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첨예한 쟁점들5] 러우전에서 기묘하게 하나가 된 제국주의의 ‘진보적’ 들보들!
더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2022년 2월 24일을 기점으로 전면화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특별군사작전)이 비교적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1년 반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이 전쟁은 서방 제국주의·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대결, 대립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했으나 이것이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전쟁은 충분하게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합의된 민스크 협정을 서방과 우크라이나가 파기하지 않았다면, 우크라이나가 서방 제국주의와 단절하거나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최소한 균형적인 태도를 취했더라면, 돈바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을 탄압하지 않았다면, 우크라이나 민중이 서방 제국주의 대리자들인 신나치에 맞서 승리했다면 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전쟁은 조기에 종료될 가능성도 있었다.
전쟁 한 달여 만인 3월 터키의 중재로 이스탄불에서 평화협정 체결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3월 29일 5차례의 평화 협상에서 이 전쟁이 조기 종결될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이 즈음 폭로된 이른바 ‘부차학살’로 평화협상이 무산되고 전쟁이 장기화 되었다.
서방측이 저질러 놓고 러시아의 자작극으로 몰고 있는 노드스트림 해저 가스관 폭파와 최근 헤르손 댐 폭파와 마찬가지로, ‘부차학살’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대한 의혹들이 있으며 우리는 이 사안이 서방 제국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 측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전쟁범죄 학살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러시아는 유엔안보리에서 이 사건을 공개 조사하자고 적극 제안한 반면, 당시 안보리 의장국이었던 영국은 완강하게 안보리 조사를 거부한 점만 보더라도 이 사건은 충분하게 의혹을 살만하다.
이 장기화된 전쟁은 보통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내세운 미제, 나토 같은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대리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을 보면 대리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이 전쟁에 깊게 참여하고 있다.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막대한 무기, 자금지원, 거대 언론을 통한 이데올로기전 지원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군대를 직접 훈련시키고 지휘하고 있으며 비밀리에 정보요원, 군사 장교까지 파견하여 참전하고 있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파고든 (범)트로츠키주의, 즉 제국주의 정치
이 러-우전쟁은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들과 진보적 인류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국제공산주의 운동 진영 내에는 현대 제국주의의 성격과 대상을 둘러싸고 입장 차이가 있었다. 러우전 이전에 이 차이는 잠재적인 갈등 요소였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이론적 차이 정도였다. 그러나 러우전을 계기로 이 이론적 차이와 잠재적 갈등은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전면적인 갈등과 대립으로 나타났다. 쿠바에서 있었던 22차 국제공산당 및 노동당 대회에서는 명목적으로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단결을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결의문이 채택될 정도로 공산주의 진영의 분열을 공식화한 대회가 되어 버렸다.
그 이후 국제공산주의 운동은 그리스공산당(KKE)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국제공산당 및 노동자당 참가 세력과 세계반제국주의 플랫폼이라는 두 개의 국제조직으로 나눠졌다. 러우전이 서방 제국주의와 러시아 제국주의 간의 제국주의 전쟁이냐 아니면 서방 제국주의와 신나치 우크라이나 꼭두각시 정권과 여기에 맞서 싸우는 반제자주 진영의 대립이냐는 성격 규정은 서로 합의하거나 절충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중국을 자본주의, 제국주의로 보는 관점은 현실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 혹은 ‘타락한 노동자국가’로 보았던 트로츠키진영처럼, 인류의 진보적인 성과, 결실을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논리다. 이는 맑스레닌주의 진영까지 파고든 (범)트로츠키주의, 즉 제국주의 진영의 정치적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트로츠키주의는 과거에는 “모스크바나 워싱턴도 아닌 오직 국제사회주의”라는 양비론 구호로, 또는 “타락한 노동자국가론”으로 현실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사회혁명이나 정치혁명으로 이들 권력들을 타도해야 한다면서 반쏘, 반사회주의 중상모략에 골몰하였다. 혁명으로 건설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레짐체인지(정권교체), 즉 반혁명에 불과한 것이다. 이처럼 트로츠키주의는 현실의 사회주의 국가와 그 지도자, 민족해방투쟁으로 들어선 진보적 국가와 지도자들에 대해 비방하고 정권교체를 획책하는 것으로 제국주의에 복무해 왔다.
이들 트로츠키주의자들, 특히 쏘련이나 현실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가장 극렬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이들과 유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범)트로츠키주의자들인 사회진보연대와 같은 ‘신좌파’, 그리고 일단의 ‘좌파’지식인들은 작금에는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리비아, 시리아, 중국(특히 홍콩과 신장위구르),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이란, 베네수엘라 등 반제·반미국가에 개입하여 레짐 체인지(정권교체)나 분쟁을 조장한 것을 ‘민주주의 투쟁’이라며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다. 이들 (범)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제국주의가 개입한 나라의 권력의 ‘비민주적’인 성격문제(독재)를 집중 거론함으로써 제국주의의 침략상과 폭력상을 물타기, 은폐하는 방식을 주로 채택한다. 러우전에 대해서도 러시아의 제국주의적인 사회성격과 푸틴의 ‘독재상’을 부각하는 것으로 서방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한다.
실제 그리스공산당은 한 줌도 안 되는 제국주의 국가가 수백 개 나라, 수십억 인류를 침략, 종속, 지배하고 금융적으로 교살한다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부정(이는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하고 있다. 이들은 국가 간, 민족 간 억압과 피억압 종속, 수탈관계를 수평적인 상호주의 관계로 왜곡시키는 ‘부르주아 국제관계론’의 일종인 ‘제국주의 피라미드론’으로, 맑스주의 철학에서 중요한 단계의 부정으로 혁명의 발전과정에서 필수적인 단계를 비약하여 건너 띄는 것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현실성을 외면하고 인류의 진보적 역사와 한 사회의 역사적 특수성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것으로, 오직 계급 대 계급 간 대립을 주장하면서 통일전선을 부정하는 협소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러우전을 제국주의 간 전쟁이라는 양비론으로, 대만분쟁에서도 마찬가지의 양비론을 취하는 태도로 맑스레닌주의 진영에까지 파고든 트로츠키주의의 영향, 실제로는 제국주의의 영향을 다방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북한핵’에 대해, 러우전에서, 첨예한 정치사건마다 취하는 양비론적 태도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나 정의당 같은 반공 ‘신좌파’ 사민주의 정당과, 일단의 다원주의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진보연하는 지식인들,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같은 소부르주아 언론이 취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들은 공히 반미는 시대착오적 인식이라면서 미제국주의의 세계 지배와 침략, 약탈상을 존재하는 않는 것으로 인식하고 대중들한테 자신들의 인식을 전파함으로써 제국주의에 봉사한다.
피아간의, 적과 우리와의 첨예한 갈등과 대립을 두고 펼치는 양비론, 중립론은 결국 피와 적의 편을 드는 이적행위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정치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벌어지는 계급 간 투쟁, 민족 간 투쟁으로 진공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핵은 인류를 절멸로 몰아갈 수 있는 위험천만만 무기이기에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한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핵무기는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이고 당위적인 원칙으로부터 “모든 핵 반대”라는 구호를 내건다면 이는 실천적으로 공허한 구호이거나 지극히 위험한 구호가 된다.
이 구호에는 핵패권과 핵독점의 원흉인 미제국주의의 책임이 빠져 있다. 심지어 미제국주의가 자신들의 핵독점과 핵패권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 ‘북핵반대’를 내걸고 북에 대한 경제제재와 정치,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일방 공세를 취하는 상황에서 ‘모든 핵 반대’는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회피하고 자위권의 일환으로 만든 핵무기를 반대하는 구호로 전락함으로써 제국주의의 이해에 봉사하게 된다.
사회진보연대의 “모든 핵 반대”라는 양비론적 입장은 결국 첨예한 정치적 사안 앞에서 이들이 결국 제국주의와 파쇼권력에 봉사하는 진보진영 내에 침투한 오열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미제의 핵과 적대시 정책, 침략책동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이 펼쳐지고 미제와 그 주구 윤석열 정권의 반북 적대행위와 전쟁책동이 고조되는 시점에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나 전선조직 내에서 “북한 핵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한다.”는 논리로 미제와 파쇼권력에 충실하게 봉사해 왔다.
러우전에 대해 제국주의 간 전쟁이라는 인식 하에 중립론, 양비론을 펼치는 공산주의 표방자들의 주장 역시 실제적인 정치공간 내에서는 중립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복무하게 된다. 이들의 논리와 실천은 진보적 인류가 제국주의와 제국주의가 도발한 전쟁에 맞서 단결하고 평화를 위해 적극 투쟁해야 하는 시점에서 진짜 전쟁 도발자를 흐리게 하고 제국주의자들의 이중 잣대를 제대로 폭로하지 못하고 부화뇌동하게 되며 평화를 위한 투쟁을 분열시키게 한다.
러우 전이 서방 제국주의와 러시아 제국주의 간의 전쟁이고 중국은 제국주의라는 그리스공산당의 양비론적 인식은 결국 우크라이나가 “정의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나아가고, 대만분쟁에서는 전쟁을 획책하는 미제를 집중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간 분쟁이라는 것으로 대만문제의 역사적 기원을 호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로츠키주의자, 반공 신좌파, 맑스레닌주의 표방자들의 기묘한 정치적 동거
러시아군도 철수하고 서방 제국주의 개입도 반대한다는 기묘한 양비론, 현실에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공상적 요구를 자칭 맑스레닌주의자들이 (범)트로츠키주의자들과 같이 내걸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기묘한 정치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와 중국이 제국주의이고 러우전이 제국주의 간 전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국내의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 같은 단체의 양비론적 인식도 실천적으로는 미제국주의 야수성, 강도성을 집중 폭로 규탄하고 싸우는 대신에 러시아와 중국이 제국주의라는 것을 입증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철수와 이란의 반미전을 호도하는데 집중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맑스레닌주의 표방 단체가 실제로는 종파주의에 골몰하며 타도 제국주의라는 엄중한 정치적 과제를 혼란케 하고 제국주의가 유포하는 대중혐오, 대러 혐오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일단의 진보‘좌파적’ 단체, 활동가들이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소부르주아 언론이 유포하는 인식, 세계관과 제국주의자들이 유포하는 프로파간다와 맞아 떨어지면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로츠키주의자-신좌파 단체와 일단의 ‘진보’적 지식인-소부르주아 언론-맑스레닌주의 표방자들이 결탁하여 제국주의자들이 유포하는 이중잣대와 책임전가, 진실 호도, 은폐에 놀아남으로써 노동자계급과 민중 내부에 혼란스러운 인식을 심어주고 제국주의에 대한 사상적, 실천적 결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반도 이남에 살고 있는 일단의 ‘진보주의자’들의 이러한 양비론적 인식은 러우전이 유라시아에서의 전쟁과 대립을 넘어,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판 나토와 가치동맹 같은 국제분쟁으로 비화되고 동북아에서는 중-대만과의 분쟁, 러일, 중일 영토분쟁과 남과 북의 대결로 나타나고 이것이 미일한 동맹 대 조중러와의 대결로 비화되는 상황에서 단순하게 관념상의 사고를 넘어 실천적으로는 심각하게 유해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러우전쟁 초기 사회진보연대(국제이주팀)는 프랑스 언론 Mediapart(3월 7일)에 실린 발리바르 인터뷰를 번역, 소개하며 푸틴과 러시아의 침략상을 규탄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는 원문 그대로 레디앙에도 실렸다.
러시아와 러시아 정권, 즉 일종의 ‘석유재벌 과두정치’ 독재에, 초군사화(ultramilitarisée)되고, 점점 더 경찰국가화되고 있으며, 러시아 제국 시절을 그리워하는 그 러시아가 지금 우리의 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적이고, 결과적으로 저처럼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을 지원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적이기도 합니다.
확전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핵무기 문제를 포함해서요. 확전은 두려운 일이고, 분명,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평화주의는 선택지가 아닙니다. ‘비개입’으로 또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유럽연합은 이미 전쟁에 얽혀 있습니다. 유럽연합이 군대를 파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기는 보내고 있지요. 그리고 저는 유럽연합이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그것도 개입의 형태입니다.
얼마 전 노암 촘스키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도와야 한다고 하면서도, 푸틴에 대해서는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또 경제 제재가 러시아인들의 과도한 반발을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경의에도 불구하고, 저는 촘스키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푸틴을 물러서게 하려면 강력한 타격이 필요합니다.
푸틴이 시작한 전쟁에 개입하는 방법은 여러 형태가 있지만, 그게 비용이 들지 않거나 위험이 없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선 우크라이나인들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푸틴에게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고 싶지 않습니다.(“‘평화주의는 선택지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에티엔 발리바르 인터뷰”, 2022년 3월 13일, 사회진보연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보내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침략자 푸틴과 러시아를 고립시키기 위해서“가스나 석유, 밀의 공급이 안 되어서 유럽인들이 고통 받을 수도 있”고, “인플레이션도 치솟”을 위험과 “세계 금융에는 ‘체계적 위험’(risque systémique)이 될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국제사회가 러시아를 경제제재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른바 “국제적인 맑스주의 석학”이라는 자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러시아 출신으로 한국으로 귀화한 진보적 학자로 명망 높은 박노자 교수 역시 이 글을 공유하며 “역시….마르크스주의 이론 석학다운 탁견”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이 노골적인 친서방 제국주의적인 주장이 나토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주장은 양비론으로 위장하고 있다.
저는 나토가 냉전의 종식과 함께 사라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해체와 함께 말이지요. 당시에 서방은 “체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생각에서, 경제적 이념적 군사적, 그 모든 면에서 승리의 결실을 거두려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확실히 제국주의와 연관이 되지요. 나토는 넓은 의미에서 유럽이 미 제국으로부터 진정한 지정학적 자결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장하는 도구 중 하나입니다. 이게 냉전 이후에도 나토를 유지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 세계에 재앙이었습니다.(같은 기사)
발리바르는 양비론적 입장에 입각해서 원론적으로는 나토를 제국주의 도구로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나토의 위협은 분명히 푸틴의 핑계”이고 “푸틴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것은 나토의 공세가 아니”며, 나토의 침략성은 잠재적인 반면에 “러시아의 공격성은 매우 현실적”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시민에게는 나토만이 유일한 보호책으로 보입니다.”라는 주장으로 실제적으로는 미제국주의와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편에 선다.
발리바르는 “나토의 ‘보호’와 함께 세계 제국주의의 전략적 분쟁에 휘말려 들게 되”기 때문에 “아무리 좋게 봐도 그게 이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민중이 침략에 맞설 수 있다는 보증이 무엇이 있을지 자문한다면, 나토는 특정한 경우에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라면서 나토가 진보적인 기구도 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발리바르의 주장은 서구 ‘진보적’ 지식인들의 지적, 정치적 타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서방 제국주의 전쟁기구의 진보성을 주장하고 반(反)러에 빠져 있는 발리바르의 반동성은 혁명성을 상실한 타락한 맑스주의, 정치적 전망을 상실하고 혼돈과 무정부주의에 빠져버린 강단 ‘좌파’ 지식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유럽주의적인 코스모폴리터리즘(세계시민주의)으로 왜곡시키고 있는 서구 ‘진보정당’, ‘진보’지식인들의 자화상이다. 이는 서방을 추종하고 동방을 비하하는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의 일종이기도 하다. 오리엔탈리즘은 현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일환이다.
이 오리엔탈리즘은 반드시 서방 ‘지식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동방에서도 이 오리엔탈리즘의 추악한 모방자들이 있다. 사회진보연대와 사회진보연대에 나왔지만, 그 세계관이 배출한 한지원 같은 진보, 맑스주의 표방하는 친윤석열파, 조선일보파, 친서방파 지식인들이 바로 그렇다.
세계화 자체를 ‘적’으로 삼는 반세계화 편향은 결과적으로 중국·러시아·선진국의 우파 포퓰리즘이 보여주듯, 세계화가 만들어 놓은 작은 진보마저 해체한다. 문명적 퇴보다.(한지원, “야만이 세계화를 대체할 순 없다”, 매일노동뉴스, 2022.04.28.)
한지원은 세계화는 역사의 진보이고 반세계화와 반미는 역사의 반동이라고 간주한다. 한지원은 이 점에서 일본 제국주의 조선 침략이 역사의 진보라며 뉴라이트로 전향한 안병직, 이영훈, 강단의 관념적 급진좌파로부터 친윤석열 반공주의자로 전락한 윤소영의 청년판 모델이다. 사회진보연대 학생조직인 ‘학생행진’은 개인 한지원이 집단화된 청년판 조직이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끝나면 민중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는 진보 좌파 일각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오늘날의 세계화 위기는 진보의 기회보단 문명적 퇴보의 위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한지원, 같은 글)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끝나면 민중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는 진보 좌파 일각의 목소리도 들려온다.”라는 한지원의 인식과 미제 중심의 일극체제와 여기에 맞서는 다극화에 대한 기대는 “현실과 무관한 위험한 환상”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공통인식은 이들 다극체제를 주도하는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적대감, 혐오감으로 더 굳건하게 하나가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적 전망을 가지고 있는데 ‘한지원과 비교하는 것은 억지다’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한지원도 “세계화의 결함을 해결하는 대안적 세계화 프로그램이 전제될 때만 타당하다.”라며 반러, 반중 입장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관념적으로는 “대안적 세계화”라는 다른 진보적 세계를 열망하고 있지 않은가. 트로츠키 ‘국가자본주의자’들도 “진정한 혁명 건설”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정치는 주관적 인식 보다 실제 누구를 위해,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진-우크라이나 평화행동 |
러우전 초기 국내 ‘민중언론 참세상’도 양비론을 강조하면서 서방의 ‘민주적 사회주의자들’, ‘좌파’가 이 전쟁에서 취했던 태도를 소개하고 있다.
‘나토를 강조하면, 푸틴이 사라진다’
일각에선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이번 전쟁 발발의 책임을 놓고 ‘나토’를 부각하는 것은 자칫 푸틴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개전 직후 〈오픈 데모크라시(Open Democracy)〉에 실린 한 칼럼에선 미국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발표한 여러 입장문에 러시아에 대한 비판이 단 한 줄도 담겨있지 않다는 점이 지적됐다. 스스로를 우크라이나 좌파라고 소개한 타라스 빌로우스(Taras Bilous)는 “(서구 좌파가) 우크라이나의 극우파 영향력을 과장하면서도 러시아 푸틴의 보수적, 민족주의적, 권위주의적 정책에 대한 비판은 피하고 있다”라며 “좌파 비평가들이 진영을 강조하면서 생기는 서구 반전 운동의 광범위한 현상”이라고 비판했다. 유럽에서도 좌파의 고민들이 깊어지고 있다. 독일 좌파당 소속 하원의원 카렌 레이는 “러시아의 크림반도의 불법 합병, 돈바스 전쟁, 시리아에서의 군사 행동에 대해 좌파로서의 비판이 충분하지 않았다”라며 “러시아 군사 행동의 공격적이고 제국적인 성격을 일찍 인식하지 못했다”라고 반성했다.(박다솔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미·러의 ‘파시즘’ 대결 [우크라이나에 떨어진 별] 서로가 전쟁의 명분…두 제국주의 국가의 끝없는 패권 경쟁, 민중언론 참세상, 2022.04.05.)
“두 제국주의 국가의 끝없는 패권 경쟁”이라는 양비론적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서구 좌파들조차도 결국 기회주의로 치달았지만, 전쟁 초기에는 서방 제국주의를 주되게 비판하며 “러시아에 대한 비판이 단 한 줄도 담겨 있지 않”게 하려 애쓰고 “우크라이나의 극우파 영향력을 과장”할 정도로 신나치를 집중 비판하고, 이 전쟁의 도발자인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집중 비판이 흐려질 것을 우려해 “러시아 푸틴의 보수적, 민족주의적, 권위주의적 정책에 대한 비판은 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요하던 서구 좌파들에 비해 그리스공산당과 그 국내외적 추종자들은 “두 제국주의 국가의 끝없는 패권 경쟁”이라는 확고한 인식 하에 훨씬 더 일관되고 충실하게 신나치의 위험성을 부정하고 러시아의 제국주의성을 규탄하는데 골몰하고 있으며, 돈바스 자결권은 부정하거나 경시하면서도 러시아의 “시리아에서의 군사 행동”을 제국주의 행위로 규탄했다. “나토를 강조하면, 푸틴이 사라진다.”고 신좌파들이 우려를 표명하여 침략자 푸틴과 제국주의를 러시아를 집중 규탄하기 시작했는데, 종국에는 푸틴을 강조함으로써 미제와 나토가 사라져버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두 제국주의 국가의 끝없는 패권 경쟁”이라며 양비론적 입장으로 러우전을 바라본 그리스공산당을 비롯한 국내외적 자칭 ‘맑스레닌주의자’들이 휩쓸리게 된 치명적인 오류다.
독일 사민당은 이미 오래 전에 제국주의의 지주(支柱)가 되 버렸는데, 독일 녹색당도 우경적 행보를 지속하다가 러우전을 계기로 제국주의를 떠받치는 들보로 전락해 버렸다.
그동안 끈질기게 우크라이나가 요구했던 독일산 전차 ‘레오파르트 2’의 우크라이나 반출을 독일 정부는 지난 1월25일 공식적으로 허락했다. 우크라이나 확전에 독일이 끌려들어 갈 위험을 우려해서 공격용 무기 제공에 신중했던 사민당 출신의 총리 숄츠가 국내외의 압력에 결국 손을 들었다.
미국의 압력도 강했지만, 연정의 파트너인 녹색당과 자민당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숄츠는 독일을 포함한 나토가 ‘참전국’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독일이 레오파르트 2의 반출을 우여곡절 끝에 허가한 그날로 우크라이나는 지원무기의 희망목록에 신형 전투기 유러파이터, 전투함과 잠수함 등을 올렸다.
여기서 나는 반전평화에 지금까지 어느 당보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해왔던 녹색당이 우크라이나에 무기공여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행보에 눈을 돌리게 된다. ‘녹색당이 이제 전차당이 되었느냐’, 녹색당의 상징적 인물의 하나였던 페트라 켈리(1947~1991)를 떠올리며 ‘페트라 켈리가 무덤에서도 등을 돌릴 것이라’는 비난과 비판의 소리도 들린다…
1999년 봄, 2차대전 후 처음으로 독일이 세르비아와 코소보 사이의 전쟁에 나토 연합군의 성원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사민당과 녹색당 연정 때 외무부 장관도 녹색당의 요스카 피셔였다. 당시 이 결정 때문에 당내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는데 이번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문제와 관련해서는 이상하게도 조용하다…
이러한 차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국제정치적 지형도의 변화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침략전쟁을 감행한 러시아와 이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의 존재를 사실상 적국과 동맹국 관계로 보고 있는 데 있다. 물론 나토의 동진정책도 하나의 원인이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침략전쟁의 명분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외교적 방법을 통한 문제 해결보다는 우선 피해자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가 급선무의 과제이고 전투무기의 지원도 따라서 당연하다는 것이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적(敵)개념의 과잉시대”, 경향신문, 2023.02.01.)
미제와 나토 제국주의자들이 리비아에 대한 침략 명분으로 삼았던 리비아 카다피 정권의 ‘벵가지 학살’ 학살 운운할 때 정의당은 “국제사회”가 이 학살을 중단시키기 위해 리비아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의당이 말하는 “국제사회”는 바로 서방 제국주의자들인데, 이 강도 침략자들은 실제로 리비아에 대한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리비아 전토에 폭격을 가하며 침략전을 개시했다. 내전을 조장해서 분쟁을 일으키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세워 침략전을 자행하며 정권교체를 기도하는 방식은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침략 방식이다. 서방 제국주의의 침략과 정권교체가 성공한 뒤 리비아 지도자 카다피는 참살 당하였고, 리비아는 미제의 점령지가 되었다. 과연 카다피 ‘독재시절’에 비해 리비아에 ‘민주주의’가 도래했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무기지원을 하면 우크라이나가 승리를 거두고 평화가 찾아오는가? 러시아가 철군하고 전쟁을 멈추면 우크라이나는 자주국가가 되겠는가?
궁극적인 정치적 목표가 다르고, 표방하는 정치적 이념이 판이하게 다른 다양한 자칭 진보파들이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전쟁 앞에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실제로는 제국주의의 ‘진보적’ 들보로 전락했다는 것은 우리시대의 희비극이다.
그러면 우크라이나에 어떻게 평화가 찾아올 수 있는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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