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계급] 후속2 민족·동족관계의 파탄 앞에서 태연자약한 “계급성”은 무엇의 발로인가?

1. 게으를 권리?

 

우리의 교조주의자들은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들이어서 구체적 사물에 대한 어떠한 면밀한 연구도 거절하며 일반적인 진리를 허공에서 떨어지는 어떤 것으로 보고 그것을 파악할 수 없는 순전히 추상적인 공식으로 만들어 버려 인류가 진리를 인식하는 이 정상적인 순서를 완전히 부인하며 또 그것을 전도시키곤 한다. 그들은 인류 인식의 두 과정의 상호연관-특수로부터 일반에 이르고 일반으로부터 특수에 이르는-도 모르고 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을 전혀 모른다.(마오쩌둥, 모순론)

교조주의를 비판하는 마오쩌둥의 《모순론》 한 문장을 인용했는데 교조주의자들의 특성은 게으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게으르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마오는 객관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연관된 사물의 상호관계의 공통의 특성, 즉 보편성을 인식하면서도 그 사물의 차이를 드러내는 특수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으면 “구체적 사물에 대한 어떠한 면밀한 연구도 거절하며 일반적인 진리를 허공에서 떨어지는 어떤 것으로 보고 그것을 파악할 수 없는 순전히 추상적인 공식으로 만들어 버려 인류가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식상의 오류일 뿐만 아니라 사물의 모순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게 한다. 심지어 변혁에 심각한 해를 끼치기도 한다.
이러한 교조주의적 사고는 맑스주의가 혁명적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무한하게 열려 있는 방법이라는 원칙 대신에 애초에 만들어 논 경직된 원리 틀을 만들어놓고 그 틀에 변화 발전하고 생생하고 구체적인 현실을 가두는 것이다. 이로써 구체적 현실이 그 틀에 갇히는 순간 현실은 질식되고 박제를 면치 못한다.
레닌의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다”라고 했다. 진리는 객관 사물과 법칙을 옳게 인식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실천을 통해 검증됐을 때 획득된다. 이 진리는 구체적으로 인식할 때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구체적 현실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인식으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교조주의자들은 단계성에 유의하지 않고 궁극목표만을 내세운다는 점은 여러 차례 강조했다. 마오는 단계성에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주지하듯 사물의 긴 발전과정에는 각 단계가 있고 이 단계성에 주목할 때 각 단계의 구별되는 특수성을 인식하여 모순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레닌은 “어떠한 타협도 없다”는 블랑끼주의자들의 극단주의를 비판한 엥겔스의 주장을 인용하여 이 단계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교조주의를 비판하였다.

(블랑끼파 꼬뮈나르들은 자신들의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중간역에 머무르지 않고, 승리의 날을 미루고 노예시대를 연장시킬 뿐인 타협을 거부한 채,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발전 과정으로서 나타난 모든 중간역과 모든 타협들을 통해서 최종 목표 ㅡ 계급의 폐지, 그리고 토지와 모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더이상 없는 사회구조의 창조ㅡ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끊임없이 추구하기 때문이다. 블랑끼파 33인은 공산주의자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일단 중간역과 타협을 뛰어넘겠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그대로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만약ㅡ그들은 굳게 믿고 있다ㅡ오늘 내일 중에 일을 ‘시작하여’ 권력이 자신들 손아귀에 떨어지면 모레에는 ‘공산주의가 도입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일을 당장 수행할 수 없다면, 이들은 공산주의가 아닌 것이다.(《좌익공산주의 소아병》)

긴 “역사발전 과정”에는 “모든 중간역”으로서의 단계가 있고 “최종 목표 ㅡ 계급의 폐지, 그리고 토지와 모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더이상 없는 사회구조”를 위해서는 각 특수한 단계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필요하며 여기서 나타난 모순들을 해결하는 데서는 우회와 타협이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모두 최종 목표를 확고히 하고 그것을 위한 것이다. 이것을 외면하고 “일단 중간역과 타협을 뛰어넘겠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그대로 만사형통이라”고 주관적으로 생각한다고 “권력이 자신들 손아귀에 떨어지면 모레에는 ‘공산주의가 도입될 것’”이라는 생각은 유치한 사고이며 반드시 일을 그르치게 된다.
레닌은 뒤에서 각국 공산주의자들은 기회주의와 “좌익” 교조주의자와 투쟁하면서 “구체적인 특성들, 다시 말해서 각국의 경제, 정치, 문화, 민족 구성(아일랜드 등), 식민지, 종교분열 등등의 특정한 성격을 아주 의식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마오쩌둥이 강조한 단계성에 유의하는 것인데, 레닌은 “그 단계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의 이행이나 접근 형태들을 모색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이행형태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궁극목표만 강조하면 평생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볼 수 없다고도 했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코민테른 7차 당대회에서 반파쇼 통일전선을 위한 레닌의 이 말에 주목하며 특수한 현실을 주목하지 못하고 궁극목표만 강조하며 통일전선을 부정하는 혈기왕성한 젊은 공산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혈기왕성한 ‘좌익’공산주의자는 비단 나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좌익”적 오류는 엘리트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인식의 오류와 실천의 해악을 교정하지 못하고, 교조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러시아식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며 자본주의와 분단이라는 구체적인 이 땅의 역사적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교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노자 간의 대립과 적대라는 기본원칙으로부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는 항상 적대할 수밖에 없으며 이로써 남북의 화해와 평화도 불가능하다는 교조주의 원리를 끌어냈다. 민족모순의 해결이라는 당면한 과제를 부정하거나 민족문제의 (상대적) 고유한 특성에 주목하지 않고 계급해방이라는 궁극목표만 외치고 있다.
분단으로 인해 생긴 민족문제에 대한 “어떠한 면밀한 연구도 거절하며”, 계급성이라는 “일반적인 진리를” 반복적으로 내세움으로써 “순전히 추상적인 공식으로 만들어” 역사적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폴 라파르그는 생명력을 고갈시키고 지적퇴화를 가져오는 자본주의 과도노동의 현실 앞에서 “게으를 권리”를 주장했는데 우리는 진리추구 앞에 게으를 권리가 전혀 없다. 이 교조주의적 권리를 남용하는 것은 생명력과 지적퇴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를 앞에 두고 우리의 운동의 진전과 역사발전을 심각하게 가로막기 때문이다.

 

2. 여기 최완고한 교조주의 공식을 보라!

 

지난 번 동족관계의 전환에 대해 어느 완고한 교조주의자의 인식에 대한 비판 글을 썼다. 그런데 이 글을 다시 뒷받침하는 완고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최완고한 글이 발표됐다. 필명이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는 이 글의 저자는 마오쩌둥이 비판한 추상적 공식을 내세우는 게으른 교조주의의 표상이다.

상당수 사람들이, “남북관계의 근본적 변화” 운운하며, 꽤 놀라고 있는 것 같다.
무리도 아니다. 적어도 외교적 혹은 수사적으로는 “자주ㆍ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을 추구해 왔던 종래와는 사뭇 다른 선언을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남북관계 혹은 북남관계에는 아무런 근본적 변화도 없다. 사실상 누구나 내심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정치적ㆍ외교적 필요에서든, 그 ‘분위기’에 뇌동하거나 억눌려서든,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던, 현실을 사실로서 공인한 것일 뿐이다. 사실, 계급적 성격이 전혀 다른, 아니 극히 적대적인 두 사회체제가, ‘연방제’든, ‘국가연합’이든, 소위 일국양제(一國兩制)의 한 국가를 이룬다는 것 자체가 환상일 뿐이 아니던가?(진상은, “적대적인 두 국가, 그리고 …”, 노사과연 정세와 노동 제199호, 2024년 2월)

교조주의자들에게 남북·동족관계의 적대적 국가로의 전환은 “놀랄 일도 아”닌데 “남북관계 혹은 북남관계에는 아무런 근본적 변화도 없”기 때문이다. 교조주의자들이 격변적 사태에 대해 이토록 담담한 것은 “계급적 성격이 전혀 다른, 아니 극히 적대적인 두 사회체제”는 언제나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 간의 “자주ㆍ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기치는 “정치적 · 외교적” 책략의 일환일 따름이고, 현실의 계급적대를 은폐하는 허위적 인식이자 “수사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연방제’든 ‘국가연합’이든 ‘일국양제’든 이들에게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근본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동족·민족관계의 적대관계로의 전환 선언은 단지 원래부터 적대적이었던 “현실을 사실로서 공인한 것”이 될 뿐이다.
노사과연 편집위원장은 [편집자의 글]에서 “남북관계, 민족 문제 등에서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는 바를 계급적 관점에서 지적하고 있는 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 “계급적 관점”이라면 계급적 관점은 얼마나 협소한 관점이며 얼마나 배타적이고 종파주의적이며 얼마나 나태하고 역사의식이 없는 빈약한 사고인가?
남과 북은 “계급적 성격이 전혀 다른, 아니 극히 적대적인 두 사회체제”이기 때문에 언제나, 필연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민족 간 교류와 화해와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은 계급적대를 인식하지 못하는 환상적 사고에 불과한 것인가?
과연 계급적 성격이 다른 국가들끼리는 항상 적대할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사회주의 국가는 언제나 자본주의 국가와 대립하고 적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회성격이 다르다 해도 서로 자주권을 존중한다면 얼마든지 교류, 협력하고 심지어 선린우호 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 과거 쏘련도 주권을 인정하는 국가들과 이런 상호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심지어 조선은 제국주의 강권과 횡포에 맞서 비동맹국가들과는 자본주의 국가들이라 할지라도 전략적 동맹을 맺을 수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조선은 쏘련 해체 이후 사회성격이 판이하게 다르지만 러시아와 신뢰관계를 유지해왔고 최근에 와서는 서방 제국주의에 맞서 더 굳건한 전략적 동맹자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쿠바 미겔 디아스카넬 주석이 앙골라, 모잠비크, 나미비아 등 아프리카 3개국을 순방하며 “모든 시련 속에서 우리와 연대한 자매국”이라 표현하고 77개 개도국 모임(G77)+중국 의장국 정부수반 자격으로 브릭스 정상회의에 참여한 것도 다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2023년 8월 21일 아프리카 순방길에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 도착해 환대를 받고 있는 아프리카 순방에 나선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가운데)

미제와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국가 간 주권존중과 선린우애 관계를 맺는 것을 훼방 놓고 제재에 동참할 것을 강권해왔다. 교조주의자들은 중국을 자본주의, 심지어 “강도 같은 제국주의”라 규정하지만 일국양제는 얼마든지 현실화 될 수 있고 지향하는 가치가 될 수 있다. 홍콩이 일국양제의 사례고, 중국과 대만과의 관계도 제국주의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방해가 없다면 일국양제가 될 수 있다.
최근 체제가 상반되지만 한국은 조선을 견제하고 고립시키기 위해, 쿠바는 제재를 돌파하기 위해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이것이 이례적인 것이 아니라 남미에서 쿠바가 마지막 남은 미수교 국가였다는 점이 오히려 이례적인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는 기본 원칙을 준수한다면 얼마든지 선린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반대로 같은 사회주의 국가 간이라 할지라도 대국주의가 자리 잡고 중쏘분쟁처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무너지면 적대관계로 전락할 수도 있다.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간주하지 않는 한 남북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경제적 생산양식이 서로 상반된다 하더라도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민족, 국가 간 관계 보다 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통일로 나아갈 수 있다. 다만 남과 북이 “하나의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적대적인 관계로 되었던 것은 외세, 특히 미제국주의가 남을 반공주의 보루로 삼고 영구 분단 책동과 대북 적대시 정책을 펼치고 여기에 남의 외세 추종 반민족적인 정치세력들, 자본이 동조했기 때문이다.
진상은은 “적어도 외교적 혹은 수사적으로는 ‘자주·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을 추구해 왔던 종래와는 사뭇 다른 선언을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라고 하는데, “종래와는 사뭇 다른 선언”을 한 주체는 북인데, 그렇다면 남의 정권은 물론이고 북조차도 그 동안 내심과 달리 ‘자주ㆍ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을 단지 “외교적 혹은 수사적으로” 해 왔다는 말이 된다. 한국의 통치자들과 조선일보도 북이 언제나 “화전양면전술”로 “위장 평화 공세”를 해왔다는 반공주의 악선전을 일삼지 않았는가.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수십 년 동안 적대적인 체제 간 ‘자주·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 가능하다고 환상을 가지거나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된다. 게다가 “하나의 조국”을 열망하며 ‘자주·평화통일, 민족대단결’ 기치 하에 주한미군 철수와 평화협정 체결, 분단 반대 조국통일을 외쳤던 남의 진보세력들과 민중의 노력과 열망, 투쟁은 다 “계급적 관점”을 상실하고 환상과 허위에 빠져 있었던 것이 된다.
이러한 종파주의적 사고에 의하면 “권력의 눈앞에서 양키 점령군의 총구 앞에서 자본가 개들의 이빨 앞에서” “조국은 하나다”를 외쳤던 김남주 시인은 필시 “계급적 관점”을 상실하고 환상이나 허위의식에 빠지거나 좋게 봐야 그저 낭만주의적인 시적 수사를 사용했던 인사에 불과하게 된다.
교조주의자들은 “계급적 성격이 전혀 다른, 아니 극히 적대적인 두 사회체제”이기 적대가 필연적이라고 간주하고 “남북관계 혹은 북남관계에는 아무런 근본적 변화도 없”다고 하지만 이는 최근 몇 년간의 정세변화를 분석하지 못하거나 교조적 사고에 현실을 꿰어 맞추기 위해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만 보더라도 남북, 조미관계에서 “선대선”에서 “강대강”으로 극단적인 변화가 있었다. 2018년을 기점으로 한 4.27 선언, 9.19평양공동선언과 조미정상회담은 “선대선”의 정점이었다. 남과 북, 해외의 수천만 민족 구성원들은 남북 간 화해와 협력, 자결선언과 군사적 충돌의 방지 등 통일로 가는 여정에 대해 열렬하게 환호했다. 그러나 주지하듯, 미제의 군산복합체를 비롯한 전쟁광들은 조미 정상회담을 파탄시켰고 문재인 정권은 “운전자론” 운운하면서 미국 눈치를 보다가 스스로 합의했던 역사적 선언들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미일은 다시 대북 침략 훈련을 재개했고 윤석열 정권은 북한 주적론, 선제타격론을 외치며 호전적 공세를 계속했다.
북은 이에 맞서 “강대강”으로 전환을 선언하고 핵무력을 고도화 하고 연일 탄도미사일을 쏘아대며 맞공세를 취했다. 결국 그 이후 9.19남북 군사합의도 파기되었다. 2023년 1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동족·민족관계의 적대관계로의 전환은 남과 북, 조미 간 선대선에서 그 정반대인 강대강 충돌의 결과로 생겨났다.
과연 이러한 전환이 “아무런 근본적 변화도 없”는 것이고 적대관계로의 전환은 체제가 다른 나라들 간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인가? 그러나 “아무런 근본적 변화가 없”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추상적 공식에 사로잡혀 변화무쌍한 현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교조·종파주의자들의 불변의 관념뿐이다.
근본주의, 교조주의로 현실 변화에 눈감고 정세에 기권하는 것은 전형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사고이다. 진상은 식대로 하면, 4.27판문점 선언이나 9.19평양 공동선언도 아무런 “근본적 변화도 없”는 것이고, 반대로 민족·동족관계의 파탄도 아무런 “근본적 변화도 없”는 것이다. 이런 태연자약(泰然自若)한 고약한 사람들을 다 봤나! 이러니 박근혜 퇴진 투쟁도 “재벌이 기획, 연출”한 투쟁이고 “노동자들은 동원되었을 뿐”이라며 이 투쟁에 전면 기권했던 것이 아닌가?
촛불투쟁에 대해 평론가들처럼 재벌기획론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정권퇴진 투쟁에 적극 개입하여 정권을 퇴진시키고 노동자계급이 주도성을 발휘하여 이 투쟁이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이 사회를 전면적으로, 부분적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투쟁하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가 아닌가?
마찬가지로 남북관계의 대전환 시기에는 이러한 격동적 정세에 전면 개입하여 남북 간 적대관계의 청산과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 평화협정 체결, 이를 가로막고 있는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해체, 국가보안법 철폐 및 각종 반민주, 반노동 악법 철폐, 군사비의 민중복지로의 전환 등을 요구하며 투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러한 사태변화도 “아무런 근본적 변화도 없”는 것이니 도대체 근본변화라는 것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태만한 교조주의자는 “현실을 있는 대로 반영하는 정명(正名)”을 말하는데, 사태를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할뿐더러 심지어 전도되어 인식하면서 정명이 될 수는 없다.

북의 선언은,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에 이어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는 ‘종전협정’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가리킬 뿐, 실전 중이 아님은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다. 그렇다면, “두 국가”라는 규정, 특히 헌법에서 “북반부”라는 규정을 삭제하겠다는 방침은, 허다한 불안 요인들을 안고는 있지만, 그 자체로서는 평화를 향한 일보전진이랄 수 있다. “북조선”ㆍ“남조선” 하며, 실제로는 국경선인 ‘휴전선’ 이남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영토시(視)했던 태도를 바꾸어, 이북만이 조선이고, 이남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한’ㆍ‘북한’이라고 부르는 것, ‘북조선’ㆍ‘남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실을 있는 대로 반영하는 정명(正名)이 아닐뿐더러, 지양해야 할 대결적 언어 아니던가!(진상은, 같은 글)

게으른 교조주의자는 남북의 적대관계로의 전환선언이 과거와 “아무런 근본적 변화도 없”는 것이고 “‘종전협정’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가리킬 뿐”이고, 심지어 “그 자체로서는 평화를 향한 일보전진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북의 적대관계로의 전환 선언은 현상유지도 “평화를 위한 일보전진”도 아니고 “언제든지 전쟁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 “전쟁이 터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2023년 한 해에만 한미합동 군사훈련이 42회나 실시됐으며 여기에 일본도 10회가 넘게 참여했다. 여기에 아시아판 나토 정책의 일환으로 필히 대북 적대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반중 포위를 위한 호주의 탈리스만 세이버 훈련, 태국의 코브라 골드 훈련 등 미국과 한국이 동북아 밖에서 진행한 훈련도 있다. 2024년에는 더욱 더 일촉즉발의 전쟁책동이 자행되고 있으며 전쟁위기가 더욱 고조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미연합훈련이 오늘까지 총 13차례, 48일 동안 진행된 것으로 확인됐다. 2월 24일까지의 통계이니, 56일 가운데 한미, 한미일 군사훈련이 48일 실시된 것이다. 한미군사연습이 10회, 한미일 군사연습이 1회, 한미일 포함 다국적군 훈련이 2회였다…한편 올해 한미연합군사훈련은 최소 130여 차례 기획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1월 30일 미2사단과 한미연합사단은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서 ‘연합훈련 협조회의’를 진행했다. 올해 한미 연합훈련에 대한 소요를 종합하고 훈련 내용을 조율하는 회의였다. 한국과 미국의 군 주요 작전 계획 담당자 80여 명이 참여한 이날 회의에서 한미는 올해 계획된 130여 건의 연합훈련 일정을 조율했다.(장창준 객원기자, [전쟁-워치콘] “올 들어 한미연합훈련 벌써 13회, 48일 진행”, 현장언론 민플러스, 2024년 2024.02.26.)

2024년에는 지난해보다 야외기동훈련이 2배 넘게 늘었는데, 3월 4일부터 11일 동안 자유의 방패(Freedom Shield)라는 이름으로 한미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지상과 해상, 공중은 물론 우주자산 등도 활용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훈련이 이뤄집니다… 특히, 지난해 23번 진행된 야외 기동훈련도 올해는 48차례로 2배 넘게 늘었습니다.
미국의 전략폭격기와 항공모함 같은 전략 자산이 한반도에 전개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 이번 훈련에는 호주와 캐나다, 프랑스, 영국 등 12개 유엔사령부 회원국도 함께 참가합니다.(홍지호 기자, “오늘부터 ‘자유의 방패’ 훈련 시작…기동훈련 지난해 2배” MBN News, 2024. 3. 4.)

이러한 상황에서 북은 그동안 민족·동족관계로 이해하고 인내해 왔던 조치들을 전면 재검토하고 적대국가로 대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이 선언은 심지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평정·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는” 내용도 담겨 있다.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한다”는 한국의 헌법 조항에 대응하여 북에서는 헌법에 북반부 규정을 삭제하고 주권행사 영역을 합법적으로 정확히 규정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미국이 임의로 그은 해상 북방경계선(NLL)을 불법·무법으로 규정하고 “영토·영공·영해를 0.001㎜라도 침범하면 그것은 곧 전쟁 도발로 간주될 것”이라는 선언이다. 과거 남북 간에 북방경계선을 둘러싸고 충돌이 일어났는데, 이제는 이러한 충돌이 곧바로 전면전을 초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 “남북관계의 진실”은 무엇이고 노동자ㆍ인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우리민족끼리’니, ‘남북은 하나’니 하는 환상을 철저히 청산하고, 현대사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할 것이다. 특히 노동자ㆍ인민대중이 극우의, 그리고 극우적 허위 선전ㆍ선동과 ‘언론’에 놀아나지 않고 우리 현대사와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한 선진노동자들의 노력과 역할, 즉 선진노동자 자신들의 진지한 역사ㆍ사회과학 학습과 대중선전 활동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대중이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계급으로서의 그 역사적 사명을 인식하고, 그 사명의 수행에 떨쳐나설 수 있도록 추동하는 선진노동자들의 각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진상은, 같은 글)

과연 역사적으로 “남북관계의 진실”은 무엇이고 “우리 노동자ㆍ인민은, 특히 노동자계급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남과 북이 체제를 달리 한다 하더라도 민족‘자주’, 민족자결의 관점에 서면 통일이 가능하다. 연방제 통일의 조건은 이남에서는 통일을 가로막는 외세를 척결하고 북을 적으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단독선거, 단독정부 시도에 맞서 외국군의 철수와 통일조국을 외치며 제주4.3에서, 여순을 비롯해 전국적인 민중항쟁이 전개됐다. 민족자주의 관점은 이러한 역사적 열망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연방제는 당면한 민족모순의 해결 과정이기 때문에 당장 남과 북 어느 한 쪽으로의 흡수통일을 전제한 것이 아니다. 양 체제가 민족적 관점으로 외세를 척결하고 “민족대단결”의 기치에 충실하면 체제가 다르더라도 통일할 수 있다.
물론 남의 역대 권력은 제국주의를 추종해 왔고 재벌들은 “미제의 보호령” 아래 반공반북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하며 성장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친미 호전주의자들인 국민의힘은 물론이고 입으로는 평화를 떠들어대지만 흡수통일주의자들인 민주당이 일관된 ‘자주ㆍ평화통일, 민족대단결’ 기치 하에 연방제 실현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일관되게 연방제를 추구하고 민족대단결과 통일의 기치를 실현할 수 있는 세력은 분단 하에 고통을 받고 억압과 착취를 당해온 노동자계급과 기층 민중이다. 이로써 노동자계급과 기층 민중이 분단모순을 해결할 진보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연방제가 남과 북 체제를 인정하고 실현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남에서 그것의 실현조건은 철저한 민주주의와 외국군의 철수이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진보적인 권력이기 때문에 연방제는 궁극적인 계급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결정적인 단초가 될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가 평화적 발전을 추구하던 시기이든, 지금처럼 민족관계가 파탄에 이르고 적대적 관계로 충돌하는 지금 시기이든 이러한 과제는 역사를 이끌어가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이 언제나 추구해야 하는 진보적인 과제이다.
과연 “계급적 관점”은 이와 달라야 하는 것인가?
“극우적 허위 선전ㆍ선동과 ‘언론’에 놀아나지 않고 우리 현대사와 현실을 직시하도록” 요구하면서도 정작 “‘우리민족끼리’니, ‘남북은 하나’” 같은 절박한 민족적 요구를 “환상”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청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도리어 극우들의 허위 선전에 놀아나고 우리 현대사의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극우적 허위 선전ㆍ선동”은 분단을 해결하기 위해 내거는 ‘우리민족끼리’니, ‘남북은 하나’ 같은 구호와 요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본주의 착취와 계급지배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위해 분단을 이용한 반공주의 종북몰이이다. 이는 이 사회의 모순과 억압구조를 인식하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전망을 포기하게 만든다.

‘쏘비에트는 이미 망했고 북은 3대 세습의 독재사회로 배고픈 인민들의 반란으로 붕괴할 것이다. 그러니 한국사회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현실을 감내하자.’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진보적 변화와 변혁을 가로 막는 제국주의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노동자 민중이 이 사회가 아무리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러워도 체념하거나 참고 견디게 한다. 심지어 진보세력 내에서 조차도 상당수가 반공반북주의에 빠져 있다. 국가보안법은 북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고 “우리 현대사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이들을 잔혹한 간첩조작으로 학살하고 짓밟아 왔다.
도대체 진상은의 글에서 우리가 무슨 실오라기만한 진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당면한 정세에 필요한 과제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교조·종파주의 태도는 고조되는 전쟁위기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늘 있는 정세라며 전쟁반대 투쟁에서 기권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동족·민족관계의 파괴자들을 준엄하게 규탄하고 단죄하는 대신에 필연적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사태를 인정, 방조하게 할 것이고 이로써 동족·민족관계의 파탄 원인을 규명하고 이를 복원하기 위한 과제들을 회피하게 할 것이다.
레닌은 파리꼬뮌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태도와 비교하며 “총을 들지 말았어야 한다.”는 플레하노프의 관조적, 평론적 태도를 규탄하였다. 남북·동족관계의 적대관계로의 전환에 대해 “‘우리민족끼리’나 ‘남북은 하나’”는 허위이고 환상이라는 진상은의 태도 역시 이에 못지않게 규탄 받아야 하는 태도다. 남북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고 해서 하나의 조국을 위한 투쟁의 정당성과 목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투쟁이 파탄에 이르렀던 점을 근본적으로 평가하고 하나의 조국을 위한 투쟁에 매진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으로서의 그 역사적 사명을 인식하고, 그 사명 수행에 나설 수 있도록 추동하는 선진노동자들의 각별한 노력”은 이 지배계급의 사상과 허위의식과 투쟁하는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구체적인, 게다가 항상 절박한(당면한) 정치적 사건과 사례들을 통해 다른 사회 계급들의 지적, 도덕적, 정치적 생활이 표출되는 모든 현상에 걸쳐 그것들 각각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리고 모든 계급, 계층, 집단의 생활과 활동의 모든 측면에 대해 유물론적 분석과 유물론적 평가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계급의식이 될 수 없다.”고(《무엇을 할 것인가?》) 강조했다. 하물며 분단문제와 그것이 오늘날 남북관계의 적대관계로의 전환과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원인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런 근본적 변화도 없다.”고 태연자약 한다면 “진정한 계급의식”은커녕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한참을 후퇴시키고 당면 과제에 기권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는 아직까지 별다른 혁명적 활동성을 보이지 않고 있는가?” 직접적인 자기 문제에만 협소하게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운동의 토대가 약하기 때문이다. 계급의식과 역사의식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인식하지 말아야 할지 진상은 분명하지 않은가!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계급적 관점”이라는 명목으로 진정한 계급성을 호도하고 분단문제와 시시각각 고조되는 전쟁위기에 눈감음으로써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관점”으로 “침묵의 벽을 쌓는 그대 가슴에도 있다” 노/정/협

이 기사를 총 159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