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산업전환’ 요구에 대한 새로운 시각

 ㅡ 노동자 일자리 강탈하는 강도 같은 산업전환을 ‘정의’라는 미명 하에 수용해야 하는가?

기후위기 대응을 명목으로 윤석열 정권이 2036년까지 원전 발전량을 전체 발전량의 30% 이상으로 높이고, 석탄 발전은 15%로 낮추는 방식으로 전국의 석탄화력발전소 58기 가운데 28기를 단계적으로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한전산업개발에서 2021년부터 3년 반 사이 전 직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142명이 퇴사했다. 사고로 숨진 김용균씨가 일했던 한국발전기술은 2021년부터 2023년까지 퇴사자가 총원의 50.1%인 449명에 달했다. 석탄발전소가 지역 내 가장 큰 기업이었기에 지역경제 타격도 불가피해졌다.”(“‘탄소 중립’ 정의로운 전환에 석탄발전 노동자는 왜 빠졌나”, 경향신문, 2024.09.05.)

노동조합에서는 이 결정으로 1만 4천여 명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무지막지한 강도 같은 산업전환 결정에 기후위기 반대 운동이 자기모순에 빠진 결과 노동자 정리해고 반대 투쟁을 선제적으로, 적극적으로 펼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정의로운 산업 전환, 정의로운 일자리 전환 요구는 기후위기 대책으로 특정 산업이 폐쇄(산업전환)될 때 노동자의 고용보장 등 ‘정의로운’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윤석열 정권에서 보듯, 실제 현실은 아무런 생존 대책 없이 일방적, 폭력적으로 산업전환이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 때 정의로운 산업전환 요구는 산업전환 자체는 기후위기 해결을 위해 불가피하고 또 필수적이라고 사고하기 때문에 애초에 내걸었던 ‘정의’가 무참히 파괴될 때 조차도 스스로 발목이 잡혀 공세적인 반대 투쟁을 대응을 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고용 대책 없이 일방적으로 산업전환을 할 때 이를 전면 반대하고 싸워야 하는데 탄소중립 논리에 스스로 발목이 잡혀 고용 대책 없는 화력발전소 폐지 전면 반대 대신에 산업전환을 불가피하고 필수적이라고 인정한 상태에서 전직, 취업알선 등 대책을 정의로운 산업전환, 정의로운 일자리 전환이라는 미명 하에 수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단지 기우도 아니고 실제 공공연하게 주장되고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정의로운 전환은 노동자에게 ‘권리’와 ‘의무’가 섞여 있는 개념이다. 노동자의 일방적인 권리만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동자에게 이것을 수용하라고 하는 의무만 얘기해서도 안 된다.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데, 의무가 수반되지 않는 권리만 내세우게 되면 자칫 이기주의적인 성격으로 변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정의로운 전환을 일자리라는 개념으로 협소하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 일자리를 이야기할 때 두 가지를 함께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내가 일하는 사업장에서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 그것만이 일자리 보장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박태주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연중기획: 정의로운 전환] “기후위기에 노동조합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24-04-11)

언제부터 “내가 일하는 사업장에서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 그것만이 일자리 보장 개념이 아”닌 것이 되었고 “협소하게 해석하는” 것이고 심지어 “이기주의적인 성격”으로까지 비난 받을 것이 되었는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가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하지 못하고 내가 일하던 직장에서 잘리면 새로운 일자리가 안정적으로 주어지는가? 정리해고 뒤에 기존의 임금과 노동조건, 경력을 인정 받고 취업한다는 보장도 없고 심지어 일자리를 새로 얻을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새로 일자리를 얻는다 해도 해고 기간 동안의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은 누가 보장해 줄 수 있는가?

특히 자본주의는 점점 더 자동화, 무인화 되면서 점점 더 인간 노동력을 폐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산업전환은 필연적으로 기존 보다 훨씬 더 적은 노동자를 고용하도록 한다. 이럴 때 전직을 한다 하더라도  노동자는 새로운 기술을 익혀야 하고 낯선 노동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이러한 불리한 조건에서 기존 노동자가 기존과 같은 조건으로 취업을 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현실을 잘 알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본의 매각이나 폐업, 해외 이전, 외주화 등에 맞서 싸워 왔다. 그리고 이를 위한 투쟁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한 정당한 투쟁일뿐만 아니라 총노동의 삶과 권리를 지키는 사회적 투쟁의 일환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노동운동의 사명이고 자본의 일방적 착취와 횡포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의 진보적 사명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의로운 산업전환을 외치는 이들은 이것이 이기적이고 사회정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까지 비난하고 있다.

이는 마치 과거 운동진영 일각에서 제기한 매각과 구조조정은 생산력 발전 과정으로 진보적 과정이니 매각과 구조조정 자체를 인정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고용불안 문제를 가지고 싸우자는 얼척 없는 소리와 같다. 

이와 비슷한 논리로 자유무역협정(FTA) 그 자체는 자본의 국제화를 낳아 노동자의 국제적 단결과 국제혁명의 기반을 만들어내니 이를 수용하고 그 결과로 발생하는 문제들과 싸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제국주의 전쟁은 생산력 발전이 낳은 결과이므로 “생산력이 죄다”라는 카우츠키 류의 논리를 낳기도 했다.

제국주의 식민지배에 대해 식민지배가 자본주의 발전을 낳는 진보적 과정으로 사회주의혁명의 산파가 된다는 식으로 맑스주의를 진화론적으로 해석하여 맑스주의가 제국주의를 인정하는 오리엔탈리즘으로 잘못 인식하여 맑스주의를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안병직, 이영훈 등 한 때 진보인사였던 자들이 악랄한 뉴라이트로 전환하여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것도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레닌주의)는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철저하게 맞서 싸우는 해방의 사상이다.

자본주의에서 정의로운 산업전환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탄소중립’이라는 논리를 갖다대도 여기에는 정의는 없다.

 
‘탄소중립’은 기후위기라는 인류의 공통위기를 해결하자는 중립적인 언어로 포장되어 있는데 이는 허구의 논리이다. 자본과 권력, 제국주의는 기후위기의 주범이면서도 마치 해결자를 자처하고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 하기 위해 이른바 저개발국가, 가난한 민중, 노동자들에게 위기를 전가하고 있다.

진보진영에서는 정의로운 산업전환 혹은 정의로운 일자리 전환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자 정리해고를 필연적으로 양산하는 석탄 화력발전소 폐쇄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이러한 발전산업뿐만 아니라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자동차(전기자동차) 등 대다수 산업영역에서 정의로운 산업전환을 명목으로 수십 만, 수백 만의 노동자 정리해고 피바람이 몰아치게 될 것이다.

노동자 정리해고를 낳고 처지를 악화하는 매각 자체의 원천 반대 투쟁처럼 탄소중립을 미명으로 노동자 정리해고를 자행하는 자본과 이를 부추기는 (자본가)국가의 산업전환, 일자리 전환에 맞서 싸워야 한다.

정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생명과 생존이 보장될 때 비로소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

기후위기 책임을 노동자들이 뒤집어쓸 이유가 하등 없다. 권력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된 노동자들이 기후위기의 책임을 자처하고 희생해서는 안 된다.

기후위기의 주범은 자본주의 체제이다. 인류가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지구(토지)를 자본가와 부자들이 일방 전유하고 일방 파괴하는 사적소유 체제가 근본 문제이다.

자본주의의 고유한 무계획성 무정부성, 자본의 탐욕과 무한이윤 추구를 근본원리로 하여 산림과 강을 난도질하고, 무분별한 투기성 위락시설 건설과 난개발로 진행되는 무차별한 도시재개발을 일삼고, 그린벨트를 파괴하고 환경규제를 완화하고,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필연적이고 여기에 서울편입ㆍ수도권 집중 정책이 더해져 도시를 과밀화로, 농촌을 황폐화로 몰아가는 이 체제가 기후위기의 주범이다.

자동차매연으로 인한 기후위기에 대한 책임은 자동차생산과 판매로 인해 막대한 이윤을 챙기는 자동차 거대자본이 져야 한다. 자본에게 탄소세를 일방 부과하고 이를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해야 한다.

미제를 위시로 한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이 기후협약을 지키기를 사사건건 거부하고 기후위기 주범이면서도 국제금융 착취체제를 구축해 놓고는 석탄을 주요원료로 사용하는 개발도상국이나 사회주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탄소중립 운운하는 것은 위선이자 제국주의 폭력이다.
 
국가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생태문명을 지향하는 중국을 기후위기 주범국으로 몰아 책임을 전가하고 중국혐오를 부추기는 것도 제국주의이고 자본주의 국가들이다.

핵전쟁으로 인류를 전멸의 위기로 몰아넣고 핵시험을 경쟁적으로 하여 인류의 절멸위기와 환경재앙을 낳는 원인도 제국주의에 있다. 이러한 계급적, 당파적, 변혁적 관점이 없기 때문에 유럽의 녹색당들이 반노동자적이거나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처럼 서방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앞장서는 반동적 정당으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가치중립이 아니라 당파적이어야 한다. ‘모든 핵 반대’ 요구가 북핵반대로 나타나 미제의 핵독점과 침략정책의 들러리가 되는 것을 봤을 때, 기후위기 반대도 탄소중립이라는 중립적 가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동자와 개인들이 책임을 지는 방식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자본의 착취체제와 맞서 싸울 때 가능하다.

제국주의, 자본주의 프로파간다에 맞서 싸울 때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후위기 대책이라는 미명 하에 일방적으로, 폭력적으로 하루 아침에 노동자의 일자리를 강탈하고 생존권을 유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석탄화력발전소 폐지를 전면 반대하고 싸워야 한다. 이미 정의로운 산업전환이 아니라 강도 같은 산업전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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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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