만에 달하게 됐습니다. 1899년 7월 제2차 인터내셔널 창립총회가 파리에서 열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하여 5월 1일을 전 세계 노동일로 기념하기로 했습니다.

이 5월 1일 총파업 다음 날 시카고에서는 파업이 계속 확대되어 3일에는 시카고의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이 경찰과 주군대도 출동시켜 파업을 진압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5월 4일 노동자들의 시위 현장에서 돌연히 총탄이 날아와 노동자들을 쓰러뜨리고 가투가 벌어져 여러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다수 부상자가 생겨났습니다.

이 순간 귀청을 찢는 듯한 굉음이 광장에 진동했다. 주변의 공기는 자욱한 연기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고약한 냄새와 금속성의 아우성소리와 광란으로 가득찼다. 누군가 폭탄을 던진 것이다. 경찰은 노동자에게 발포하고 노동자도 총으로 응수했다. 그날 밤 2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부상했으며, 도대체 몇 명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죽은 사람의 정확한 수는 지금까지의 조사로 확실히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헤이마키트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누구인지 아직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헤이마켓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노동운동 지도자 4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고 1명은 사형 집행 직전에 자살하였다고 발표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공안통치가 자행되면서 투쟁으로 쟁취한 8시간 노동제가 무력화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이 얼마나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진행됐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헤이마켓 폭탄 테러 조작사건으로 사법살인을 당하기 전 어거스트 스파이스는 법복입은 살인자들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기 전에 다음과 같은 최후진술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우리를 교수형에 처함으로써 노동운동을 뿌리 뽑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처형하라!

가난과 불행 속에서 착취당하며 해방의 날을 기다리는 수백만 임금노예들의 운동을 없애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당신들의 의견이라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매달아라!

그렇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일순간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거기에서 바로 거기에서 당신들의 앞과 뒤, 여기저기 곳곳에서 성난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땅속에서 타오르는 들불이다.

당신들도 이 들불은 끌 수 없으리라.

어거스트 스파이스 열사의 이 최후진술은 노동절에 즈음해서는 한 번쯤 들어봤을 이야기입니다. 열사는 최후진술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러한 내용의 진술도 했습니다.

당신들은 마녀들을 말뚝에 묶어 화형시킨 당신들의 선조처럼 마술은 믿지 않으면서도 모반에 대해서는 믿고 있다…

진실로 ‘모반가’, ‘선동가’들을 제거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급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종업원들을 혹사시켜 부를 축적한 모든 공장주들을 처단하라! 노동자 농민들이 착취당하면서 지불한 집세로 부자가 된 모든 집주인들을 제거하라! 모든 재화의 생산자들인 노동자들을 가난 속에 몰아넣은 채 공업과 농업의 관계를 변형시키고 생산활동을 집중시켜 국가의 부를 증대하는 반면, 노동자들을 몰락시키고 있는 모든 제도를 철폐하라! 철도, 전신, 전화, 증기기관 그리고 당신들 자신을 제거하라! 왜냐하면 바로 이 모든 것들이 혁명정신을 움트게 하는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당신들 자신이 혁명가라는 말이다.(《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세계 혁명가 25인의 최후진술》,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저 엮음, 김준서 외역, 이매진)

어거스트 스파이스 열사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치열하게 8시간 노동제를 걸고 투쟁하는 동안에 러시아노동자들도 특히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 “빵과 토지와 평화”의 요구뿐만 아니라 8시간 노동제를 내걸고 투쟁하였습니다. 8시간 노동제가 법제화 된 것은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이후였습니다.

10월 26일 혁명 하루 뒤에 소비에트 정권 수립 결정이 채택되고 노동자·농민 정권이 수립되어 “강화에 대한”, “토지에 대한” 포고가 발표되어 전쟁을 중단하고 지주·황실·사원의 토지를 국유화 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준다는 결정이 나왔습니다. 이어서 “8시간 노동제에 대한” 포고가 발표되어 인류 최초로 8시간 노동제가 국가 차원에서 입법화 되었습니다.

기업의 내부관리규칙으로 규정되는 노동시간은 하루 8시간을 넘든가 1주일에 48시간을 넘어서는 안 된다. 이 가운데는 기계의 청소와 작업장소의 정돈에 소요되는 시간도 포함된다.(제2조)

제1인터내셔널이 강령에 8시간노동제 요구를 내걸고 투쟁한 이래 51년 만에 혁명으로 8시간 노동제가 법제화 된 것입니다. 보통선거권도 그렇지만 러시아혁명 이후에 전 세계 노동자들이 혁명적으로 투쟁한 결과 8시간 노동제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게 된 것입니다.

열사들과 전 세계 노동자들의 피어린 투쟁으로 노동자들의 권리가 신장되고 140주년 노동절은 노동절 명칭을 되찾았으나 여전히 노동자들은 노동자라는 존재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영업자ㆍ개인사업자 취급을 받고 있고, 심지어 다시 열사가 되고 있습니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중세보다 훨씬 긴 “하루 13시간 월 325시간 과로, 아파서 쉬어야 할 때도 건당 운임의 2배의 대차비용을 내야 하는 부당한 노동조건” 속에 싸우고 있습니다. 하루 8시간 노동제는 허울일 뿐이고 1주 12시간의 연장근로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자본은 틈만 나면 이 연장근로를 연장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쿠팡의 배송 노동자들은 주6일 11시간씩 야간노동을 하면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과로 산재의 대표적인 증상인 뇌심혈 관련 질병에 시달리고 과로로 사망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임금삭감을 우려하여 야간노동을 부득불 선호하기도 할 처참한 지경입니다. 저임금과 야간, 장시간 노동이 서로 하나의 사슬로 묶여서 노동자의 목을 조이고 있는 것입니다.

노동시간 단축 역사를 살펴볼 때 자본은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 노동강도 강화와 임금저하로 반격을 시도하면서 노동시간 단축을 무력화 시켜 왔습니다. 그러한 자본의 반격의 와중에도 노동시간은 단축되고 투쟁으로 임금을 단축 이전으로 회복시켜왔습니다. 임금삭감 없이, 노동조건 후퇴 없이 이루어지는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특히 중소영세 사업장의 경우 장시간 노동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장시간 노동의 뒤에서는 초단시간 노동자들은 과소 노동으로 빈곤선 이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플랫폼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도 되지 못합니다.

되찾은 노동절은 단지 명칭일 뿐,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에이 아이 시대 노동자들의 고용은 근본적으로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에이 아이 도입은 불가피한 것인데 대안이 있느냐는 협박 아닌 협박이 권력자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1877년에 결성된 사회주의노동당의 강령에는 1) 생산의 발전에 비례하는 노동시간의 단축이 있습니다. 에에 아이 도입과 확산은 생산의 대대적인 발전입니다. 에이아이 도입으로 인간 노동이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착취적 생산이 아니라면 에아아이 도입은 인간 생산력의 발전으로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이는 재앙입니다. 생산의 대대적인 발전만큼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대안입이다. 현재 생산력의 발전이나 발전 추이를 볼 때, 4시간 노동으로도 현재의 생산과 서비스를 담보하고도 남습니다.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하고 노동자들 고용을 전폭 확대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요구가 바로 21세기 우리의 강령이 되고 이것을 기치로 다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투쟁을 대대적으로 벌여나가야 합니다.

사진출처: 시사인 이명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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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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