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담론, 사회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혁명적 전망이 무너진 자리에 소부르주아 다원주의만이 남았다

민생과 인권의 위기, 기후ㆍ생태위기, 핵과 전쟁위기가 인류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협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누구나 민생, 인권, 탄소중립 기후위기, 생태위기, 핵공멸, 전쟁위기를 말한다. 이는 신좌파적 “진보적 정치세력”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프로파간다나, 그 영향 하에 있는 지식인들, 언론들도 비슷한 어조로 그 위기에 대해 말한다.
이들은 공히 이제 착취, 분단, 반제국주의, 권력타도 같은 거대담론의 시대는 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요구들을 해결하기 위해 민생, 생태, 노동, 인권, 여성 등의 요구들을 개별적, 나열적으로 내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에 대한 개별적, 분리적, 지엽적, 파편적, 일면적, 현상적 인식으로는 이러한 문제의 근본원인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뿐더러 전망을 가지지 못하고 지배계급의 인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원주의 인식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 인식,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인식론적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해결의 전망도 혁명적이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실제 당면한 다양한 위기들을 해결하지도 못하게 된다.
민생의 문제가 자본의 착취와 어떻게 분리될 수 있으며, 생태 문제가 자본주의 무정부성, 무계획성과 맹목적이며 탐욕의 이윤추구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핵문제와 전쟁위기가 미제국주의 핵독점ㆍ핵패권과 대북적대시 정책, 반북ㆍ반중ㆍ반북ㆍ반쿠바ㆍ반이란ㆍ반예멘ㆍ반베네수엘라ㆍ반시리아 ‘가치동맹’과 나토의 동진, 아시아판 나토와 분리될 수 있는 문제인가?
기후위기 역시 도시집중과 농촌파괴, 무차별 위락ㆍ유흥시설의 난립, 그린벨트 훼손과 난개발, 자본에 대한 규제완화, 기후협약의정서에 대한 미국의 패권적 태도, 제국주의의 제3세계 원료독점과 자연파괴 등과 무관한 문제일 수 있는가?

“한 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양의 온실 가스를 배출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노동이 창출한 자본은 제국주의 기업과 은행의 금고로 흘러 들어갔다. 제국주의 중심 국가인 미국은 제일 잘 준비가 되어 있고 동시에 기후 변화와 싸워야 할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국가로 여겨진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미국 에너지 회사, 은행 및 미국 기업 전체는 배출 억제 조치를 막고 방해했다.”(
스콧 셰퍼(Scott Scheffer), 파키스탄 홍수와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기후변화, 노동자정치신문 2022년 9월 6일)

교토기후협약 의정서와 파리협정을 파기한 것도 미국이었고, 일본의 핵오염수 방류를 찬성한 것도 미국이었다.
반면 중국은 어떠한가?

“양대 강국의 기후위기 대응에서 눈여겨볼 만한 지점이 있다. 중국의 행보다. 최악의 온실가스 배출 국가로 지목돼온 ‘세계의 굴뚝’ 중국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미국을 앞서나가고 있다. 여기서 의아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미세먼지와 환경오염의 나라 중국이 기후위기 대응에서 두각을 나타낸다고? 하나씩 살펴보자.

세계 최대의 통신장비 업체인 중국의 화웨이는 올해 1월 국제 비영리 환경기구 CDP(Carbon Disclosure Project:탄소 정보공개 프로젝트)의 기후변화대응 평가에서 최상위 등급인 ‘A 리스트’를 받았다. 재생에너지 생산량을 늘리고 제품 생산 및 포장 단계에서 탄소배출을 줄인 점을 인정받아 ‘우수 환경 리더십상’도 수상했다.

지난해 4월 화웨이는 ‘친환경 개발 2030 보고서’를 발표하고 ‘녹색산업’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주류로 자리 잡은 재생에너지 △산업 전반의 친환경화 △전기 교통수단 본격화 △탄소중립으로 운영되는 건물 △친환경 디지털 인프라 △저탄소 생활에 대한 관심 증대 등이다.

화웨이의 사례는 일부일 뿐이다.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등 막대한 전기를 사용하는 중국의 거대 IT 기업들이 2021년을 기점으로 일제히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나섰다. 계획의 현실성과는 별개로, 2022년에 탄소중립을 선언한 한국의 삼성전자보다 빨랐다.
중국 기업의 탄소중립 선언 뒤에는 정부가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2020년 유엔 총회에서 탄소중립을 선언한 이래 중국은 기후위기 대응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의 전략은 이른바 ‘쌍탄소’ 정책이다. 2030년에 탄소배출 피크를 찍고 2060년에 탄소중립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세계 최대의 수력발전소인 싼샤댐 등 풍부한 수력자원을 가진 중국은 이미 재생에너지 강국의 토대를 갖췄다.” (“유일한 선택은 ‘협력’”,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미국과 중국의 자세, 이오성 기자, 시사인, 2023.03.01.)

여성의 차별과 억압 역시 저임금 자본주의, 유연노동과 비정규직 확대, 출산ㆍ보육ㆍ교육의 개인부담, 가사노동의 전담, 이러한 물질적 차별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차별적 인식과 분리될 수 있는 문제인가? 여성의 이중의 억압구조, 이중의 굴레는 당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 여성해방과 노동해방의 추구 없이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이러한 투쟁 속에 후진적 인식의 문제인 문화혁명을 해야 한다.
인권과 인도주의 문제의 태반도 자본주의 억압과 민주주의 파괴, 전쟁과 제국주의가 조장한 내전책동과 난민 등과 분리되는 문제일 수 있는가?
그런데도 미제국주의ㆍ서방제국주의자들은 “보편적 인권”과 인도주의 기치를 내걸고 조선.쿠바 적대시와 제재, 반중ㆍ반러 책동, 세계 각국에 대한 전쟁과 침략ㆍ학살ㆍ파괴ㆍ지배를 정당화 한다.
문명의 이름으로 팔레스타인 점령과 학살을 정당화 하는 비열하고 파렴치한 작태는, 문명의 이름으로 식민지배를 미화, 정당화 했던 제국주의의 상습ㆍ상투적 수법이었다.
자본주의 착취와 봉건적 억압이 중첩된 이주노동자의 문제도 그렇다.
지금은 “진보정치”도 벗어나 어느 별에 안착했는지도 모르는 조성주의 신좌파적 다원주의 인식이 이러한 모순들을 당면 사안들을 인식하는지 보자.

“그러나 아직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기후위기를 마치 90년대 중반 ‘세계화’처럼 거대한 외부환경의 변화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기후위기는 국가가 방향을 결정하고 대응해야 하는 문제이지 그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무언가의 위험과 부담을 나누는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정치인과 정당들도 대부분 국가가 잘 대응할 것을 강하게 촉구할뿐 시민 개개인이 어떻게 다른 시민들을 위해 스스로의 삶의 방식을 변화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위험과 부담도 함께 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조성주의 정경유착] 우리는 서로의 기후다, 생태지평, 2023-06-29)

“현실의 ‘기후정치’ 에서 우리의 대안비전과 레토릭도 조금은 더 정치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멸론’, ‘위기담론’, ‘변혁론’이 아닌 것으로도 시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조성주의 정경유착] 9_기후위기 시대, 성장에서 성숙으로 – ‘탈성장사회’와 ‘성숙사회’,
생태지평, 2023-09-01)

파멸론, 변혁론이 아니라 남는 것은 결국 개인들의 성찰뿐이다. 자본과 권력,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빠진다.
심지어 조성주는 “정의로운 산업전환”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자들의 양보를 주장하는 반노동자적 주장으로 자본의 이윤확대에 복무한다.

“사실 노동조합들의 주장대로 ‘친환경’, ‘저탄소’라는 ‘대의명분’을 달성하기 위해 지금 임금수준에서 상위 20% 내에 들어가는 공공부문 노동조합 조합원들에게 당장의 추가적인 ‘임금인상’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해당 산업 종사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높아지는 것과 해당 산업이 친환경, 저탄소 지향으로 변화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때로는 해당 산업 종사 노동자들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조성주 정치발전소 상임이사, “기후변화를 위해 노동조합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정치발전소, 2021-03-16)

이러니 자본주의, 제국주의가 좋아하는 담론이 될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으로 대다수 신좌파 녹색당 노선이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체제에 복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노선은 신좌파 다원주의 노선이다.
사회진보연대가 신좌파 다원주의 인식 하에 쏘련과 동유럽 해체원인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 당독재에 있다고 하면서 우경화 되고 쏘련과 조선 같은 현실 사회주의를 적대시 하고 “한반도 비핵화”노선으로 미제의 핵독점ㆍ핵패권에 침묵하면서 자위권의 일환으로 만든 북핵의 “비핵화”를 주장하며 결국 제국주의의 대리자들이 된 것은 이러한 인식의 오류로부터 출발했다.
사회진보연대와 함께 움직이는 “평등의길” 역시 이러한 다원주의 인식이 낳은 제국주의 인식을 낳았다. 오늘날 반쏘, 반북 신좌파를 표방하는 대다수 정치적 흐름도 그렇다.
현대 제국주의 프로파간다는 프랑스 68년 혁명을 거치면서 세련된 반자본의 기치를 내건 소부르주아 인권, 젠더, 생태 다원주의 담론을 포섭했다. 이리하여 소부르주아 담론은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부르주아 사이를 오가거나 심지어 제국주의이데올로기까지 진폭이 오가게 되었다.
정의당은 이러한 반북, 반쏘 다원주의 신좌파 노선의 당적표현이다. 녹색당도 정의당 위성을 돌다가 녹색정의당이 되었다.
노동당은 사회주의라는 수사를 제외하면 상당 부분 신좌파 다원주의 영향을 받고 있다. 진보당이 당차원에서 이 종북몰이에 굴종하고 의회주의와 부르주아 세태에 굴복하여 점점 더 이러한 신좌파 다원주의로 경도되면서 ‘진보대단결’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운동의 비극이다.
간첩조작, 종북몰이가 판치며 사상의 자유가 파괴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하며 계급착취와 빈곤과 불평등, 분단, 침략과 학살과 수탈의 제국주의 체제에서 우리는 여전히 포스트모던할 수 없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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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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