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남사할린 및 쿠릴 열도에서의 전투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는 어디에서 발생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놀랍게도 만주·중국·몽골·한반도·쿠릴 열도·사할린에서 일어났다. 태평양 전쟁은 중국 전선과 동남아 전선 그리고 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에서 전투가 벌어진 전쟁이었지만, 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앞서 언급한 지역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전투의 주인공은 바로 소련이었다. 사실 소련은 1938년 하산호 전투와 1939년 노몬한 전투 이후 일본과의 교전을 피했고 1941년에는 소일 중립조약을 체결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여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소련은 히틀러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에 사력을 다했었다.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크루스크 전투, 레닌그라드 포위전, 바그라티온 작전 등 파시즘을 무찌르기 위해 소련이 치른 희생은 상상을 초월했으며, 1945년 5월 베를린을 완벽히 점령함으로써 유럽에서 파시즘을 격퇴했다. 소련이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고 있던 시기 일본과의 전쟁은 미국과 중국이 치렀다. 미국과 일본이 싸운 전쟁에서 일본은 100만 명의 병사를 잃었고, 미국은 12만 이상의 병사를 잃었다. 나치독일이 항복한 이후에도 태평양 전쟁은 지속되어 미국은 오키나와 전투를 끝내기 위해 1945년 6월까지 교전을 치렀다.

히틀러의 제3제국을 멸망시킨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5년 6월부터 유럽에 있던 소련군을 시베리아 열차를 통해 극동에 배치했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Aleksandr Vasilevsky)가 후에 있을 만주 진공 작전을 지휘하게 됐다. 소련군은 크게 3군데에서 만주 전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배치되는 군대도 크게 3개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소만 국경지대와 몽골 만주 국경지대에 배치된 자바이칼전선군이었고, 그다음은 연해주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쪽에 배치된 제1극동전선군이었으며, 마지막은 만주 샤오싱안링 산맥을 향해 공격하게 될 제2극동전선군이었다. 


소련이 계획한 이 작전에는 150만 이상의 병력과 5,500대 이상의 전차와 자주포, 27,000문 이상의 야포와 박격포 및 3,7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동원됐다. 소련군이 크게 3개의 전선군으로 나뉘어저 대일전을 시작한 것은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동료이자 북한에서 부주석을 지낸 림춘추의 자서전에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되기도 했다. 

1945년 8월 8일 쏘련은 일본 침략 군대를 격멸하기 위하여 선전 포고를 하였다. 쏘련 군대는 자바이칼 전선, 제1원동전선, 제2원동전선의 3개 전선에서 진공을 개시하였고 쏘련 태평양 함대의 군함들과 부대들이 동원되였다. 쏘련 군대는 각 전선에서 일본 침략군을 분쇄하면서 영웅적으로 진격하였다. 쏘련 군대의 정의의 칼날 앞에 일본 침략자들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인민은 쏘련 군대에 의하여 36년 간의 일제의 야수적인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되게 되였다. 쏘련 군대는 일제의 통치 제도를 전복하고 조선 인민에게 조국 창건의 가능한 조건을 지어 주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만주 전역과 태평양에서 대일전을 게시했다. 소련군이 만주전역에서 공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소련군의 예상과는 달리 손쉽게 전선이 무너지고, 방어선이 붕괴되었으며, 사막 지역과 늪지대 그리고 산맥을 손쉽게 돌파하며, 거침없는 진격을 계속했다. 그들 중 일부는 만리장성까지 가기도 했고, 치스차코프 휘하의 소련군은 대략 35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반도로 진군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8월 말까지 계속되었지만, 소련군의 진격작전은 1주일만인 8월 16일에 끝났다. 즉 단 1주일 만에 소련군은 만주전역으로 진군했고,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했다. 이에 대해 소련의 군사사를 연구한 데이비드 글랜츠(David M. Glantz)는 소련군의 승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만주 전역의 소련군 지휘관들은 모든 방면, 모든 단위부대에 걸쳐 큰 위험을 감수하며 대담한 작전을 실시하고, 자유롭게 계획을 수행했다. 소련군이 작전 초기에 실증했던 엄청난 유연성은 작전 전구의 특정한 요구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소련군 지휘관들의 전반적 지휘력 상승과도 연관되어 있다. 전쟁은 새로운 세대의 야전군, 군단, 사단, 여단, 연대 지휘관을 잉태했으며, 그들의 전문성은 최대 4년에 걸친 전투의 산물이었다. 이 세대의 지휘관들은 만주 전역이 기나긴 전쟁의 마지막 단계임을 깨달았고, 따라서 전역을 단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종결지으려 했다. 평화를 되찾으려는 의지는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소련군은 외과수술처럼 정밀하게 전투를 수행했고, 11일에 걸친 싸움 끝에 치열한 전쟁을 종결지었다.

앞서 언급한 소련의 제2극동전선군의 경우 단순히 만주에서만 진격작전을 게시하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이 점령한 섬인 쿠릴열도와 남사할린으로도 진격했다. 소련군의 남사할린 진격의 경우 제2극동전선군 산하 제16군이 동원됐다. 여기에 동원된 소련군 병력은 총 10만 명이나 되었으며, 대략 200대 이상의 항공기와 여단 규모의 탱크도 동원됐다. 남사할린으로의 진격은 8월 11일에 이루어졌다. 소련군은 개전 8일 만에 사할린 섬 남서쪽에 위치한 홀름스크에 상륙작전을 펼쳐 항구를 순식간에 함락했고, 일본 훗카이도와 연결되는 오도마리(러시아명 코르사코프)도 8월 25일에 함락시켰다. 당시 남사할린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은 2만 명도 채 안되었고, 이들은 2주 만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남사할린의 경우 1905년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에게 빼앗겼던 곳이었는데, 빼앗긴지 40년 만에 되찾은 셈이다.

참고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남사할린에는 일제가 강제징용으로 끌고 온 조선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사할린 한인이었다. 이 당시 사할린 한인의 규모는 대략 10만 명 정도였다. 전쟁 이후 사할린에 남은 한인은 4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제 패망 전후로 일본 제국주의 군대는 남사할린에서도 한인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벌였었다. 카미시스카에서 19명의 한인이 학살되었고, 미즈호에서 27~35명의 한인이 학살된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나 미즈호 마을에서 일본군의 벌인 학살을 보면 피해자들 중 아이들이 제법 있었다. 학살당한 27명 중 10세 이하의 피해자(3살, 4살, 6살, 8살)가 4명이고, 한 명은 6개월 된 갓난아기였다. 2019년 KBS 뉴스 기사에 따르면, 미즈호 마을에서 학살당한 한인은 27명이 아닌 35명이라고 나온다. 그 근거는 입수한 소련 측 재판 기록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남사할린 전투는 궁극적으로 소련군의 승리로 종결됐다. 소련군은 600~1,000명이 전사했다. 반면 일본군은 최소 700명에서 최대 2,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일본군은 18,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남사할린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들은 시베리아 혹은 사할린 내부에 마련된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1950년대에 귀국하였고, 억류된 민간인들은 순차적으로 일본 본국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사할린 한인들의 경우 냉전시기 접촉이 없다가 한소관계가 개선된 1990년 이후부터 일부가 귀환하여 2018년에는 3,500명이 한국으로 귀환했다. 냉전시기에는 북한을 선택한 사할린 한인들도 제법 많았으며 대략 8,000명 정도 된다.

쿠릴 열도에서의 전투는 특히 슘슈 섬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쿠릴 열도의 경우 1930년대부터 일제가 비행장과 해군 기지를 건설한 곳이었다. 1941년 12월 7일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 함대는 쿠릴 열도 남부에 위치한 이투루프 섬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릴 열도 상륙 작전은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다음에 게시됐다. 8월 18일 소련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슘슈 섬에 상륙했다. 당시 쿠릴 열도에 주둔한 일본군은 항복 명령을 받았음에도 이를 무시한 채 상륙한 소련군 부대를 공격했다. 이렇게 해서 나흘간의 전투가 지속됐다. 결국 8월 21일 소련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22일부터 일본군은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았다.

당시 소련은 쿠릴 열도와 더불어 일본 훗카이도를 대상으로 한 상륙작전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훗카이도 상륙작전을 취소하고 쿠릴 열도 남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자, 쿠릴 열도에 있는 일본군 무장해제 작업을 진행했다. 이 작업은 9월 5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소련은 쿠릴 열도 전체를 접수했다. 쿠릴열도 점령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인 슘슈 섬 전투에서 소련군은 1,500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일본군은 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다. 일본의 경우 전투 1일차에 소련군과의 첫 교전에서 최소 30대 이상의 탱크를 상실했고, 당일 교전을 통틀어 소유한 탱크 80대 모두 소련군에 의해 파괴됐다.

소련은 1945년 8월 대일전 참전을 통해 결과적으로 만주 지역과 몽골의 일부 영토, 중국 대륙의 일부와 한반도 이북, 그리고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에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몰아냈다. 소련이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신속하게 무너뜨렸지만, 이와 같은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직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일제를 패망시켰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통주의적 역사관은 소련의 대일전의 역할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관점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시각은 분명히 교정돼야 한다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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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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