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암살과 미군정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7월 19일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그 이유는 독립운동가이자 남북의 통일을 바랬던 해방 정국시기 정치인인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선생이 암살당한 날이기 때문이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명륜동 집에서 계동 자택으로 가는 도중 현재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탄을 맞고 비명횡사했다. 당시 여운형이 사망하기 직전 남긴 말은 ‘조국’과 ‘조선’이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했던 여운형이 괴한에게 암살당하자, 해방 정국은 점차 분단의 길로 들어섰다. 이미 대구 10.1 항쟁에서 미군정의 진압으로 수백 수천 명이 학살당한 상황이었지만, 여운형의 암살 이후 이남에서 발생한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에서의 학살은 상상을 초월하는 유혈극이었다. 이 때 해방정국을 통틀어 무려 1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미군정 하에서 학살당했다.

이 두 사건 및 학살의 경우 미군정이 이승만을 중심으로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으며, 결과적으로 한반도에서는 1948년 8월과 9월 한반도 이남과 이북에 분단 정부가 완성됐다. 그리고 2년이 지나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생각해보자면, 그의 죽음은 그런 점에서 더더욱 비극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운형이라는 인물은 어떠한 인물이고, 어떠한 일생을 살아온 인물일까? 오늘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의 몰락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14살이 되던 1900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제학당에 입학했으며,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조선이 을사조약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며 집안에 있던 노비들을 해방시키는 대담함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 받은 여운형은 일제의 식민지배 초기 중국 난징에 있는 금룽대학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여 영어실력도 뛰어났다. 의외로 일반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여운형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던 1918년 신한청년당을 창설하여 우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등 1919년 3.1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임시정부에 들어간 그는 일본 고관들과의 회담에서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 진정한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을 보였으며,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직접 만나는 등 사회주의 운동에도 투신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 혁명에도 가담했으며, 국제적으로 여러 군데를 다니고 여행한 인물이었다. 1929년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식민지 조선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33년부터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활동했으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소사건을 주도했다. 1937년 중일전쟁 시점부터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뛰어난 국제정세 판단력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그 이후를 대비했던 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1944년 건국동맹을 만들어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으며, 1945년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 받아 초기 해방 정국을 주도했다.

여운형은 해방 이후 2일 뒤인 8월 17일 건국준비위원회의(약칭 건준) 공식 수립을 전국에 발표했는데, 그가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설립되기 1일 전에 이미 한반도 이남에서 1만 6,000명의 넘는 정치범을 석방시켰다. 이 당시 석방된 사람들 중에는 이후 이승만 정권에 맞서 싸우다 사법살인을 당한 죽산 조봉암도 있었다. 아울러 건준은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된 학생과 청년 1만 5,000명 정도를 제대시켰으며, 단 며칠 만에 조선인 수만 명을 석방시켜 치안 유지 임무와 정치활동에 참여시켰다. 이러한 활동으로 8월 말까지 여운형이 조직한 건준은 한반도 전역을 통틀어 총 145개 정도의 지부를 형성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시 건준을 통해 창설된 치안대는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3주 동안 평화를 유지했으며, 주요 식량 창고를 유지 및 보호했으며 풍작을 도왔다. 또한 노동운동 지도자와 노동자가 수많은 공장과 시설을 유지했으며, 지방의 조직가들은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과 미국 그리고 중앙권력의 억압을 이겨내고 진행됐으며, 1945년 9월 6일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면서 절정에 달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와 같은 여운형의 해방 이후 자주적인 건국사업은 미군정이 설립되면서 해체됐다. 남한 주둔 미군 사령관인 존 리드 하지가 군정을 실시한 데에 이어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 아치볼드 군정장관이 “남한에는 미군정이라는 단 하나의 정부가 있을 뿐이다.”라고 발표했는데, 이것은 여운형이 주도해서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과 휘하조직인 건국준비위원회 그리고 인민위원회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토대에 미군정은 과거 일제시기 친일했던 경찰들을 다시 복권시켜 자신들의 통치를 이어나갔다.

미군정 하에 있던 경찰의 최소 80에서 90%가 과거 일제 때 친일했던 경찰이라는 사실과 그 당시 남한민중들이 가장 싫어하고 증오한 존재가 그들이었다는 사실에서 미군정 통치가 매우 반민중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의 저자이자 마오쩌둥의 친한 친구였던 에드가 스노(Edgar Snow)는 해방 후 조선에 와서 2개월간 머무르면서 정세를 알아보고 귀국한 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지에 글을 게재하며 건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미국은 아무 준비가 없이 조선에 상륙했다. 그러나 조선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다. 곧 정치적 준비가 있었다. 미국인이 만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살렸더라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하였을 것이다.

이후에도 여운형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참여와 좌우합작운동 전개를 통해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여운형은 1946년 4월 17일부터 25일 사이에 김일성의 초청으로 남북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였으며, 그해 7월 3일에는 두 딸인 여연구와 여원구를 평양으로 보냈다. 그의 딸은 이후 김일성이 거뒀으며, 여연구는 북조선에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과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까지 올랐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여운형은 북한의 김일성과도 인연이 깊었다. 이후 여운형은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여 좌파 대표로 활동했다. 1946년 10월 합작위원회는 좌우합작 7원칙을 합의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 시가지의 기지와 대건물을 적정처리하며 주요산업을 국유화 하여 사회 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 우익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은 궁극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좌우합작운동은 이승만 중심의 극우파와 박헌영 중심의 극좌파가 극렬 반대했다. 거기다 1947년 초부터 미국의 정책이 보다 반소반공주의적으로 변모하면서, 미군정은 이승만과 같은 친미파를 더욱 지지하게 됐다. 즉, 그런 맥락 속에서 좌우합작운동은 궁극적으로 실패로 귀결된 것이다. 민족사적으로 보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미군정이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고, 미국 스스로가 통일정부를 세울 생각이 없었음을 궁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운형은 해방 정국에서 벌어진 테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여운형이 해방 정국 시기 2년 동안 무려 12번이나 테러를 겪었다는 것이다. 테러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쪽과 박헌영을 지지하는 쪽에서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궁극적으로 비명횡사했다. 안타깝게도 여운형의 암살배후는 여러 추측만 남긴 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여러 암살설들이 존재하지만, 글쓴이가 생각하기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승만 암살설이라 본다. 여운형은 해방 정국에서 인기가 매우 높은 인물이었다. 여운형의 제자이자, 관련 전기인 『여운형 평전』을 남긴 이기형은 2005년 KBS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 당시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건국준비위원회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어. 충천했어. 그 때 군정청에서 여론조사를 할 때도 몽양이 1등을 했다고. 그 당시 건국준비위원회의 인기라는 건 대단한 거죠.

심지어 재미조선사정협의회장이던 김용중이라는 사람은 1946년 초에 여운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승만이나 김구는 너무 늙고 경륜도 영도력도 없는 망명객이므로 그들보다는 자유적이고 민중의 인기가 높은 여운형이 적합한 지도자이다.

이러한 평가가 존재했다는 건 이승만에게 여운형이 분명히 적이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해방 정국 당시 백색테러로 악명을 떨쳤던 김두한의 경우 본인이 여운형 암살범인 한지근에게 권총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물론 김두한이야 워낙 과장과 거짓 주장을 많이 해서 액면그대로 신뢰할 수만은 없지만, 그 당시 김두한이 이승만 편이었다는 사실은 분명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거기다 당시 여운형을 암살한 우익 테러리스트들은 이승만이 행사하는 권력의 주요 기반 중 하나이기도 했다. 제주 4.3항쟁 당시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물을 때 이승만과 서북청년단을 같이 묻는 것은 양자가 절대 단절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운형 암살 문제에서도 우익 테러리스트와 이승만 양자는 단절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사실에 입각해서 보았을 때, 여운형 암살 배후로는 이승만일 가능성이 제법 높다는 것이 글쓴이의 개인적 견해다. 여운형이 겪은 테러와 암살에 대해 생각할 때, 주목해야할 또 다른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군정의 존재다. 미군정은 초기에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여운형이 백주대낮에 테러를 당하는 것을 막는데 큰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선 1945년부터 1947년 사이 무려 12번이나 여운형을 대상으로 테러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여운형이 암살되고 나서 미군정은 관련 조사를 대충 마무리했으며, 그 결과 진정한 배후를 알 수 없게 됐다. 그 점에서도 미군정은 여운형 암살 비호자라 봐도 무리는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군정의 이와 같은 행동은 그 당시 트루먼 정부가 추진한 반소 반공정책으로의 전면 전환과도 연결지점이 있는 것 같다. 1947년 3월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이 선포되면서 미국은 반소 반공정책을 노골화했는데, 대표적으로 그리스 내전에서의 개입이 그러했다.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그리스에 고문단과 군사원조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승만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무엇보다 트루먼 독트린은 반공정책이었고, 이승만이 추구하는 것과 일치했다. 따라서 미군정은 이승만을 보다 더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여운형 암살 이후 미국과 이승만은 이남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박차를 가했고, 미군정은 유엔에게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 선거를 진행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와 여수순천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나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광란의 학살극으로 막을 내렸다. 즉, 이와 같은 사건의 중간지점에서 벌어진 것이 바로 여운형 암살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여운형의 암살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이 분단정책으로 이어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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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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