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계급] 후속1 어느 완고한 교조주의자의 인식에 대하여

북이 남을 적대국으로 대한다고 해서 놀랄 일도 아니다.
오래전부터 남북(북남)은 세계에서 가장 서로간 적대하는 국가였다. ‘노동자 인민의 독재국가’와 ‘자본가 계급의 독재국가’로…
국가란 지배계급의 권력기구이다.
노동자계급(+피억압 인민)은 북과의 관계에서도 국제주의적 관점을 확고히 가지고 국내 지배계급과의 투쟁에 임하면 된다.
민족적 관점이 아니라 계급적 관점이 포인트다.(박문석, 1월 16일 페이스북)

페이스북의 짧은 개인 글이지만, 남북관계의 파탄 이후 나온 글 중에서 우리사회의 특정 정파들의 경향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민족과 계급》 연속글의 비판지점이 됐던 지점, 즉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혁명”을 위해서 “남쪽 내부의 계급모순을 타파하는 문제가 선차적이”며, “계급적 성격이 전혀 다른 또 하나의 국가인 북은 남쪽에 있어서는 ‘외부’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외부모순인 남북간 모순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연대의 관점에서 대할 수밖에 없다.”(박문석 연구위원, ‘민족문제에 대한 계급적 접근을 위하여’, [노동사회과학], 2020년 12월 5일), “민족과 계급2 남북 민족문제의 특수성을 국제주의 일반으로 해소하는가?”, [노동자정치신문], 2021년 1월 26)는 글의 필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기서 인용하여 비판한다.
한국사회 자주파들이 북의 동족ㆍ민족관계 파탄과 적대관계로의 전환 발표 이후 이 격변적 선언에 충격을 받고 이를 발본적으로 분석하여 대비하려고 부심한 상황에서 계급모순을 중심에 두는 좌파들은 대개 이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추측컨데, 민족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에 대해 늘 있는 문제 정도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박문석의 짧은 글도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박문석에게 남북관계의 파탄과 적대국가로의 전환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남과 북은 원래 사회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세계에서 가장 서로간 적대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북문제는 외부 모순이기 때문에 남쪽의 계급투쟁을 우선시 해야 하며 남북문제는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연대의 관점에서 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변증법적인 형이상학적 사고도 놀랍지만 이런 관점으로 최근의 상황에 대해 태연자약한 태도와 근본주의적 태도 또한 놀랍다. 정치노선이 다르다는 것이 남북의 사회성격 차이만큼이나 남쪽 내부 정파에 따라 이렇게 판이한 인식의 차이를 나타내게 하였다. 기이한 일이며 개탄할 따름이다.
정치노선이 진보세력을 이렇게 인식과 실천을 분열시켰다는 것이 개탄스럽고 그 차이에 따라 정치노선과 상관없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중대한 삶과 죽음을 결정할 전쟁위기의 고조와 하나의 민족이 동족.민족 관계가 파탄에 이르러 상호 적대국으로 규정하게 된 현실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도 개탄스럽다.
북의 동족.민족관계의 전환 이후 진보진영이 그 동안 자기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재평가와 전환, 쇄신을 고민하고 있는 시점이므로 우리 운동의 분열상을 극복하고 우리 사회를 변화, 개조시키기 위해 이러한 지점에 대한 분석과 비판도 수행되어야 한다. 남북의 분단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남쪽 진보진영의 분단ㆍ분열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갈 때만이 민족ㆍ동족관계를 복원하고 남북의 통일도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남쪽 내부의 모순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편으로는 필요하다. 물론 그것은 형이상학적이지 않게 민족.동족관계의 복원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해결해 나가야 하는 과정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민족.동족관계의 파탄이 미제와 윤석열 파쇼정권은 물론이고 외세의존 흡수통일 세력들의 반민족ㆍ반동족 작태에 있다는 것을 폭로,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북남은 원래 상호 적대국가였기 때문에 북이 남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이 놀랄 일도 아니라는 인식은 이 사태를 필연이라는 명목으로 그것을 왜곡해서 초월적이고 평론적인 객관주의로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박문석에게는 민족문제 해결이라는 단계를 넘어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만이 지상과제이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이 《모순론》에서 주장한 것처럼, 맑스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에 따라 역사발전의 긴과정 속에서는 반드시 단계가 있고 그 단계성에 유의해야지만 특수성에 주목하며 역사와 사물의 모순을 제대로 인식하고 처리할 수 있다. 가령 역사를 원시 공산주의, 고대노예제, 중세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낮은 수준의 공산주의)/공산주의(높은 수준의 공산주의) 단계로 나누지 않고 인류사 전체를 하나의 긴 과정으로만 인식한다면 각 시대를 구분해 그 시대의 특수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각각의 모순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음이 자명해진다. 레닌이 자본주의를 자유경쟁 시대와 독점자본주의 시대로 나누어 후자의 상부구조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분석을 함으로써 우리는 이 시대의 특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타도 제국주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었다.
현대사를 제대로 인식하면 외세(일제의 식민 지배와 미제의 신식민지배)의 지배로 인해 분단이 생기고 민족모순이 생겼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는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에 어떤 사회를 건설할지 둘러싸고 벌어진 계급투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계급투쟁으로만 인식하고 1948년 이남만의 단정(단독정부).단선(단독선거) 이후 분단문제가 불거지고 제주 4.3, 10월 여순항쟁과 전국적 항쟁에서 분단반대 통일조국 건설이라는 민족적 과제 해결을 위해 싸웠던 역사적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단계성에 유의하지 못하는 교조주의에 빠져 이후 민족.동족관계의 회복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무시하게 된다.
박문석의 인식은 노사과연의 인식이기도 한데, 이들은 남과 북이 계급적대 사회이기 때문에 이 양자 간 외세 배격 민족공존, 연방제적 평화통일은 결코 추구해서는 안 되고 이뤄질 수 없는 주관주의 타협이고 야합이라고 본다.
이들에게 6.15, 10.4 그리고 4.27, 9.19 등 남북의 화해와 협력, 자결과 통일추구는 어차피 체제가 다른 세력들이 불가능한 시도, 헛된 공존을 모색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의미는 오직 “각자의 사회운동법칙에 따라서 발전해 갈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만큼 그것은 긍정적 의의를 가지고 있”을 뿐이고, “‘6.15선언’(‘7.4공동선언’도 물론)과 이른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의 분단과 적대를 절대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계급’, ‘계급적 분열’, ‘계급적 적대’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은, 물론 바로 그 ‘침묵’이라는 소극적인 방법을 통해서이지만, 분단과 적대의 기초에 있는 계급적 분열과 적대를 은폐하고, 그 문제의식조차 기각하고 있기 때문이다.”(채만수, ≪피억압의 정치학(상)≫, 노사과연, p. 102.)

민족대단결 선언이 미제의 민족분열 책동과 남의 통치세력들의 굴종적 태도로 인해 번번이 깨지고 오늘날 민족.동족관계의 공공연한 적대관계로 파국을 맞았지만, 그 선언의 본래 정신이 “각자의 사회운동법칙에 따라서 발전해 갈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체제를 존중하면서 통일로 나아가지 말고 각자 가자는 것은 평화공존하며 분단체제를 영속화 하자는 것인데, 이는 이 선언의 성격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며 민족자결과 통일추구가 민족모순을 해결하면서 변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변의 교조주의 관점으로부터 오늘날 민족.동족관계의 파탄은 앞서 봤던 것처럼, 생산양식이 전연 다른 남북의 성격상 당연한 것이며, 민족.동족관계의 복원 보다는 남쪽 내부에서 계급투쟁에만 매진하고 북에 대해서는 노동자국제주의 관점으로 대하면 된다는 인식이 나오게 된 것이다.
채만수 소장과 노사과연이 우리민족끼리 반미자주 하자는 주장을 계급협조 심지어 범죄라고 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민족문제는 계급문제의 외연”에 불과하는 주장은 민족문제와 계급문제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는 맞지만, 이것이 계급문제가 본질이고 민족문제는 그 본질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이라면 잘못된 것이다.

유럽의 민족문제와 남북이 분단된 사회에서 민족문제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유럽의 민족문제는 자본주의 발전 시기에 생겨나 부르주아 혁명과 함께 민족적 통일로 해결됐다. 유럽에서 민족은 단일한 경제적 지역적 언어적 역사적 공동체로 보지만 우리의 민족문제는 위를 포함하면서도 혈연적(확대된 혈연적 의미) 공통 기반으로 해외에 산재된 500만 동포들을 포함하고 있다. 남과 북이 분단되어 남은 자본주의 북은 사회주의라는 상반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어 경제적 통일성이 없더라도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경제적 통일성 이전에도 민족이 통일될 수 있다.
계급문제 해결로 일거에 민족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전면 배제할 수 없으나 이는 실제로 당면 집중 모순해결의 단계와 방식, 절차를 건너띠는 비약이며 민족문제의 상대적 독자성을 외면하고 계급문제 해결로 환원하는 주장이다.
“민족적 관점이 아니라 계급적 관점이 포인트다.”(박문석, 같은 글)는 주장은 마치 ‘일국혁명이 아니라 세계혁명이다’, ‘민족관계가 아니라 오직 국제주의다’, ‘분단 해결 과제가 아니라 오직 계급혁명이다.’ 같은 트로츠키주의의 형이상학적 사고에 빠진 결과로 나왔다.
이처럼 계급 대 계급의 모순만 강조하며 트로츠키주의적 사고와 방식으로 조직화된 맑스레닌주의표방자들에게는 오직 계급대립, 피티독재만 있을 뿐이다. 궁극목표만 있을 뿐 그를 쟁취하기 위한 단계도 수단도 방법도 없이 사물발전에 대한 인식도 그 특수한 조건에 대한 인식도 없이 비월하고 초월함으로써 당면 투쟁에 무기력하거나 기권하는 것이 바로 트로츠키주의 기회주의의 모습인데 딱 그 짝이다.
동족ㆍ민족관계의 파산은 계급대립의 필연적 발로에 불과하다는 사고는 “죄는 생산력에 있다”는 카우츠키처럼 필연성을 객관주의 평론으로 왜곡한다. 1차 세계대전은 발전된 생산력에 따른 것이지만 그 죄는 생산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제국주의에 의해 벌어졌고 전쟁을 지휘하고 수천만 인민을 살상하고 전 인류를 비극으로 몰아가면서 전쟁의 이익을 얻는 한 줌도 안 되는 독점자본가들과 정치모리배들과 그 일파들에게 있다. 발전한 생산력에 죄를 묻는 것은 누구에게도 죄를 묻는 게 아니다. 생산력이 죄를 묻는 게 아니라 타도 제국주의로 단죄해야만 하는 것이다.
북에서 선언한 민족ㆍ동족관계의 파탄과 적대시는 그것이 바람직한 당위가 아니라 미제와 전쟁 추동자들에 의해 파탄된 현실을 보여주고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다짐과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차제에 “북과의 관계에서도 국제주의적 관점을 확고히 가지고 국내 지배계급과의 투쟁에 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미제와 윤석열 정권의 전쟁책동을 분쇄해야 한다. 지배계급의 사상인 반북반공 이데올로기를 척결해야 한다. 동족ㆍ민족관계의 파괴자들을 축출, 타도하고 자주적, 진보적 권력을 세워 파산된 동족ㆍ민족관계를 복원시키고 평화적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

 

교조ㆍ계급환원주의는 중ㆍ러 신흥제국주의론으로 나타나 미제의 신흥 프로파간다에 복무

 

남북 문제를 오로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연대의 관점에서 대”하는 교조주의적이고 계급환원주의적 인식은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에서 격화되는 대립과 대결, 전쟁위기 고조에 대해서는 더욱 심각한 파탄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조만간 미제를 중심으로 한 서방 제국주의와 중ㆍ러를 중심으로 한 후발 제국주의의 패권 경쟁 속에서 배치되는 한(조선)반도에서의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수시로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정세] 파쑈 권력에 맞서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전면화하자, 박문석 | 연구위원, 부산지회 운영위원)

파쇼 권력의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전면화 하자는 다짐은 좋다. 그런데 반공주의 백색테러 국가보안법은 우리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 체제를 마비시켜 왔다. 반공 백색테러의 공포에 굴복하지 않고 투쟁했던 이들은 학살만행에 대다수 희생되고 살아남은 이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대신 국가보안법의 등에 업은 극우적 사고의 광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다종다양한 언론기구, 교육기구, 종교기관, 문화기구 등을 통해 지배계급의 사상을 유포하고 있는데 이것이 대중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지배계급이 유포하는 반북적대감은 오늘날 대중들에게 반중혐오(짱깨주의), 반러혐오(루소포비아)를 이어지고 있다.
이로써 맹목적인 친미 숭배의식에 반해 반북, 반중, 반러혐오는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다. 이는 이러한 대중들의 인식 뒤에는 미제와 반공 부르주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주주의 대 독재,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인도주의 대 인권말살 체제, 다원주의 대 전체주의…
이런 인식은 미제를 위시로 한 서방 현대제국주의자들이 유포하는 최신의 프로파간다다.
미제의 가치동맹은 바로 반북, 반중, 반러를 기치로 내건 신냉전이다.
이 신냉전 이데올로기와 그 폭력체제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전쟁을 막고 극우 파쇼 체제를 타도하는데 있어 중대한 과제다.
그런데 미제와 서방 제국주의는 선발 제국주의고 중ㆍ러는 후발제국주의라면 이것이 과거 영국제국주의에서 미국제국주의로의 전환과 같다는 의미이다. 이는 박문석 개인뿐만 아니라 노사과연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다.
중ㆍ러가 제국주의라는 선전은 미제와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 중동, 동남북 아시아, 남미 등 전 세계에서 자신들이 자행하는 제국주의 침략과 약탈, 반동성을 은폐, 전가하기 위해 사용하는 신종 이데올로기다.
힐러리 클린턴이 대표적인 인사다. 2011년 6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아프리카를 순방하던 중 잠비아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위협하는 중국의 ‘신제국주의’에 대해 경고하는 연설을 했다.
네오콘의 상징적 정치인이 존 볼튼(John Bolton)은 중국이 아프리카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약탈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중국의 남미 진출을 겨냥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신제국주의 열강’이라고 비난했다.

2023년 11월 칼슨은 트럼프와의 인터뷰를 공개했는데, 두 사람 모두 베이징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트럼프는 “왜 중국은 우리 영역에서 제국주의 행위를 하도록 내버려 둡니까?” 라는 극우 언론인 터커 칼슨의 질문에 대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쿠바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에요. 중국은 남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중국은 미제가 그런 것처럼, 이들 나라들에 군사기지를 가지고 내정에 간섭하고 정권교체(레짐체인지)를 시도하고 침략을 자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과 학살을 지원하는 미제와 서방제국주의자들의 제국주의 행보에 비춰볼 때도 러시아, 중국은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존중하고 있다.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이들 나라들의 주권을 존중하고 약탈이 아닌 이 나라들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교역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런데 러우전을 제국주의 간 전쟁으로 보는 것을 넘어 이곳에서의 분쟁과 대결이 선발 제국주의와 후발제국주의와의 투쟁이라는데 이러한 인식이 맞다면 우리 남쪽의 진보세력, 활동가, 인민대중은 중국, 러시아 제국주의에 맞서 무슨 반제투쟁의 과제를 수행하자는 말인가?
이들은 중러가 미제의 제재를 뚫고 북과 경제 교역을 확대하는 것은 자본수출의 강화로 제국주의 행보라고 보는데 그렇게 되면 이를 반대하는 것이 반제투쟁의 과제가 된다.
가중되는 중국혐오, 러시아혐오에 편승해 중러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자는 것이 반제의 과제가 된다.
이들은 남북을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했는데, 중국이 제국주의면 중국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요구하며 중국인민과 국제협력을 해야 한다.
대만 인근에서 고조되는 위기는 미제와 중제가 대만 자결권을 압살하며 싸우는 제국주의 간 대립에 불과한 것이 된다. 실제 이들이 일방 추종하는 그리스공산당은 이렇게 인식하고 있다.
이들에게 미일한 동맹과 조중러 동맹은 선발 제국주의 동맹과 후발 제국주의 동맹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양 동맹의 대립이 제국주의 간 대립이니 노동자 민중은 오불관언(吾不關焉)해야 하는가. 기계적 중립을 지키고 제국주의 양자의 패배를 도모해야 하는가.
북(조선)은 중러 신흥 제국주의 축과 야합하여 싸우는 제국주의 들러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인가.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한다면 북이 미제와 싸우는 것은 영제에서 미제 패권 교체기에 영제에 맞서 신흥 제국주의 중심축과 손잡는 것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북이 수행하는 반제의 전략적 의의는 심각하게 훼손되고 이로써 조미 대결 와중에 남에서 수행하는 반미반제 투쟁도 그 의의가 없어지게 된다.
“모스크바도 아니고 워싱턴도 아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구호가 그랬던 것처럼, 도대체 남과 북, 동북아에서 대결과 전쟁위기 고조를 맞아 이런 양비론적 구호로 어떻게 이 위기를 주체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인가.
러-우전, 이-팔전, 대만해역 위기, 그리고 이곳 반도에서의 전쟁위기는 그 역사적 배경은 다르다 하더라도 공통으로 관통하는 성격이 있다.
바로 이 분쟁, 전쟁의 원인, 침략자, 학살자들은 미제와 서방 제국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현지의 파쇼 나찌 극우 현지 권력을 내세워 제국주의 침략을 자행하는 것이다.
남과 북, 동북아에서 대결과 전쟁위기 고조를 맞아 하는 도대체 그 역사적, 정치적 원인이 무엇인지 규정하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싸워야 할 적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이 적들과 싸우고 이 위기를 헤쳐나가 승리할 수는 없다.
이는 지배계급이 미제와 서방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물타기, 전가하기 위해 러시아 혐오증, 중국혐오증을 유발하는 것을 폭로하기는커녕 여기에 부응하는 짓이다.
또한 이는 미제침략자, 도발자, 그 추종자들과의 투쟁에 심각한 혼선을 가져오고 민족적ㆍ동족적 과제의 복원이라는 정치적 과제를 회피하게 만든다.
이래 놓고 국가보안법에 맞서 싸우고 지배계급의 사상과 맞서 싸우자고 하는 게 말이 되는가?
중ㆍ러가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이라는 인식은 인식상의 오류인 동시에 여기에 멈추지 않고 실천적으로는 미제와 제국주의자들의 이해에 봉사하는 심각한 정치적 탈선인 것이다.
고조되는 전쟁위기를 외면하고 민족문제에 기권하며 중ㆍ러 패권주의론으로 미제와의 결전을 혼란, 회피케 하는 진보진영 내에 침투한 제국주의, 부르주아 신종 프로파간다를 척결해야 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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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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