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ㆍ인민의 과학성, 당파성에 반하는 양비론, 중립주의는 종국에는 부르주아, 제국주의자들의 이해에 복무하게 된다!
* 이 글은 지난 7월 19일(금) 오후 3시 민주노총 12층 중회의실에서 열렸던 (가칭) 자주연합 준비위원회 주최의 [한반도 정세 전망과 자주화 운동 과제 토론회] 토론문입니다.
원인 없이 결과 없고 작용 없이 반작용 없다
인간사는 모두 시간의 흐름 위에서 이루어진다. 지금 진실의 전모를 알려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사연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과관계의 시간적 맥락을 잘라내고 자신에게 유리한 특정 부분만 선택, 확대해 특정 사안의 성격을 규정하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나라 국내 대부분의 언론들은 딱 그 짓을 하고 있다. 거두절미하여 진실의 전모를 가리고 왜곡하는 것이다.(이범주, “전후 맥락을 잘라먹는 의도”)
“객관적 진리를 인정할 수 없다”거나 “역사적 사건들의 인과 관계는 망상”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망상적 주장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역사, 현상에는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원인 없이 결과가 없다는 것은 원인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 원인으로 인해 생겨난 결과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에서는 이것이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로도 나타난다. 작용 없이 반작용은 없다. 작용이 있었기에 그에 대한 반작용이 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법이며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법이다.
“인간사는 모두 시간의 흐름 위에서 이루어” 지는데 현재는 과거의 축적물이다. 과거 없이 현재 없고 현재 없이 미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역사를 제대로 인식하려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인과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인식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올바르게 파악하려는 역사적 관점이 아니라 “인과관계의 시간적 맥락을 잘라내고 자신에게 유리한 특정 부분만 선택, 확대해 특정 사안의 성격을 규정하고 평가”하는 비자연스러운 흐름이 숱하게 만연해 있다. 이는 진실을 은폐하고 책임을 전가하거나 비열한 정치적 의도와 음험한 술책을 가지고 행해지고 있다.
국제관계에서도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을 보도하는 대다수 언론의 태도가 그렇다. 여기에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의 역사적 원인은 사라지고 푸틴은 침략자 수괴고 젤렌스키는 정의의 사도이다. 서방 제국주의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돈바스인들을 학살하고 러시아를 적대시한 우크라이나(권력)는 무고한 피침략국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고 있는 학살과 침략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도 특정 시점의 하마스의 인질극만 부각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학살과 점령은 정당화 된다. 이스라엘은 문명이고 하마스는 야만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야만에 맞서 정의를 집행하는 문명의 사도다. 이스라엘 시오니스트 학살자들을 규탄하고 이에 맞서는 행위는 유태인 혐오로 비난 받고 있다. 유태인 학살과 혐오가 파시스트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 원인과 전혀 상관없는 무고한 팔레스타인들과 파시스트를 증오하며 이 연장선에서 이스라엘판 파시스트인 시오니스트를 증오하는 이들을 유태인 혐오로 엉뚱하게 원인을 파악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역사적 원인은 다루지 않거나 설사 다뤄진다고 하더라도 원인과 결과가 둔갑되거나 뒤섞이면서 양비론이 되거나 공동책임이 됨으로써 책임이 사라지게 된다.
국가보안법이 유일한 진리의 판단기준으로 남아 공포를 조장해온 분단된 한국사회에서는 진실을 추구하고 사태의 역사적 원인을 과학적으로 파악해 들어가는 시도를 하는 이들은 수없이 골로 가거나 골로 간다는 겁박을 당해야 했다.
그리하여 이 백색테러 체제 하에서 이 땅의 통치계급은 제어 받지 않는 노골적인 뻔뻔함과 파렴치함과 교활함으로 무장하고 인민들을 속이고 원인과 결과를 호도하고 심지어 전도시키고 있다.
진실보도를 사명으로 하는 언론은 대개 일찌감치 그 사명 따위는 내다 버린 지 오래고 자본의 이해에 일방 복무하고 거짓과 조작을 언론의 제1의 사명으로 삼은 지 오래다. 특히 남북관계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조선(북)에 대한 노골적인 왜곡과 상투적 보도는 일상이 돼버렸다. 정정보도는 책임질 대상이 휴전선 북쪽의 적대하는 상대방이기 때문에 안 하면 그만이다.
이에 따라 남북관계에서는 역사적 원인을 거두절미하고 특정 장면만 부각시키면서 조선을 악마화 하고 조선에 대한 적대정책을 은폐하고 정당화 하는 경우가 통상적으로 되어 버렸다.
2020년 6월 16일 북이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남북공동연락소를 폭파한 것에 대한 남쪽 언론의 보도태도에서도 이러한 태도가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2018년 4.27판문점 선언과 9.19평양공동선언과 조미 정상회담 개최로 정점에 달한 “선대선”의 관계가 2019년 2월 27일~28일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미국이 파탄시키고 나서 대북 침략책동인 한미군사훈련이 재개되고 대결로 변화된 것에 대한 원인과 책임은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탈북자들이 저열한 내용의 대북전단을 날리면서 북을 모욕하고 도발한 직접적인 원인과 책임도 사라지고 없다.
이러한 맥락이 사라지고 의도적으로 묵살되고 무시되면서 이제 남북의 평화와 교류의 상징인 연락사무소를 파괴한 북의 호전성과 무도한 도발행위만 남게 되었다. 남의 대중들의 인식 속에는 이러한 보도행태가 누적되면서 북은 악마화 되었다.
최근 북의 오물풍선 공방도 마찬가지다. 이는 멀리 갈 것도 없이 2023년 9월 대북전단 살포가 “표현의 자유”로 보장돼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에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조항이 위헌이 되면서 접경지대에서 탈북자들이 날리는 대북전단이 재개되면서 북에서는 예고한 대로 이에 대한 맞대응 조치로 취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은 묵살되고 있다. 남에서 하면 “표현의 자유”고 북에서 하면 “도발”이라는 파렴치한 내로남불의 이중잣대가 판단 근거가 되고 있다.
당파성이 아닌 양비론은 종내는 적들의 이해에 복무
“거두절미하여 진실의 전모를 가리고 왜곡하는” 것은 통치자들과 “이 나라 국내 대부분의 언론들”만이 아니다.
진보진영이 과학적이고 자주적 관점, 당파적 세계관으로 무장하지 못하면서 당대의 지배계급이 조장한 여론,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 언론 내부에도 이러한 흐름이 침투해 있다.
그런데 “지금 진실의 전모를 알려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사연을 알아야” 하는데 복잡한 인간의 개별 사안들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의 역사적 진실을 인식하는데 비본질적이며 결과와 연관이 전혀 없는 요인들,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차적이고 지엽적인 요인들은 내려놓고 본질적이며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역사적 사안들을 검토해봐야 한다. 이것이 사회과학이다. 이 사회과학은 이 사회모순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그 해결을 모색하는 사회성격론 혹은 사회구성체론으로 나타났다.
한국사회는 보편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고 특수하게는 분단된 사회이며 미국이 정치, 군사, 경제, 문화, 심지어 정신까지 지배하는 사회다. 당대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인바, 한국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친미 숭배 사상이며 이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표적 삼고 있는 대상을 적대하는 반북반공 사상이다. 이 반공이데올로기는 신냉전의 시기에는 반북 이데올로기의 연장선 속에서 반중, 반러 이데올로기로 점철돼 있다.
뉴라이트 진영에서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노골적으로 근대화론으로 찬양하고 역사왜곡에 동참하고 극우 정치세력 일부도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대한 분노가 인민들에게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 이를 전면 무시할 수 없는 이 사회의 통치자들은 한쪽에서는 반일을 외치면서도 미·일·한 동맹을 유지해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와 겁박 사이를 오가고 있다. 그리하여 각종 선거에서 틈만 나면 “한일전”을 외치면서도 북의 도발에 공동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한일군사정보협정을 유지하고 있고 심지어는 자위대를 끌어들여 미·일·한 공동 군사훈련에는 침묵하면서 입에 발린 반일과 모순되게 친일 부역하고 있다. 친미 상태로 반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일본 제국주의를 대신해 미국 군대가 새로운 점령군으로 들어와 포고령을 발하고 이남의 자주적 인민기관을 분쇄하고 단독정부ㆍ단독선거로 민족을 분단시키고 여기에 저항하는 인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그러나 미국의 식민지배는 영국, 일본 제국주의 시대와 다르게 대개 현지 통치자들을 형식적으로 내세워 주권을 보장해주는 신식민지배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러시아혁명과 민족해방투쟁의 성과, 영제에서 미제로의 식민지배 패권의 전환 등 때문이다.
이 (신)식민 지배는 강도성은 계속 유지하고 있으나 인민들의 저항을 막고 간접 통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더 세련되고 고도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이를 정당화 하는 이데올로기도 한층 더 치밀하다.
한국 자본주의의 외형적 발전과 수다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대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본질은 불변이다. 미제의 지배는 이남을 반공 군사기지화, 침략 전초기지로 삼았기 때문에 대북 적대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미제의 대북 적대 정책이 남북 대결 및 갈등, 오늘날 남북관계의 적대관계로의 전환의 역사적 원인이다. “북핵문제”는 실은 미국의 핵독점·핵패권 정책이다.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 핵패권과 핵위협이라는 원인이 북이 핵무장을 초래하였다. 미국의 핵독점·핵패권이 원인이고 북핵은 이에 대한 대응이자 자위권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원인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 원인으로 인해 생긴 결과도 사라지지 않고 대응이 없으면 맞대응이 없고 작용이 없으면 반작용도 없는 법이다. 이는 자연사, 인간사의 보편적인 원리이고 합리적, 과학적 인식의 기본이고 상식이고 이성이다. 북의 사회성격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적용되어야할 자명한 원칙이다.
그런데 이 자명한 원리·원칙이자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보편적 상식이 조선(북)이라는 대상, 북이라는 대상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사라지고 만다.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이 사라지지 않고 핵독점·핵패권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북핵을 “비핵화” 해야 한다는 주장은 미국의 사악하고 비열한 논리에 부응하는 것이다. 정치는 진공 상태에서 이뤄지는 행위가 아니다. 계급대립과 상호투쟁과 대결 속에서 이뤄진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무기는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이는 자명한 원칙 같지만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의 핵위협이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제국주의와 싸우지 않으면서 진공 상태 속에서 외쳐대는 “모든 핵 반대”는 모든 핵을 반대하는 중립과 양비론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북한핵 비핵화”를 외치면서 공세를 펼치고 있는 미제와 그 주구들의 이해에 복무한다. 제국주의의 핵독점과 핵위협이 엄존한 가운데 “모든 핵 반대”는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자위권의 일환으로 만든 핵을 포기하고 무장해제하라는 요구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리비아와 카다피의 비참한 사례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진보진영”을 자처하고 이 사회진보를 외치고 연대를 외치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외치고 민주노총이 이를 수용하라고 겁박하는 세력을 진보세력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미국의 침략정책에는 눈감고 이에 저항하는 세력과 나라를 적대하는 것은 미제국주의 패권의 우군이 되는 것이다. 미·일·한은 역사적 진보이고 북·중·러는 야만이라는 인식은 이스라엘은 문명이고 팔레스타인은 야만이라는 주장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이들 “진보세력”들은 민주노총 강령(창립선언문)에 명시 된 “핵무기 종식을 통한 세계평화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는 문구를 가지고 자신들의 “한반도 비핵화” 요구가 정당하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핵무기 종식” 문구 앞에 언급된 “침략전쟁”을 반대한다는 서술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더욱이 강령 정신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저 멀리 선배 노동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간고한 탄압 속에서 민족해방과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피어린 투쟁을 전개했다.”와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가열찬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는 문구와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내용을 무시하고 문구만으로 강령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 진보세력이 “반전반핵 양키고홈” 요구를 외쳤으니 “양키고홈”은 짐짓 모른 체하고 당시 반미 투쟁을 외면하면서 “한반도 비핵화”, 실제로는 “북핵 비핵화” 요구를 걸어야 한다는 주장과도 같은 것이다.
일각에서 조·러 간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나토 조약와 비교하며 이 조약 체결로 “한반도가 전쟁에 빨려들어갈 위험, 더 커졌다”(정욱식, 오마이뉴스, 24.06.20.)고 주장하는 것은 외국군 주둔이 없는 자주적 국가들 간의 동맹과 예속된 “불평등” 조약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는 것이며 이 역시 역사적 맥락은 생략한 체 원인과 결과를 호도하고 방어와 침략을 전도시키는 것이다.
나날이 강해지는 군사력과 동맹에 미소 짓고 있는 남북의 지도자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동맹을 갖게 되었다고 자랑하는데, 과연 한국과 조선의 안보는 튼튼해지고 있는가? 군비경쟁과 안보딜레마를 격화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당사자가 바로 자신들은 아닌가?
전쟁과 군비경쟁과 지정학적인 대결이 첨예해지고 있는 국제사회에서 동맹 강화가 한반도의 운명을 타자화할 위험은 없는가? ‘몽유병자’처럼 동맹의 체인에 엮여 원하지 않는 전쟁에 빨려 들어가게 할 위험은 없는가?(같은 기사)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당사자”는 역사적으로 누구인가? 미국 아닌가? “’몽유병자’처럼 동맹의 체인에 엮여 원하지 않는 전쟁에 빨려 들어가게 할 위험은” 누구로부터 오는가? 윤석열 정권으로부터 나오는 것 아닌가?
70년 이상을 미국의 적대정책과 싸우고 나사 못 하나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물샐틈없는 제재와 맞서 싸우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제재를 완화하고 침략 억제력을 발휘하기 위해 자주적인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 그렇게도 못마땅한가? 양비론과 중립주의야말로 “한반도의 운명을 타자화”하고 제국주의의 횡포에 맡겨 두는 “위험”을 초래하는 비자주적이고 비민중적인 태도 아닌가?
또한 이밖에 평화통일 세력 내에서 “민족과 통일을 부정하는 북한 당국의 비이성적, 비합리적, 독단적 입장은 남한 당국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거나 조·러 간의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조약’ 체결로써 “북러관계가 시대착오적인 군사적 동맹관계로 복원되고 한반도와 동북아가 한층 더 핵대결과 핵전쟁 위기를 맞게 된 데 대해 크게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 역시 역사적 원인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중립주의적이고 양비론적 태도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제국주의와의 결전 앞에 “중립은 없다”
현 국제정세는 미제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체제와 여기에 맞서는 비제국주의, 반제국주의 진영 간의 대결 및 투쟁이 본질이다. 이것이 현 신냉전의 핵심이다. 이를 패권 대 반패권, 미국 일극체제 대 다극체제, 서방 제국주의 대 반미자주 국가, 서방과 반서방, 서방 제국주의와 개발도상국, 제1세계와 제3세계, 북반구와 남반구의 대결, 제국주의와 비동맹 체제(블록불가담)의 대립 및 대결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현대 제국주의는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여 나토에 결집해 있는 영국, 독일, 프랑스와 아시아의 일본 제국주의가 미국 하위에 있고 이스라엘, 이탈리아, 스페인, 캐나다, 호주 등이 동맹체제로 제국주의를 떠받치고 있으며 한국, 대만, 우크라이나 등이 동맹이라는 미명 하에 제국주의 돌격대로 나서고 있다.
미국은 나토를 내세우고 우크라이나 신나찌 정권을 대리전으로 반러 동진을 하며 전쟁책동을 벌여왔는데 이것이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의 역사적 원인이다. 중동에서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의 팔레스타인 침략과 학살의 역사적 뿌리는 영국과 미국의 제국주의 패권 교체에 있으며, 이스라엘은 미국을 등에 업고 중동에서 제국주의 패권을 대리 행사하며 미국과 자국의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나토의 동진이 러우전에서 서방 제국주의와 대리국의 패전이 짙어지면서 막히자 미국은 아시아판 나토로 우회로로 조·중·러를 포위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대결은 동북아와 한(조선)반도에서는 미·일·한 대 조·중·러의 대결로 나타나고 있다. 전자가 침략 동맹이라면 후자는 평화와 방어 동맹이다. 현대제국주의는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미국의 패권 약화는 제국주의의 패권 약화가 되고 미제의 패권 소멸은 패권이 소멸하고 국제 관계가 자주와 주권존중, 호혜평등의 관계로 재정립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실제 국제관계에서 미국의 패권 약화와 함께 실제 급속도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정세 양상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가 제국주의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트럼프와 힐러리 같은 미국의 정치인들과 서방언론에서도 중국의 일대일로를 근거로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중국이 신식민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하면서 아프리카, 남미에 대한 자신들의 제국주의 패권과 약탈을 은폐, 전가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비단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정치선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보진영” 상당수도 이러한 인식에 동조하고 있다. 이들은 “진보”세력들은 현 국제질서를 제국주의 간 “패권경쟁”이라면서 현대 제국주의 체제가 서방의 기존 제국주의와 중국과 러시아가 중심이 된 신흥 제국주의 간의 대결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인식 하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1차 세계대전처럼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를 하면서 식민지 시장과 원료, 노동력을 약탈하고 전리품을 분할, 재분할하기 위한 약탈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서방 제국주의와 러시아 제국주의가 우크라이나의 시장과 원료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나토의 동진과 친러 정권에 대한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 색깔혁명 기도, 신나치의 육성과 우크라이나 군대와 사회 전반에 대한 파쇼 이데올로기의 육성, 러시아인에 대한 탄압과 차별, 돈바스 자결권 압살과 학살 등 전쟁을 불러온 구체적인 역사적 원인들을 전면 무시하고 제국주의 간 전쟁이라는 관념으로 구체적인 현실을 도그마하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입장은 전쟁의 야기자들인 미제를 위시로 한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집중적인 투쟁을 막고 호도함으로써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게 된다,
이들은 독점이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 기초라는 주장을 독점은 곧 제국주의라는 것으로 호도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들은 독점자본의 이해를 위해 다른 나라와 민족을 침략, 약탈하는 제국주의 성격을 경제주의적으로 왜곡함으로써 제국주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반제투쟁을 혼란케 한다. 심지어 독점이 곧 제국주의이기 때문에 현대의 대다수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가 된다. 이들은 한 줌도 안 되는 제국주의 국가가 수백 개 나라와 민족, 수십억 인류에게 자행하는 침략과 약탈과 학살, 경제적 교살은 과거의 것이 되었으며 지금은 어느 정도의 위계는 있으나 제국주의 간의 상호관계가 되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왕이면 누가 신하가 될 것이며, 모두가 제국주의면 누가 (신)식민지 지배를 당한다는 것인가? 이것이 이론, “진보적” 이론이면 사슴도 말이 되고 파리도 새가 될 것이며 쥐도 박쥐가 될 것이다.
이들은 미제와 서방 제국주의의 침략적, 약탈적 전쟁을 방어적 전쟁 일반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시키고, 침략과 지배의 경제적 수단이 되는 자본수출을 자본교류 일반으로 돌림으로써 미제의 제재에 맞서 러시아와 중국이 호폐평등과 자주권을 인정하면서 쿠바, 베네수엘라와 경제교역을 하는 것도 제국주의의 근거로 삼는다.
이러한 인식에 의하면 조선과 러시아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은 것도 제국주의의 근거가 된다. 자주를 정치적 생명으로 하는 조선은 러시아와 중국이 속국이 되고 조·중·러 약탈동맹의 동반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데나 주먹을 휘두르면 정작 싸워야 할 상대와는 싸우지 못하면서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입을 수 있는데 이들 “진보세력”의 신흥 제국주의론이 바로 그 짝이다.
그런데 지금 서방 대 반서방의 대결은 1차 대전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영국 제국주의에서 미국 제국주의로 패권이 바뀌는 상황과 전혀 다르다. 지금 반서방 진영은 패권에 질식당하고 고통 받아온 세력들이 제국주의 패권에 맞서 싸우면서 결성되었다. 일례로 중국과 러시아는 미제의 패권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서방 제국주와는 정반대로 민족해방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을 지지, 지원하고 서방에 맞서는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호혜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러시아만 보더라도 소비에트 해체 이후 자본주의 체제로 변모했음에도 조선, 쿠바,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베네수엘라 같은 이들과 친교를 강화하고 서방에 맞서 싸우는 시리아, 이란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다.
영·미제국주의 교체기에 해가 지는 영국에 비해 새롭게 부상하는 미국 제국주의가 인류에게 더 큰 재앙이 되었다. 현 국제 질서를 이와 같이 인식한다면 쇠퇴하는 미제국주의에 비해 새롭게 욱일승천하는 중국과 러시아와 그 동맹체제가 더 위험하고 모든 화력을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다극화는 미제 중심의 일극 지배 체제의 주권 존중과 평화추구의 다자주의로의 변화인데, 이러한 국제관계의 변화는 미제의 패권 약화로 인해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국제관계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고 이러한 외부적 변화를 주체적 변화로 바꿔 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미제의 쇠퇴와 국제관계의 급변에 비해 내부적 요인의 괴리는 너무나 크다. 국제적으로 쇠퇴하는 미국의 위상에 비해 국내적으로 미국 숭배는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이 상반된 부조화를 주체역량으로 극복해야 한다.
반제의 요체는 반미다. 반미는 반미 제국주의의 대중적 표현이다. 반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최대강령이 아니다. 그 자체로 당장 전면화 해야 하는 대중적 요구이자 절박한 당면 요구다.
양비론, 중립주의가 아니라 명료한 인식과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미제국주의를 축출해야 한다. 민족·동족관계를 적대관계로 전환시킨 주범인 미국을 축출하고 그 추종 세력들을 권력에서 쫓아내야 한다. 미일한 3각전쟁 동맹의 전쟁책동을 분쇄하고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시켜야 한다.
농민운동, 빈민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 지식인운동, 시민운동이 반미노선을 전면에 내걸게 하자. 노동자가 그 투쟁의 중심에 서야 한다. 진보적 노동자들의 총결집체인 민주노총은 반미 노동자대회를 통해 정례적으로 개최하여 반미가 노동자들의 대중적 요구가 되도록 해야 한다.
노동자가 중심이 되고 민중이 참여하는 반미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공장과 기업 곳곳에서, 지역 곳곳에서 노동3권 쟁취 요구와 함께 반미 미군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한미일 3각동맹을 해체하고 파탄난 민족관계를 복원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과 해방으로 나아가야 한다.
“객관적 진리를 인정할 수 없다”거나 “역사적 사건들의 인과 관계는 망상”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망상적·혼돈적 주장에 맞서 현실의 총체적 모순을 반영하는 사회변혁 노선을 다시 정립하자. 분열된 운동을 통일시키는 전략노선을 재정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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