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북한이 겪은 고난의 행군은 왜 일어났는가?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북한(조선)에게 있어서 역사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일까? 아마도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대략 3년간 북한이 겪은 한국전쟁(Korean War)일 것이다. 한국전쟁 기간 3년 동안 북한은 미군의 폭격으로 말 그대로 달 표면이 됐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 폭격에 의한 북한의 도시 파괴의 규모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보다 훨씬 컸다.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에서 18개 도시는 최소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평양 75%, 청진 65%, 함흥 80%, 흥남 85%, 사리원 95%, 신안주 100% 원산 80%다.(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현실문화, 2017, 226~227쪽.)
북한에게 있어 한국전쟁과 더불어 역사상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또 있다. 바로 두 번째가 1990년대 북한이 겪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다. 사실 ‘고난의 행군’이라는 용어는 북한의 최고 지도자이자 초대 지도자이기도 한 김일성이 젊은 시절 경험한 항일무장투쟁에서 나온 것이다. 고난의 행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38년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 부대가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100일간 행군을 한 데서 유래했다. 당시 김일성을 포함한 항일 빨치산 부대는 수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추격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았으며, 1990년대 냉전이 붕괴하자 고립을 면치 못했던 북한은 국가적으로 ‘고난의 행군’임을 내세웠다.
고난의 행군 시절 구호 |
고난의 행군은 한국이나 서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이 아닌,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북한이 겪은 대기근과 체제 붕괴 위기를 부르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한다. 고난의 행군 당시 적잖은 사람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각에서는 그 숫자를 무려 300만 명이라고 추정하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추정치는 지극히 과장된 추산임을 학자들에 의해 지적받기도 한다. 2010년 한겨레에서 나온 기사에 따르면, 당시 서울대 교수인 박경숙은 1990년대 중후반 북한의 식량난 등으로 굶어 죽은 북녘 동포의 숫자가 대략 34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으며, 북한 당국이 자체 실시했다는 ‘1993년 인구센서스’와 이번 ‘2008년 인구센서스’ 자료를 비교·분석해 추정치를 내놓았다.(이제훈, “고난의 행군때 아사자 34만여명 추정”, 한겨레, 2010.03.17.)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1990년대 북한이 겪은 고난의 행군으로 적잖은 아사자가 속출했으며, 소위 한국 및 서구 사회가 북한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고 일부러 악용하는 기사 소재 거리라는 것이다. 2023년 올해만 하더라도 북한의 식량난을 가리켜 ‘고난의 행군’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한 기사들이 즐비하다. 2023년 10월 31일 조선일보에 실린 정치섹션 관련 기사 중 하나가 바로 “北, 우방 앙골라·우간다 공관도 문닫았다…“고난의 행군 시즌2 징조”다.
물론 이 조선일보가 인용한 출처는 현재 탈북자 출신 국민의힘 의원인 태영호의 페이스북 글이다. 참고로 태영호의 경우 2020년 4월 27일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은이 스스로 일어서거나 제대로 걷지 못하는 상태임은 확실하다.”는 아무런 근거출처가 없는 허위사실은 사실인 것처럼 주장했다.(Paula Hancocks and Jessie Yeung, “Rumors surrounding Kim Jong Un not ‘based on the facts’ says former North Korean diplomat”, CNN, 2020.04.27.)
심지어 영국 BBC 또한 2023년 6월에 “[단독] 서해 NLL 탈북 가족, ‘북한 극심한 식량난에 인육 취식 소문’”과 같은 황당무계한 허위주장을 기사로 내보낸 적이 있다. 물론 이 기사에서도 “몇백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진 1996년 고난의 행군 시기, 평양시 만경대구역 장마당에서 한 시민이 인육을 내다 팔다가 당국에 붙잡혀 그 사람은 물론 관련 친인척까지 처벌받는 사례가 있었다.”고 말하며, 허위사실을 사실인냥 포장했다.(리차트 김, “[단독] 서해 NLL 탈북 가족, ‘북한 극심한 식량난에 인육 취식 소문’”, BBC 코리아, 2023.06.13.)
즉, 이와 같은 검증되지도 않은 허위사실들이 기사로 실리고 있고, 그 기사들에는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는 용어가 자극적으로 남용된다. 그리고 이처럼 허위사실에 근거한 기사들은 북한 악마화 및 타자화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이러한 검증되지 않은 루머에는 고난의 행군 아사자에 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사들은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고난의 행군에 대한 책임을 북한에게만 전가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렇다면 국내 언론과 서구 언론에서 북한을 비난하기 위해 끊임없이 강조하는 고난의 행군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1990년대는 이른바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시기였다. 1990년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통일 됐고,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됐으며, 1992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에선 참으로 끔찍한 내전이 발발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반공학자 프렌시스 후쿠야마는 저서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세계가 미국 등 서방 자유민주 진영의 주도로 큰 전쟁이나 대립 없이 평화를 이어나가고,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서 더 이상의 체제 발달 없이 사회가 유지될 것.”이라는 지극히 자본주의 시각으로 낙관적인 결론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러한 대외적인 요소가 북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90년 당시 북한은 소련과의 교역량이 25억 달러였던 반면, 2000년 3,850만 달러로 급감했다. 1991년 소련 붕괴로 북한은 가장 중요한 교역 동반자들을 잃었으며, 소련의 경제적 원조도 상실했다. 북한의 에너지 안보에 필수적인 코메콘(동구경제상호원조회의)도 종말을 고했으며, 동유럽 국가들과의 활발했던 교역의 붕괴는 소련보다 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이는 미국이 적성국교역법을 적용하고 대공산권수출조정위원회를 통해 세계 경제의 거의 잔반에 북한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강화하고 일반적 경제제재를 부과했기 때문이었다.(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42쪽.)
더 나아가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농업 부문에서 큰 타격을 받았는데, 1995년 7월 30일부터 8월 18일까지 쏟아진 폭우로 인한 홍수가 결정적이었다. 당시 북한이 겪은 역대급 규모의 홍수는 그 당시 최소 70년 동안 기록된 적이 없는 범람이었다. 그리고 1997년에도 홍수가 닥쳤으며, 전에 경험한 홍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가 더 극대화됐다. 이 당시 곡물 비축분 100만 톤이 홍수에 휩쓸려갔고, 철도, 도로, 다리, 댐, 관개 시스템이 유실되었으며, 탄광들이 침수되어 일부는 버리고 떠나야 할 정도였다. 유엔에 따르면 1994년과 1995년의 홍수로 양곡 비축분 150만 톤이 파괴됐다. 1995년에 홍수, 1996년에 혹독한 가뭄 그리고 1997년에 또 다른 홍수가 북한을 연타했다.(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45~47쪽.)
A.B 에이브람스는 저서 <<끝나지 않은 전쟁 II – 북미 대결 70년사>>에서, 모스크바 대학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와 아시아·아프리카연구소 연구원인 콘스탄틴 아스몰로프 박사를 언급한다. 아스몰로프 박사는 북한의 경제적 재앙과 그 결과로 나타난 기아의 원인이 지도자 김정일을 포함한 북한 정부 및 지도부를 악마화하기 위한 목적 하에 서방 소식통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했다는 점을 지적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지적을 한번 보자.
“그 재앙을 둘러싸고 몇 가지 오해가 생겨났다. 가장 흔한 오해가 북한 지도부의 무능한 정책이 의도적으로 나라를 기아로 이끌어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만약 위에 언급한 문제점들, 그러니까 열악한 농업 잠재력, 소련이라는 동반자 관계의 상실, 극단적인 날씨, 미국의 경제제재 가운데 단 하나만 저울에서 내려놓는다면, 상황은 훨씬 덜 비극적인 결과 쪽으로 기울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Konstantin Asmolov, “Famine in North Korea: Causes and Myths. Part 1”, New Eastern Outlook, 2013.10.30.)
아스몰로프 박사는 더 나아가 외부 세력들의 행위가 어떻게 북한의 상황을 악화시켰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보통 때 같으면 국제 사회가 그 같은 인도적 대재앙에 개입했겠지만, 북한의 경우에는 이데올로기가 또 다시 역할을 했다. 많은 이들이 북한이 아주 이른 시일 내에 자체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을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간주했다. 그것은 최소한 남한이 행동으로 보인 모습이다. 첫째 그들은 지원 프로그램(NGO들이 모금한 소량의 원조)을 잘난 체하며 발표했다. 하지만 그들은 북한 내부 정치에 사시상 개입이 될 만한 용납할 수 없는 조건들을 요구했다. 따라서 평양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자, 그들은 모든 식량 공급을 중단하라며 북한을 겨냥한 경제제재에 로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더 좋다는 계산을 한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상당한 지위의 외교관 자리에 오르게 되는 보수파를 대표하는 이는 필자에게 드러내놓고, 평양에 대한 원조 식량의 이동에 제약을 가하기 위해 자신들은 구체적인 정책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위기 속에서, 북한 대중은 자신들을 자급자족 하도록 방치하는 정권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것이고, 만약 배가 제대로 흔들린다면, 북쪽의 공산주의 국가는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나라는 김영삼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통일될 것이고, 김영삼은 단지 최초의 민간인 대통령으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무너뜨린 인물로도 역사에 기록될 것이었다.”(Konstantin Asmolov, “Famine in North Korea: Causes and Myths. Part 2”, New Eastern Outlook, 2013.10.31.)
유튜브에 있는 다큐멘터리 중 하나인 “Loyal Citizens of Pyongyang in Seoul(서울의 평양 시민들)”을 보면, 2011년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한국에 오게 된 평양시민 김련희의 인터뷰가 있다. 김련희는 고난의 행군 시절을 직접 북한에서 겪은 인물이이기도 하다. 그 인터뷰 내용을 보면, 당시 미국이 북한을 붕괴시키기 위해 어떤 행위를 했는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미국 놈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냐면, 고난의 행군 시절에 원유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바람에 우리 공장들의 70%가 기계를 멈췄어요. 정말 생산을 못했어. 국가가 생산해서 인민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995년부터 갑자기 우리의 공동 식량원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우리는 굶어 죽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남한과는 그렇지 않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와 국경을 공유하고 있고, 중국과는 국경 개념이 없어서 인민들이 원하는 대로 오고 갈 수 있어요. 당시에, 우리는 전보다 훨씬 더 중국을 왔다 갔다 하며 국경을 통과해 다녔고, 정부는 자신들이 공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서 물건을 팔아 집으로 식량을 가져오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놈들이 그 CIA나 국정원이나 이런 자들이 단둥이나 우리 국경에서 작전을 벌였는데, 그들은 공화국 시민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하는 거죠. ‘소의 꼬리를 하나 잘라 와라. 소꼬리 하나에 쌀 한 가마니를 주겠소. 전기선을 잘라서 가져와라. 전기선 몇 kg에 무게만큼 쌀로 맞춰주겠다.’ 뭐 이렇게 말한거죠. 미국인들이 왜 소의 꼬리를 원했다고 생각하세요? 우리에게 가스나 전기가 잘 안들어오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생산할 수 있는 게 아무리 적더라도 수작업으로 농사를 지어 인민들을 먹여 살려야 하잖아요. 하지만 미국이 휘발유 수입에 제재를 가해 트랙터들이 작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신에 소들을 이용해 쟁기로 밭을 가는데, 꼬리를 잃어버리면 소들이 균형과 힘을 잃습니다. 농업을 훨씬 더 망가뜨리고 인민들을 굶어 죽게 하려고 미국인들이 소꼬리를 원한 거죠. 북을 붕괴시키려고요.”(DPRK News Room, “Loyal Citizens of Pyongyang in Seoul (서울의 평양 시민들)”, 2018.10.16.)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해봤을 때, 당시 북한이 겪은 고난의 행군은 북한 정권 책임으로만 보기엔 너무나도 많은 흠점이 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자본주의 체제를 강요하는 것에 따르지 않은 것을 책임으로 물을 수는 없다고 본다. 당시 비슷한 예로 이라크가 있다. 1990년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이유로 걸프전쟁을 치르게 됐다. 걸프전쟁으로 이라크는 초토화됐다. 1991년 1월 16일 이라크 내 기지들에 대한 미국 주도의 공격이 시작되어, 이라크는 집중적 공습 아래 노출되었고, 미국과 동맹 세력의 전투기들이 10만 회 넘는 출격으로 8만 8,500톤의 탄약을 쏟아 부었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이 정유 공장, 발전소, 수송망과 같은 핵심 기반시설들을 정밀유도무기로 파괴했다고 보도했으며, 이라크인 생활수준을 공격하는 것이 미국의 폭격 목적이었음을 전했다. 실제로 미국은 이라크 전력 생산 능력 80%를 파괴하고 하수처리 시스템을 마비시켰다.(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13~14쪽.)
그 결과 이라크 주민들은 건강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최소 기준에 해당하는 1인당 칼로리의 절반 밖에 섭취할 수 없는 기아 수준으로 연명하게 됐고, 영양실조가 나라 전반에 걸쳐 가파르게 상승했다. 전쟁 이전 이라크는 다수의 서방 국가들을 능가하는 생활수준으로 중상위 소득국이었지만, 걸프전쟁의 미군폭격 여파와 12년간 이어진 가혹한 경제제재로 빈곤한 제3세계 국가 수준으로 경제가 하락했다. 생활수준은 절대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았으며, 최소 100만 명 이상의 이라크 주민이 전쟁과 뒤따른 미국의 제재 여파로 사망했다. 1996년까지 이라크 어린이 50만 명이 아사했다.(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14쪽.)
이것은 순전히 미국이 일으킨 전쟁과 가혹한 경제제재 여파 때문이었다. 일각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1990년 사담 후세인 정부는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을 깨달았고, 완벽한 굴욕만 피하면서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기 위해 미국과 합의를 보려고 노력했다. 즉, 미국은 철수를 교섭하려는 이라크의 모든 시도를 무시하고 1991년에 대대적인 폭격을 개시한 것이었다.(노엄 촘스키·비자이 프라샤드, 유강은 옮김, <<물러나다: 촘스키, 다극세계의 길목에서 미국의 실패한 전쟁을 돌아보다>>, 시대의창, 2023, 18~19쪽)
마찬가지로 북한 고난의 행군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북한 또한 냉전 종식 이후, 1992년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관계 개선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한 주체는 미국이었다. 1993년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여 미군과 한국군 20만 명을 훈련에 동원했다. 이 군사훈련에는 평양에 대한 핵 폭격 훈련, 원산과 흥남항에 대한 대규모 상륙 훈련 등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이 보낸 평화적 메시지를 무시했으며, 지속적으로 한미군사훈련을 진행해왔고,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이 보이자, 제재 강화와 더불어 의도적으로 체제 붕괴 시나리오 기대했다. 따라서 고난의 행군의 책임이 미국에게 없다고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됐으며, 이라크 후세인 정권에서 발생한 아사자 문제와 더불어 미국에게 큰 책임이 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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