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 ㅡ유행하는 무정부주의적 사조에 대해

멸망의 길이 아니라 진리를 구하고 승리를 위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운동이 이처럼 청산주의적으로 빠지고 우경화되고 붕괴된 출발은 사상적 붕괴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상적 붕괴는 맑스주의 혁명적 사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과거 유고 사회주의나 소련 사회주의 해체도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상, 특히 파리꼬뮌을 보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정립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무너뜨리고 당의 지도적 역할을 부정하고 자본주의 이윤체계를 도입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유고에서는 일찌감치 ‘사회주의로 가는 유고의 길’로 당시 스탈린 시대의 중앙집중 경제와 다른 수정주의의 길을 본격적으로 가기 시작했다.

맑스주의 국가소멸론에 (왜곡)근거하여 ‘점차 사멸되어가는 국가’론과 ‘생산자간의 자유연합’을 들어 국유화와 중앙집중 계획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또한 ‘당이 없는 직접사회주의 민주주의 길을 실현’한다며 당의 사회전반에 대한 지도적 역할을 부정하고 중앙집중 대신 자치를 대비하여 강조했다.

마침내 1952년 유고에서는 노동자 자주관리와 시장 사회주의 실험을 본격 채택하였다. 1960년대 중반에는 체코슬로바키아, 1968년에는 헝가리에서 ‘시장 사회주의’ 노선이 동유럽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이로써 1980년대 중반에 유고에서는 외채위기, 인플레이션 위기, 과잉생산 위기, 실업위기가 심각하게 대두하였다.

당의 지도적 역할을 포기와 이윤체계의 도입과 중앙집중 계획의 약화는 지방주의, 이기주의를 대두시키고 이는 지역ㆍ연방 간 분열로 민족 분쟁으로 비약되었다. 유고에서 나타나는 사상적ㆍ사회적 문제가 동유럽 사회주의 전반에 나타났다.(이에 대해서는 노동자정치신문, “수정주의 ‘전위’, 유고 시장사회주의”를 참고하기 바란다.)

소련은 후르시초프 때 사회주의의 건설자인 전대 지도자를 개인숭배, 학살자라며 전면 부정하였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인민의 국가로 후퇴시켰으며 평화이행론으로 유로꼬뮤니즘의 원류인 의회주의로의 길을 열어주고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론으로 투항했다.

또한 이들 수정주의자들은 레닌 시기 제국주의 침입과 내전으로 황폐해진 사회주의를 복구하기 위해 일시적 방책인 거래의 활성화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레닌은 이를 불가피한 자본주의적 조치로의 일시적ㆍ잠정적 후퇴이자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에 의한 포위공격이라고 불렀다.)한 신경제정책을 영속화 하며 자본주의적 상품ㅡ화폐관계를 확대하였다.

특히 기계화의 중요성에 비춰 강조되는 국유화된 기계ㅡ트랙터 스테이션을 해체하고 협동농장에 빌려주는 트랙터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에서 보듯 상품이 대폭 늘어나고 국유화 비중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암시장ㆍ소생산자 시장 같은 제2경제도 번성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을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사상적으로는 “해빙”이라는 명목 하에 반공주의 세계관을 담은 문학, 연극 등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의 칩입을 허용했다.

이러한 맑스주의ㆍ레닌주의의 혁명적 사상의 침식과 전 사회적인 수정주의으로의 재편은 1980년대 신사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명목으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로 개혁ㆍ개방, 다당제, 전면적 사유화를 도입하면서 사회주의에서 사민주의로 후퇴하였고 마침내 옐친 도당에 의해 소련 사회주의 전면 해체라는 반혁명으로 귀결되었다.

이것이 동유럽과 소련사회주의 해체의 역사적 과정이고 전모다.

그런데 주지하듯, 사회진보연대 같은 단체는 사태를 전도(轉倒), 즉 거꾸로 보았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독재로, 당독재가 개인독재(개인숭배)로 변질되었다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고 당의 지도성과 중앙집중 계획과 국유화를 부정하였다.

동유럽과 소련사회주의의 해체를 과학적,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대신에 수정주의적으로 청산주의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강화ㆍ강성하게 만들었던 요인을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해체시켰던 요인들에서 “혁신적” 요소들을 발견하였다.

현존했던 사회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이들이 현존하는 사회주의에 대해 전면 부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미제국주의 보다도 현실 사회주의에 더 적대적인 태도는 이들을 반소, 반북 이데올로기의 전파자로 만들고 미제의 핵독점ㆍ핵패권에 침묵하면서 북핵반대를 내세우면서 결국 제국주의 주구로 만들었다.

심지어 사회진보연대 학생조직인 학생행진은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을 지지하는 것으로 긴 타락의 행진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회진보연대의 사상적 지주역할을 해왔던 윤소영 교수 역시 사회진보연대의 극우적 타락의 선구적 안내자로서 반공주의자 이문열에 찬사를 보내고 일본군 “위안부”를 부정하며 윤석열을 지지하는 것으로 극우적으로 타락하였다.

사회진보연대의 타락과 극우화에 반대하며 탈퇴했던 단체조차도 사회진보연대의 우경화의 사상적 근원과 전면 단절한 것이 아니라 그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한국사회 ‘진보적’ 지식인들, 노조활동가들, 인권 활동가들, 단체들도 상당 부분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신좌파’적 정치적 사조, 흐름들은 여전히 현존했던 사회주의와 현존하는 사회주의에 부정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이기조차 하다. 이들은 최근 “체제전환 운동”이라며 자본주의 착취 체제, 분단체제,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반대하는 투쟁 대신 비(또는 반)혁명적인 신좌파의 (유사)무정부주의 노선을 그대로 지속하고 있다. 다원주의 노선은 이들의 정치적 정체성이기도 하다. 

당의 지도성,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치혁명, 중앙집중화 노선을 명령경제ㆍ지령경제라 부정하고, 위와 아래, 지도자와 대중, 중앙집중과 참여, 통일과 자치를 비변증법적으로 대립시키며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분산적 계획, 자치와 참여를 일면 강조하는 것도 신좌파 다원주의의 (유사)무정부주의적 사조, 경향의 특성이다.

이들은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ㆍ엥겔스가 공산주의 핵심원리로 강조했던 사적소유 철폐,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로의 집중을 부정하고 사회주의 국유화 대신 사회화를 강조하기도 한다.

국유화가 국가소멸의 단계 이전인 사회주의에서 사회화의 가장 높은 단계인 국유화에 대해 부정적이다.

앞서본 유고 사회주의에서 그러하듯 이들은 맑스주의 국가소멸론을 왜곡해서 사회주의가 되었는데 국가소멸로 가야지 국가가 강화되었다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서의 사회주의 국가의 약화를 주장한다.

맑스주의 국가사멸론은 “장구한 세월”, 제국주의가 사라지면서 전 세계적 수준의 공산주의가 안정적으로 확립되면서 대중국가의 극소수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억압적ㆍ지배적 성격의 상실이지 중앙집중적 생산의 소멸이 아니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며 국가소멸로 즉시 나아가자는 자들을 무정부주의라고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스탈린도 이제 혁명이 되었는데 왜 소련은 국가소멸로 나아가지 않느냐며 소멸을 주장하는 자들을 맑스주의를 경읽기 하듯 암송하는 자들이라며 조소하며 제국주의가 소련을 와해시키려 공세를 펼치는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약화는 제국주의에 투항하는 것이며 무장해제하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엄중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단의 신좌파 다원주의 사조들은 노동당처럼 당과 사회주의를 강조하든, 정의당처럼 사민주의와 당을 강조하든, 트로츠키주의처럼 맑스주의와 당과 혁명을 강조하든 상관없이 이러한 (유사)무정부의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처럼 사회주의를 전면 내세우고 있는 세력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소비에트 다당제를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보증인 것처럼 강조하는 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단 한 번도 실사구시적, 내재적으로 보려하지 않으며 사회주의 생산의 원리와 현실에 대해 과학적으로 검토해보지도 않았다.

트로츠키주의도 이러한 흐름도 이러한 신좌파적 기조와 기묘하게 합치하고 있다.

이들 신좌파, 트로츠키파, 심지어 “사회주의자”들도 소련과 조선 체제의 원리ㆍ원칙, 그 혁명적 지도자들에 대해 부정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것에서는 일심단결하는 기묘한 정치적 지경에 이르렀다.

강단 맑스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사조에 승선하지 않을리없다.

박노자는 현실 사회주의를 적색 개발주의라며 비난해 온지 오래고 한국 사회에 트로츠키주의 내에서 가장 악명 높은 “국가자본주의론”을 수입ㆍ번역한 정성진 교수의 경우도 이러한 흐름을 학문적으로 선도하고 있다.

정성진 교수는 지난 날 맑스 꼬뮤날레에서 “마르크스주의 대안 사회론의 혁신”이라며 맑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문헌적으로, 정치적으로 왜곡하고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국유화와 중앙집중 계획 참여 대신 참여와 자치노선인 어쇼시에이션(Association)을 내세워 왔다.(이에 대해서는 노동자정치신문, “반(反)‘맑스 꼬뮤날레’와 창궐하는 무정부주의”를 참고하기 바란다.)

최근에는 포스트 자본주의 운영원리를 구체화 한다면서 일본의 사이토 고헤이의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을 번역하고 집중 소개하고 있다. 이 번역서는 그 동안 정성진 교수가 주장해 왔던 어쇼시에이션의 연장선이자 정점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새삼 이 어쇼시에이션을 다시 재비판하지는 않을 것인데, 이에 대한 기존의 비판에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이것이 이 글 처음에 소개했던 국가소멸 운운하며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약화시키고 마침내 해체로 가는 길을 닦았던 유고의 참여ㆍ자치 노선과 거의 유사하다는 것이다.

전도된 사고는 사물의 참된 이해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보를 멸망으로 이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상ㆍ원칙을 부정하고 현실사회주의에 적대하며 창궐하는 청산주의, 횡행하는 무정부주의적 사조에 맞서 그것이 비록 험난하고 협소하다 하더라도 진리를 찾아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좁은 문을 들어설 때만이 마침내 드넓은 승리의 길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버려진 혁명적 사상을 벼리는 것으로부터 대중운동을 전면적으로 쇄신하고 분열된 운동을 통일하는 것으로, 세상을 개조하는 것으로 전면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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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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