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주체사상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 변혁사상을 정립하기 위한 단상

재미교포 김현환선생의 《나와 주체사상과의 대화》(1998년 출간)는 선생이 묻고 북의 권위 있는 주체사상 이론가, 따라서 북의 공식입장의 대변자가 답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주 볼만 합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북사상에 대해 깊이 있게 해석합니다.
이 글을 근본적으로, 즉 뿌리 끝까지 파헤쳐 읽어야 남에서 제대로 된 인식의 틀을 잡고 분열된 우리운동을 통일시키고 변혁과제를 잡을 수 있습니다.
북사상에 대해 왜곡, 악선전하는 경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동안 이른바 ‘좌파’들에게 만연한 반공주의를 주로 비판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위 과제를 위해 그 의미보다는 저 [대화]가 맑스레닌주의를 일정하게 오해하거나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점에 대해 핵심만 지적하고 향후 기회가 닿는데로 온전한 글을 쓸 것입니다.
위 글 대화는 이남의 엠엘론자들, 80년대 활동했던 엠엘론자들 비판과 엠엘 자체의 제한성을 뒤섞여서 논의를 전개합니다.
교조화된 엠엘론자, 심지어 반북적인 엠엘론자들 비판과 맑레 자체를 뒤섞다보니 이게 교조주의자들의 문제인지 맑레 자체의 문제인지 혼란을 줍니다.
북의 엠엘과의 관계는 강조점이 다릅니다. 기본 원칙은 계승과 혁신입니다.
김일성 주석의 한 일본 언론 인터뷰에도 나와 있듯이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에 다 있는 원칙을 자신이 특별하게 강조했다며 계승발전론을 내세웁니다.
후르시초프 이후 쏘련과 국제공산주의 운동 내에 수정주의자들이 득세하고 개인숭배 이유로 반스탈린, 대국주의 횡포가 극심한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맑레사상 100년 총화를 통해 유일사상을 강조하고 처음으로 김일성사상을 선포하여 혁신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북에서 이를 기회로 엠엘을 부정하는 듯한 흐름이 나타나자 김국방은 엠엘사상의 계승성을 부정하면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이도 계승과 혁신의 원칙 위에서 계승성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위 대화에서 남의 엠엘론자들이 북의 인간의 본질특성인 자주성이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본질적 특성이 아니기 때문에 관념론이라는 편협한 교조주의자들을 비판합니다.
그런데 대화는 이게 인간이 왜 노동하는지, 어떻게 노동하는 인간이 되었는지, 노동은 인간의 어떠한 본성의 발현인지 해명하지 못한 엠엘주의의 노동하는 인간론의 근본한계라고 비판합니다.
《공산당선언》에서의 “문자로 기록된 이래로 인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는 규정에 대해서도 북에서는 자주성의 개념보다 협소하다고 지적하는데 계급투쟁은 왜 합니까?
억압과 착취에 맞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사회와 자연개조의 걸림돌을 없애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자주성의 개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노동하는 인간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성을 노동하는 인간과 대비하여 이를 관념론이라 비판하는 편협한 ‘인간들’이 문제인 것이지 이게 맑스주의 인간론의 근본한계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닙니다.
맑스주의는 인간이 아무런 목적 없이, 아무런 계획없이 노동을 위한 노동을 한다고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의 목적은 자연과 사회를 개조, 발전시키고 생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속에서 인간이 두뇌를 발전시키고 창조성을 고양시키고 공동노동하고 집단의식을 발전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맑스주의에서 자유는 법칙을 인식하여 인간이 자연의 일방 숭배자, 노예에서 자연 속에서지만 인간의 주도성과 능동성 같은 개조자적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연, 사회에 대한 법칙을 인식하는 것과 개조자적 특성은 대립되는 게 아니라 전자를 인식하는만큼 후자가 발전하는 것이고 후자를 견지하는만큼 전자에 대한 인식도 발전하는 상호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계급사회 일반과 자본주의는 집단노동 형식만 유지하면서도 인간 노동을 착취하고 소외시키고 이기성을 극대화시킴으로써 본성을 심히 왜곡시키고 짓밟습니다.
이로써 인간 자주성의 최고형태인 혁명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을 객관세계의 반영이라고 한 것도 일면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객관세계를 반영하지 않은 인식은 없습니다. 물론 객관세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환상적 인식도 있습니다. 객관세계와 일치하지 않는 주관적 인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엠엘사상의 반영론은 그저 외부 세계를 수동적으로 반영하고 숙명적인 인식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변증법은 이렇게 사물을 일도양단하지 않습니다.
맑스주의는 자연사적 과정, 객관법칙을 강조하면서도 사회역사 인간역사에서 인간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사회의 역사에서는 의식을 가지고 신중하게 또는 열정적으로 행동하는 인간들이 일정한 목적을 추구하며 활동한다.”(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자유라는 것은 자연필연성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여 우리 자신과 외적자연을 지배하는데 있다.”(엥겔스, 반뒤링론)

자유가 “우리 자신과 외적자연을” 심지어 지배하는 것이라고 개조(개조자적 특성)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인식에 의거하여 인간의식과 실천과 사회변화의 가장 고차원적인 형태인 혁명의식과 그 발현인 혁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혁명이 필요한 것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지배계급은 타도되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타도하는(Stürzende)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모든 낡은 오물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세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독일이데올로기》)

결국 자주성이라는 개념이 관념론이라는 80년대 맑스레닌주의자들의 편협한 관념론적 인식과 달리 자주성은 맑스레닌주의에 바탕을 둔 개념입니다.

인간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다”라는 규정은 맑스주의 인간론의 발전인 것입니다.
우리는 계급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남의 활동가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제한성을 이유로 맑스주의 원칙, 원리를 왜곡하거나 전제한 것으로 간주하여 무시, 외면하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대화에서 비판하는 80년대 교조주의자들은 지금 대개 멸절되어 수정주의, 청산주의자들이 되거나 지배계급 인사들로 변절했습니다.
일부 남아 있는 엠엘론자들의 교조주의적, 편협한 인식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80년대 경험을 지금 그대로 가져와 당시 교조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가지고 교조, 교의에 자체에 대한 왜곡, 부정, 무시, 외면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확고하게 견지하면서도 국가보안법과 싸우며 북과 그 사상의 혁신성을 온전하게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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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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